‘아담의 창조’ 그리고 내면의 왕국

[시리즈 칼럼]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

에릭 베스(Eric Bess)
2018년 10월 11일 오전 9:04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6:16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프레스코화의 한 부분인 ‘아담의 창조’는 드라마나 문학작품에서 흔히 상징적인 이미지로 언급된다. HBO에서 방영한 공상과학 드라마 ‘웨스트 월드’는 의식의 중요성과 관련해 이 그림을 언급했다.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한 ‘웨스트월드’ 주인공 로버트 포드 박사는 인간의 모양을 한 안드로이드 창조물 중 하나를 향해 “의식은 창조주가 창조물에 줄 수 있는 진정한 선물이다”며 ‘아담의 창조’를 이용했다.

이 해석은 만족할만한 것일까? 아니면 뭔가 불충분한 것일까? 미켈란젤로가 신이란 의식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의식이 인간과 신 사이의 연결 고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미켈란젤로는 단순하게 성서에 대한 그의 이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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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린 메시버거 박사는 그의 논문 ‘신경 조직학에 입각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해석’에서 신을 의식으로 묘사했다는 것이 ‘아담의 창조‘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미켈란젤로의 소네트와 해부학 연구가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고 그는 말한다.

미켈란젤로가 쓴 소네트는 ‘손으로 그리기 전에 창조물은 우선 지성 안에서 형성되고, 인체 해부에서 얻은 지식을 사용하여 창조의 근원인 신을 담은 뇌의 횡단면 묘사를 했다’고 서술한다. 신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 그 뒤에 있는 타원형 직물을 묘사하는 그림의 한 부분을 보면 두뇌의 단면 형태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비물질적인 것 즉, 마음과 영혼이 물질인 몸에 영향을 준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설득력 있게 해석한 것일까? 미켈란젤로가 언급한 바가 없으니 그의 의도를 밝힐 방법은 없다. 실제로 신경외과 의사 마이클 살크먼 박사는 “우리의 시각 체계는…세부를 스스로 채우며, 어떤 패턴이나 의미가 의도하지 않았던 지점에서 의미를 창조해 낸다”고 한다. 구름 속에서 그림이 보이는 것을 경험하듯, 인간은 추상적 형상에서 구상적인 사물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의미가 있을 가능성에 대해 추측해 보는 것은 호기심 어린 방식의 의미 생산이다.

신은 의식이라고 ‘아담의 창조’를 해석하기 이전에는, 내 생각은 신은 가톨릭 교리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이해에 따라 아담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해석을 접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미켈란젤로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예수는 ‘신의 왕국이 당신 안에 있다’고 말한다. 아마 미켈란젤로는 인체를 해부하는 동안 이 문구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단순히 비물질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예술을 사용했을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이 프레스코화를 다르게 경험하고 있다. 나는 이제 아담의 알몸을 본다. 사람은 알몸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난다.

아담에게는 몸을 눕힐 땅과 자기 몸과 신이 내밀어주는 손밖에는 없다. 아담은 신성과 세속 사이의 중개자로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무엇이 이를 허용하는가? 아담의 뻗은 손에 신이 그렇게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알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에게 이 벗은 몸은 무아 혹은 ‘사심 없음’으로 보인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어떤 욕망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뻗은 손조차도 기운이 없고 열정도 없다. 그리고 그는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기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신에 대한 그의 느낌을 다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흠모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런 평온한 사심 없음의 상태가 자신이 창조한 것에 신이 손을 뻗게 되는 전제조건인 것으로 보인다.

이 프레스코화의 제목은 ‘아담의 창조’다. 신은 아담을 신을 기쁘게 하는 방식으로 창조한다. 사심 없는 평온함과 욕망 없음의 상태가 신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이는 신이 팔을 내밀어 아담에게 생명을 주는 과정 중에 있으며, 아담의 팔은 아직 생명 에너지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팔이 늘어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중인 그의 존재는 이완된 자세와 열정이 없는 표정으로 설명된다. 그의 표정은 흠모 대신 신이 생명을 주는 작업을 완성하기를 바라는 갈망이거나 욕구 중 하나다. 이것은 나의 이전 의견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비록 이 해석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아담이 생명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갈망과 욕구는 오직 신을 향한 것이다. 아담의 표정에 나타난 것이 흠모건 욕구건 그것은 신이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전제 조건이며 결과다.

그러나 신은 이미 이곳에서 업무를 완성한 것 같다. 아담은 이미 생명을 얻었다. 아담은 생명을 얻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삶이라는 선물에 반응하고 있다. 그는 기댄 자세로 스스로 자리 잡고 있으며, 아담의 두 손과 마치 아담이 삶이라는 선물에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 같은 흠모하는 표정과는 거리가 있다. 내가 보기에 미켈란젤로는 의도적으로 아담이 신의 존재 앞에서 생동감 있으면서도 느슨하고, 사심 없이 기댄 자세로 신의 선물에 대해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신이 있을 위치에 두뇌의 단면 이미지를 몰래 그려놓았다는 것을 나는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했다면, 편안하고 사심 없는 마음 상태에 있을 때만 신성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이유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고 싶다. 우리가 지구에 머무는 이 짧은 시간에 신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은 우리의 마음 상태다.

이 프레스코화에 관한 한, 나는 미켈란젤로의 의도를 알지 못할 수도 있다.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끄는 힘이 있음은 확실히 인정한다. 어쩌면 이 그림에 대한 나의 안을 향한 탐구와 심사숙고는 나의 ‘내면 왕국’으로의 여정의 일부분일 것이다.

예술은 보여질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놀라운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것은 나에게 무슨 의미이며 그것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미래에는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인간의 경험에 대해 그것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나의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 시리즈에서 탐구해나갈 주제다.

에릭 베스(Eric Bess)는 현재 비주얼 아트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젊은 화가 겸 예술전문 기고가다.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예술 작품 큐레이션에도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