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혁명’ 와중 전해진 장쩌민 사망 소식에 추측 무성

한동훈
2022년 11월 30일 오후 10:56 업데이트: 2022년 12월 26일 오전 10:15

중국에서 수십년 만에 가장 큰 규모의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중국 공산당 총서기 장쩌민(江澤民)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무성한 추측이 일고 있다.

현재 중국 전역은 물론 해외에서도 “시진핑 퇴진, 공산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번지면서 중국 공산당은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전례 없는 민중의 압박에 직면해 있다.

지난 24일 신장위구르자치구 수도 우루무치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최소 10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자 25일부터 우루무치를 시작으로 베이징, 상하이, 난징, 광저우 등 주요 도시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봉쇄망을 뚫고 거리로 나와 항의했다.

특히 화재가 난 아파트 주변이 철제 울타리로 가로막혀 소방차 접근이 늦어지고 소방관들도 물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진화 작업을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제로 코로나 봉쇄에 숨죽이고 지내던 중국인들의 억눌렸던 민심이 폭발했다.

미국의 중국문제 전문가 고든 창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중국인들이 더 이상 공산당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며 “중국인들은 공포조차 잊어버리고 공개적으로 저항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30일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앞 어울마당로에서 300여명이 모여 중국에서 일어나는 ‘백지 혁명’을 지지하는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 에포크타임스

27일까지 사흘간 침묵하던 중국 공산당은 28일부터 대응을 개시했다. 사법계통 총괄 기구인 정치법률위원회가 “적대 세력을 진압”하고 “전반적인 사회 안정”을 유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시위대를 적대세력으로 규정한 것이다.

공안 당국은 이날 베이징 시내에서 시위가 예고된 곳에 경찰 차량과 인력을 대거 배치하고 행인들을 모두 검문했다. 공안은 휴대전화에 인터넷 차단 우회 프로그램이 설치됐는지 확인하고, 무작위로 통화기록까지 조사했다. 결국 시위는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국무원은 같은 날 “빨리 봉쇄하고 빨리 해제해야 한다”고 지방 당국에 코로나19 봉쇄로 인한 주민의 고통과 불편을 다독이는 모습을 보였다. 중국 공산당은 사법계통과 국무원을 각각 채찍과 당근으로 삼아 국면 전환을 시도하는 모양새다.

당국의 대응에 시위 양상도 변화하고 있다. 29일 중국 광저우에서는 최루탄을 발사하며 진압에 나선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긴 했지만, 우루무치 화재 직후였던 지난 주말 시위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줄어들고 산발적으로 변했다.

시위가 소강상태로 접어들 것인지, 다른 단계로 전환할 것인지 중국은 물론 전 세계의 시선이 쏠린 바로 그 시점에 장쩌민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 공산당 관영 매체인 신화통신은 30일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백혈병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이날 오후 12시 13분 상하이에서 9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장쩌민의 사망 루머가 전해졌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이 관영언론을 통해 장쩌민의 죽음을 공식 발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트위터 등 중국에서 접속이 차단된 해외 소셜미디어에서는 중국어 사용자들이 장쩌민의 죽음에 관해 활발히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장쩌민의 생애를 추적하며 죄업을 비판하는 이도 있었고, 후련하다는 이도 있었다.

적잖은 네티즌은 백지 혁명에 세계적 관심이 집중된 이 시기에 장쩌민의 죽음이 발표된 것에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장쩌민의 죽음으로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렸다는 관측도 나온다.

장쩌민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부도덕하고 무능한 인물로 꼽힌다. 장쩌민은 1993년부터 2004년까지 12년 이상 최고 권력자로 머물면서 대량의 부패를 저질렀다. 그의 일가는 ‘중국 최대 부패세력’으로 불린다.

중국문제 전문가 왕요췬(王友群)은 “장쩌민은 부패와 음란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지도자”라고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장쩌민은 국가 권력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고위층에서 일선 관리까지 자신을 뒤따라 마음껏 부패를 저지르도록 조장했다.

시진핑이 정권 출범 초 ‘반부패 운동’으로 자신의 미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할 때, 장쩌민 파벌이 줄줄이 낙마하는 데 이러한 배경도 작용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장쩌민 고소를 성원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15.7.15 | 파룬궁 정보센터

장쩌민은 또한 국민을 탄압하는 공포 정치로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을 택한 지도자였다.

그는 이미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태 때 이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의 유혈 진압에 대해 전 세계적 비난 여론이 고조됐으나, 장쩌민은 유혈 진압을 적극적으로 옹호해 최고 고위층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국민 탄압은 그가 권력을 거머쥔 비결이었다.

장쩌민은 1999년 7월 당시 중국 내 수련 인구가 7천만 명 이상이었던 파룬궁 수련자들에 대한 탄압을 일으켜 또 한 번 중국을 피비린내 나는 공포 분위기 속에 몰아넣었다. 대신 이번에는 손에 쥔 권력을 더 강하게 틀어쥐기 위한 목적이었다.

왕요췬은 “장쩌민이 파룬궁 수련자를 탄압하면서 수련자들의 장기를 적출하고, 고문·학대했을 뿐만 아니라 파룬궁 창시인에 대한 중상모략과 암살 시도까지 벌였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파룬궁 창시인 리훙즈(李洪志) 선생은 명예를 추구하거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파룬궁을 전수하고 국제사회에도 보급해 많은 이들의 건강과 심리적 안정에 큰 공헌을 했다.

장쩌민은 국민 건강에 기여한 파룬궁과 리훙즈 선생에 대해 감사하는 대신 앙심을 품었다.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국가의 큰 어른’인 자신 대신 파룬궁에 더 마음을 쏟고 있는 상황이 불만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장쩌민은 또한 당시 미국에 정착해 생활하던 리훙즈 선생을 중국으로 송환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미국 정부에 대미 무역흑자를 5억 달러 축소하겠다고 제안했다.

리훙즈 선생은 박해가 시작되기 한 해 전인1998년, 가족과 함께 ‘글로벌 인재’ 자격으로 미국으로 이민해 정착한 상태였다. 미국 정부는 중국 공산당의 이 같은 제안을 거절했다.

장쩌민 파벌의 2인자이자 중국 공산당의 비밀조직을 총괄하는 쩡칭훙(曾慶紅)은 비밀리에 리훙즈 선생에 대한 암살명령을 내렸다. 중국 공산당 국가안전부와 인민해방군 육군 참모부가 합동 특별작전팀을 구성해 리훙즈 선생을 추적하고 기회를 노렸다.

2000년 12월 대만, 2001년 1월 홍콩, 2005년 5월 캐나다에서의 암살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장쩌민 파벌은 또한 파룬궁 탄압에 대한 중국 내 지지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톈안먼 광장에서 가짜 파룬궁 수련자를 동원, 분신자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CCTV 인력이 제작에 투입된 이 사건은 2001년 1월 23일 설날 하루 전날 발생해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지금은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위화(僞火·False Fire)’ 등을 통해 중국 공산당이 파룬궁 탄압을 정당화하려고 꾸민 사기극임이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10억이 넘는 중국인들이 매일 방송되는 CCTV 뉴스를 통해 파룬궁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품게 만든 사건이었다.

‘백지 혁명’으로 불리는 중국의 봉쇄 반대 시위는 그 규모와 파급력에서 1989년 톈안먼 사태 이후 최대라고 평가된다.

30여 년의 세월을 넘어 톈안먼 사태가 재현될 가능성이 고조된 가운데 톈안먼 유혈 진압을 두둔하고, 중국인 10명 중 1명꼴로 수련했거나 가족이 수련자였던 파룬궁을 탄압한 장쩌민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의 정세가 또다시 급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