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흔적 지우기? 홍콩대학들, 톈안먼 추모 작품 잇따라 철거

이윤정
2021년 12월 24일 오후 6:11 업데이트: 2021년 12월 25일 오전 11:21

홍콩대 수치의 기둥·중문대 민주주의 여신상·링난대 부조벽화 모두 철거
中 반체제예술가 아이웨이웨이중국 통제 아래 예술적 자유 증발

국가안전법(홍콩안전법) 시행 후 홍콩에서 민주주의 흔적이 하나둘씩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이 우려는 점점 현실화하는 중이다. 12월 19일(현지 시간) 치러진 입법회 선거는 친중파가 싹쓸이했다. 홍콩 내 대학에 전시돼 있던 중국 민주화 상징물들이 잇따라 철거됐다.

영국 BBC는 12월 23일(현지 시간) “홍콩대 캠퍼스에 24년간 설치됐던 ‘수치의 기둥(Pilla of Shame)’ 조각상이 철거됐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이를 두고 중국 당국의 ‘톈안먼 사태 흔적 지우기’ 일환이라고 전했다.

‘수치의 기둥’은 덴마크 조각가 옌스 갈시외트의 1996년 작품이다.  영국령 홍콩의 주권을 중국으로 반환하는 1997년 7월 1일을 앞두고 홍콩 시민사회의 요청에 따라 제작됐다. 작품에는 1989년 6·4 톈안먼 민주화 시위 8주년 추모의 뜻도 담겼다.

높이 8m, 무게 2t의 조각상은 대규모 유혈진압으로 막을 내린 6·4 톈안먼 민주화 시위 희생자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짓눌리고 비틀어진 몸,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서 당시 민주화를 외치다 스러져간 역사 속 희생자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조각상 하단부에는 ‘톈안먼 학살’ ‘1989년 6월 4일’ ‘노인은 젊은이를 영원히 죽일 수 없다’ 등의 문구가 영어와 중국어로 새겨져 있다.

1996년 작품 완성 이듬해인 1997년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연합회(지련회)’에 기증됐다. 처음 빅토리아 공원에 세워졌다가 1997년 1월 홍콩대학 경내로 옮겨졌다. 지련회는 톈안먼 사태 이듬해 결성된 홍콩 민주화 운동 단체다. 이 단체는 1990년부터 올해까지 매년 톈안먼 사태 추모 집회를 열어 왔다. 1997년부터는 기둥을 씻는 ‘세정식’도 연례행사로 해 왔다. 홍콩 경찰 당국의 압력 끝에 지련회는 지난 9월 해산했다.

처음 홍콩대에 세워진 수치의 기둥은 홍콩 각 대학에 연달아 세워졌다. 1997년 9월 홍콩 중문대, 11월에는 링난(嶺南)대와 홍콩침례대, 1998년 1월 홍콩과기대, 3월 홍콩이공대와 홍콩성시(城市)대에 세워져 1989년 봄날의 사건을 각인시켰다.

수치의 기둥 작가 갈시외트는 작품 철거 소식에 “충격적”이라고 답했다. BBC 인터뷰에서 그는 “홍콩대 측으로부터 어떤 통보도 받지 못했다. 홍콩 당국이 조각상을 파괴한다면 사유재산에 대한 손해 배상을 청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갈시외트는 자신을 홍콩 국가안전법에 따라 처벌하지 않는다고 보장하면, 덴마크로 작품을 가져가겠다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갈시외트는 “희생자 묘지에 가서 묘비를 훼손한 것과 같다”며 철거 행위를 규탄했다.

홍콩대 수치의 기둥 철거 전[좌], 철거 후[우] 모습 | 연합뉴스
홍콩 영자신문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철거작업은 12월 22일 밤 10시 30분부터 시작됐다. 학생들이 캠퍼스를 비운 방학 기간,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보안 속에서 몇 시간 만에 작품은 해체돼 트럭에 실려 나갔다고 신문은 전했다.

중국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는 AFP 통신에 “‘수치의 기둥’은 중국 공산당이 진실을 은폐하고 통제하려는 모든 순간과 사실에 관한 것”이라며 “조각상 철거는 중국의 통제 아래 홍콩에서 예술적 자유가 증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1989년 톈안먼 핵심 인사 왕단(王丹)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조각상 철거는) 피로 쓰인 역사와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해당 소식이 전해진 이틀 뒤, 홍콩 내 대학 두 곳에서 톈안먼 시위 추모 작품 두개가 잇따라 철거됐다. 12월 24일, 홍콩중문대 ‘민주주의 여신상’과 홍콩링난대 대형부조 벽화가 모두 사라졌다.

홍콩중문대 ‘민주주의 여신상’[좌], 홍콩링난대 교정에 전시됐던 톈안먼 민주화시위 추모 부조 벽화[우] | 연합뉴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홍콩중문대는 이날 새벽 캠퍼스 내 광장에 세워져있던 ‘민주주의 여신상’을 철거했다. 민주주의 여신상은 1989년 톈안먼 시위 당시 대학생들이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세워진 동명의 조각상을 본 떠 제작한 것이다. 6월 4일을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6.4m 높이로 제작됐다.  작품도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2010 홍콩중문대로 옮겨졌다.

홍콩 링난대에서도 톈안먼 시위를 추모하는 대형 부조(浮彫) 벽화가 철거됐다. 작품에는 ‘민주주의 여신상’, 톈안먼 광장에서 맨몸으로 탱크를 막아섰던 일명 ‘탱크 맨’, 중국 인민해방군 유혈 진압에 희생된 이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철거된 두 작품의 작가인 천웨이밍은 로이터 통신에 “중국 공산당은 홍콩에 국가안전법을 시행한 이후 언론·집회·표현의 자유를 뿌리째 뽑아버렸다. 그들은 잔혹한 탄압의 실제 역사를 제거하려 한다. 그들은 홍콩에서 어떠한 이견도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