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끈 거인…리덩후이 별세에 대만서 ‘지도자의 자질’ 조명

류지윤
2020년 08월 4일 오후 5:43 업데이트: 2020년 08월 4일 오후 5:43

향년 97세로 별세한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의 위상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그가 생전에 공산주의를 가장 잘 이해한 자유민주주의 지도자였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지난 7월 30일 대만의 민주화를 이끈 리덩후이 전 총통이 노환으로 사망하자 미 국무부는 추모 성명을 발표했다.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그의 과감한 개혁이 대만을 오늘날의 민주적 등대로 자리 잡게 했다”고 애도했다.

리덩후이는 장징궈 총통에 의해 부총통으로 발탁됐고, 1988년 장징궈가 임기 중 숨지자 총통직을 승계한 뒤, 2000년 5월 선거를 실시해 첫 직선제 총통에 당선됐다. 이후 다당제 도입 등 대만의 군사독재를 끝냈다.

최근 대만 사범대 정치학연구소 판스핑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리덩후이가 부총통에 발탁될 수 있었던 이유를 분석해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대만은 중국에 대해 불접촉, 불담판, 불타협의 3불정책을 고집했으나, 1971년 중국이 일국양제를 표방하면서 3불정책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장징궈는 대만-중국 본토 사이에 친척들의 왕래를 허용했고 곧 3불 정책을 고수할 수 없음을 예견했다. 40년간 왕래가 끊긴 대만과 중국 본토 사이 관계가 회복될 경우 그동안 축적된 에너지가 한꺼번에 쏠릴 것이 분명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은 귀향을 희망했고, 중국의 관광지를 가보려는 수요도 높았다. 대만 기업인들에게 중국은 값싼 노동력이 풍부한 생산기지였다.

이 시기에 대만을 이끌 지도자는 중국 공산당과 본질을 꿰뚫고 기만적인 수법에 당하지 않을 인물이어야 대만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리덩후이는 젊은 시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서들을 탐독했고 중국 공산당에 입당한 경험도 있었다. 그 후 공산주의의 사기성을 절감하고 자유민주주의로 전향한 리덩후이만큼 중국 공산당을 아는 인물이 대만 정계에는 없었다.

또한 리덩후이는 일본과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 감각을 소유했던 인물이었다.

장징궈 그 자신은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었고 1946년 이후 공산당과의 내전(국공내전)과 종전, 협상 과정에 모두 참여하면서 중국 공산당이 본질적으로 사악한 집단임을 이해했기에 공산당을 절대 믿지 않았다.

판스핑 교수는 “공산당을 잘 아는 장징궈는 심사숙고 끝에 리덩후이를 부총통으로 발탁해 후계자로 준비해 뒀을 것”이라며 대만을 이끌 지도자의 자질로 국제정세를 잘 알고 공산당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며 현 차이잉원 총통을 두둔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