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 법원, ‘먹는 낙태약’ FDA 승인 동결 판결

한동훈
2023년 04월 9일 오후 3:04 업데이트: 2023년 04월 9일 오후 9:15

미국에서 언제든 원하는 대로 낙태해도 되는 것인지를 둘러싸고 찬반 격론이 치열한 가운데, 중요한 법원 명령이 하나 내려졌다.

텍사스 에머릴로 연방 지방법원은 ‘미페프리스톤’에 대한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임시 중단하라고 7일(현지시간) 명령했다. 이 약물은 ‘먹는 낙태약’ 미프진의 주요 성분명이다.  법원이 사실상 미프진 판매를 일시 중단시킨 것이다.

이날 에머릴로 연방지법의 매튜 캐스매릭 판사는 “FDA가 약물의 위험성을 무시하고 승인했다”며 미페프리스톤 승인을 동결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명령서 링크).

캐스매릭 판사는 “재판부가 FDA의 결정을 경솔하게 추측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증명하듯 67쪽에 달하는 명령서에서 FDA의 약물 승인 근거를 상세하게 검토했다.

그러면서 “FDA는 타당하지 않은 것이 명백한 추론과, 결론을 뒷받침하지 않는 연구를 바탕으로 합법적인 안전 문제를 묵인함으로써 법적 의무를 위반했다”고 밝혔다.

판사는 또한 “FDA가 (먹는 낙태약을 이용한) 화학적 낙태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다는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내부에서 제기된 안전 조치를 포기하도록 상당한 정치적 압력을 받았다는 증거가 있다”고 설명했다. FDA의 먹는 낙태약 승인이 과학적 결정에만 근거하지 않았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번 명령은 즉각 효력을 발휘하지는 않으며, 7일간 유예 기간이 적용된다. 조 바이든 행정부와 FDA 측 변호인단의 긴급 항소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현재로서는 보건당국이나 FDA의 항소가 유력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미 낙태할 권리를 보장하는 행정 명령을 두 차례 내린 바 있다.

낙태…헌법에서 보장한 권리냐 아니냐

미국에서 낙태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낙태 합법화가 각 주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안인지, 아니면 ‘헌법상 권리’로 볼 것인지다.

전통적인 미국의 관점에서 낙태를 허용할 것인지는 각 주에서 결정할 일이었으며, 이를 연방정부나 연방의회 혹은 연방대법원 같은 연방기구에서 결정하는 것은 지나친 개입이었다.

하지만 1973년 1월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4조 ‘적법 절차’에 의거, 7대 2의 판결로 낙태를 ‘사생활 권리’로 인정했다. 이른바 ‘로 대 웨이드’ 판례다. 이 판례로 인해 미국에서 낙태를 금지하던 기존 법률들이 폐지됐다.

숱한 비판과 도전 속에서도 유지되던 이 판례는 49년 만인 지난해 6월 파기됐다.

연방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례가 “약한 추론을 기반으로 결정됐으며 낙태 문제를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분열을 심화하며 극히 해로운 결과를 초래했다”고 판단했다.

이어 낙태를 권리로 보장할 것인지는 각 주에 맡길 일이라고 결론 내렸다. 사법부가 사회적으로 첨예한 문제에 개입해서 사태를 악화시킬 게 아니라,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미프진, 먹어도 혈액서 검출 안돼…‘꼼수’ 가능

바이든 행정부와 FDA가 항소할 경우 사건은 13개 항소법원 중 텍사스를 관할하는 제5 항소법원에 맡겨지게 된다. 결국 최종심인 연방대법원까지 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양측의 대립이 팽팽하기도 하지만, 사건의 핵심이 된 약물인 미프진이 낙태 찬성론자 측에서는 ‘마지막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서다.

현재 미국에서는 연방대법원 판결에 따라 낙태는 각 주에서 자율적으로 제정하는 주 법률에 따라 허용과 금지가 결정된다. 50개 주 가운데 임신부 위독 등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낙태를 금지한 곳은 14개 주다.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 중 낙태를 하려는 이들은 낙태를 허용한 다른 주로 이동해 수술적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낙태에 드는 비용 부담이 크다.

하지만 작은 알약 형태의 미프진을 이용하면 비용과 시간이 크게 줄어든다. 복용해도 혈액검사에서 검출되지 않아 ‘자연유산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낙태가 금지된 주에서도 암암리에 복용하고도 추적을 피할 수 있어 일부 단체와 언론은 ‘낙태할 권리의 상징’으로 떠받든다.

미프진은 지난 2000년 FDA 승인 이후 미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낙태약이다. 임신 10주 이내의 태아를 죽이기 위해 설계된 약물로, 먹는 낙태약 혹은 화학적 낙태로 불린다. 종종 유산한 여성들에게도 사용된다.

이 약의 주성분은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 두 가지다. 미페프리스톤은 프로게스테론을 차단해 태아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박탈하고 임신이 진행되는 것을 막는다. 미소프로스톨은 태아를 자궁에서 내쫓기 위해 진통을 유도한다.

바이든 행정부 FDA는 지난 1월 미프진(브랜드명 ‘미페프렉스’)과 그 복제약의 소매약국 판매를 허용했다. 각 주에서 진행되는 낙태 금지 움직임을 무력화하기 위한 조치다. 원격진료로 처방받을 수 있도록 하고 약도 배송 주문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텍사스 법원의 명령이 미국 전역에서 판매 중인 미프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금지 명령만으로 판매 중지가 되리라는 전망도 있지만, FDA 항소 여부도 변수가 될 수 있다.

미프진의 주성분인 미페프리스톤을 제외한 미소프로스톨만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일부 낙태 클리닉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전환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소프로스톨만 사용할 경우 효율성이 떨어지지만 미페프리스톤이 금지된 국가에서는 단독 투여도 이뤄진다.

이번 법원 명령의 계기가 된 소송은 미국의 기독교 보수 법률지원단체 ‘자유수호연맹(ADF)’이 제기했다. 이 단체는 2000년 FDA의 미프진 승인이 미성년(18세 미만) 소녀들이 복용했을 때 안전성에 대한 충분한 입증 없이 이뤄졌다고 소송 이유를 밝혔다.

한편, 미프진은 한국에도 대량으로 불법 유통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은 지난해 7월 국회 의원회관 기자회견에서 “국내 (먹는) 낙태약 소비량이 연간 100만정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낙태는 한국서 이미 자유방임 상태가 됐다”고 비판했다.

낙태약을 정식 수입, 유통하려면 약사법에 따라 식품의약안전처의 품목 허가가 필요하며 국내 제약사가 수입 신청을 내야 한다. 지난해 한 국내 제약사가 수입을 추진했으나 신청을 자체 취하하며 도입이 무산됐다. 식약처에 따르면 자료 미흡 등이 원인이었다.

* 이 기사는 미미 응우옌 리 기자가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