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가르드의 뱀과 싸우는 토르’…은닉한 사악이 속삭이는 자기 태만

에릭 베스(Eric Bess)
2020년 12월 15일 오후 5:23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6:15

필자는 자주, 성실하고 착하고 인내심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자문하곤 한다.

이 질문에 대한 절대적인 답은 찾지 못했지만, 이러한 질문을 통해 자문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나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됐다.

이러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자기 영혼의 진실 속으로 가는 여정을 시작하게 했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최근 노르웨이 신화를 읽다가 천둥의 신 토르와 미드가르드의 큰 뱀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됐다.

토르와 바다낚시 여행

노르웨이 신화에서 토르와 미드가르드의 뱀(일명 ‘요르문간드’)은 아주 오래된 적(敵)이다. 한번은 토르가 요르문간드를 거의 물리칠 뻔했지만, 그 과정에서 중단됐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바다의 신 에기르와 아내인 바다의 여신 란은 만약 신들이 연회에서 모든 사람을 대접할 만큼 거대한 가마솥을 제공한다면, 신들이 마련한 연회를 열겠다고 제안했다. 그처럼 거대한 가마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거인은 혜미르가 유일했다. 토르는 가마솥을 요청하기 위해 혜미르를 만났다.

토르가 혜미르의 집에 도착한 후, 혜미르는 세 마리의 황소를 먹기 위해 도살했다. 하지만 악명 높은 식욕을 가지고 있던 토르는 그 자리에서 황소 두 마리를 먹었다. 이들 황소는 토르가 지내는 동안 둘이 함께 먹을 양식이었다.

둘은 식량을 얻기 위해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가야 했다. 이 사실이 혜미르는 거슬렸다. 토르는 낚시 여행에서 미끼로 사용하기 위해 또 다른 황소를 도살했고, 이는 혜미르를 더욱 짜증 나게 만들었다.

식량을 얻기 위해 바다로 여행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혜미르는 고래 두 마리를 잡았다. 그러나 토르는 계속 노를 저어 더 먼 바다로 나갔다. 혜미르는 겁에 질린 채 사악한 미드가르드 뱀, 요르문간드가 이 근해에서 헤엄치기 때문에 더 이상 가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토르는 단념하지 않고 그의 낚싯줄을 바다에 던졌고, 오래지 않아 줄이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낚싯줄을 잡아당기기 시작하더니 요르문간드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토르는 지체하지 않고 사악한 뱀을 말살하기 위해 망치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혜미르는 두려운 나머지 줄을 끊고 요르문간드를 풀어주었다.

토르는 화가 나 혜미르를 배 밖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그는 두 마리의 고래를 데리고 혜미르의 집으로 가서 가마솥을 가지고 신들에게 돌아갔다.

‘미드가드르의 뱀과 싸우는 토르'(Thor Battering the Midgard Serpent), 1790년, 캔버스에 유채, 133 x 94.6 cm. 왕립 미술 아카데미 소장. | public domain

‘미드가드르의 뱀과 싸우는 토르’

18세기와 19세기 초 낭만주의 화가인 헨리 퓨슬리(Henry Fuseli)는 요르문간드에 맞선 토르의 투쟁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그림의 근육 조직 그리는 스타일에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를 자신의 작품에 접목시키려 노력했다.

퓨슬리는 작품 <미드가드르의 뱀과 싸우는 토르(Thor Battering the Midgard Serpent)>의 중앙 상단에 토르의 밝기를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구도를 만들었다. 작품은 배경이 어두워 알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이는 토르가 얼마나 멀리 노를 저어 바다로 나왔는지를 짐작게 한다.

토르 뒤에는 배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혜미르가 있다. 혜미르는 이 장면을 두려워하며 지켜보고 있다. 요르문간드를 잡은 토르는 망치를 들어 그의 오랜 적을 파괴하려고 한다. 작품 왼쪽 상단 구석에는 토르의 아버지와 노르웨이의 가장 위대한 신 오딘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내면으로, 타인과 함께 여행할 용기

필자에게 퓨슬리의 그림은 우리 영혼 내면의 휴식처로 가는 여행을 상징한다.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여행이다.

이 여행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이것과 함께 우리가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올 수도 있다. 나는 우리 안에 존재할지 모르는 깊고 어둡고 악한 것들을 항상 극복하려고 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토르와 같은 우리의 일부다. 두려움이 없으며, 사적인 악을 없애는 일이 반드시 지켜져야 할 의미 있는 사명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낯선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또 다른 부분이 있다. 마치 혜미르와 같다. 우리 표면 아래 숨어 있는 악과 마주할까 봐 두려워하는 이 부분은, 우리가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방해하려 온갖 수단을 찾는다.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서 이기심, 악을 숨기고 피하려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나 자신이 아니다. 자신이 자신을 두려워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외부의 그 무엇이 아니라, 자신(처럼 보이는 그것)이 최악의 적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내면의 악한 측면을 물리쳐 나갈 때, 때로는 우리의 두려움은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진실을 부정하며 그것을 끝내지 못하게 한다.

처음, 부정하는 단계에서 우리는 그러한 악을 품지 않는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기는 여행을 하는 동안, 악은 다시 표면으로 드러나고 자신의 이기심에 의해 방해를 받게 된다.

누가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여행을 할 용기가 있는가? 누가 계속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갖고 있는가? 누가 자신의 두려움을 배 밖으로 던져 이기주의라는 오래된 적을 파괴할 용기가 있는가?

*에릭 베스(Eric Bess)는 현재 비주얼 아트 박사 과정을 공부하는 젊은 화가 겸 예술전문 기고가다. 고전회화를 중심으로 예술 작품 큐레이션에도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