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총성 없는 전쟁 중…‘가짜뉴스’ 통한 인지전 격렬

강우찬
2023년 03월 12일 오후 8:35 업데이트: 2023년 05월 25일 오후 4:08

정치인이 사실 확인 않고 일방적 주장 소셜미디어에 확산
‘美 언론인’으로 소개된 인물…알고보니 러 국영매체 소속
정보 출처 묻는 질문에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

대만이 동북아 정세의 핵으로 떠오른 가운데, 사람의 정신을 상대로 한 전쟁인 ‘인지전(Cognitive Warfare)’이 이어지고 있다.

인지전은 심리전과 유사하지만 개인에서부터 사회 전체까지 여론조작과 심리전 등을 포함해 인간의 인지를 조작하는 전술을 가리킨다. 핵심은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행동과 의사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대만을 상대로 한 인지전은 최근 가짜뉴스로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러한 가짜뉴스들은 언론과 기자를 가장한 외국 세력의 대리인을 통해 유포된다는 점에서 파괴력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난달 미국 국무부(외교통상부 격)와 대만 외교부는 미국 워싱턴DC의 라디오 진행자 갤런드 닉슨이 올린 트위터 게시물이 일으킨 파장을 수습하느라 홍역을 치렀다.

닉슨은 지난달 21일 백악관 소식통을 인용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대만 파괴(Garland Nixon)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백악관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네오콘(신보수주의)의 우크라이나 계획보다 더 큰 참극이 벌어질 것이냐’는 질문에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가 세운 대만 파괴 계획을 봐두도록 하라’고 답했다”고 썼다.

이 게시물에 가장 먼저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중국이었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는 다음 날 “미국의 진행자가 바이든의 대만 파괴 계획을 폭로했다”는 해시태그가 만들어져 24일까지 1억 회 이상 조회수를 기록했다.

중국에서는 트위터 접속이 차단돼 있다. 중국 공산당 정권에서 외국 소식이나 자유로운 분위기가 중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과 대만에 불리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담은 트위터 게시물이 단 하루 만에 웨이보를 통해 중국에 대거 확산한 경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여파는 이어 대만으로 번졌다. 야당인 국민당 소속 전 입법위원(국회의원 격) 차이징위안(蔡正元)이 닉슨 게시물을 번역해서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것이다.

미국이 대만을 상대로 배신이나 다름없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다는 외국 언론의 주장을 번역한 대만 야당 정치인의 게시물에 가장 환호한 것은 환구시보를 비롯한 중국 공산당 관영언론들이었다.

환구시보 등은 일제히 차이 전 위원의 게시물을 인용하며 바이든이 몰래 세워둔 계획이 가져올 대만의 파국에 대해 경고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지난달 24일 외교부 정례 회견에서 “나도 대만 파괴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미국 측은 명확한 설명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파문의 시작점이었던 닉슨이 러시아 국영 매체 소속이라는 사실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만 외교부에 따르면, 닉슨은 러시아 국영 라디오 ‘스푸트니크’ 소속이며 스푸트니크 공식 홈페이지에도 그의 얼굴 사진과 함께 구성원으로 등록돼 있었다.

이는 대만이 미국과 협력하며 중국 공산당의 위협에 맞서는 가운데, 중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러시아가 미국-대만 사이의 이간질 공작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갤런드 닉슨(Garland Nixon)이 러시아 국영매체인 스푸트니크 호페이지에 소속 언론인으로 소개돼 있다. | 스푸트니크 홈페이지 화면 캡처

또한 뒤이은 사태에 대한 닉슨의 ‘묵묵부답’ 태도도 눈총을 받고 있다. 그는 정보 출처를 묻는 말에 “출처는?”이라는 아리송한 말로 응수하면서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일부 트위터 이용자들은 “중국 언론이 당신의 트윗을 인용하면서 파문을 키우고 있다”고 항의했으나 닉슨은 “대만이 파괴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는 말로 일축했다.

대만 외교부는 22일 “닉슨의 트위터에는 미국을 비난하는 선동적 내용이 많다”며 “믿을 만한 정보 출처가 아니다”라며 닉슨이 러시아 관영언론 소속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하면서 사태 수습에 안간힘을 썼다.

곤혹스럽기는 미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미 국무부의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동아시아 수석) 대니널 크리튼브링크는 같은 날 ‘대만 파괴 계획’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당혹감을 내비쳤다.

크리튼브링크 차관보는 자신이 들은 것이 맞는지 기자에게 여러 차례 물어보며 확인을 한 뒤 “지금까지 접한 것 중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정보”라며 “아무 의미도 없는 정보”라고 답했다.

그는 “미국의 ‘하나의 중국’ 정책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서 “미국은 대만이 자기방위 능력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등 대만 관계법에 따른 의무를 다하겠다”며 원론적 입장을 덧붙였다.

대만 정세에 정통한 시사평론가 탕하오는 “이번 사건은 중국 공산당이 대만과 미국을 상대로 벌이고 있는 인지전의 또 다른 사례”라며 배후로 중국 공산당을 지목했다.

탕하오는 “중국 공산당은 대만과 미국 사이를 악화시키려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며 “자신도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물리적 충돌을 피하면서 그 대신 가짜뉴스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 한다”고 밝혔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 시절 대중정책 브레인이었던 위마오춘(마일스 위)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분석을 인용해 “중국 공산당은 이러한 인지전에 대만 내 친중공 언론과 친중공 정치인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탕하오는 인지전의 목적은 대만 사람들이 잘못된 인식을 갖게 하는 것이며 그 대표적 사례는 “미국의 대만 방어 의지를 의심하게 하는 것”과 “미국이 대만을 희생해 중국 공산당을 약화하려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전직 국회의원(입법위원)이 확인되지 않은 뉴스를 ‘외국 언론’이라는 포장만으로 들여와 국내에 퍼뜨린 사례는 온라인 여론이 이러한 공세에 매우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경각심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