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진 英, 중국 기업이 자금 댄 연구소 잇따라 폐쇄

한동훈
2022년 10월 9일 오전 11:31 업데이트: 2022년 10월 9일 오후 12:52

방산분야 기술 유출 우려…관계 재검토
‘대중 강경파’ 트러스 총리 집권 후 변화
서구서 中기업의 해외투자에 경각심 고조

대중 강경파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의 집권 이후 영국에서 중국과의 협력에 대한 재검토가 이뤄지고 있다. 첨단기술 연구 분야에서 기술의 유출을 막기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

영국의 이공계 명문대학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은 중국 국영기업 서우강(首鋼)그룹과 공동 운영하던 연구소를 내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폐쇄한다고 지난 4일(현지시간) 더 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연구소는 지난 2018년 서우강그룹으로부터 120만 파운드(약 20억원)의 자금을 받아 자동차 충돌 회피 시스템과 경량철강을 연구해왔다. 철강은 조선·건축·의료·가전 등 광범위한 산업 분야에 사용되는 소재이지만, 무거워 이를 경량화하는 연구를 각국에서 진행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연구소에서 연구 중인 분야는 민군 양용 기술일 가능성이 크다. 연구소 연구진은 최근 서우강 그룹 소속 연구원과 ‘고강도 마그네슘 합금’의 새 제조법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서우강그룹은 중국의 대형 국영 철강업체로 중국군과 연계된 기업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자회사인 서우강 구이양(贵阳)특수강유한공사는 공식 홈페이지 제품 목록에 ‘군용 철강’을 명시하고 있다.

또 다른 자회사 서우강 베이예(北冶)는 중국 정부에 의해 ‘국가중점 방산 지원대상’, ‘항공우주재료 중점연구개발 생산기지’로 지정됐다. 지난 수년간 중국 항공우주 분야 국영기업을 지원해왔다.

중국은 민간기업을 내세워 자금을 지원하며 세계 각국 연구시설과 협력을 확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자국의 연구·기술력만으로 달성할 수 없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5년 10월 21일 영국 국빈 방문 이틀째 일정으로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햄린 로봇수술센터 설명회에서 3D 안경을 착용한 채 의료장비 시연회를 살펴보고 있다. | Anthony Devlin/AFP via Getty Images/연합뉴스

앞서 2019년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는 중국 방산기업이 각국 대학과 공동 운영 중인 연구시설이 16곳이라고 밝힌 조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중국 기업들이 군용으로 활용 가능한 기술을 ‘민간 연구’로 포장해 자국으로 빼돌린 후 군사 분야에 사용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영국 싱크탱크 ‘시비타스(Civitas)’에서 방산 분야 국가안보를 연구하는 로버트 클라크 연구위원은 더 타임스에 “역대 영국 정부는 중국의 최대 생산·연구·기술 그룹의 직접투자를 희망해왔지만 실제로 이들 중국 기업은 중국군 소속”이라며 영국은 이러한 접근법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의 홍보담당자는 해당 연구소에서 어떠한 기밀 연구도 하고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담당자는 영국 국제무역부(DIT)가 서우강 그룹에 연구 성과나 기술 수출을 승인했는지에 관해 언급을 피했다. 서우강 그룹 측도 언급을 거부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달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이 올해 말까지 중국 국영기업인 중국항천과기집단(CASC) 등에서 자금을 받은 연구센터 2곳을 폐쇄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두 연구소 폐쇄는 영국에서 민감한 분야의 연구협력을 감독하는 수출통제 합동부서(ECJU)에서 승인이 거부된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영국 정부는 승인 거부의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해당 부서가 국익을 해치는 기술·장비의 수출 및 이전을 감독한다는 점에서 개연성이 크다.

또한 두 연구소는 모두 인민해방군에 장비와 항공기를 공급했다가 미국의 제재를 받은 바 있다.

중국과 합작한 연구소 3곳의 잇따른 폐쇄 결정은 영국의 대중 정책 급선회가 배경이 됐다.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 재임 중 영국은 공산주의 중국에 있어 ‘유럽으로 가는 관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트러스 신임 총리 취임 후 양국 관계는 급속하게 냉각하고 있다.

이번 총리 선거에서는 최종 결선에 오른 두 후보 모두 자신이 중국과 싸울 적임자라며 경쟁을 벌였다. 그만큼 영국 내에서 공산주의 중국의 침투에 대한 정치권과 기업, 여론의 경각심이 고조돼 있었다.

그동안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 서방 각국은 중국의 투자를 환영해왔지만, 중국이 민군융합(민간 자원의 군사적 활용)을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각국 정부는 중국의 해외 투자가 이러한 국가전략의 실행 수단이라고 보고 대응을 서두르고 있다.

앞서 지난 7월 영국 국내정보국(MI5)의 켄 매컬럼 국장과 미 연방수사국(FBI)의 크리스토퍼 레이 국장은 사상 첫 합동연설을 통해 “중국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서방 기술을 훔치고 있다”며 장기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