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 정상들은 어디서 사나?

최창근
2022년 03월 30일 오후 5:01 업데이트: 2022년 03월 30일 오후 5:01

5월 10일, 취임을 앞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1호 공약’은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대통령 집무실 겸 거주지로 사용되고 있는 청와대는 본관, 비서동, 관저 등이 분리된 청사 배치로 인하여 대통령과 참모진 간 소통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윤석열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 공간 이전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의 벤치마킹 대상은 미국 백악관, 독일 연방총리청, 일본 총리대신관저 등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대통령(총리)을 중심으로 참모들의 업무 공간이 집중 배치돼 있다는 점이다. 세계 각국 국가 원수 혹은 행정 수반들은 어떠한 공간에 거주하고 있을까?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사례를 조망해 보았다.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오벌오피스를 중심으로 참모들과 소통할 수 있는 구조

미국 대통령 집무실이자 관저인 백악관. | 연합뉴스.

백악관(白堊館·White House)은 미국 대통령의 거처이자 집무실이다. 1789년 기공하여 1800년 완공했고 이듬해인 1801년 공식 개관했다.

백악관이 건축되기 전에는 뉴욕의 새뮤얼 오스굿 하우스(Samuel Osgood House), 알렉산더 매콤 하우스(Alexander Macomb House), 필라델피아의 프레지던트 하우스(President’s House)가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다. 1800년 제2대 존 애덤스(John Adams) 대통령 이후로 미국 대통령 주거지로 이용되어 왔으며, 집무, 외국사절 접견, 일상생활 등을 이곳에서 수행한다.

백악관이라는 명칭은 미영전쟁에서 유래했다. 1814년 8월, 영국군이 수도 워싱턴 D.C를 점령하고 백악관도 방화했다. 와중에 건물 외벽은 검게 그을렸고 복구 과정에서 관저 외벽을 흰색으로 칠한 후 백악관이라 부르게 됐다. 이후 33대 대통령인 해리 S. 트루먼이 대대적으로 정비, 보수한 후 35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마지막 손질을 하여 오늘날 모습을 갖추었다. 정비 과정에서 건물 외벽만 남기고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재건축하여 원래 사암(砂巖) 재질로 건축됐던 백악관은 겉에만 사암을 두른 콘크리트 건물이 됐다.

백악관 웨스트윙 평면 구조. 대통령과 참모들이 유기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백악관 내부 시설 중 각종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곳은 서쪽 동(棟), ‘웨스트 윙(West Wing)’이다. 대통령 공식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 캐비닛 룸(내각 회의실), 상황실, 루스벨트룸 등이 있다. 이 밖에 백악관 비서실장,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 대통령 자문관, 대통령 선임고문, 백악관 대변인을 비롯하여 보좌 직원 사무실이 있다. 부통령도 웨스트 윙에 사무실이 있지만 주요 직무실은 아이젠하워 빌딩에 두고 있다.

영국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공식 집무실이 없는 게 특징

영국 총리관저. 지명을 따서 ‘다우닝가 10번지’라고 부른다. 대로변에 자리하여 시민의 접근이 쉽다. 대신 테러에 취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입헌군주제하의 의원내각제 국가인 영국 총리 관저는 런던 시내 정부 청사가 밀집한 화이트홀(White Hall)의 다우닝가(Downing Street)에 자리하고 있다. 번지수는 10번지. 따라서 총리 관저는 ‘다우닝가 10번지’로 불린다.

총리 관저 명패에는 ‘제1 재무경(First Lord of the Treasury)’이라 붙어있다. 영국 총리(Prime Minister)의 원조가 국가 재정 문제를 총괄하던 제1 재무경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옆 다우닝가 11번지에는 재무장관(Chancellor of the Exchequer) 겸 제2재무경(Second Lord of the Treasury)의 관저가 있다.

영국 총리관저, 다우닝가 10번지의 역사는 올리버 크롬웰파였다가 뒤에 왕정복고파로 돌아선 조지 다우닝이 1682년 타운하우스를 지은 데서 시작한다. 다우닝가라는 거리 이름은 다우닝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세인트 제임스 공원과 인접하고 국회의사당까지는 걸어갈 수 있으며 버킹엄 궁전과도 가까운 이곳은 런던의 요지였다.

다우닝가 10번지가 웨스터민스터 모델로 보이는 영국 민주주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733년 국왕 조지 2세가 영국 최초의 총리라고 불리는 로버트 월폴에게 당시 왕실 소유였던 타운하우스를 하사하면서부터다. 월폴은 이 집을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월폴 개인이 아닌 당시 공석이었던 제1재무경(총리) 관저로 줄 것을 요청했고, 조지 2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제1재무경 관저’로 지정됐다. 월폴은 후임 총리들이 공관을 사용하기를 희망했지만 후임자들은 낡은 관저에 입주하기를 꺼렸다.

다우닝가 10번지가 총리 공관으로 다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02년 아서 밸푸어 총리 때부터다. 1905년 이래로 영국 총리가 제1재무경을 겸하기 시작하면서 재1재무경의 관저인 이 건물이 영국 총리의 관저이자 영국 의회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굳어졌다.

총리 취임 후 첫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는 보리스 존스 영국 총리. 총리 담화 등은 총리 관저 앞에서 이뤄진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시 내각을 이끌었던 윈스턴 처칠은 안전상의 이유로 다른 벙커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았으나 때때로 다우닝가 10번지에 나타나 승리의 ‘브이(V)’자를 지어 보이며 영국 정부와 내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영국 총리 관저의 특징은 건물 내 특정된 총리 집무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 취임한 총리가 관저에 입주 후 자신이 원하는 공간에서 집무할 경우 그곳이 ‘총리 집무실’이 된다. 또 다른 이유는 영국 정치의 특징에서 유래한다. 상시(常時) 국회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영국에서 총리와 각료는 업무 시간의 대부분을 국회 의사당에서 보내게 되어 관저에 머무는 시간이 적은 편이다.

프랑스 엘리제궁전
번화가에 자리하여 접근성 양호하나 경호 취약

파리 번화가 샹젤리제 거리에 자리한 엘리제궁. 프랑스 정치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영국 총리 관저와 마찬가지로 도심에 자리하여 접근성은 용이하나 경호에 취약하다는 문제가 있다.

프랑스 수도 파리 제8구에 자리한 엘리제 궁전(Le Palais de L’Élysée)은 프랑스 대통령의 공식 집무실이다. 미국 백악관, 영국 다우닝가 10번지(총리관저)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부 수반 관저 중 하나로 꼽힌다.

건축가 아르망‒클로드 몰레(Armand-Claude Mollet)가 설계했다. 완공 후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저택’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후 부르봉 왕가와 귀족의 저택, 별장으로 사용되던 엘리제궁전은 프랑스 혁명기에는 관보출판소 등 공공기관 청사로 사용됐다. 그러다 18세기 말 근처 샹젤리제 거리의 이름을 따 ‘르 팔레 드 렐리제(Le Palais de l’Élysée·엘리제 궁전)’이라는 오늘날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180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황제로부터 ‘나폴리 왕’으로 임명된 뮈라 원수가 ‘엘리제‒나폴레옹 궁전’이란 이름으로 나폴레옹 황제에게 헌납했다. 이 때부터 엘리제 궁전은 점점 프랑스 역사의 중심으로 들어섰다. 프랑스 제2공화국 임시정부하에서 엘리제 궁전은 ‘엘리제 나시오날(국유 엘리제 궁전)’이란 이름을 얻었고 그 정원도 대중에게 개방됐다. 그러다 1848년 국회는 법령을 공포하고 국유 엘리제 궁전을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의 관저로 지정했다. 이후 엘리제 궁전은 프랑스 대통령 관저 겸 집무실로서 프랑스 정치 1번지가 됐다.

엘리제궁전 1층에는 매주 국무회의가 열리는 대회의장이 있다. 2층에는 대통령 집무실, 비서실장실, 수석보좌관 사무실이 자리한다. 대통령과 참모진 간 원활한 소통에 유리한 구조란 평가를 받는다. 반면 취약점도 존재한다. 엘리제궁전은 파리 중심가 샹젤리제 거리 바로 옆에 있다. 그 일대의 교통 체증은 악명이 높다. 보안도 완벽하지 않다. 궁 주변은 경찰, 궁전 출입 통제는 공화국 근위대, 경호는 대통령경호실(GSPR)이 3중으로 관리하지만 현지 언론들은 “백악관이 안전한 벙커라면 엘리제궁은 ‘골판지’로 만든 성”이라며 수시로 비판하기도 한다.

독일 연방총리청
연방의회청사 인근에 자리한 세계 최대 규모 행정수반 사무처

청사 외관이 세탁기를 닮았다고 하여 ‘세탁기’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독일 연방총리청 청사. 건축 당시 헬무트 콜 당시 총리의 의견을 반영하여 당시에는 흔치 않던 유리 궁전의 형태로 지었다. 건축 당시에는 흔치 않던 양식이라 반발을 샀지만 2000년 대 이후 보편적인 양식의 하나가 됐다.

‘세탁기(Waschmaschine)’는 독일 연방총리청(Bundeskanzleramt) 청사의 별칭이다. 독일 연방 총리가 이곳에서 집무를 한다. 연방총리청의 시원은 1871년 독일 제국 성립 후 베를린에 설치한 제국재상(Reichskanzlei) 집무처다. 이후 나치 독일 시대 1938~39년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가 ‘총통 관저’로 알려진 새로운 국가총리부 청사를 신축했으나 1945년 소련군이 파괴했다.

동·서독 분단 후 서독(독일연방공화국)은 본을 수도로 정했고, 샤움부르크 궁전(Palais Schaumburg)을 연방총리 집무실로 사용했다. 그러다 독일 통일 후 수도를 베를린으로 옮기면서 1997년 공사에 들어가 2001년 현재의 연방총리청을 완공했다. 전체 8층으로 된 세계 최대 규모의 사무처로 꼽히며 연면적은 부속건물까지 합하면 미국 백악관의 8배 규모이다.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까지의 거리는 500m로 총리나 각료가 도보로 의사당으로 이동할 수 있다.

연방수상청 청사 내부에는 총리가 거주할 수 있는 ‘거처시설’도 마련되어 있다. 다만 청사 건축을 주도한 헬무트 콜 당시 총리가 거처시설에 입주하기 직전에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패배하고 물러나면서 이후 총리들은 단 한 명도 해당 건물 안에 입주하지 않았다. 후임자인 슈뢰더 전 총리, 메르켈 전 총리는 모두 사택을 연방의회 의사당 근처에 마련하고 통근했다.

역대 최장수 총리 메르켈 전 총리가 살던 사택. 담장조차 없는 개방형이다.

일본 총리대신관저
집무실과 공관이 분리… 공저에서 귀신 출몰한다는 괴담

일본 총리 관저. 설계 시 외관과 내장 모두 ‘일본다운 단순미를 추구한다’는 기조 아래 꾸며졌다. 관저를 찾는 외빈들에게 일본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도록 박물관 또는 미술관적 컨셉트에 주안점을 두었다. 총리 관저를 새로 신축하는 과정에서 이미 기존의 초고층 빌딩이 인접하고 있는 문제로 경호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상당히 면밀한 설계를 거쳤으며, 미국의 백악관 상황실을 본딴 위기관리센터를 지하에 배치하는 식으로 총리 관저의 집중도를 높였다. 또 태양광발전 및 풍력발전 설비를 설치하고 연료전지를 통한 발전과 난방 시스템도 갖추는 등 친환경적인 면에도 신경썼다.

일본 수도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에 자리한 일본 총리 관저의 공식 명칭은 ‘내각총리대신 관저(内閣総理大臣官邸)’이다. 총리가 국정 업무를 총괄하는 집무실만을 일컫는 명칭으로 사용하며 총리가 생활하는 공간은 총리공저(總理公邸)라고 부른다.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관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기관은 총리관저가 유일하다.

지상 5층, 지하 1층의 총리관저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인 2002년 완공됐다. 공사에는 한화 7천억 원이 소요됐다. 관저 본관 지하 1층에는 국가위기관리센터가 있다. 지상 1층 출입구의 로비에 기자회견장, 각종 회견장, 2층에는 귀빈실, 회의실이 있다. 3층에 각 성(省)·청(廳) 사무실, 4층에는 내각 대신(大臣·장관) 집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핵심 구역이라 할 수 5층에는 총리 집무실, 관방장관과 부장관의 집무실이 있다.

같은 구역에 자리한 총리 거주공간인 공저는 1932년 당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총리가 암살당한 장소이다. 이후 공저에 입주했던 역대 총리들이 단명하거나 불운한 결말을 맞으면서 불길한 곳으로 인식됐다. 1929년 지어진 옛 공관을 개수해 2005년 4월부터 다시 이용하기 시작했다. 역대 총리 거주지로 사용되다가 2차 아베 정권 때부터 연간 1억6천만엔(약 16억7천만원)의 유지비가 들어가는 빈집으로 남아 있었다.

일본 총리관저와 인접한 총리공저(공관). 건축된 지 100년 가까운 노후 건축물로서 귀신이 출몰한다는 괴담이 있다.

역대 총리들이 공저 입주를 꺼리는 것은 귀신이 출몰한다는 괴담 때문이다. 공저 완공 3년 후인 1932년 5월 15일 일어난 5·15 사건은 해군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로서 당시 이누카이 총리가 공관에서 구로이와 이사무(黑岩勇)라는 해군 소위의 총에 맞아 절명했다. 1936년에는 일본 육군 황도파(皇道派·일본 천황 보위파)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 사건이 발발했다. 일왕이 친히 나라를 다스리는 이른바 쇼와(昭和) 유신을 주장하며 1400여 명의 육군 장교가 총리 공관을 포위하고 공격했는데, 이 과정에서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 총리는 가까스로 도망쳤고 4명의 경비병과 여러 명의 대신이 살해됐다. 두 차례 정변의 현장인 총리 공저는 이후 억울하게 죽은 많은 원혼이 유령이 돼 나타난다는 소문이 일본 정가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