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종식 주역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서거

최창근
2022년 08월 31일 오후 2:26 업데이트: 2022년 08월 31일 오후 2:26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50대 최연소 소련 공산당 서기장
개혁 개방 정책 추진… 결과적으로 소련 해체
세계 평화에 기여했지만 조국 평가는 냉담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 대통령이 8월 30일(현지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세.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 등은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노환을 앓다가 이날 저녁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에서 숨졌다고 전했다.

장례식 후에는 러시아 중요 인물들이 잠들어 있는 모스크바 노보드비치 공동묘지에 있는 아내 라이사의 옆에 영면(永眠)하게 된다.

소련공산당 마지막 서기장이자 첫 대통령이었던 그는 소련 해채, 동서 냉전 종식, 동유럽 공산권 국가 몰락 등 격변의 세월의 중심에 섰다.

고르바초프가 역사의 정면에 등장한 것은 1985년 54세 때였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올랐을 때 그는 소련 공산당 최연소 정치국원이었다. 전임 서기장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사망 3년 전부터 사실상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뒤를 이은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네코도 고령과 병환으로 서기장에 오른 지 1~2년 만에 숨졌다. 늙고 병든 최고 지도자들의 모습은 쇠퇴를 넘어 재기불능 상태로 가는 소련을 상징하는 듯했다.

고르바초프는‘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추진하여 대변혁을 시도했고, 이를 통해 정치적 민주화를 허용하고 경제 효율성을 높이려 했다. 당시 소련은 대대적인 개혁이 불가피했다.

고르바초프의 통치 스타일은 역대 소련 지도자들과 달랐다. 매력적이고 지적인 외모를 가진 그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타고난 웅변가였다. 소련의 역대 퍼스트레이디와는 달리 부인 라이사 여사도 대중 앞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고 해외 순방에도 동행했다.

로널드 레이건(우) 미국 대통령과 담소하는 고르바초프(좌). 두 사람은 동서 냉전 종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은 ‘신사고’에 기반을 둔 외교 정책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집권 8개월 만인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 화해의 악수를 함으로써 수십 년간 계속돼온 양국 간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초석을 놓았다.

군축도 이어졌다. 미국과 중거리핵전력조약(INF) 및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체결했다. 동유럽 주둔 소련군 50만 명을 일방적 감축하기도 했다. 미국과 소련의 화해 분위기는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받는 독일 통일과 동유럽 민주화의 촉매제가 됐다.

1989년 지중해 몰타에서 열린 미국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한 데 이어 1990년 여름 동·서독의 통일을 수락했다. 통일 독일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잔류하는 것도 용인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에 대한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그는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려다 끝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90년 여름 급진적 경제개혁안인 ‘샤탈린의 5백일 개혁안’을 거부해 개혁파 인사들과 틈이 벌어졌다.

1991년 8월,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던 도중 쿠데타를 일으킨 보수파들에 의해 연금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보수파의 쿠데타는  ‘3일천하’로 막을 내렸지만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과 소련 지도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쿠데타 이후 그는 공산당 활동을 정지시키고 보수적 내각을 물갈이하는 동시에 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라트비아 등 발트3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개혁 조치를 마련했으나 이미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효율화, 경제 회복을 목표로 추진했던 고르바초프의 개혁은 동유럽 사회주의권 몰락, 소련 해체로 이어졌다.

1989년 동독 붕괴를 시작으로 동유럽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1991년 12월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마저 해체됐다.

소련 해체,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 몰락 속에서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국가들과 소련 내 공화국을 억압하지 않았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우려했던 군사력 사용도 없었다.

고르바초프는 냉전을 평화적으로 끝내는 데 일조했고, 동서관계를 개선해 세계 평화에 이바지했다는 명분으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1991년 권좌에서 물러난 뒤 싱크탱크 ‘고르바초프 재단’을 설립해 학술과 강연 활동에 전념해왔다. 1996년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에 맞서 러시아 대선에 출마해 재기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0.5%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을 단행하고 미국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해서 ‘제국(帝國)’ 소련이 무너지게 했다는 세간의 평가를 방증하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그를 소련을 해체한 반역자라 평가하기도 한다.

보리스 옐친의 뒤를 이어 2000년 5월 권좌에 오른 블리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평가도 다르지 않다. 그는 2005년 “소련 붕괴는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다.”라며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손대고 싶은 사건이다.”라고 했다.

1999년 9월, 아내 라이사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정신적 충격으로 건강이 악화됐지만 왕성한 외교·학술 활동을 펼쳤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2기 정권(2004~2008년)에서는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을 비판하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하며 크렘린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