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안의 최악의 적 ‘나르시시즘’과의 만남

[시리즈 칼럼] 고전회화는 사람의 내면에 무엇을 남기는가

에릭 베스(Eric Bess)
2020년 08월 10일 오전 11:10 업데이트: 2024년 01월 19일 오후 6:15

예술가(화가)로서 나는 때때로 자기애에 빠진 나를 발견하고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사람들이 내 작품을 많이 보고 또한 좋아하기를 바란다.

소셜미디어에 작품 사진을 올리고 나면,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주길 기다린다. 솔직히 말하면, ‘좋아요’가 많을수록 자신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져 자기애는 깊어간다.

‘좋아요’를 많이 받길 바라는 나의 욕망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자신을 발견한 나르시스

나르시스의 이야기가 어쩌면 내 자기애를 들여다볼 좋은 통찰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고대 로마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따르면, 나르시스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물의 님프 리리오페에게서 태어났다.

나르시스는 너무 아름다워 누구든 그를 보기만 하면 사랑에 빠졌다. 나르시스가 태어났을 때, 리리오페는 한 예언자에게 찾아가 나르시스가 장수할 것인지를 물었고 예언자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면”이라는 예언을 했다.

실로 모두가 나르시스를 사랑하게 됐고 그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다. 그러나 나르시스는 이들의 찬미와 감탄을 무시하고 멸시하기까지 했다.

거만한 나르시스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한 님프가 신들에게 복수의 기도를 올렸다.

“그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만드소서, 그리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얻을 수 없게 하소서.”

그리고 이 기도를 들은 건, 바로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였다.

어느 날, 나르시스는 숲속에서 외딴 샘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샘은 고요하고 ​​맑았다. 그는 샘물 옆에 누워 휴식을 취한 후 갈증을 느껴 샘물을 마시려 했다.

그 순간이었다. 그가 샘물 가까이 몸을 숙였을 때, 그는 고요하고 맑은 물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만 사랑에 빠져 버렸다.

자신에게 깊이 빠져버린 나르시스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려 했다. 그는 물속에 비친 자신을 안아 보고 싶었지만, 손이 닿자마자 흐려지며 사라지는 형상을 어찌할 수 없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물속의 자신을 속절없이 바라보기만 하다 결국 “아아, 허무하구나, 사랑하는 자여! … 안녕!”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카라바조의 ‘나르시스(Narcissus)’, 1598–1599년, 국립고대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ncient Art), 로마. |Public Domain

카라바조의 ‘나르시스’

카라바조는 오비디우스의 로마신화에 나온 나르시스 이야기를 ‘나르시스(Narcissus)’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표현했다. 이탈리아의 이 바로크 화가는 나르시스를 극도의 빛과 어둠으로 묘사했는데, 그 신체에 표현된 밝기는 어두운 배경과 대비돼 나르시스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물은 작품 구성을 반으로 나눴다. 나르시스는 물가에 앉아 오랫동안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본 듯하다. 땅을 짚은 오른팔은 체중을 받치고 있지만, 왼팔은 물속의 형상을 잡고 싶은 듯 물속으로 뻗어있다. 나르시스의 두 손과 물에 반영된 두 손은 서로 만나 타원형을 이룬다.

배경의 어둠은 나르시스의 바깥 세계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것일지 모른다. 그는 어쩌면 자신에 대한 강렬한 욕망 때문에 세상을 잊은 건 아닐까? 아니면, 그것은 욕망 때문에 닥치게 될 어둠을 나타내는 것일까?

나에게 배경의 어둠은 둘 다를 상징한다. 나르시스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욕망 때문에 주위 세상을 잊어버렸다. 그는 한때 자신을 사랑했던 존재들과 그의 가족, 그리고 주변의 동물과 식물마저 잊어버렸다.

자신에 대한 욕망은 다른 존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들 역시 고통받고 인내하고 사랑하고 웃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잊게 했다. 자신을 향한 욕망은 선(善)과 양립할 수 없다.

선의 부재보다 더 어두운 것은 무엇일까? 어둠이 나르시스에게 가까이 다가올 수 있는 이유는 어둠은 욕망의 본질, 즉 자신만을 위한 욕망과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의 결핍과 이기적 욕망은 결국 생명을 거두는 어둠,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의 마지막 말 ‘허무하구나'(in vain)는 그의 노력이 결국 실패했다는 표면적인 사실을 암시할 뿐 아니라, 물에 비친 자신의 형상을 원하는 그의 허영심(vanity)을 꼬집는 것이기도 하다.

카라바조는 왜 타원형을 구성 요소로 사용했을까? 나르시스의 팔은 물에 반영된 팔과 결합해 우리의 시선을 계속해서 큰 타원으로 이끌어 돌게 한다.

나에게 이 타원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가한 신의 응보를 상징한다.

나르시스는 다른 모든 존재가 그에게 품었던 그 마음을 자신을 향해 품었다. 그리고 그를 향한 찬사와 사랑에 냉정과 경멸로 반응했던 그의 교만은 다른 존재들이 받았던 만큼의 고통과 슬픔으로 고스란히 나르시스에게 돌아왔다. 신의 응징, 곧 ‘인과응보’인 거다.

내 안에 있는 최악의 적

나르시스 신화와 카라바지오의 그림은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해 주려는 걸까? ‘좋아요’에 대한 내 욕망은 자기애인 걸까?

나는 종종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내 작품을 소셜미디어에 공유해 자신을 홍보하고, 그림을 팔며,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사실’이지만, 온전히 ‘진실’한 것은 아니다.

전통예술가에게 작품은 예술가의 가치와 시각 세계를 반영한다. 예술가는 작품 속 상징과 표현을 통해 그가 무엇을 찬양하고, 욕망하는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지를 드러낸다.

예술가는 또 각 작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들여다볼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사람들이 어떤 예술 작품을 좋아할 때, 그 예술가와 예술가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 역시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가로서 나는 항상 내 작품에 비친 자아와 사랑에 빠지는 위험에 직면한다.

‘좋아요’를 받을 목적으로 작품을 공유할 때, 나의 선(善)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정말 단순히 예술가로서 존경받고 싶을 뿐인 걸까? 그렇다면 이 자기애적 접근은 작품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인가?

그것은 단지 다른 인간들을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이 자기애에 대한 신의 응징은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고통받게 될까?

그렇다. 찬사를 받기 위해 자신의 작품을 게시하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깊은 곳에 감춰진 가치 있는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작품을 게시하는 예술가가 있는 거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가치를 투영해 주고 반성하게 했다. 그래서, 오늘 나는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나의 작품을 다른 이들을 위해 공유하는가, 아니면 나를 위해 공유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