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조총련, 북송 신청자 마음 바뀌면 물리력 동원해 강제 승선도

재일교포 북송사업의 실체 ⑥

이윤정
2022년 12월 2일 오후 6:47 업데이트: 2024년 03월 9일 오전 9:41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3340명의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한 사건이다. 1959년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이른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북송사업이 시작된 이후 25년 동안 총 187회에 걸쳐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의 청진항으로 향했다. 당시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이주한 재일 한인 9만3340명 중 재일교포의 98%는 고향이 남한이었고, 일본인 아내 등 일본인 680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이 2022년 발간한 ‘지상낙원으로 간 그들은 어디에? : 기만적 북송사업과 강제실종’은 그 실체를 규명한 보고서다. 에포크타임스코리아는 북한인권시민연합의 도움을 얻어 보고서를 바탕으로 재일교포 북송사업 실체를 분석한 특집 기획을 마련했다.

1959년 9월 3일, ‘귀국지도서’가 공표되고 본격적으로 북송자 신청 및 승선 업무가 시작됐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관련 업무를 일본 적십자에 위임했지만, 실제로 북송자 신청이 이뤄진 일본 각 도도부현(都道府縣) 소재 일본적십자센터와 승선 업무가 행해진 니가타일본적십자센터는 전적으로 조총련이 관리·감독했다.

북송자 신청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북송 관련 업무를 일본 적십자에 위임했지만, 일본 적십자는 전적으로 조총련이 관리·감독했다. | 북한인권시민연합 제공

‘귀국지도서’가 공표되고 1959년 9월 21일부터 3655개의 일본 적십자사 창구에서 북송자 신청 접수를 시작했다.

귀국지도서에는 신청에 대한 원칙, 거주지 선택의 자유 및 선택에 따르는 책임, 북송 준비에 필요한 사항 등이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었지만, 재일교포는 이 같은 내용을 전혀 전달받지 못했다. 사단법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연구에 참여했던 탈북 북송자 중 각 지방 창구에서부터 북송선에 오르기까지 이 귀국지도서에 관해 설명을 듣거나 본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밝혔다.

북송 대기자들은 북송선에 승선하기 전 니가타항 부근에 자리한 니가타 일본적십자센터에서 3박 4일간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국제 적십자 위원회 입회하에 진행되는 최종 의사 확인이 이뤄졌다.

최종 의사 확인 절차가 이뤄지는 ‘특별실’에는 한 사람씩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가구 단위로 들어갔다. 재일교포 사이에서 가구 단위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는 자발적인 의사 표현에 걸림돌이 됐다.

일반 사무용 방에 문을 떼어낸 채 칸막이만 두고 목소리는 밖에서도 들을 수 있는 구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기 생각을 바꾸거나 표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북송 의사를 확인하는 질문도 “이 게시문을 잘 이해하셨고 변함없으시지요?”라는 간단한 질문으로 한정했다.

귀국지도서는 본인이 직접 신청해야 한다. 귀국지도서에는 ‘귀환희망자는 일본 적십자가 정하는 귀환신청서를 본인 스스로 직접 일본 적십자사에 제출하고 필요한 귀환 신청을 진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나 조총련 관계자들에 의해 대리 신청이 이뤄진 경우도 있었다. 당시 재일교포 중에는 문맹자가 많아 본인이 직접 신청서를 작성할 수 없는 사람도 많았으며, 북송자 모집의 편의성을 위해 조총련이 대리 신청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증언자 A는 “재일동포 중에 글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 일체 수속은 조총련이 대리로 다 진행했다. 나처럼 조총련을 통하지 않고 신청한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라고 증언했다.

강제 승선

일본 정부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대표단은 북송자들이 일본 적십자센터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는지 알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일본 경찰청이 ICRC 대표단에 보낸 극비 메모가 실려 있다. 메모에는 “현행 귀국사업(북송사업)은 일본에서 북한 정부를 대신해서 조총련에 의해 처리되고 있다. 북한 정부에 의해 결정되고 조총련에 의해 적용된 방침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자는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북한에서는 당국에서, 일본에서는 조총련에서 좋은 대우를 받을 수가 없다”고 적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최종 의사 확인 절차가 이뤄지는 니가타일본적십자센터의 관리는 전적으로 조총련이 담당했다.

일본적십자센터에서 재일교포의 수속과 생활지도를 담당했던 장명수 씨의 증언에 따르면 북송선 출항을 앞두고 북송 의사를 철회하는 사람이 매번 나왔다. 특히 가족 단위의 북송 재일교포가 많았는데 이때 가족끼리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고 했다.

완장을 찬 장명수 씨 | 북한인권시민연합 제공

장 씨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귀국자 가운데서 의사 변경자가 나오는 일이었다”며 “조총련은 이를 ‘불명예스러운 사태’로 규정하고 의사 변경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조총련은 북송을 두고 동요하는 사람(의사 변경자)을 사전 조사해 북송선이 출발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처음에는 설득으로 시작했지만, 설득을 통해서도 의사 변경 의지를 굽히지 않는 이에게는 거짓말을 하거나 물리력을 동원해 승선시키는 일도 발생했다.

장 씨는 본인이 직접 이러한 임무를 맡았다며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럴 때(승선을 거부하는 의사 변경자가 있을 때)는 내가 나섰다. 부모의 처지를 생각해서 배에 타기까지만 하라. 내가 배에서 내리게 해줄 테니까. 이 경우 자유로이 드나드는 내 권위를 내세워 귀국선(북송선)에 출입하는 완장을 건네기도 했다. 대개의 사람은 내 말을 믿고 귀국선에 탔다. 귀국선 측도 그런 사정을 미리 알고 있었기에 특별하게 처리해줬다.” ‘특별 처리’는 북송선에서 내리려는 의사 변경자를 물리력을 동원해 제압했다는 의미다.

이어지는 장 씨의 증언이다.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를 자칭하며 북송선에 오르기로 한 한 노인은 머리가 길고 미군 작업복과 비슷한 옷을 입은 특이한 행색이었다. 이에 조총련 관계자가 북송선에 오르기 전 머리를 깎고,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으라며 주의를 주자 노인은 북송선에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노인이 넘어오지 않자, 귀국자집단 간부와 상의해 그를 술에 취하게 해 북송선에 태우기로 모의했다. 그러나 북송선 출발 전 노인이 술이 깨어 도망가자 강제로 잡아서 북송선에 태워버렸다.”

이처럼 니가타 일본적십자센터에서의 3박 4일은 전혀 자유롭지 않았으며, 조총련에 의해 북송이 강제되고 있었다.

북송사업, 귀국 운동 아닌 강제 이주

보고서는 취재를 통한 수많은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지상낙원’ 귀국 운동으로 호도됐던 북송사업이 실제로는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감독 태만하에 소련, 일본 정부, 일본 적십자의 지원을 받아 북한 정부가 조총련을 통해 조직한 노예무역이었다”라고 평가했다.

1926년 체결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노예금지협약은 노예제를 “소유권 행사에 부속되는 권한의 일부 또는 전부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지위 또는 상황”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노예무역’을 “강제로 노예로 만들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포획·취득·처분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행위”로 정의한다.

북송사업을 위해 합심했던 관련 행위자들은 각각 북송사업을 통해 정치적 수혜를 입었다. 특히 북한 정부는 북송 재일 교포의 국내 유입을 통해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 재건에 운용할 수 있는 무상 노동력과 자본을 얻었다. 북송사업은 국제 사회에서 정상국가로서 북한 정부의 지위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북한 정부가 진행할 수 있는 첩보 활동의 범위를 확장하는 결과도 초래했다. 일본 정부는 공공부문 지출 감소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취했다.

일본 내 제도적 차별의 피해자였던 재일교포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북한 귀국을 종용받았다. 그 과정에는 ▲조총련과 일본의 여론 주도자들을 통한 북한 정부의 선전 활동 ▲학생과 조총련 간부의 가정방문을 통한 심리 조작 및 정서적 협박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불성실한 감독으로 인해 진실성이 훼손된 북송 신청 및 의사 확인 절차 등이 존재했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북송사업에 대해 “강압을 통해 이뤄진 민간인 강제 이주였으며, 이를 귀국운동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북한으로 ‘귀국’하는 결정에 수반되는 결과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진정한 의미의 사전 동의를 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북송사업 조직에 관여했거나 북한 첩보기관과 연결된 자들로, 북한에 대한 허위 정보를 확산시키는 귀국선전운동의 여론 주도자로서 자신의 전략적 역할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이들을 제외한 북송자는 대부분 노예 상태로 전락했다.

북송자들이 정치·경제적 장기말처럼 취급되며 거래된 방식은 북송사업의 실상이 국가 주체들이 대규모로 계획해 실행된 노예무역과 다를 바 없음을 보여준다.

북송사업을 통해 노예화된 북송자 계층이 형성됐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교포들은 결과적으로 북한의 기존 주민들이 겪는 어려움에 더해 특수한 차별과 착취까지 견뎌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