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⑤ 좌절된 핵 개발, 대만은 다시 핵 무기 개발을 할 수 있을까

[기획연재] 대만의 핵 무장은 가능할까? 좌절된 대만의 핵 개발 진상 ⑤

최창근
2022년 08월 18일 오후 3:26 업데이트: 2022년 08월 18일 오후 5:00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양안(兩岸) 간 긴장이 고조됐다. 핵무기 보유국이자 미국에 대적할 만큼 국방력을 증대해 오고 있는 중국에 비하여 대만의 국방력은 절대 열세이다. 이 속에서 대만 방위를 위해서는 핵 무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 대만 정부는 국제규범에 따라 핵무기 관련 생산·개발·획득을 하지 않는다는 ‘3불 정책’을 확인하고 있지만 ‘핵무기 개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메시지도 던지고 있다. 실제 대만은 독자 핵 개발을 시도했었고 성공을 눈앞에 두었으나 내부 ‘간첩’으로 인하여 좌절된 역사가 있다. 비밀리에 추진됐던 대만 핵 개발 역사는 어떠했을까. ‘에포크타임스’는 관련자 증언,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추적했다. 

관련 기사
① 대만이 핵 무기를 개발하려 했던 이유는?
② 1970년대 핵 개발을 둘러싼 대만과 미국의 갈등
③ 대만 핵 무기 개발 카운트 다운, CIA, 그리고 스파이
④ 대만 핵 무기 개발 책임자의 망명, 강제 비핵화

무산된 독자 핵 무기 개발

1988년 장징궈 총통 사망, 핵 무기 개발 책임자 장셴이의 망명 등으로  인하여 대만의 비밀 핵 개발 계획은 무산됐다. 이후 미국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하에 비핵화로 이행했다.

1988년 1월 장징궈 총통 서거를 보도한 대만 ‘중국시보’. 장징궈 총통 사망은 대만 핵 개발이 좌절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대만 비핵화 이후에도 “대만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은 있으나 개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정치권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중국의 미사일 시험으로 제3차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한 1995년 7월, 중국은 대만해협에서 탄도미사일 시험으로 대만을 위협했다.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은 입법원(국회) 연설에서 “우리는 핵무기 보유 문제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알다시피 우리는 이런 계획을 갖고 있었다.”며 핵무기 개발 재개를 시사했다. 파장이 일자 리덩후이는 다시금 이렇게 이야기했다. “대만은 핵무기를 개발할 역량은 있지만 절대 개발하지 않을 것이다.” 전임자 장징궈 총통 시절 천명한 대외 원칙이기도 했다.

대만이 핵 프로그램을 지속하고 있다는 의심은 2000년대 들어서도 지속 제기돼 왔다. 일부 핵 프로그램이 존재할 수는 있다는 분석에 기반한 의심이다. 대만 지도자들은 핵 역량을 마음만 먹으면 다시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을 주는 발언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사라진 핵 연료봉의 행방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다른 실마리도 존재한다. 1988년 IAEA를 비롯한 사찰단은 대만 비핵화 당시 핵연료봉이 10개가량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핵연료봉이 재처리되지 않은 채 핵 폐기물로 처분됐는지 아니면 재처리 과정을 거쳐 플루토늄이 됐는지, 재처리 됐다면 현재 어디에 있는지 등은 여전히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2000년 1월, 탕페이(唐飛) 행정원 국방부장은 “1986년 이미 핵 무기 개발 능력을 보유했으나 미국의 강력한 저지로 개발이 무산됐다.”는 하오보춘의 발언에 대해서 전면 부인했다. 그 무렵 하오보춘은 자신의 참모총장 재임기 일기를 출판했고 대만 핵 개발 계획과 미국의 개입으로 무산됐다는 내용이 실렸다. 탕페이는 “대만은 현재 핵 개발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코 핵 개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라고 강조하여 리덩후이 총통의 기조를 재확인했다.

유시쿤 전 대만 행정원장. 천수이볜 총통 집권기 행정원장을 역임했던 민진당 원로 정치인이다.

2000년 대만 사상 첫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의 민진당 정부가 출범했다. 민진당 정부 시기에도 대만의 핵 개발 논란은 반복됐다. 2004년 9월, 입법원에 출석한 유시쿤(游錫堃) 행정원장은 “중국이 타이베이 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 미사일 100발을 발사하면 대만은 중국 본토에 있는 최소 10곳의 목표 지점을 공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유시쿤 행정원장은 ‘핵무기’나 ‘원자탄’ 등의 단어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지만 당시 제2 야당 친민당(親民黨·쑹추위를 중심으로 국민당에서 분당한 보수 색채 정당) 입법위원들이 반발했다. 친민당 입법위원들은 유시쿤에게 “비밀 핵무기 프로그램이 있는가?”라고 공개 질의했다. 유시쿤은 이를 전면 부인했다.

2007년 또다시 논란이 재발했다. 당시 뤼슈롄(呂秀蓮) 대만 부총통은 미국 싱크탱크 외교협회와 영상회의에서 “대만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은 있으나 개발하지 않고 있을 뿐이며 핵무기를 개발할 의도도 없다.”라고 밝혔다. 당시 뤼슈롄 부총통의 발언은 중국의 대만 무력 침공 위협이 지속되는 한 언제든지 대만도 핵무기 개발에 나설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핵무기 개발 능력은 있으나 개발하지 않는다

10년이 흐른 2017년, 정부 당국자 입에서 다시 한번 대만 핵 개발 문제가 제기됐다. 5월 펑스콴(馮世寬) 행정원 국방부장은 국가 안보 관련 토론회에 참석하여 “대만은 핵무기 개발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처럼 핵무기 개발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만은 군사력을 남발하는 호전적인 북한과는 같지 않다. 대만은 영원히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것이며 거래 카드로 삼기 위해 또 다른 핵위기를 초래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밝혀 대만이 핵 제조 능력이 있음을 시사했다.

이 속에서 대만은 한국·일본과 더불어 ‘잠재적 핵 보유국’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국제 사회의 제재 등 불이익만 감수하면 단기간에 핵 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했다는 것이다. 실제 대만이 다시 핵무장에 나설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결과적으로 대만 핵무기 개발을 수포로 만들었던 장셴이(張憲義)는 “대만이 원자력 연구와 개발 노력 그리고 인재 양성을 계속해왔다. 또 핵무기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원자로 없이도 다시 예전 역량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노년의 장셴이. 대만 핵무기 개발 실무 책임자였으나 1988년 미국 망명과 핵 개발 프로그램 폭로로 대만 핵 개발이 무산됐다.

지난해부터 대만해협 양안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자연스레 대만 핵 개발론이 다시금 점화됐다. 중국으로부터 대만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핵 무장이 불가피하다는 논리이다.

2022년 4월, 맥도널 더글라스(McDonnell Douglas) 대만법인 대표를 지내기도 한 랴오훙샹(廖宏祥) 전 대만 국방대학 전쟁학원 명예 석좌교수는 “중국은 대만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미국의 개입을 저지하기 위해 핵무장을 강화하고 있다.”며 대만의 핵무기 개발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원하지 않는다면 대만이 중국의 무력 위협에 굴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현상 유지라는 전제 아래 대만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랴오훙샹은 대만의 경우 3∼4개월이면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전망을 예로 들면서 외부 전문가 발언을 인용해 대만이 최소한 1년이면 핵을 보유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비밀 유지 중요성도 재차 강조했다. 장셴이의 망명으로 무산된 1980년대 비밀 핵 개발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잠정적 핵 보유국 대만

결과적으로 미국의 압박과 내부 스파이로 인하여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핵무기 개발 성공 직전까지 갔던 대만은 잠정적 핵 보유국임은 분명하다.

미국 입장에서 대만의 비핵화는 ‘비확산’ 성공 사례로 꼽힌다. 미국 정부는 대만 정부를 설득·압박하고 비핵화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현재까지 관련 문건 상당수가 비공개 상태이다.

대만의 핵 개발 시도와 실패 사례는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에 비밀 핵 개발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개발 저지 시도,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새로이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의 핵 폐기 프로그램 이행 등으로 좌절된 한국 사례와도 유사점을 지닌다.

다만 대만은 관련자 회고록, 관련 문건 일부 공개 등으로 전모가 드러난 상태이지만 한국은 관련 문건이 폐기 또는 유실되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힘든 상황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