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당의 박해 보며 자랐지만…” 中 20대의 이유 있는 용기

이윤정
2021년 04월 22일 오전 2:10 업데이트: 2021년 04월 23일 오전 9:34

“어릴 적부터 중국 공산당의 박해를 보고 들으며 자랐지만 이렇게 좋은 수련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중국인 유학생 고윤지(24•한국명) 양은 딱 그 나이 또래다운 앳되고 발랄한 모습이었다. 중국에서 태어나 가족과 지인들이 박해받는 모습을 보고 들으며 자랐다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2014년 한국에 유학 온 윤지 양은 올해 대학을 졸업했다.

“제 또래나 지인 중에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분이 아주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친구들과 다툼이 생겼을 때 남을 탓하기보다 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원인을 찾아서 고치려고 하면 아무리 힘든 일도 잘 풀리고 친구 관계도 금세 다시 좋아졌어요.”

윤지 양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파룬궁을 수련하던 어머니 덕분에 걸음마를 떼면서 수련을 시작했다. 어머니로부터 연공 동작을 배웠고 글자를 익히기도 전에 어머니가 읽어주시는 전법륜을 들으며 자랐다.

“(파룬궁 수련서인) 전법륜을 읽으면서 모든 일이 우연한 게 아니라 인연 관계가 있다는 이치를 알게 됐어요. 수련으로 내면의 힘이 점차 커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녀가 중국에 있을 때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발생했고 한국에 와서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있었으며 현재 코로나 19도 심각하다. 하지만 3번의 재앙을 겪는 과정에서 한 번도 두렵거나 불안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중국의 명상수련법인 파룬궁(정식명칭 파룬따파·法輪大法)은 1992년부터 보급되기 시작해 9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였던 장쩌민은 “수련자 수가 공산당원보다 많다”며 탄압을 지시했다. 1999년 7월 20일을 기점으로 시작된 탄압은 지금까지 21년째 계속되고 있다.

파룬궁이 중국 정부의 탄압을 받게 되자 수련자들은 중국 헌법에 명시된 ‘상급 기관 청원권’을 근거로 베이징에 몰려들었지만, 문밖에서 거절당하거나 심지어 투옥됐다.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는 숫자는 2000년 초부터 2001년 말까지 2년간 최고조에 달해 톈안먼 광장에는 수련 동작을 하거나 현수막을 들고 외치는 파룬궁 수련자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윤지 양이 4살이던 2001년 그녀의 어머니 역시 파룬궁 탄압에 대해 정부가 공정하게 조사해 줄 것을 청원하기 위해 베이징에 갔다가 노동교양소(강제 노역 시설)에 수감됐다.

“당시 어머니가 아침마다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마칠 때 데리러 오곤 하셨어요. 당시 저는 어렸지만, 그 날따라 예감이 안 좋아서 엄마에게 데리러 올 거냐고 수십 번 되물었던 게 기억납니다. 어머니는 끝까지 대답을 안 하셨고 결국 저를 데리러 오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톈안먼 광장에서 파룬궁 탄압 실상을 알리는 현수막을 펼치자마자 공안(경찰)에 체포돼 1년 형을 선고받고 노동교양소로 보내졌다.

노동교양소는 강제노역을 당하고 사상 재교육을 받는 시설로 99년 이후 파룬궁 수련자 수십만 명이 이곳에서 노동 착취 및 고문을 당하는 등 피해를 봤다. 시진핑 정부가 들어선 후 2013년 하반기에 노동 교양 제도는 해체됐지만, 아직도 수많은 피해자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머니 역시 혹독한 환경에서 온갖 고문에 시달렸다. 손에 수갑을 채우고 바닥에 고정시켜 계속 엎드린 자세로 있게 하고는 앉기만 해도 때렸다. 어둡고 비좁은 독방에 가두고 화장실도 못 가게 했다. 여름에는 일부러 실내온도를 높이려고 감방 안에 24시간 전등을 켜놓아 온종일 강렬한 햇볕 아래 있는 느낌이었다.

어머니가 잡혀간 날부터 윤지 양은 외할머니댁에서 살다가 1년 뒤에야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1년 만에풀려났지만 다니던 직장에서는 이미 해고됐고 다시는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수시로 당국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누군가 집에 와서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린 적이 있어요. 파출소에서 검문검색 나왔으니 문을 열라면서 10분도 넘게 두드려댔어요. 우리는 끝까지 문을 열지 않고 버텼고 다음 날 삼촌 집으로 피신해, 한 달 정도 지냈습니다.”

집 주변을 맴도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매일 하교 길에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남자를 봤는데 어머니의 출입 시간과 횟수를 체크하는 것 같았다.

2015년 어머니는 실명으로 법원에 장쩌민 고소장을 제출했다. 파룬궁 탄압을 주도한 장쩌민 전 중국 국가 주석에 대한 반(反) 인류 범죄 고발이 당시 한국을 비롯해 각국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노교소에 수감됐던 사람은 기록이 남아 있어 즉시 잡혀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무사했다.

“중국에서 파룬궁 수련자는 불시 검문에 항상 노출돼 있고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불안과 위협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성장하면서 파룬궁 박해의 실상을 상세히 알게 된 윤지 양은 당시 어머니가 겪었을 고통이 짐작되는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변에서 박해받은 분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중국에 머물 때 어머니의 지인이 공원에서 파룬궁 박해 상황을 알리다가 신고당했다. 당국의 감시를 피해 여러 번 이사했는데도 공안이 찾아와 수련을 포기하지 않으면 감옥에 보낼 거라고 협박했다. 또 다른 지인은 수감됐다 풀려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고윤지 양이 파룬궁 수련서인 <전법륜>을 읽고 있다. | 사진=이유정 기자/에포크타임스

하지만 어머니는 수련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노교소에서 나온 직후부터 다시 수련을 이어갔고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고양의 신념도 더 확고해졌다.

“파룬궁을 수련하면서 어머니는 몸에 있던 잔병이 다 나았고 건강해졌습니다. 파룬궁의 근본 원칙인 진(眞)·선(善)·인(忍)에 따르려고 노력하면서 마음도 안정됐어요.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좋은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더구나 이렇게 좋은 수련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올해로 한국 생활 6년째인 윤지 양은 자유롭게 수련할 수 있는 한국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지난해 홍콩인들이 민주화 시위를 벌였던 것처럼 중국 국민이 모두 들고 일어나 반대했더라면 6.4 톈안먼 사태, 코로나 확산, 홍콩 안전법 등도 모두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중국 공산당의 박해를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 모두 힘을 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