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위기 맞은 中, 대규모 간첩신고 캠페인…“외부세력에 책임 전가”

강우찬
2023년 08월 24일 오전 10:14 업데이트: 2023년 08월 24일 오전 10:57

中 정보기관, 열흘 새 美 CIA 간첩사건 2건 공개
전문가 “경제 위기에 따른 불만여론 돌릴 곳 찾는 것”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 중국판 카톡인 ‘위챗’, 틱톡의 중국 본토 버전인 ‘더우인’, 쇼핑몰을 결합한 SNS ‘샤오홍슈’ 등 중국 소셜미디어에는 간첩신고에 참여하라는 선전물이 넘쳐나고 있다.

이 중에는 “간첩은 당신의 주변에 나타날 수도 있다. 그들은 당신과 취미가 맞는 네티즌일 수도 있고, 친밀한 연인일 수도 있고, 당신에게 배달 아르바이트 기회를 주는 친절한 사람일 수도 있다”며 주변을 감시하라고 부추기는 내용도 있다.

간첩 신고 선전의 대상은 성인뿐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포함된다. 최근 중국 온라인에 확산된 간첩 신고 홍보물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가족을 감시하라고 한 수년 전 만화영화까지 포함됐다.

이 만화영화에선 “간첩은 쉬지 않으므로 주말에도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가족들의 거동을 잘 관찰하고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면 즉각 국가안전(안보)기관에 보고하라”고 가르쳤다. 영상 속 주인공은 공산당 유소년 조직인 ‘소년선봉대’를 상징하는 붉은 스카프를 착용했다.

중국의 초중학생 대상 간첩신고 홍보 만화영화. 붉은 스카프를 맨 소년이 “주말에도 경계를 늦추지 말고 가족을 감시하라”고 교육한다. | 古亭/RFA 화면캡처

실제로 학교에서는 간첩신고 장려를 포함한 안보교육이 시작됐다. 간첩신고 교육을 위한 교내 학생 모임도 결성됐다. 이 학생들 역시 붉은 스카프를 매고 동료 학생들을 상대로 간첩신고 홍보활동을 벌이게 된다. 중국에서는 말 그대로 ‘전국민 간첩신고’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허난성 정저우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자링민(賈靈敏)은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에 “주화입마(走火入魔)”라는 표현을 사용해 당국이 미쳤다고 지적했다. ‘주화입마’란 무협소설에서 등장하는 과장된 표현으로 기(氣) 수련 중 마음에 큰 동요가 일어 심신이 피폐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자링민은 “정부가 초목개병(草木皆兵) 상태에 이른 듯한 느낌”이라며 “정부 스스로도 안정감을 갖지 못하는데 납세자와 시민의 안전을 어떻게 보호하겠나. 안정감이 없어 모든 것을 의심하고 전력을 여기에 쏟을 때 국민에 봉사할 여력이 어디 있나”라고 비판했다.

‘초목개병’은 적을 두려워한 나머지 풀과 나무마저 적군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긴장되고 두려워 모든 것을 의심하는 상황을 가리킬 때 쓰인다.

전직 중고등학교 교사의 한마디에 오늘날 중국 공산당과 정부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혜안이 담겼다. 위험의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데도 공산당과 정부가 앞장서서 공안정국을 조성하는 모양새다. RFA에 따르면 학부모들 사이에서 “학생 세뇌”라는 우려 섞인 반응도 나온다.

중국 정보기관, 미 CIA 관련 간첩사건 2건 공개

‘전국민 간첩 신고’ 운동을 주도하는 중국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국안부)는 지난 21일 중국 SNS 위챗을 통해 “미 중앙정보국(CIA)에 정보를 넘긴 정부 부처의 한 간부(39)를 간첩 혐의로 체포해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 간부는 일본 유학시절 CIA 요원에 포섭됐다고 국안부는 설명했다.

이는 지난달 반간첩법(개정) 시행 후 공개된 두 번째 간첩 사건이다. 앞서 11일 국안부는 CIA와 연계된 간첩 사건을 발표했다. 중국 군수업체 직원(52)이 이탈리아 연수 중 접근한 CIA 요원에게 포섭돼 귀국 후 민감한 군사정보를 제공하다가 적발됐다고 했다.

국안부는 이 직원이 CIA요원으로부터 거액의 보수와 가족의 미국 이민을 약속받았다고 설명했다.

‘미국 이민’은 중국인들에게 이율배반적 이슈다. 겉으로는 중국을 압박하는 미국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지만, 적잖은 중국인들은 자유롭고 선진적인 사회로 이주하고 싶은 속마음을 감춘다. 중국 공산당 간부들이 가장 선호하는 도피처가 미국, 캐나다, 호주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중국 무장경찰이 베이징 거리에서 경비를 서고, 경찰견을 동반한 보안요원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 | 자료사진/로이터/연합

비밀스러운 활동을 벌이던 국안부는 지난달 31일 사상 처음으로 위챗 계정을 개설하며 공개적인 행보를 예고해 주목을 받았다. 그 후 해당 계정을 통해 열흘 새 2건의 간첩 적발 사례를 SNS에 공개했다. 공교롭게도 2건 모두 미 CIA와 관련된 사건이다.

베이징에서 20년간 변호사로 활동하가 캐나다로 이주한 중국 평론가 라이젠핑(頼建平)은 “휘청거리는 중국 경제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려 한다”며 “분노를 미국으로 향하게 만들고 있다”고 에포크타임스에 말했다.

중국 청년실업률은 지난 6월 역대 최고인 21.3%를 기록했고, 중국 당국은 7월 청년실업률 통계 발표를 중단했다. 현지에서는 “실업률 50%”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나온다.

17일에는 중국 부동산 대기업 ‘헝다그룹 ‘이 미국에서 파산 신청을 했다. 미국 법원에 파산 신청을 접수한 것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시간을 벌려는 의도라는 게 블룸버그 통신의 분석이다. 중국 최대 부동산 개발업체 비구이위안도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에 빠졌다.

중국인들도 이러한 소식들을 뉴스와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통해 접하고 있다. 해당 게시물에는 “나중은 더 어렵다”는 우려 섞인 댓글들이 심심찮게 달린다.

라이젠핑은 경제성장을 내세워 독재·철권통치를 정당화해 온 중국 공산당이 경제를 잃게 되면 더는 통치를 정당화할 명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엇에 의지해 국가를 지배할 것인가. 중국 공산당은 지금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며 “국민을 철저히 장악하기 위해 증오를 부추기고 있다. 그 분노를 미국으로 향하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

재미 중국 평론가 왕요우췬(王友群) 역시 에포크타임스 기고문에서 공산당이 ‘전 국민 간첩 신고’ 운동을 벌이는 것은 자신들의 문제를 ‘국내외 적대세력’에 전가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왕요우췬은 “중국 공산당의 100년 역사를 보면 중국 공산당은 모든 문제를 상대에게 돌리는 것이 하나의 법칙이 됐다”며 대만해협, 홍콩 문제, 신장 위구르자치구, 티베트 지역의 문제를 모두 ‘독립분자’가 일으킨 것으로 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공산당은 당면한 국내외 모든 문제를 ‘국내외 적대세력’이라는 프레임에 가두려 하고 간첩은 그 적대세력이 대리인을 침투시켰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간첩으로 몰린 무고한 피해자들이 나올 수 있음을 시사했다.

왕요우췬은 ‘전 국민 간첩 신고’로 인해 국민 간 불신이 심화할 우려가 있으며 이는 국민을 분열시켜 권위주의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는 중국 공산당의 의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공산당은 ‘전 국민이 간첩 잡기에 참여한다’, ‘간첩이 바로 당신 곁에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선동한다. 사람 간 불신을 조장해 서로 경계하게 만들고, 상대에게 불만이 있으면 고발하게 만든다”며 “이럴수록 공산당의 정권 유지가 쉬워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