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진보 의원들, 바이든에 “코로나 백신 특허 일시해제” 압박

한동훈
2021년 04월 23일 오후 3:08 업데이트: 2021년 04월 23일 오후 4:04

미국 의회의 진보성향 의원들이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코로나19 백신 지식재산권과 특허권을 일시적으로 포기하자고 제안했다.

전 세계가 백신 접종에 ‘공정한 접근’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무소속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을 앞세운 일부 미 상·하원의원들은 12개 보건노동단체와 함께 23일(현지시간) 바이든 대통령에게 200만 명이 참여한 탄원서를 전달했다.

탄원서는 미국의 제약업체들이 가지고 있는 백신 관련 특허를 풀어 여러 국가에서 백신을 제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제안은 이미 작년 10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인도에서 내놓은 바 있다(관련문서).

남아공은 작년 10월 코로나 변이 바이러스가 등장했고, 같은 달 인도는 신규 확진자가 하루 5만 명 이상씩 쏟아졌다.

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백신 관련 ‘지적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을 잠정 유예해줄 것을 청원했다.

TRIPs는 각 회원국이 보유한 지적재산 보호의 기준을 규정한 협정이다. 미국은 이 협정을 통해 특히 제약 및 생명공학 분야에서 결정적인 보호를 받아왔다.

따라서 미국 모더나, 화이자, 존슨앤존슨 등이 개발한 코로나19 백신도 이들 제약사의 승인 없이 각국에서 생산하는 일이 금지돼 있다.

현재 중저소득국가를 비롯한 100여 개국에서 남아공과 인도가 제안한 TRIPs의 한시적 유예를 지지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와 전직 국가급 인사들 170여 명 역시 지난주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WTO 특허권 잠정 유예는 코로나19 대유행을 끝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처”라고 주장했다.

전 영국 총리 고든 브라운, 전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 등이 참여한 이 서한에서는 “대부분의 가난한 국가에서는 10명 중 9명이 올해 안에 백신을 맞지 못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서한에서는 “이런 속도라면 많은 국가들이 코로나19 면역체계를 달성하려면 적어도 2024년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라며 백신 관련 지적재산권 보호 유예로 백신 접종을 촉진해 코로나19 대유행 종식과 경제 회복을 앞당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미국 내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권자 60%는 바이든 행정부가 백신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특허 장벽을 없애기를 원한다고 응답했다.

미국의 진보성향 싱크탱크 ‘진보를 위한 데이터'(Data for Progress)와 ‘진보주의 인터내셔널’이 공동 실시한 이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원 72%, 공화당원 50%가 이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샌더스 의원과 엘리자베스 워런, 태미 볼드윈 등 진보성향의 민주당 상원의원 9명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제약 회사 이익보다 사람들을 우선시하라”고 촉구했다.

서한은 “세계 공중 보건 관점에서 봤을 때, 특허권 잠정 포기는 전 세계의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에 대한 충분하고 공평한 접근을 보장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지적재산권 보유한 제약업체들 난색

하지만, 코로나19 백신을 보유한 선진국과 제약회사들은 특허권 잠정 중단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일부 전문가들 역시 특허권 중단은 더 빠르고 공정한 백신 출시를 위한 일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

기술 싱크탱크인 ‘정보통신혁신재단'(ITIF)의 스티븐 에젤 부대표는 “핵심은 지적재산권이 아니라 백신과 치료제의 대량 생산”이라고 말했다.

에젤 부대표는 에포크타임스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코로나19 백신의 지적재산권 일시적 포기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며 바이든 행정부가 이런 조치를 내려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한 “지적재산권 때문에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 생산이 지체됐다는 신뢰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전했다.

세계 최대의 백신 제조업체인 ‘인도혈청연구소’의 최고 경영자인 아다르 푸나왈라는 역시 같은 의견을 나타냈다.

그는 지난 2월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특허권 때문에 백신 제조가 늦어진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제조업체는 충분하다. 다만 백신 특성상 생산 규모를 키우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그는 백신의 제조와 유통을 늦추는 가장 큰 요인은 국가마다 상이한 규제라며 “이미 진행된 구매 건에 대해서도 승인 절차가 완료되지 않아 7천만 회분을 선적하지 못하고 있다. 유통기한은 6개월이다”라고 했다.

미 상공회의소에서도 특허권 잠정 유예 제안에 대해 “잘못된 판단이다. 의견 대립만 일으킨다”면서 “백신과 치료제의 빠른 보급을 위해 규제와 무역장벽을 철폐해야 한다”고 지난달 성명에서 밝혔다.

한편, 바이든 행정부는 백신 관련 특허권 잠정 유예 제안에 대해 “지적재산권 보호를 일시적으로 해제하는 조치를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