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예술가, 페이스 페인팅으로 ‘안면인식 기술’에 저항…“프라이버시 침해”

윤건우
2020년 03월 10일 오후 2:46 업데이트: 2020년 03월 10일 오후 2:49

‘안면인식기술’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 영국 예술가들이 시스템에 잡히지 않게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매달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AP통신이 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거리 시위를 나가기 위해 조지나 롤렌드와 안나 하트가 화장을 시작했다. 립스틱과 아이라이너 대신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얼굴을 덮다시피 했다.

롤렌드는 얼굴을 가로질러 길고 좁은 파란색 삼각형과 얇은 흰색 직사각형을 그렸다. 하트는 빨강 주황 하얀색 도형을 그려 넣었다. 색종이를 오려 붙인 모양이다.

이들은 안면인식기술 발달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하기 위해 작년에 설립한 예술가 모임 데즐 클럽(Dazzle Club) 창립자 네 명에 속한다.

데즐 클럽은 매월 런던 각지에서 침묵 걷기 행사를 하고 있다. 생체인증 기능 중 하나인 안면인식 기술이 ‘공격적인 감시’에 이용되고, 수집된 데이터베이스가 올바르게 사용되는지에 대한 규제가 부족하며, 공공장소에서 무작위로 수집될 수 있어 프라이버시를 침해한다는 우려를 표출한 것이다.

얼굴에 그림을 그린 예술가 조지나 롤렌드(왼쪽)와 안나 하트가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20. 2. 17. | AP=연합뉴스

최근 런던 동부 쇼디치에서 열린 행사에 19명 정도가 참석했다.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참가자는 ‘CV 데즐’ 스타일로 얼굴에 페인팅해야 한다.

예술가 애덤 하비가 개발한 CV 데즐은 얼굴 이미지를 수학적 공식에 대입해 알고리즘으로 분석할 수 있는 안면검사 시스템에 대항하기 위한 위장술이다. ‘CV’는 컴퓨터 비전(Computer Vision)의 약어이고, ‘데즐’은 이들의 클럽 이름을 딴 것이다.

CV 데즐은 큐비스트(Cubist)에서 영감을 받았다. 큐비스트는 루빅스 큐브 등 트위스티 퍼즐을 맞출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말하며 큐버라고도 부른다.

안면인식기술은 얼굴 전체보다 코와 입, 눈썹, 턱 등 얼굴 골격이 변하는 각 부의 50여 곳을 분석해 인식한다. 얼굴에 도형을 그려 넣으면 컴퓨터의 알고리즘에 의한 분석을 방해한다는 게 CV 데즐의 아이디어다.

런던 쇼핑센터 밖에 있는 이동식 경찰 안면인식 시설. 2020. 2. 11. | AP=연합뉴스

롤렌드는 얼굴에 어느 색이든지 도형을 그려 넣으면 안면인식기가 감별하기 어렵다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한 색과 진한 색을 섞어 쓰는 것”이라고 키포인트를 던져줬다. 흑백처럼 대조적인 색깔로 얼굴의 밝은 곳과 그림자를 교란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술이 광범위하게 사용돼, 영국은 해군 함정을 위장하고 배의 실제 방향이나 위치에 대해 상대방을 교란했다.

롤렌드는 디자인이 효력이 있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스마트폰 카메라에 장착된 안면인식 기능으로 확인하고는 “(스마트폰이) 나를 감지하지 못한다”며 그려 넣은 사각형이 성공적이었음을 알렸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테크 쇼에서 사람들이 전시물을 보고 있다. 2020. 1. 8. | AP=연합뉴스

중국은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이용한 안면인식기술에서 세계의 선두 국가로 자리 잡았다. 2018년 중국내 2억 개의 CCTV를 설치한 데 이어 올해 4억 개로 늘릴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신장 지역 위구르인들의 감시 수단으로 CCTV가 광범위하게 이용되면서 디지털 독재 국가로 낙인 받기도 했다. 이 기술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민간기업과 법률 집행, 국가 안보에 활용돼 시험과 운용이 확산하고 있다.

영국은 오랫동안 보안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공공장소에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를 설치했다. 당국과 민간 기업이 성능 좋은 CCTV를 늘리려고 하지만 사생활 침해 등의 우려를 제기하는 운동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반대운동이 영국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달 모스크바에서도 안면인식 카메라 사용에 대항하며 페이스 페인팅 시위를 벌인 혐의로 러시아 인권 운동가들이 체포됐다. 홍콩 시위대는 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마스크를 사용해 왔다. 세르비아와 우간다의 인권단체 또한 중국 정부가 제공한 카메라 설치 계획을 반대했다.

적외선 빛을 반사해서 알고리즘 판독을 방해하는 선글라스를 대응책으로 내놓은 연구자도 있었다.

롤렌드와 하트 외 4명의 예술가는, 지난해 8월 런던 교통의 중심지 킹스 크로스 지역에서 대중의 동의 없이 실시간 안면인식 카메라 실험을 진행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데즐 클럽을 창립했다.

그리고 올해 3월 초 경찰이 붐비는 쇼핑 거리에서 안면인식 카메라의 도움으로 폭행죄로 수배된 한 여성을 체포한 사건이 있었다. 런던 경찰은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신기술이 필요하며 무고한 사람의 이미지는 즉시 삭제된다고 밝혔다.

안면인식기술에 대한 영국 국민의 태도는 엇갈리고 있다. 작년 한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이 안면인식 기술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함을 인정하면서도 거의 절반은 거부 반응을 보였다.

데즐 클럽의 창립자들은 지금도 작동 중인 곳곳의 CCTV에 대한 수행 목적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서 생체인증을 수집하는 것이 대중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고 우려했다.

하트는 “공공장소에서 이러한 문제를 각성시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며, 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