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해병 ‘2차 세계 대전’ 증언… ‘일본, 국민당에 굴복했다’

2015년 06월 10일 오후 3:52 업데이트: 2019년 11월 9일 오후 3:41

올해 5월 8일과 9일은 세계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이 독일의 나치군을 이기고 승리한 날을 기념하는 70번째 해다. 미국, 소련, 영국 및 여러 국가의 군대가 유럽을 독일 제3제국의 손에서 해방시키는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는 중국이 일본 침략군들에 맞서 저항한 날을 기리는 8번째 해를 맞이했다.

중국의 지도자인 시진핑이 모스코바에서 열린 5월 9일 행사에 참여했다. 올해는 일본군에 맞서 생사의 기로를 오가는 전투를 벌인 국민당이 일으킨 또 하나 중국의 희생을 기리는 때이기도 하다. 중화민국을 다스렸던 국민당은 일본을 물리치는 데 있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국민당의 요청으로 미국은 일본이 중국 국민당에 항복하는 과정을 감독했다.

지난 2014년 9월 ‘미중 해병’이 사우스 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중국 해병(China Marines)’은 ‘일본이 중국에 항복하는 과정을 감독한 미국군’을 지칭하는 말로 세계 2차 대전 전후로 중국에 주둔했다.

중국 해병

이 역사적 사건은 1945년 10월 6일,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천 명의 중국 시민이 중국 톈진 거리에 모였다. 미국 해병들은 창문에 매달려 이를 바라보았다. 길 위에 탁자가 설치되었고 종이 한 장이 위에 놓였다. 그 뒷편 오른쪽에는 미 해병 의장대가 사열해 있고 왼쪽에는 일본 군 간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미국의 로키 사령관은 이 종이에 서명했고, 워튼 사령관이 그 뒤에 서 있었다. 그 후에는 일본의 우치다 사령관이 자신의 이름을 적고 미 해병이 대변하던 전 장제스 정권에 대한 일본의 항복을 확인했다. 이어 중국 내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항복이 잇따라 이어졌다.

칭다오에서는 일본군이 미 해병 6사단의 셰퍼드 사령관에게 항복했으며, 베이징에서는 로키 사령관에게 항복했다. 톈진에서 열린 의식을 확인한 해병 중에는 윌리엄 후크 상병도 있었다. 그는 일본의 항복을 증명하기 위해 처음 중국으로 보내진 17명의 해병 중 한 명이었다.

후크 상병은 자신의 저서인 ‘중국 북부를 해방시키다 – 1945(Liberating North China – 1945)’를 통해 세계 2차 대전에서의 경험과 미국 해병의 역할에 대해 상세히 묘사했다.

묵직한 목소리의 후크 상병은 푸른 재킷을 입고 있었고 그의 밝은 파란 빛 눈과 잘 어울렸다. 그의 머리는 희끗희끗했지만, 마음만은 폭정으로부터 자유 세계를 지켜냈던 비극의 시간과 영웅으로 가득했던 젊은 시절 그 순간에 남아있었다.

뒤바뀐 역사

중국 내 일본의 항복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를 통한 일본의 첫 항복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2014년 출간된 후크의 저서에는 중국 당국이 정치적 이득을 위해 숨기고 있는 명확한 역사가 담겨있다. 승전 기념일마저도 중국 내 반(反)일본 세력을 키워내기 위한 새로운 공휴일 중 하나일 뿐이다.

1939년 9월 독일 국방군이 폴란드를 상대로 맹공격을 펼치던 시기, 중국은 이미 2년 이상 일본과 전쟁 중이었다. 상하이와 우한에서 있었던 전투는 규모 면에서 스탈린그라드나 노르망디 작전과 비견될만했으며, 잔인했던 난징 대학살은 전쟁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만들었다.

8년 전쟁은 적어도 10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의 목숨을 앗아갔고, 1억에 가까운 난민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중국 내 문헌 어디에도 거론되지 않았다. 공산당은 세계 2차 대전 역사를 뒤바꾸는 데 좋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중국을 지켜낸 자부심이 이제는 대만 정부인 국민당의 어깨에 걸려 있을 뿐 아니라, 현 권력에 올라서는 데 일본의 침략이 한몫을 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올해 9월 3일은 공산당의 69번째 승전 기념일’이라고 발표하며 ‘69년 전 오늘, 일본과 연합 국가가 우리의 승리 앞에 무릎 꿇었다. 중국인으로서 당신은 그 역사를 마음에 지녀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민일보는 중국 공산당이 일본을 물리치는 중심에 있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공산당 승리의 이유가 ‘단순히 인민군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는 다르다. 최근 해제된 소련 정보부 기밀문서 문서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인 마오쩌둥이 1949년 2월 3일 있었던 일에 관해 설명한 자료가 있었다. 내용인즉슨 ‘공산당이 국민당을 상대로 하는 헛된 싸움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그는 ‘전쟁 시작부터 공산당이 군사력에 상당한 손실을 겪었다’고 밝혔다. 마오쩌둥은 “우리에게는 단 3만 명의 군사만이 남았으며 왕밍(공산당 지도자)은 이 군사력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공산당의 3만 군사가 중국 인민 해방군이 양분으로 자라난 뼈대였으며 1949년에 이르러 100여 배 증가한 300만 명 규모로 확대되면서 국민당을 누르고 일본의 통치권을 얻었다고 덧붙였다.

3만 군사는 일본과의 전쟁 기간 동안 그 수가 불어났으며, 이후 국민당이 일본과 싸우는 틈을 타 그 세력을 확대했다. 1996년 발표된 기사는 ‘마오의 정책은 일본이 국민당을 파괴할 수 있도록 허가함으로써 공산당을 강화시키는 것이었으며, 그의 주치의는 마오가 내란에서 공산당이 이길 수 있었던 공로를 일본에 돌렸다고 전했다’며 ‘1961년 1월 일본의 카쿠에이 타나카 총리가 중국 침략에 대해 사과하려 하자, 마오가 그에게 일본의 침략이 공산당 승리를 가능케 했고 이로 인해 공산당과 일본 지도자들 사이의 방문이 가능 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고 밝혔다.

2014년 9월 더 디플로마트(The Diplomat)지의 재커리 켁 기자는 기사를 통해 “두 번째 중일전쟁의 초반 전투는 그 규모가 가장 컸으며, 국민당이 홀로 이들에 맞서 싸웠다.… 전쟁 전체가 이러한 흐름으로 흘러갔다”고 전했다. 그는 1937년에서 1945년 사이 일본과 국민당 모두가 전투를 위해 적어도 한 연대를 보냈던 전투가 23건이나 있었다는 내용을 지적했다. 그는 또 “공산당은 그 어떤 전투에서도 주요 전력을 보내지 않았다. 공산당은 고작 1000~1500명의 군인을 보냈을 뿐이다”고 증언했다. 

켁 기자는 중국과 일본의 1117번의 주요 교전 중 공산당이 참여하여 싸웠던 것은 단 한번에 불가하다고 덧붙였다. 양국 사이의 4만 번에 달하는 소규모 접전에서는 약 0.5%밖에 되지 않는 200번의 전투에만 참여했다.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공산당 한 역할은 1940년 스탈린에게 비밀 문서를 보내는 것 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 문서에는 1939년 여름까지 100만 명이 넘는 중국인이 일본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들 중 단 3%만 공산당 소속이었다.

1945년 10월 중국 톈진(天津)에서 일본군 장교가 항복문서에 사인을 하고 있다. | U.S. MARINE CORPS

마오쩌둥 이전의 중국

중국 내에서 일본의 항복을 감독하는 미국군의 존재는 또 하나의 잃어버린 역사의 조각이다. 이들의 활동은 중국 정부의 환영과 초대를 받았지만, 공산당은 이를 비난하기 바빴다. 바로 여기에 또 하나의 역사가 있다. 후크는 “많은 사람이 만약 워싱턴이 중국 북부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급하지 않았다면 공산당을 제압해 러시아가 만주와 한국을 통과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이를 통해 한국과 베트남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미국 해병은 중국 해방을 위해 준비했고 중일전쟁의 초기 동안 장제스와 함께 가깝게 일했다. 1935년에는 워튼 사령관이 중국으로 건너가 미국 해병을 위해 일본에서 정보를 모아올 요원들을 모집하는 비밀 임무를 맡았다. 이듬해 끝난 이 임무는 미국이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기 훨씬 이전에 진행됐으며, 장제스의 도움과 그의 비밀경찰을 통해 이루어졌다. 미국 해병은 장제스를 대변인자격으로 일본군 항복 관리에 배치되었고 그 이후에는 베이징을 장악하기 위해 이동했다.

워튼 사령관의 자신의 노트에 ‘중국 공산당이 미국 군대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고 썼다. 중국에 도착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워튼은 나찌 외교 임무 중심지가 된 베이징으로 이동했고, 독일 총영사였던 앤드류 본 델윅에게 자신과 부하들이 현재 전쟁 포로로 잡혀 있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저우언라이가 접근했다. 저우는 ‘만약 미국군이 여기로 오려 한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라도 미국군이 도시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것이다’고 밝혔다.하지만 워튼의 답변은 강력하고 직접적이었다.그는 저우언라이에게 미군이 이미 베이징에 들어와 있으며 해병 1사단이 곧 (베이징에) 도착할 것이고 그들은 세상에서 최고의 팀으로 막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이라고 전했다.

이 역사적인 내용 일부가 최근 소련 정보부 문서 기밀 해제로 세상에 공개됐다. 1949년 2월 1일 작성된 한 소련의 보고서는 소련 정치가였던 아나스타스 미코얀과 저우언라이의 만남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저우는 미코얀에게 중국 공산당과 미국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중국에 근거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국민당과 충돌에서 [국민당] 작전에 참여한 다수의 미국인들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저우는 중국 공산당이 일본 항복 무렵 중국에서 살해하거나 사로잡은 미국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공산당은 다른 세력이 아닌 미국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미국인들을 더욱 강하게 잡아들였다”며 “미국인들은 공산당 정권을 약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공산당은 미국을 고립시켜야만 한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후크는 “잊혀져 가고 있는 중국 내 미국의 역할에 대한 역사를 담아내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들이 어떤 일이 일어났고, 누가 그 사건들을 목격한 증거를 남겼는지 기억하길 바란다”며 “자신에게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릴 책임이 있다”고 전했다.

후크는 “나는 공산당이 하는 말과는 달리 역사를 있었던 그대로 다시 되살려냈다. 현재 공산당들 조차 여기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말할 것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