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연방대법원, 낙태 합법화 판결 폐기 방침”…초안 유출

남창희
2022년 05월 4일 오전 11:03 업데이트: 2022년 05월 4일 오전 11:14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과거 판례를 폐기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2일(현지시각) 연방대법원이 1973년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을 무효화하기로 했다며 98쪽짜리 다수의견 판결문 초안을 공개했다.

소송을 제기한 당사자와 검사의 이름에서 유래된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의 낙태권을 대법원이 7대 2로 인정한 사건이다. 판결에서는 임신 24주(6개월)까지 낙태를 합법화했고, 이후 미국 연방과 모든 주에서는 낙태를 금지하던 기존 법률들이 폐지됐다. 이후 50년간 미국 사회의 모습을 크게 바꿔놓은 중요 판례로 평가된다.

새뮤얼 앨리토 대법관이 집필한 초안은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해 “처음부터 터무니없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또한 ‘가족계획연맹(낙태 옹호단체) 대 케이시’ 판결(1992)도 폐기해야 한다고 했다. 두 판결 모두 낙태 합법화를 결정지은 판례다.

다수의견 초안은 또한 “두 판례는 낙태 문제 해결의 국가적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논쟁을 가열시키고 분열을 심화했다”며 “이제 헌법에 충실해 낙태 문제를 국민이 선출한 대표(의회)에게 돌려보내야 한다”고 밝혔다. 낙태가 헌법에서 언급한 사안이 아니므로 연방대법원이 심사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새뮤얼 앨리토 미 연방 대법관. 2021.4.23 | Erin Schaff/Pool via Reuters/연합

연방대법원은 이 초안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줬지만, 초안 유출은 배신행위라며 심각한 사안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초안은 아직 결정된 사안이 아니며, 사건 쟁점에 대한 대법관들의 최종 입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명한 헌법·형법학자이자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 반대 입장을 밝힌 앨런 더쇼비츠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폭스뉴스에 “이전에도 대법원 내부 의견서가 언론에 유출된 사례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이번 초안 유출 사건에 대해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더쇼비츠 교수는 “추측일 뿐이지만”이라면서 진보성향 대법관이 다른 대법관들에게 입장을 바꾸도록 압력을 넣거나, 오는 6월로 퇴임하는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의 은퇴에 맞춰 빠르게 새 대법원을 구성하라고 조 바이든 행정부와 의회에 신호를 보낸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지난 수년간 낙태 금지법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졌다. 여러 주(州) 의회가 약 600건의 생명존중 법안을 도입했다. 위협받는 태아의 생명을 더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최소 13개 주에서 60건 이상 법안이 발의됐다.

플로리다주 등 일부 지역에서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우회해 입법을 진행하고 있지만, 미시시피주는 이 판결에 정면 도전하고 있다. <폴리티코>가 초안 입수처로 밝힌 ‘미시시피 낙태 금지법’ 재판이 진행 중인 바로 그 미시시피다.

미시시피주 린 피치 검찰총장(법무장관 겸직)은 지난해 7월 연방대법원에 “낙태가 헌법에서 보장한 권리라는 판결은 법조문, 구조, 역사, 전통 등에서 근거가 없다”는 소견서를 제출하며 ‘로 대(對) 웨이드’ 판결 폐기를 요청했다. 그는 “이 판결은 터무니없이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미시시피 낙태 금지법의 정식 명칭은 ‘재태기간법’이다. 낙태 금지 기준을 임신 20주에서 15주로 앞당겼다. 의학적 응급 상황이나 심각한 태아 기형을 제외한 모든 낙태를 금지했다. 낙태를 시술한 의사도 최대 징역 10년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연방대법원은 지난해 12월 이 법에 대해 구두변론을 열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을 포함해 보수성향 대법관 6명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진보성향 대법관 3명은 판결 유지 찬성을 분명히 했다.

이 구두변론은 지난 2020년 10월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 임명 후 6대 3의 판결이 나온 첫 사례다. 일부 관측통들은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진보 대립이 치열할 때마다 진보 성향 대법관을 편드는 모습을 보여왔다며 대법원 구도를 보수 5, 진보 4로 평가하기도 한다.

<폴리티코>는 이번에 유출된 초안에서 보수 성향 대법관 5명이 다수의견(판결 폐기)에 참여하고,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은 반대했다고 전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의 의견은 초안에 기재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 이 기사는 매튜 베이덤 기자가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