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 ‘마지막 황제’ 푸이의 손목시계 82억원에 경매…역대 최고가

최창근
2023년 05월 25일 오후 2:52 업데이트: 2023년 05월 27일 오전 10:54

홍콩 경매시장에서 한정품 시계 하나가 4890만 홍콩달러(약 82억원)에 거래됐다. 예상 금액 300만 US달러(약 40억원)의 2배 가까운 금액이다.

5월 23일, 프랑스 AFP통신 등 외신들은 “‘파텍 필립(Patek Philippe)’ 브랜드 손목시계가 홍콩에서 진행된 필립스 아시아 지부 경매에서 치열한 입찰 경쟁 끝에 최종 510만 달러(약 67억원)에 낙찰됐다. 수수료 포함 4890만 홍콩달러(약 82억원)에 거래됐다.”고 보도했다.

청 마지막 황제 푸이의 시계. | SCMP.

기록적인 고가로 낙찰된 시계의 원주인은 청(淸) ‘마지막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 溥儀‧애신각라 부의)이다. 해당 시계는 ‘파텍필립 레퍼런스 96 콴티엠 룬(Ref. 96 Quantieme Lune)’으로 전 세계에 같은 모델이 8점 남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계는 직경 1.2인치 백금 원판에 시침과 분침은 핑크골드로 되어 있다. 왕관과 같은 모양의 문페이즈가 특징이다. 문페이즈는 달의 현재 모습을 알려주는 그림이다. 1851년 스위스에서 설립된 파텍필립은 최고급 시계를 극히 소량 제작한다. 오데마 피게, 바쉐론 콘스탄틴과 더불어 ‘세계 3대 명품 시계’ 제조사로 꼽힌다.

경매를 주관한 필립스 옥션은 “3년 동안 이 시계의 역사를 조사하고 출처를 확인했다. 동일한 모델 중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고 강조했다.  토마스 페라치 필립스 옥션 시계 부문 대표는 “한때 황제가 소유했던 손목시계 중 최고의 결과이다.”라고 전했다. 역대 ‘마지막 황제’들이 소유했던 명품 브랜드 시계는 경매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됐다.  2017년 경매에 나온 에티오피아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의 파텍필립 시계는 290만 달러(약 38억원)에 팔렸다. 같은 해 베트남 마지막 황제 바오다이가 소장했던 롤렉스 시계는 500만 달러(약 66억원)에 팔렸다.

선통제 푸이 조카이자 양자 아이신기오로 위옌(愛新覺羅 毓嵒)이 쓴 ‘푸이와 함께한 20년: 마지막 황자의 회고록(我隨溥儀二十年∶末代皇子回憶錄)’에 따르면 시계는 선통제가 개인적으로 소장한 물품 중 하나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돼 시베리아로 끌려가 머물렀던 수용소를 떠나면서 시계와 펜, 예술품 등을 당시 자신의 러시아인 통역사 게오르기 페르먀코프(Georgy Permyakov)에게 선물로 줬다. 그의 가족은 몇 년 후 푸이의 소장품을 익명의 유럽 수집가에게 거의 헐값에 팔았다. 페르먀코프는 지난 2001년 언론인 러셀 워킹과의 인터뷰에서 “푸이가 소련에서의 마지막 날 내게 시계를 줬다.”며 “그는 자신에게 매우 특별한 사람들에게 가끔 선물을 줬다.”고 회상했다. 러셀 워킹은 “고령의 통역사가 시계를 서랍에서 꺼냈을 때 그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고 AFP에 전했다.

1908년 3세의 나이로 청 12대 황제로 즉위하는 푸이. | 영화 ‘마지막 황제’ 화면 갈무리.

필립스 아시아는 푸이가 이 시계를 수용소로 들였음을 보여주는 증빙서류가 있다고 밝히면서도 시계의 출처를 확인하고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전문가, 역사가, 언론인, 과학자와 함께 3년간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중국 마지막 봉건왕조 청(淸)의 12대 천자로 즉위한 선통제(宣統帝)의 삶은 굴곡졌다. 1906년 순친왕(醇親王) 아이신기오로 자이펑(愛新覺羅 載灃)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11대 황제 광서제(光緒帝)가 서거하자 실권자였던 자희태후(慈禧太后‧서태후)는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다음 황제로 지명했고, 3살에 즉위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결과 1912년 1월 1일 청을 대신한 중화민국(中華民國)이 건국됐다. 1912년 2월 선통제는 ‘퇴위 조서’를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천자 자리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중화민국과의 협정으로 외국 황제의 예우를 받으며 1924년까지 자금성 안에서 ‘청나라 소조정’ 황제로 지냈다.

1928년 국민혁명군이 북벌(北伐)을 완수하여 베이징을 점령했다. 군벌 쑨뎬잉(孫殿英)은 청 황릉을 도굴했고 선대 황제의 시신을 훼손하기도 했다. 선통제는 격노했고 이에 1931년부터 당시 일본 조계지 톈진(天津)으로 거처를 옮겼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켰다. 청 왕조 발상지인 만주(오늘날 동북 3성) 일대를 점령했고, 이듬해인 1932년 만주국(滿洲國)을 수립했다.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일본제국은 푸이를 집정(執政)으로 추대하였고 다시 만주국 황제로 옹립했다. 청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는 강덕(康德)이라는 연호로 1934년 즉위하여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재위했다.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 황제 시절 푸이. | China Times.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됐다. 일본으로 도주하려던 푸이는 소련군에 체포됐다. 전쟁 포로가 된 푸이는 극동 하바로프스크 감옥에 구금됐다. 그러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했고 이듬해 푸이는 중국으로 송환됐다.

‘한간(漢奸‧민족반역자)’로 낙인찍힌 푸이는 랴오닝성 푸순(撫順戦犯管理所)에 수감됐다. 이후 1959년 특사로 풀려날 때까지 9년간 이른바 ‘인간개조’를 당했다.

청 마지막 황제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으로 바뀐 푸이는 노년을 중국과학원 식물연구소 산하 베이징 식물원에서 일했다. 1964년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 자료 전문 위원이 됐고, 인민 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위원으로도 피선됐다. 그러다 1967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베이징 식물원에서 일하던 노년의 푸이. | China Times.

일생 동안 청-중화민국-만주국-중화인민공화국으로 격변하는 세월 속에서 2번 황제가 되고 결국은 공산당원으로 삶을 마감한 푸이의 삶은 유일한 자서전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 From Emperor to Citizen)’, 푸이의 영국인 교사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이 쓴 ‘자금성의 황혼(紫禁城的黄昏‧Twilight in the Forbidden City)’ 등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특히 이탈리아 영화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가 1987년 연출한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는 작품성‧대중성 면에서 호평받으며 관객들에게 푸이의 삶을 알렸다.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감독상·각색상·촬영상·편집상·음악상·음향효과상·미술상·의상상 등 총 9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한편 이번 경매에는 파텍 필립 손목시계 외에 푸이가 소유했던 다양한 물건도 경매에 올랐다. 푸이가 역시 게오르기 페르미야코프에게 선물했던 종이부채는 예상 낙찰가의 6배에 달하는 가격인 7만 7846 달러, 한화 약 1억 원에, 푸이가 ‘논어’를 적은 공책은 예상 낙찰가의 다섯 배에 달하는 12만1634 달러, 한화 약 1억6천만 원에 낙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