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주한 중국대사 列傳②] 中 한반도 전문가 1세대, 장팅옌 초대 대사

최창근
2021년 08월 6일 오후 4:01 업데이트: 2024년 01월 21일 오전 2:04

반려자 탄징은 대학 동기동창 겸 외교부 입부 동기
6·25전쟁 관련 발언 파장도…현 한중우호협회 부회장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후 초대 ‘주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 특명전권대사’로 서울에 부임한 것은 장팅옌(張庭延)이다. 중국의 1세대 한반도 전문 외교관으로 꼽힌다.

장팅옌은 1936년 베이징(北京)에서 출생했다. 1954년 베이징대학 동방어문학부에 입학하여 조선어(한국어) 전공으로 1958년 졸업했다. 졸업 후 국무원 외교부에 입부하여 평생 대 조선(북한) 업무에 종사했다.

1958~63년 외교부 아주사(亞洲司·아주국) 조선처(북한담당과)에 몸담았고, 1963~69년 주북한대사관에서 첫 해외 근무를 했다. 이후 1969~76년 외교부 본부 근무 후 다시 1976~81년 주북한대사관 3등서기관·2등서기관으로 일했다. 1981~86년 외교부 북한 담당 데스크인 아주사 조선처 부처장·처장·참찬(參贊·참사관)을 역임했고, 1990년 아주사 부사장(副司長·부국장)으로 승진하여 1992년까지 근무했다.

1983년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발생, 6·25전쟁 휴전 후 한-중 첫 공식 교섭

장팅옌이 외교부 한반도(남·북한) 담당자로 일할 때, 동서 냉전 체제 하에서 적대 관계를 지속해 오던 한-중 관계에 중대 변화가 일었다. 1983년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이 대표적이다.

어린이날이던 1983년 5월 5일 오후 2시, 통칭 ‘중국민항(中國民航·CAAC)’인 중국민용항공국 소속 영국제 단거리 제트기 호커 시들리 트라이덴트(Hawker Siddeley Trident) 2E 여객기가 강원도 춘천시 주한미군 헬기 비행장 캠프 페이지(Camp Page·2005년 한국으로 반환)에 불시착했다. 승객 96명이 탑승한 중국민항기는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둥타(東塔)공항에서 이륙하여 상하이(上海) 훙차오(虹橋)공항에 착륙 예정이었다. 비행 중 줘장런(卓章仁) 등 6인의 납치범은 기내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한국행을 요구했고, 춘천 미군기지에 불시착했다. 줘장런 등 납치범들은 주한국 중화민국(대만) 대사 면담, 중화민국으로의 정치적 망명 허용을 요구했다.

자국 민항기 납치 사건 보고 후, 중국 정부는 구무(谷牧) 국무원 부총리를 책임자로 하는 긴급 대책반을 가동했다. 구무는 선투(沈圖) 국무원 민용항공국장에게 “도둑맞은 연 찾아오는 기분으로 온갖 지혜를 짜내서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선투는 “현장에 가는 것이 상책이다. 우리가 직접 한국과 담판에 나서야 한다. 한국도 그러기를 바라는 눈치다. 한국 측에 우리 의견을 전달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보고했다. 선투는 한국 교통부 항공국으로 팩스 발송을 지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금일 오후 폭도들에게 납치당한 중국민항 항공기가 귀국 춘천공항에 착륙했다. 원만한 처리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서울에 협상단을 파견하겠다. 협조를 청한다. 중국민용항공국 국장 선투.”

중국 정부가 한국 정부에 전문(電文)을 보낸 것은 1953년 6·25전쟁 휴전 협정 체결 이후 최초였다. 한국 정부는 수락 의사를 밝혔다. 사건 발생 3일째인 5월 7일 선투를 단장으로 하는 33명의 교섭단이 베이징을 출발하여 한국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대표단원 공식 신분은 ‘중국 국무원 민용항공국 직원’이었으나 외교부를 비롯하여 공안부 등 당(黨)·정(政) 정보기관 간부가 대거 포함됐다. 외교부 아주사 한반도 데스크였던 장팅옌도 일원이었다.

2011년 5월 23일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가 파견한 다섯 번째 한·중 청년우호사절단이 방한했다. 신화통신은 대표단이 한국 측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전했다. 오른쪽 세 번째가 장팅옌 초대 주한 중국대사 | 신화통신/연합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공식 국호 명기한 최초 사건

한국 정부는 공로명(훗날 제25대 외무부 장관 역임) 외무부 제1차관보를 책임자로 한 교섭단을 꾸렸다. 3일에 걸친 협상 끝에 납치범들의 대만으로의 즉각 망명을 허용하지 않고 한국 국내법을 적용해 처벌하는 쪽으로 타결됐다. 납치범들은 우리 법정에서 재판을 거쳐 징역형이 확정됐지만 1년 후 형 집행정지로 석방돼 대만으로 망명했다. 항공기 승무원·승객과 기체는 국제법에 따라 중국으로 송환·반환하기로 결정했다.

합의문서에는 공로명 ‘대한민국’ 외무부 제1차관보, 선투 ‘중화인민공화국’ 민용항공국 국장이 양국을 대표해 공식 서명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양국의 공식 국호를 사용한 외교 교섭이 첫 성사된 것이다.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Nordpolitik)’의 대미(大尾)로 추진된 한-중 수교 협상 과정에도 장팅옌은 실무 책임자로 참여했다. 베이징대학 동방어문학부 동기동창이자 외교부 입사동기인 아내 탄징(譚靜) 아주사 조선처 1등 서기관도 함께였다. 부부가 한-중 수교과정에 동참한 것이다. 한-중 수교회담 분위기를 상세하게 남편 장팅옌에게 전해줬다.

한-중 수교 협상 시, 관건 문제는 북한과 대만 문제였다. 중국과 북한은 혈맹(血盟)관계였다. 한국과 대만관계도 다를 바 없었다. 중국은 우방인 북한을 배려, 한-중 수교 사실을 선 통보했다. 한-중 수교 협정 ‘가(假)서명’을 앞둔 7월 15일, 첸치천(錢其琛)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평안남도 연풍호수의 별장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그는 “개혁·개방의 필요에 따라 중국은 이미 한국과의 수교를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김일성은 “중국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며 “조선은 여전히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어려움이 생기면 스스로 극복할 것”이라고 답했다. 장팅옌은 수행 통역관으로 배석했다. 훗날 장팅옌은 “김일성 주석과의 회견에 수차례 참석했지만 이렇게 시간이 짧고, 이렇게 말을 적게 하는 것은 처음 봤다”고 회고했다.

장팅옌 초대 주한 중국 대사. 현재 한중우호협회 부회장이다. | 웨이보

北에 한-중 수교 사실 통보… 김일성 표정 굳어

7월 29일, 노창희 한국 외무부 차관이 베이징을 방문, 쉬둔신(徐敦信) 중국 외교부 부부장(차관)과 면담했다. 한-중 수교 성명 문안과 발표 날짜 확정 후, 노태우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에 대해서도 합의했다. 양국 외교 차관은 ‘수교 공동 성명 합의문’에 가서명했다. 이후 부속 회담을 거쳐 1992년 8월 24일,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 첸치천 외교부 부장이 베이징에서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외교관계 수립에 대한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은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됐다.

초대 주한 대사로 장팅옌이 내정됐다. 9월 12일, 중국민항 편으로 김포공항에 입국한 장팅옌은 “한-중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 하겠다”며 “오랫동안 기다려온 한국 대사직을 맡게돼 한없이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장팅옌은 차기 북한 주재 대사 하마평에 오르다 평양이 아닌 서울에 오게 됐다.

10월 9일, 장팅옌은 대사 부임 후 첫 공식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회견에서 한-중 수교 협상 중 중공군의 6·25전쟁 참전 문제 관련 발언이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수교과정에서 한국전쟁(6·25전쟁)과 관련해 중국이 한국 측에 ‘유감’을 표시했다는 보도는 근거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국 기자들이 외무부 발표를 근거로 질문을 계속하자 장팅옌은 “유감을 표시할 필요도 없다”고 일축했고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 갈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문제”라고 선을 그었다.

6·25전쟁 관련 중국의 ‘유감’ 표명 없다… 한국 외무장관 주장 전면 반박 파문

이는 이상옥 외무부 장관의 발언을 전면 부인하는 것이었다. 한-중 수교 다음날인 8월 25일, 이상옥 장관은 MBC와 대담에서 “이른바 과거사에 관련한 문제로 한국전쟁(6·25전쟁)에 중국 군민이 참전해서 우리 국민에게 큰 고통과 아픔을 안겨준 문제에 대해서도 거론됐다. 그 문제에 대해서 (중국) 대표단은 ‘그 당시 중국에 국경선이 위협을 받는 사태 하에도, 부득이한 조처에도 다시는 그러한 일이 있었서는 안 되겠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유감스러운 입장표명이 있었다”고 발언했다.

이후 10월 16일, 장팅옌은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주최 ‘금요조찬 대화’ 초청 연사로 참석해서도 “조선전쟁(6·25전쟁) 문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일관돼 있다. 그것은 사건 당시 우리도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양국 국민은 불행한 과거보다는 앞으로의 관계발전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장팅옌의 발언은 파장을 일으켰다. 훗날 이는 주한 중국대사들이 일으킨 ‘설화(舌禍)’의 시초로 기록됐다.

장팅옌은 1998년 8월 이임해 ‘72개월’의 초대 주한대사직을 마무리했다. 그동안 한국 대통령은 노태우-김영삼-김대중으로 바뀌었고, 주중한국대사는 초대 노재원 대사에 이어, 2대 황병태, 3대 정종욱 대사가 부임했다.

본국 귀임 후 장팅옌은 중국인민외교학회 이사, 국제문제연구기금회 이사, 베이징시정부 대외사무 고문, 산둥대학 한국학원 명예 원장 등을 맡아 활동했고, 2001년부터 현재까지 한중우호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이후 자신의 이름 ‘팅옌(庭延)’과 아내 ‘탄징(譚靜)’에서 한 글자씩을 딴 ‘옌징(延靜)’이라는 필명으로 ‘한국 대사로 나가(出使韓國·2004)’ ‘영원한 기억(永遠的記憶·2007)’을 산둥대학출판부에서 펴내기도 했다.

/최창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