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대 교수가 발설한 중공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 내막(상)

양웨이(楊威)
2021년 04월 13일 오후 12:01 업데이트: 2024년 02월 19일 오후 3:17

진찬룽(金燦榮) 중국인민대학교 대외전략연구센터 주임은 공개 강연을 통해 자주 대국(大國) 전략을 거론해 네티즌들로부터 중국의 ‘국사(國師)’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6년 7월 23일, 진찬룽은 광저우(廣州) 서던클럽호텔(Southern Club Hotel)에서 ‘중·미 전략 철학’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는 미국과의 패권 다툼에 관한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중공이 남중국해 섬을 강탈한 내막을 누설했다. 그는 중공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남중국해 문제의 유래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남중국해의 모든 섬을 점령했다. 이를 거론하며 진찬룽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전쟁에서 패했고, 1946년 장제스(蔣介石) 위원장은 그 섬들을 인수하라고 명했다. 이에 중화민국 내무부는 1947년 3월, 11단선(段線)이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U자형 선을 그었다. … 그런데 그 후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과 베트남 관계가 좋아지면서 호찌민 베트남 민주공화국 주석이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베트남) 어민들의 전통적인 어장이 없어졌다고 했다. 그 후 마오 주석의 승인을 거쳐 11개의 선 중 2개를 지움으로써 11단선이 9단선이 된 것이다.”

진찬룽의 말대로라면, 중공이 남중국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는 중화민국 시절 자체적으로 그은 11단선이다. 물론 이해 당사국들과 합의하지 않았다. 중공은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뒤, 베트남이 미국에 맞서도록 추동하기 위해 11단선을 잘라 9단선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애국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매국으로 봐야 할까?

진찬룽도 이를 인정했다.

“60년대에 한 유엔 위원회가 남중국해 해저에 석유가 많이 매장돼 있다는 발언을 한 후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이 시작됐다. … 우리도 국력이 조금 강해지자 남중국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가 남중국해에 최초로 개입한 때는 1974년 1월 19일의 시사해전(西沙海戰)이었다. … 1974년 당시에는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통일되기 전이었는데, 남베트남은 이미 버티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때를 틈타 우리는 남베트남 수중에 있던 시사군도(西沙群島)를 가져왔다. 북베트남도 마음이 편치 않았겠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축하 서신을 보내야 했다. 당시 북베트남은 남베트남과 내전 중이어서 장비 등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의존해야 했기 때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진찬룽이 밝힌 진실은 중공이 11단선을 9단선으로 바꿨을 뿐 아니라, 1974년까지는 9단선마저도 관심이 없다가 석유가 있다는 말을 듣자 갑자기 남중국해에 손을 댔다는 것이다. 또한 중공은 남중국해의 평화와 협력 개발을 거듭 외치고 있지만, 처음부터 무력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진찬룽(金燦榮) 중국 인민대 교수 | 웨이보

중국과 베트남 해전의 진실

진찬룽은 중공 해군이 두고두고 찬양하는 시사해전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우리는 당시 500t급 구잠정(驅潛艇) 4척으로 쳐들어갔는데 베트남 함대는 매우 강했다. 남베트남에는 4000t급 구축함 1척, 2500t급 호위함과 1500t급 호위함 각각 1척, 그리고 600t급 포함(砲艦)이 1척 있었다. … 당시 남중국해 함대의 참모장은 정면 돌파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구잠정 4척 모두로 대함(大艦)의 지휘실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 우리는 대포가 아니라 사격 속도가 매우 빠른 35mm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우리는 전투 능력도 좋지 않았다. … 우리는 구잠정 4척의 기관총으로 함장실을 집중 공격해 단번에 함장을 사살했다. 나중에 (남베트남 대함의) 조타수가 경험이 부족해 방향을 틀다 1500t급 호위함을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진찬롱은 성공적으로 끝난 중공 해군의 전투 사례의 내막을 실수로 폭로하고 말았다.

“전과(戰果)는 상대방 군함 1척을 격침했고 나머지 3척도 크게 파괴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격침한 것이 아니다. 우리 포탄으로는 1500t의 배를 침몰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우리는 당시 구잠정 1척을 잃었다. 베트남군은 그들 영해에 들어서자 냉정을 되찾았고, 4000t급 구축함의 대포 1발에 우리 구잠정 1척이 크게 부숴졌다. 이 전쟁은 매우 위험한 전쟁이었다. 만약 남베트남이 조금만 더 침착했다면 우리는 분명 졌을 것이다.”

진찬룽은 계속해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974년에는 시사군도만 있었고 난사군도는 없었다. … 베트남 사람들은 시사군도와 난사군도가 모두 그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 마침내 1988년 3월 14일에 전쟁이 시작됐다. … 1988년에 우리는 이미 자체 건조한 3700t급 구축함이 있었다. … 전세(戰勢)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남중국해에 대한 발언권을 가졌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발언권이 없었을 것이다.”

진찬룽의 발언은 석유를 빼앗으려면 무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중공 고위층의 논리를 정확히 반영했다. 이는 평화를 원한다는 중공의 거짓말을 철저히 까밝힌 것이다.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은 억지

진찬룽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1995년 우리는 필리핀 수중에 있던 메이지자오(美濟礁·미스치프 암초)를 가져오면서 7개 섬을 차지하게 됐다. … 베트남은 훨씬 더 많은 29개를 차지했다. …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그곳의 소유권은 분명치 않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더 많이 갔는데, 이것은 사실이다. … 그런데 주변국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섬들은 확실히 그들과 더 가깝다. … 청무안사(曾母暗沙)에서 싼야(三亞)까지의 거리는 1650km인데 말레이시아까지는 50km도 안 되니, 확실히 그들(말레이시아)과 더 가깝다. 그러나 더 가까워도 소용없다. … 유럽인들이 온 이후로는 그들이 통제해왔다. 따라서 소유권이 좀 불분명하다.”

진찬룽은 5년 전에 남중국해 영유권 논쟁이 뜨거웠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러나 중공은 공공연히 강탈했다. 다른 나라와 더 가깝고 다른 나라가 먼저 통제하고 있는데도 무력으로 빼앗는다.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국제적인 일은 모두가 상의해서 처리해야 한다”며 “누군가 주먹이 크다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바로 중공이 남중국해에서 주먹을 휘둘러왔고, 미국의 주먹이 더 큰 것을 보자 반대로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진찬룽의 남중국해 영유권 근거에 대한 설명도 매우 남다르다.

“일본 사람들이 (남중국해에) 와서 이것들(섬들)을 모두 차지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이 섬들을 우리에게 넘겨줬다. 그래서 지금 우리의 가장 큰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우리가 승리한 후 일본인 손에서 가져왔다. 일본이 어디에서 뺏었는지는 우리는 상관하지 않는다. 어쨌든 일본은 이미 이 섬들을 뺏었고 다시 우리에게 돌려줬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것이라 생각한다. 11단선을 그은 것이 근거다. 그러나 실제 국제 소송까지 가면 확실히 문제가 있다.”

진찬룽이 내세운 근거는 억지에 가깝다. 아마 중공 외교부도 이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국제중제재판소(PCA)가 중공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중공은 어떻게 남중국해를 뺏었나?

또 진찬룽은 이렇게 설명했다.

“60년대에 이곳에 석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후, 주변국들이 약탈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상관할 능력이 안 돼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힘이 조금 커지자 우리는 남중국해에 손 대기 시작했다. … 우리가 남·북 베트남 내전을 틈타 시사군도를 차지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화가 난다. 여러분은 우리가 순진하다고 생각하면 틀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는 북한에서 미국과 3년 넘게 싸웠는데, 그것은 총과 칼을 든 진짜 전쟁이었다. 그 후 우리는 베트남에서 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10년 넘게 또 미국과 싸웠다. 당시 우리군 35만 명이 갔는데 규모가 매우 컸다. 이는 장기간 대국(大國)과 싸운 것이다.”

진찬룽은 남중국해 섬을 탈취하기 시작한 이유가 석유 때문이라고 시인했고, 미국과 대적한 군대가 베트남군이 아닌 중국-베트남 연합군이었다는 베트남 전쟁의 내막도 까발렸다.

“처음에는 베트남을 도와주다가 나중에는 베트남을 응징했다. 1979년부터 1994년까지 치른 중공-베트남 전쟁에서 모든 군대는 교대로 훈련을 했다. 현재 중공의 모든 상장(上將)들이 이 전쟁에서 단련된 사람들이다. 사실 우리 군은 정말 많은 전쟁을 치렀다. 외교부는 매일 우리 중국은 줄곧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기자들은 아무도 믿지 않는다.”

진찬룽은 또다시 중공 외교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를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랑했다.

“우리는 힘이 생긴 후, 70년대에 우선 시사군도를 차지하고 중사군도(中沙群島)를 통제했다. 80년대에는 난사군도에 발을 들여놓았고, 90년대에는 이를 조금 더 넓혔고, 1995년는 필리핀의 손에서 메이지자오를 뺏었다. 사실 필리핀의 입장에서 말하면 (우리는) 아주 막무가내였다. 우리는 (메이지자오를) 점령한 후, 어장을 통제하고 필리핀 어민들을 쫓아냈다. 그래서 필리핀 사람들은 매우 화가 났다. 메이지자오가 필리핀에서 겨우 200km가량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중국 싼야에서는 2000km 정도 떨어져 있고, 그들 어민들도 수천 년 동안 거기에서 고기를 잡아왔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너희들(중국) 것이 된단 말인가? 그래서 그들도 매우 억울하다.”

중공이 남중국해에서 공개적으로 약탈하자 미국은 경계심을 점차 높이고 있다.

남중국해에 떼지어 정박 중인 중국 선박들 | EPA=연합뉴스

미국과의 게임 시작

진찬룽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우리에게 반대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이다. 2012년 4월 10일 황옌다오(黃岩島·스카버러 섬)에서 중국과 필리핀의 충돌이 있었다. 우리 단속선과 필리핀 단속선이 대치했는데, 그 결과 필리핀이 졌다.”

“1997년부터 2012년까지 15년 동안 사실상 필리핀이 황옌다오를 더 많이 통제했다. 매년 52주(周) 중 우리가 2주 통제하고 필리핀이 50주 통제했다. 왜? 멀기 때문이다. 싼야에서 황옌다오까지는 1300km여서 한번 가기도 쉽지가 않았다. 팔라완에서는 겨우 149km이니 9배나 먼 거리다. …  황옌다오에 도착한 우리는 필리핀 사람들이 세운 비석을 밀어버리고 우리 땅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우리는 일주일 안에 반드시 돌아와야 했다. 배가 작았고 담수가 없어 일주일밖에 생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황옌다오에서 우리 어민들이 필리핀에 많이 잡혀갔는데, 우리는 나중에 돈을 써서 찾아왔다.”

진찬룽은 중공이 필리핀이 장악한 황옌다오를 빼앗은 사실을 조금도 서슴지 않고 말했다.

“황옌다오 사건은 미국을 크게 자극했다. 미국은 중국이 지금 남중국해를 통제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경계하고 있다. …  미국은 2010년부터 아시아로 회귀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 (미국의) 전반적인 전략은 (중공을) 주목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중공이) 양보했는데 지금은 공공연히 빼앗고 있다. 황옌다오에 대한 (중공의) 횡포를 발견한 것이다. … 그러나 미국이 직접 개입한 것은 2015년 중반부터다. 그들의 개입은 당연히 인공섬 건설과 관련된다.”

진찬룽은 많은 ‘특종’을 터뜨린 후 시진핑에게 아부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새 지도자가 등장한 후 태도가 강경해졌다. 남중국해 문제에 있어서 덩샤오핑의 지시는 안정 유지가 우선이었고, 권리(영유군) 주장이 그다음이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그대로 이어받았다. … 하지만 시 주석은 집권하자마자 달랐다. 게다가 그의 신분은 도련님(혁명 원로 2세)이다…. 그는 인공섬 조성 계획을 승인했다… 이 승인으로 기적이 일어났다… 1년 반 동안 3200에이커의 땅을 조성했다. 이는 미국놈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래서 지난해 중반부터 미국이 직접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 그래서 지난해 중반부터 지금까지 남중국해 문제는 미·중 간 게임이 된 것이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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