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망명 신청한 中 스파이 “중국 정권의 심각한 해악 깨닫고 결심”

LEO TIMM
2019년 11월 25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27일

중국 첩보요원이 호주에 망명을 신청했다. 민주사회의 자유를 경험하고는 이를 해치려는 중국 공산당과 정권에 반감을 갖게 됐다고 동기를 밝혔다.

지난 23일(현지시간) 호주 방송 나인네트워크 등 현지언론은 전 중국 인민해방군 첩보요원 왕리창(王立强·27)이 호주에 망명을 신청했다고 보도했다. 왕리창이 망명을 신청하며 제출한 진술서에는 17페이지에 걸쳐 정보기관 고위급 인사의 명단, 정보기관 운영방식, 홍콩·대만·호주에서 벌인 공작에 관한 정보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왕리창은 ‘당을 위한 스파이’와 ‘자유세계를 경험한 자연인’ 사이에서 정체성 혼란을 겪다 전향을 결심했다. 직접적인 계기는 내년 대만대선 개입작전을 위해 위조 한국여권으로 대만에 입국한 일이었다. 그는 “위조 여권에 인쇄된 내 얼굴을 직시한 순간 내면에 변화가 일어났다. 자기 정체성을 잃을지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다”고 했다.

작전 후 홍콩으로 돌아가 지내던 왕리창은 올해 4월 아내와 자녀가 살고 있는 시드니로 건너가 호주안보정보원(ASIO)에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넘겼다. 그는 자신도 여러 차례 첩보 활동에 연루, 가담했었다고 진술했으며 현재 ASIO에 협조하며 비밀 장소에 기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시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부모와 친지를 만나지 못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중국 정부를 배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리창은 “그 사실을 생각하면 항상 슬퍼진다. 도청 우려 때문에 부모님뿐만 아니라 조부모님과도 많이 통화하지 못한다. 이 점이 가장 슬프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나 첩보 활동은 계속하기엔 지나치게 위험하고 비도덕적이었다. 왕리창은 망명을 신청한 후인 지난 5월 본지와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고 세계관이 바뀜에 따라 점차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가 전 세계 민주주의 및 인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깨닫게 됐다”며 “당과 공산주의에 대한 내 반감은 전에 비할 수 없이 확고해졌다. 결국 조직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내 인생에 좋은 결정일지 나쁜 결정일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언할 수는 없어도 나는 중국 정부에 남았더라면 좋은 결말을 맞지 못했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고 전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 본 경험 또한 왕리창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대만 방문 전인 2018년 12월에도 가족들을 찾아 호주에 머물렀다. 그는 “호주에서 지낸 몇달 동안 민주주의가 주는 자유를 만끽했고 중국이 전 세계 민주주의를 훼손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일들에 더 큰 부끄러움을 느꼈다”며 “그래서 첩보활동을 포기하고 당을 완전히 등지기로 마음먹었다”고 했다.

미술 전공…학교 측 소개로 홍콩 ‘위장 투자사’ 입사

왕리창이 본지에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대만과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중국 최남단 푸젠성 출신으로 지방직 공산당원의 아들로 태어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해 중국 안휘재경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그가 본지 취재진에 제시한 대학 시절 사진에는 미술대회 수상장면이 다수 담겨 있었다.

미대생이 첩보기관에 몸담게 된 것은 대학 관계자의 ‘취업추천’이 계기가 됐다. 이 관계자는 왕리창에게 홍콩에 있는 중국창신투자(CIIL) 입사를 제의했는데, 이 회사는 대외적으로는 중국 방위산업체를 주대상으로 한 투자사였지만, 왕리청은 “입사하고 보니 첩보기관이었다”고 했다. 공산당 고위간부 휘하 해외 첩보조직과도 관련 있었다.

호주 나인네트워크에 따르면, 왕리창이 처음부터 회사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창신투자 대표의 아내에게 미술 수업을 해준 일로 신임을 얻어 ‘이너서클’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후 왕리창은 중국의 여러 첩보작전 정보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상당수는 군사기술 입수 작전이었다.

왕리창은 대만, 홍콩과 호주에서 다양한 작전에 직접 가담하기도 했다. 2018년 대만 지방선거 당시에는 차이잉원 정부 약화를 위한 대규모 허위정보 유포작전에 참가했다. 대만 입국에는 위조 한국여권을 사용했다.

홍콩에서는 중국 본토 출신 유학생과 어울리며 당 이념을 세뇌시키고 학생들을 첩보관련 활동에 동원했다. 왕리창은 동료들과 홍콩 소재 대학 학생회 등에 손쉽게 침투할 수 있었으며 “본토 출신 학생들은 사소한 도움이나 이익만 제공해도 작전에 협조했다”고 덧붙였다.

왕리창은 공산당을 따르는 것이 애국이라고 교육받으며 자랐기에 첩보요원을 매력적인 직업으로 여겼다고 했다. 그는 “보수가 좋았고,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기분도 느꼈다”고 했다.

전 미중앙첩보부(CIA) 분석관이자 중국 첩보활동 전문가인 피터 매티스는 “왕리창은 정보부 고위간부가 첩보 및 정치 영향력 확대 작전에 활용할 수 있는 인적 자산을 사전 확보해두는 관리자나 포섭자 역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왕리창은 중국 정부의 홍콩·대만 언론 장악에 대해서도 폭로했다. 그는 “중국 정부는 홍콩과 대만의 주요 매체를 매수하거나 요인을 심어 뉴스에 당의 관점을 반영시킨다”며 “중국 인민해방군 사단장급 장성이 한 아시아 대형 TV 방송국의 고위간부를 맡고 있기다”고 주장했다.

나인네트워크는 “왕리창이 중국 정보부가 전 호주 연방의원 등 호주 내 거물 정치자금 제공자들에 접촉했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관련 은행계좌 거래내역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왕리창이 호주에 제출한 진술서에는 중국계 학생 커뮤니티에 침투해 중국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배척되도록 했다는 내용도 담겼다고 방송은 전했다.

중국 정부는 왕리창의 폭로에 대해 전면 부인하고 있다. 상하이 경찰은 그가 첩보요원이 아니라 사기 혐의로 인한 수감 전력이 있는 무직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24일에는 호주 주재 중국 대사관이 나서서 “왕리창은 올해 초 자동차 수입사업 관련 사기범죄로 상하이 경찰에서 수배 중인 범죄자”라고 거들고 나섰다.

그러나 호주 정부는 왕리창이 제공한 정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로이터 통신은 조쉬 프라이덴버그 재무장관이 매우 우려스러운 반응을 나타냈으며, 법무기관에서 대처에 나섰다고 전했다.

호주에 망명한 중국 정부인사가 왕리창이 처음은 아니다. 2005년 호주로 망명한 천융린(陳用林) 전 시드니 주재 중국 총영사관 정무영사는 중국 첩보요원의 활동과 영향력에 대해 경고하며 “1천여 명의 중국 스파이가 호주에서 활동 중”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중국 정부의 주요 목표에는 호주 내 파룬궁 수련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천융린은 전했다. 파룬궁은 1999년 중국에서 금지된 수련단체다.

중국 공산당이 호주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 한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17년 호주 언론은 중국 재벌들이 정치 기부금을 이용, 호주 정치인들을 포섭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2018년 말콤 턴불 당시 호주 총리는 “중국의 호주 내 영향력에 대한 경악할 만한 보고들”이 접수되고 있다며 방첩을 위한 법안을 마련했다.

올해 초 호주는 중국 부동산 재벌 황샤오모의 영주권을 박탈하고 시민권을 거부했다. 방첩 관련 법안 마련 후 시행된 첫 조치였다. 황샤오모는 지난 5년간 270만 호주 달러(약 21억 원)를 호주 주요정당에 건넸으며 중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황샤오모는 중국 공산당 해외 선전활동부서인 중공중앙통일전선공작부 산하 호주중국화평통일촉진회 대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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