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당(黨)문화]제7장 생활 속의 당문화(하)

2007년 9월 13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8일

하편:당문화의 구체적인 표현 

【당문화 해체】 제7장 생활 속의 당문화(하) 


목차

4. 부부는 혁명 동지로 여자는 남자와 차이가 없다 

5. 자연과 투쟁하고 당이 지시하기만 하면 언제 어느 곳이든 투쟁 


4. 부부는 혁명 동지로 여자는 남자와 차이가 없다

도처에 존재하는 당문화의 구체적인 표현은 정치, 경제 등 공공 영역을 완전히 점령한 것 외에도 백성들의 개인적인 영역 내지는 사적인 범주에 해당하는 가정생활에까지 전면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이다. 결혼을 할지 여부, 한다면 누구와 할지, 아이는 언제 몇 명을 낳을지에 대해서도 당은 모조리 관할하려 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모든 폭력기구를 이용한다.

부부란 본래 인연으로 이뤄진 것으로, 연애와 혼인은 낭만적 색채를 지닌 인류의 영원한 화제이다. 더욱이 가정이란 인생이란 항로 중에 쉬어가는 항구이다. 화목한 가정과 부부간의 사랑, 그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행복이다. 그러나 공산당은 도리어 계급투쟁의 전쟁터를 직접적으로 모든 가정에 옮겨놓았다. 부부는 입장이 분명한 “혁명동지”로 변했고, 정치 투쟁은 직장에서부터 퇴근 후의 주방과 침실에까지 뻗어 나갔으며, 가정 관계의 변이를 조성했다.

하늘이 사람을 만들 때 남녀(男女)를 구분한 것은 그들이 음양을 서로 보완하며 강한 것과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때문에 남녀 쌍방은 사람의 특성과 신체 능력상 각기 특장이 있다. 하지만 공산당은 여자를 남자로 만들어 남녀는 다 똑같으며 부녀자도 절반의 하늘을 떠받칠 수 있다고 고취했다. 이것은 단순히 여자들이 구직, 취학과 정치적 지위가 상승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중국 여인의 온유하고 현숙함을 거의 다 말살해 버려 중국 특유의 음성양쇠(陰盛陽衰)란 열악한 결과를 조성했다.

1) 산아제한

중공에는 “계획 출산”이라고 하는 한 가지 기본적인 “국가정책(사실은 “당의 정책”)이 있는데 국제 사회에서는 그것을 “한 자녀 정책”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부녀와 아동의 권리와 관련해 세계적으로 아주 논쟁이 있는 문제이다. 일단 이 문제의 시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단지 이런 정책이 출현한 자체가 바로 신명(神明)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늘도 땅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슨 짓이든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할 수 있는 중공의 뿌리 깊은 당(黨)문화 요소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중국의 전통 왕조 사회거나 나치 파쇼와 같은 극권(極權)주의 국가거나 막론하고 정부에서 주류 민중들의 사생활을 간섭한 적은 없었다. 특히 출산과 같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공산당은 달랐다.

1956년, 중공 제8차 당 대표대회 정치 보고에서 산아제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모든 것을 공산당이 통제하는 “계획경제” 체제의 직접적인 연장으로, 무엇이나 다 계획 속에 집어넣으려는 것이다. 1957년 2월 27일 마오쩌둥은 최고 국무회의에서 말했다. “공장 생산에 대해서는, 천을 짜고 책걸상을 만들고 강철을 생산하는데 모두 계획이 있지만 인류 자신을 생산하는 것에 대해서는 계획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무정부주의다. 인류는 자신을 통제해야 하며 계획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어떤 때는 조금 증가시키고 어떤 때는 정지시켜야 한다.” 유물론에서 내원한 이런 사상에 따라 아이의 출산을 강철을 제련하고 천을 짜는 것과 함께 논할 수 있는 것은 중공이 보기에는 모두 “생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계획경제하에서는 공산당이 각종 물품의 생산량을 통제하기에 공산당이 인구를 통제하는 것 역시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57년 대약진이란 “식량 위성(糧食衛星)”이 하늘에 오른 후 마오쩌둥과 중공은 견해를 바꾸어 “사람이 많은 것은 좋은 일”이라는 것이 주류 사상이 되었다. “사람이 많아야 힘이 강해진다.”, “사람은 입뿐만 아니라 또 한 쌍의 손이 있기에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라고 하면서 중국 여성들에게 아이를 많이 낳을수록 영광스럽다고 고무했을 뿐만 아니라 열 명의 자식을 낳은 여성에게 “영광스런 어머니”란 칭호를 주었다. 당시의 북경대학 총장인 마인추(馬寅初)가 쓴 인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신(新)인구론』은 “자산계급의 황당한 논리”, “우파의 창궐한 공격”으로 치부되어 “철저한 적발과 비판”을 당했다.

중공의 인구 정책은 6,70년대 중국 인구의 급격한 증가를 초래했다. 1981년 3월 6일 중공은 계획출산위원회(計劃生育委員會)를 만들고 아이를 적게 낳을 것을 강요했다. 따라서 이후 “계획출산”은 중공의 기본 국가시책이 되었다.

중공의 “계획출산”은 외국의 “가족계획(Family planning)”과 본질적인 구별이 있다. “가족계획”은 보통 정부의 보조, 서비스와 관련된 자문을 통해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공의 “계획출산”은 헌법이 규정한 공민의 의무로서 늦게 결혼하고 늦게 출산하며 한 쌍의 부부가 하나의 아이만 낳을 것(소수의 예외는 제외)을 제창(아주 많은 직장에서는 강제적)한다. 가임여성은 생육 지표가 있어야만 임신할 수 있다.

“계획출산”은 극단적인 강제조치를 통해 집행되었다. 태아가 태어나지 않았을 때, 혹은 유산시킬 수 있을 때는 계획출산위원회 “집행원”이 계획되지 않은 임산부를 강제로 병원에 보내 유산을 시킨다. 만약 태아가 출생한 후에 발견되면 계획출산위원회는 “법에 따라” 그 가정에 고액의 벌금을 물린다. 실제로 집행하는 과정 중에 공산당은 늘 폭력을 써 왔고 인권이란 아예 고려하지도 않았다. “계획출산”은 집행 범위가 넓고 시간이 길며 또 태아의 생명에 관련되기 때문에 그 과정은 몹시 잔혹하다. 특히 “초과 출생”한 농민에 대해 중공은 더욱 제멋대로 괴롭힌다. 기본적으로 산달이 가까운 아이라도 만약 허가증이 없으면 낳지 못하게 한다. 설령 낳았다 해도 의사와 간호사는 반드시 갓 태어난 무고한 생명을 산 채로 죽여야 한다. 추정에 의하면 “계획출산”이 시작된 이후 적어도 4천만 명의 태아 혹은 영아들이 중공에 의해 살해되었다.

대륙 농촌에 나붙은 구호와 표어에서 살기등등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집이 망할지언정 나라를 망하게 할 수는 없다.”, “약을 먹으려 하면 병을 빼앗지 말고 목을 매려 하면 밧줄을 주어라.” “한 사람이 초과되면 온 마을이 불임수술을 해야 한다.”, “첫째는 낳고 둘째는 불임수술 하며 셋째와 넷째는 긁어내라! 긁어내라! 긁어내라! 첫째는 괜찮지만 둘째는 수술하고 셋째, 넷째는 죽여야 한다!”, “피로 강을 이룰지언정 하나도 더 낳을 수 없다.”, “묘지를 10개 늘릴지언정 한 사람도 더 낳지 말아야 한다.” 이렇듯 잔인한 구호는 중국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호에만 그친 것이 아니다. 집을 수색하고 집을 허물며, 사람을 잡아 감금하고 아기를 죽이는 등은 중국에서는 이미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2006년 중국 대륙의 어느 매체에서 다음과 같은 일을 보도한 적이 있다. 우한(武漢)시 황포(黃陂)구 차이뎬(蔡店)촌 촌민 황추성(?求生)은 집이 너무 가난해 예물을 살 형편도 못 되었다. 계획출생반원이 그의 집에 뛰어들어 임신 9개월째 되는 그의 아내를 사무실로 끌고 가 낙태 주사를 놓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황 씨의 아내는 아기를 낳았고 낙태 주사가 태아를 죽이지 못했다. 계획출생반원은 황 씨를 핍박해 아직 살아 있는 아기를 버리게 했다. 오후 5시쯤 류 씨 성을 가진 할머니가 거리에서 향 정부 뒤편 화장실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난다는 말을 들었다. 전직 의사인 류 할머니가 울음소리를 따라가 보니 과연 남자 화장실 변기통 속에 남자 아기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기는 머리만 밖에 나왔을 뿐 온몸은 전부 변기통 속에 잠겨 있었다. 할머니는 다급히 아기를 건진 후 대충 씻은 다음 즉각 진료소로 안고 가 탯줄을 끊고 주사를 놓아주었다. 모든 일을 잘 처리한 후 류 할머니는 아기를 포대기에 싼 후 문 앞에 앉아 아기에게 물을 먹였다. 바로 그때 향 계획출생반원 다섯 명이 할머니 앞에 나타났고 그 중 하나가 다짜고짜 할머니의 품에서 아기를 빼앗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기는 너무 아파 사지를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아기를 발로 걷어찼다. 그 다음 그들이 아기를 데려갔다. 아주 멀리 갈 때까지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계획출생반원이 아기를 논에 던져 익사시켰다. 중국에서는 이런 사례들이 결코 드문 현상이 아니다.

“계획출산” 정책은 중공 무신론 교육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설령 큰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발생했다 할지라도 영아를 살해하는 것은 모두 중대한 반(反)인류범죄이다. 그러나 중공 “무신론”의 교육 아래 각급 관원들은 중공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서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렸다”는 기본적인 도덕관념마저 없이 영아 살해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

서양에는 위험한 때를 만나면 언제나 어린이와 여자에게 우선적으로 생존기회를 주는 전통이 있다. 약자의 권리를 존중할 줄 아는 민족만이 모든 사람의 권리를 존중할 줄 안다. 중공의 영아 인권에 대한 멸시는 곧바로 중공이 모든 사람의 인권을 전혀 존중하지 않음을 폭로하는 것이다. 농민에 대한 중공의 억압, 탄광 재난에 대한 무관심, 상방(上訪)인원에 대한 무정한 박해, 심지어 영아에 대한 살해, 이 모든 것은 “약육강식”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바로 중공 인권 기록의 지속적인 악화이다.

사람들은 아마 각종 이유를 찾아 강제적인 통제가 아니라고 설명할 것이다. 중국 인구가 팽창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다만 문제의 표면 현상일 뿐 중공이 정책을 결정하는 당문화 요소야말로 문제의 실질이다. 공산당은 일시적인 충동에 의해 인구가 많은 것을 원하고 출산을 장려하다가도 인구가 많아 먹여 살리기 어려워지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태아를 살해하여 어린 영혼들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다산(多産)과 소산(小産)은 겉으로 보기에 양극단인 것 같지만 사실 모두 무슨 짓이든 제멋대로 하는 중공 망나니의 패도(覇道) 습성의 표현이다. 지금 중국의 인구는 30년 전에 비해 훨씬 많아졌지만 최근 몇 년, 중공이 경제 영역에서 느슨히 하고 간섭을 줄이자 사람들이 먹고 살기가 이전보다 더욱 편해지지 않았는가? 여기에서 볼 수 있다시피 문제의 핵심은 인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공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인구 문제는 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모두 당면한 문제이다. 하지만 지금 세계적으로 정부에서 강제로 계획 출산을 실시하는 나라는 중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구 문제 해결을 반대하자는 것이 아니라 신명(神明)을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것을 반대할 뿐이며 특히 살인으로 생명을 해치는 방법을 반대할 뿐이다.

중공의 산아제한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 구체적인 표현은 인구 구조의 신속한 노령화로 인해 은퇴 인구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반면 경제 활동 인구는 날로 줄어들어 연금이 고갈될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 쌍의 부부가 4명의 노인과 아이 하나를 부양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이가 인재로 자라날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아이가 인재로 성장하지 못하면 부모들은 늙어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 그렇지만 중국에는 이들을 또 도와줄 메커니즘이 없다. 중국 농촌에서 딸이 태어나면 자식을 더 낳을 수 없는데다가 그 딸이 성장해서 시집가고 나면 농사를 지을 사람도 없어지고 결국 살아갈 방도가 없다.

계획 출산은 또한 현재 중국 성비의 심각한 불균형을 야기했다. 전에는 딸을 낳아도 아들을 낳을 때까지 계속 낳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오직 하나의 아이밖에는 낳을 수 없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낙태라는 방법으로 자녀의 성별을 선택한다. 대를 잇고 조상을 모시기 위해 딸을 유산시켜 아들만 낳는다. 결국 남여 성비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했고 현재 남자와 여자의 비율은 120:100에 달한다. 이렇게 되면 20년 후에 약 6분의 1이 남성(약 4000만 명)이 배우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며 이것은 사회적으로 아주 커다란 불안정 요소가 될 것이다.

산아제한은 또한 도시의 젊은 세대들에게 형제자매가 극히 드물게 만들어 외아들, 외딸을 양산했다. 이들은 저마다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소황제(小皇帝)가 되었고, “거만하고 응석”이 심해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일 뿐만 아니라 책임감과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다. 이 아이들이 사회의 중견으로 될 때면 그들의 성격 특징이 중국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사실, 바로 자연계에 법칙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구 역시 스스로를 조절하는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바로 『시경』에서 말한 것처럼 “하늘이 백성을 낳으시고 사물에 법칙이 있도록 하셨다(天生烝民,有物有則).” 정상적인 정부에서도 인구를 조절하는 방식은 아주 많다. 인구학과 유엔 통계자료에서는 모두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져 있고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높은 지역은 출산율이 저절로 내려간다고 한다. 중국의 통계수치에서도 여자가 중학교 교육만 받아도 출산율이 2.13으로 내려갈 수 있어 인구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을 받은 여자의 출산율은 더 내려가 각각 1.82와 1.11에 불과하다(이상은 1986년 통계자료에 의한 것이며 지금은 이보다 더 낮을 것이다).

그러나 살육과 강제 정책에 습관이 된 중공은 낙태에 대해서는 흥미가 있지만 더욱 근본적 작용을 일으키는 교육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교육에 대한 낮은 투자는 말문이 막힐 정도이다(중국의 교육비는 GDP의 4%가 안 되어 세계 최저수준이며 아프리카 우간다보다도 낮다). 중공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6년 전국의 의무 교육 비용은 약 2260억 위안인데 반해 중공이 공금으로 먹고 마신 금액은 2004년에만 3700억 위안에 달했다. 바꿔 말해 중공이 공금으로 먹고 마시는 것만 중단해도 전국의 취학연령 어린이들이 의무교육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교육 수준의 제고는 인구 성장 압력을 완화시켜 줄 수 있다.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가족계획 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인도에서는 21살 법정 혼인연령을 넘어 결혼하는 사람을 장려하고, 아이 둘을 낳은 후 자발적으로 불임 수술을 하는 부부에게는 복지와 의료 보험 등 방면에서 혜택을 더 주는 등이다. 하지만 강제적인 조치는 없었다. 멕시코, 터키, 인도네시아 등의 나라에서도 가족계획을 위한 법률을 제정했지만 이들 나라의 법률에는 모두 부모가 자식의 숫자나 간격을 자유롭게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서양 국가들은 저 출산율 문제에 직면하여 경제적인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세금을 감면하는 등의 방식으로 격려해 주며, 정부에서도 강제적인 수단으로 출산을 통제하진 못한다. 사실 그 어떤 정부도 각 가정의 출산문제를 상관하지 않으며 폭력적인 기구로 출산 정책의 실시를 보장하는 나라는 더욱 없다. 오직 중공 통치하의 중국만이 인위적인 산아제한을 채용했으며 이로 인해 야기된 사회 문제 역시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2) 부부는 혁명 동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 문화는 모두 “가정”을 중심으로 한다. 공업화가 제일 발달한 미국에서도 “가정 관념”은 여전히 중요한 미덕이다.

사람에게 가정은 편안한 곳이다. 부부 사이에는 은혜와 믿음이 있고 알뜰살뜰한 보살핌이 있다. 부부 사이에 흉금을 털어놓는 것은 심리적인 압력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방식이며 또한 정신건강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생리적인 건강을 보장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이다.

『시경』에서는 “아내와 화목하면 거문고와 비파를 타는 것 같노라(妻子好合,如鼓琴瑟)”라고 했다. 전통 가정에서는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여자가 집안일을 돌본다. 남자는 강직하면서도 자상하여 처자식을 위한 보호막 역할을 하며 여인은 온유하고 현숙하며 가정 일을 도맡아 남편의 현명한 내조자였다. 부부는 마치 거문고와 비파처럼 서로 조화를 잘 이루며 서로 즐겁다. 아름답고 원만한 혼인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너그럽고 상대방을 양해해 줄 수 있으며 서로 존중해 주는 바로 이런 모습이다.

중공 당문화는 사람들의 혼인 예의를 변이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출산을 통제하는 동시에 부부 관계를 새로 규정했다. 중공은 전통 문화를 비평하고 전통적인 인륜 관계를 낙후한 봉건 찌꺼기라고 비판했으며, 가정의 따뜻한 정과 인성을 소자산 계급의 인성으로 폄하했고 당성과 혁명성이 부족한 표현이라고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부부 사이의 인륜 관계는 허공에 뜨고 말았다. 인성을 뽑아버린 후 중공은 또 당성을 주입하여 부부는 “혁명동지”라고 떠들어대면서 부부간의 감정과 윤리를 승인하지 않았다. 부부는 “한마음”이 아니며 당과 한마음이 되어야 하고 “동지”도 당과 한 뜻이 되어야 한다. 부부 사이의 신임은 당에 대한 신임을 초월해서는 안 되며, 부부간의 은혜도 절대 당에 대한 충성심보다 높아서는 안 된다.

가정생활은 혼인의 목적이지만 중공은 정반대이다. 중공에게는 남녀의 결합이 가정을 조직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을 위한 것이며, 당의 한 부품이 되어 당이 혁명하는 수단과 도구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부는 “혁명동지”가 되었다. 당이 승인한 “여자 혁명가” 중 한 사람인 타오주(陶鑄)의 부인 쩡즈(曾志)는 그녀의 회고록 『운 좋은 혁명의 생존자』중에 자신의 혼인관을 피력했다. “공산당원에 대해 말한다면 부부 생활은 부차적인 것이며 중요한 것은 정치 생명이다.”

『공산당 선언』에서는 “가정을 소멸”해야 한다고 명확히 표시했다. “우리는 사회 교육으로 가정교육을 대신해야 하며 사람들의 가장 친밀한 관계를 소멸해야 한다.” 그러나 가정, 육친에 대한 정과 인륜은 불변의 진리이며 부부, 자녀, 부모, 친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상적인 교제는 인류 사회를 구성한다. 인류 역시 부부라는 이런 가정 형식이 있었기에 이성과 도의의 단속 아래에서 비로소 번영하고 발전해 온 것이다. 하지만 공산당은 “혁명동지” 간의 이익 관계로 부부의 인륜 관계를 대신했으니 근본적으로 말해 인류사회의 기본적인 조직형식을 변이시켰다.

바로 본서 제6장『습관화된 당의 언어』에서 분석한 것처럼 부부 사이에 “동지”라고 불러 부부가 일상생활에서 시시각각 자신이 공산악당의 신도임을 잊지 않게 하여 중공 사교(邪敎)의 어두운 그림자를 가정에 씌웠다. “동지”가 먼저이고 부부는 나중이다. 만일 부부 한쪽이 중공의 적이 되면 곧 “동지”에 속하지 않게 되며 그러면 반드시 경계선을 명확히 구분해야 하며, 배우자를 포기하고 당 조직에 다가서야 한다. 부부가 “혁명동지”로 된다면 부부 사이의 전통적인 친밀한 정이 깨지고 부부 사이의 은혜와 신뢰가 타파되어 사람들은 부부간에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일단 “혁명동지”의 관계가 타파되면 부부간의 윤리 역시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문화대혁명 기간과 역대 정치운동 중에서 나타난 것처럼 부부가 서로 적발하고 고발하게 되며 인성이라곤 전혀 없게 된다.

대개 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당신의 일체 장단점을 거의 속속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상처를 받게 되면 아마 세상 어디에도 몸 둘 곳이 없는 것 같고 세상에 더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고 느껴지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이 원하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혁명의 요소는 점차 옅어졌고 이런 “혁명동지”의 관계는 생활 속의 “동지관계”로 변했다. 오로지 구체적인 목적과 이익을 위해 가정을 유지할 뿐 부부 사이의 감정 교류와 서로간의 보살핌은 아주 부족하여 가정생활이 단조롭고 침울해졌다. 심지어 많은 가정에서는 아이들이 성장한 후에는 부부가 장차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3) 남녀는 차이가 없고 세상의 절반은 여자

속담에 남녀 사이에는 구별이 있다고 하지만 오랫동안 당문화 영향을 받아 여자를 말하기만 하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시대가 달라졌고, 남녀는 차이가 없다.”, “여자는 절반의 하늘을 떠받칠 수 있다.”는 따위의 말을 한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본래 같지 않다.

중국 전통문화는 음양평형을 중시한다. 사실 음양이란 만사만물이 서로 협조하는 법칙을 말한 것으로 그 속에는 남녀도 포함한다.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기에 남자의 특성은 강직하고, 여자의 특성은 부드럽다. 강한 것과 부드러운 두 가지 수단이 조화를 이루어 공생하는 것으로 힘을 믿고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의 윤리 도덕에서 제창한 것은 부부 사이에 사랑과 은혜를 중히 여기며 남자는 바깥일을 하고 가정에 대해 책임져야 하며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자신의 아내를 사랑할 줄 알며 평생 그녀를 책임져야 한다. 여자는 집안일을 하면서 시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가르치며 남편을 잘 섬겨야 한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다. 고대 중국 사회에서 가정과 가족은 지금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옛 사람들의 인생 이상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였다. 사실 이것은 서로 똑같은 이치인데 “세상을 다스리는 것(平天下)”은 “집안을 다스리는(齊家)” 이치를 더 큰 범위로 확충한데 불과하다. 가정 관계에서 “부부”관계는 또 가장 중요한 한 방면이다. 『중용』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비롯되지만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는 천지를 관찰할 수 있다(君子之道,造端乎夫婦。及其至也,察乎天地.)” 중공은 “남녀는 매 한가지”라고 고취하여 직접적으로 가정의 평형과 조화를 파괴했고 이것은 중공이 전통 사회질서를 전복하는데에서 중요한 과정이었다.

전통사회에서 여성은 비록 정치, 경제, 과학, 군사 등 방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내진 못했지만 자식을 교육하고 도덕과 정상적인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방면에서 대체할 수 없는 작용을 일으켰다. 특히 모친의 자애로움은 아이들의 여린 마음에 뿌리를 내려 아이가 성장해 성인이 된 후에는 이런 사랑을 사회에 전해주게 된다. 마치 “맹모삼천지교”와 “악비(岳飛)의 모친이 악비의 등에 글자를 새긴” 이야기와 같은데 이것은 거의 모든 중국인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만약 대의(大義)를 깊이 아는 악비 모친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어쩌면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한” 악비의 장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중공은 “남녀는 차이가 없고 세상의 절반은 여자”라는 것을 고취하여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모습을 억지로 개변시켰고, 여자들을 남자와 같이 용감히 싸우게 하여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하게 했다. 다른 한편 노인을 보살피고 자식을 교육하는 부담은 대신할 사람이 없거나 감당할 방법이 없어져 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완전히 조부모나 혹은 학교와 사회로 떠넘겼다. 이 때문에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 문제를 조성하게 되었다.

“남녀는 차이가 없고 세상의 절반은 여자”를 고취하는 것은 중공이 전민(全民) 투쟁을 진행하기 위한 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여성은 사회 활동에 아주 적게 개입했는데 이렇게 되면 중공이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절반이나 줄어들게 된다. 중공은 자신이 여자를 “해방”시켰다고 선전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여성들을 선동하여 이른바 혁명 활동에 참가하게 하려던 것이다. 이전의 온유하고 현숙하며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던 여성들을 “강철 여인 부대”와 “홍색 낭자군”으로 조직해 전 사회를 중공의 반란 운동 속으로 휘말리게 했다.

“남녀는 차이가 없다”는 말이 겉보기에 여성의 지위를 제고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런 관념이 당문화에 대한 인정을 기초로 건립되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여성의 생리적인 차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녀들에게 힘에 부치는 일을 하도록 강요하고 남자의 표준을 여인에게 요구하는 이런 것은 사실 여인에 대해 공평하지 못한 것이며, 당문화 아래에서 여성을 진정한 노예로 만든 것이다.

공자는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하여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지킨다고 했다. 바로 사람마다 각기 다양한 특징이 있기 때문에 다채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제각기 자신의 장기를 갖고 있으므로 서로 존중하고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그런데 중공은 “사상을 통일”해야 하며 사회를 일원화된 사회로 변하게 만들었다. 남녀 사이의 선천적인 차이에 대해 중공은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을 주입하여 여자들에게 만약 남자보다 약하면 희생당하거나 압박받을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때문에 여인들이 자신을 보호하려면 반드시 사나워져야 했다.

여자가 부드러움(柔)을 버리고 강(剛)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장점을 버리는 것과 같으며 자신의 단점으로 남자의 장점과 다투는 것이다. 때문에 원래 있던 아주 많은 자신의 본색(本色)을 잃는다. 여자들은 공부하고 일을 하는 외에 현모양처가 되어야 하며 또 자식을 낳고 길러야 하기에 자신이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여자들은 또 남자로 되어 힘겨운 싸움을 치러 관문을 돌파해야 하며 동시에 여자로서 전통적인 역할도 해야 한다. 중국 여인 스스로도 이런 압력을 느끼며 여자 노릇하기가 정말 힘들다고 느낀다.

“남녀는 차이가 없다”는 관념은 중국에 음성양쇠(陰盛陽衰) 현상을 초래했다. 이런 종류의 당문화가 만들어낸 여성상이란 바로 류후란(劉胡蘭), 리톄메이(李鐵梅), 장누이(江姐), 아칭 아줌마(阿慶嫂) 등이다. 그녀들은 저마다 눈을 부릅뜨고 바람이 일 정도로 힘차게 걸으며 말을 할 때는 기세가 높고 목소리가 크다. 중국 고대 여인들의 온정(溫情)적인 면은 인위적으로 버려졌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여성들도 스스로 책, 신문, 영화, 텔레비전에서 발견한다. 일본, 한국, 대만 여인들은 중국 여자들보다 더 꾸밀 줄 알며 더욱 여성스럽다. 당문화의 지도하에서 여자가 남성화되는 과정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특성을 잃었으며 난폭하고 무지막지하게 변했으며 여성이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핵심은 바로 남자와 싸워 이기는 것이라는 과격한 관념이 강조되었다. 이리하여 오늘날 여성으로서 특징을 잃어버린 수많은 여자들이 만들어졌고, 남녀 사이 악성(惡性) 경쟁, 결혼과 가정 관계의 긴장을 조성하였다.

당문화에 의해 변이된 혼인으로 이룬 가정에서 사람들이 정신적인 귀속감을 느끼기란 매우 어렵다. 여자들이 세상의 절반을 떠받치기 위해 남자가 할 일을 하다 보니 남자처럼 사납게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집에서 서로 지지 않으려 하고 서로 아귀다툼을 하여 가정은 따스한 온기를 잃어버렸다. 남자는 여자가 전혀 여자답지 않다고 탓하고 여자들도 자신의 남편이 강하지 못하며 칠칠치 못함을 한스러워한다. 여자들에게 눌린 남자들은 사내대장부의 존엄을 지니지 못하며 공처가로 되어버린다. 많은 남자들은 집에서 남자의 존엄을 실현할 수 없기에 곧 밖에 나가 남자를 존중하고 순종하는 여자를 찾는다. 이것은 결국 더욱 많은 모순을 조성하게 되며 사람들은 결혼의 책임에 대해 더욱 냉담해졌다. 현재 중국의 높은 이혼율과 각종 혼외정사의 범람은 가정이 당문화에 의해 파괴당한 것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

“남녀는 차이가 없다”는 것은 또한 여성의 옷차림에서도 나타난다. 마오쩌둥은 일찍이 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옷단장을 즐기기 않고 무장(武裝)을 즐기네.” 사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천성이며 여자는 더욱 그렇다. 중국 여자들이 도대체 무엇을 즐기는가 하는 문제를 어찌 공산당의 남성 두목이 결정할 수 있겠는가? 지난 몇십 년 동안, 중국 여인들은 단지 세 가지 색깔의 옷만 입을 수 있었는데 바로 파란 색, 검은 색, 회색이었다. 옷 모양도 레닌 식 복장, 녹색 군복 등 몇 가지에 불과했다. 누가 만약 무늬가 있는 옷을 입기만 하면 가벼운 경우는 비평을 받았고 심한 경우는 비판을 받았다. 공산당은 일찍이 사람들을 파견해 여자들의 하이힐 굽을 잘라버렸고, 좋은 천으로 만든 바지를 가위로 잘라버렸다. 외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중국 여자들의 옷차림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그들은 중국이 가난하다 못해 여인들이 치마도 입을 수 없어 남편의 옷을 입고 거리에 나온 것으로 여겼다 .

지금은 중국 사람들의 옷이 이전보다 비록 다양해지긴 했지만 당문화가 주입한 관념은 여전히 완고하게 작용을 발휘하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중국 여인들의 옷차림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으며 말투가 거칠고 이해심이 부족하고 행동이 무례하다. 부드럽고 우아하며 단정하고 세심하며 살뜰한 여성미의 체현은 공산당의 파괴로 인해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

5. 자연과의 투쟁 및 당이 지시하기만 하면 언제 어느 곳이든 투쟁

1) 자연과의 투쟁

자연재해란 말만 하면 우리 머릿속에는 저절로 가뭄과 싸우고 홍수와 싸운다는 이런 생각이 튀어나온다. 사람들이 줄을 지어 벽을 만들어 제방 둑을 쌓고 사람이 있는 곳에 제방도 있다고 하면서 사수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자연에 대한 공산당의 태도는 “하늘과 싸우고 땅과 투쟁하는” 것이다. 당문화의 영향으로 많은 중국인들은 자연재해를 반드시 이런 식으로 대항하고 대처해야 한다고 믿는다. “자연을 개조하고”, “천지와 투쟁하는” 것을 영웅적인 기개로 해석한다. 그런데 혈육의 몸으로 홍수와 생사를 건 투쟁을 벌여 여기저기를 막지만 위험한 상황은 여전히 끊임없이 닥치고 홍수는 여전히 제방을 터뜨리니 대자연이란 사람이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재해를 대함에서 중국 고대의 “대우(大禹)가 물을 다스린 일화”와 도강언(都江堰) 공정은 후세인들에게 아주 좋은 계시이다.

대우가 물을 다스린 이야기는 우리 모두 아주 익숙히 알고 있다. 우의 아버지 곤(鯤)은 물을 다스리기 위해 “막는” 방법을 채용했지만 “9년이 되도록 홍수가 그치지 않아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대우는 “소통”하는 방법으로 물을 다스렸는데 산을 만나면 산을 가르고 둑을 쌓고 도랑을 치고 물의 흐름에 따라 인도하여 결국 바다로 흘러들게 했다.

유네스코에서 인정한 “세계문화유산”인 고대 수리 공정 “도강언(都江堰)”은 인류 문화의 정화라고 할 수 있다. 천서평원(川西平原)에는 도강언이 있기에 물난리가 수리(水利)로 변해 비옥하고 부유해졌으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천부지국(天府之國)”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이다. 가장 신기한 것은 2200여 년이나 지났음에도 줄곧 천서평원을 적셔주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천부지국을 기르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에 이렇듯 오랜 생명을 가진 공정은 아직까지 없었다.

도강언은 민강(岷江) 중간의 어취(魚嘴)를 분수령으로 하는 둑을 포함하는데 민강을 내강(內江)과 외강(外江)으로 나누었다. 이 둑은 홍수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강 중간에서 홍수를 저절로 4:6으로 나누어 흐르게 한다. 장마철에는 외강 대 내강의 비율이 6:4가 되지만 갈수기에는 반대로 내강이 6에 외강이 4로 변한다. 내강으로 흘러들어 오는 물은 “보병구(寶?口)”로 들어가 동으로 천서 평원에 관개한다. 보병구로 흘러들어오는 수량을 진일보로 통제하기 위해 어취의 꼬리 부분에 물을 가르는 데 사용하는 물탱크와 “비사언(飛沙堰)”을 만들어 홍수 방지용으로 썼다. 만약 내강의 수위가 너무 높으면 홍수는 평수 탱크를 거쳐 비사언을 천천히 넘어 외강으로 흘러드는데 이렇게 하여 내강 관개 구역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한다. 비사언을 넘어 외강에 흘러든 물의 소용돌이 작용은 보병구 주변에 모래가 쌓이지 않도록 보장한다. 도강언의 전반 공정은 중국 선인들의 자연에 대한 순응과 “천인합일” 사상을 충분히 체현했으며 자연과 싸우지 않고 자연의 힘을 지혜롭게 운용하여 해로운 것을 이롭게 만들어 자연과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갔다.

현대 서방국가에서는 홍수지역의 물을 나누어 저장하는 방법을 채용해 홍수 위협을 감소시켜 사회, 경제, 생태환경에 대한 파괴가 가장 적으면서도 홍수피해 방지 비용을 가장 낮게 했다. 이 역시 추세를 거스르지 않고 세력에 따라 유리하게 이끈 것이다. 또한 일반 주민들에 대한 표준적인 홍수 방지 조치는 대피시키고, 사전에 보험에 들게 하며, 가산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 가급적 손실을 줄이는 것이지 중공처럼 대자연과 억지로 싸우면서 천리를 거슬러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 외, 중국의 옛사람들은 천재지변이 나타나는 것은 국가가 도를 잃은 행위에 대한 경고이자 집권자와 백성들에게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재앙이 닥칠 것임을 경고하는 것으로 여겼다. 상(商)나라를 세운 탕(湯)임금이 왕위에 오를 때 천하에 큰 가뭄이 들었다. 이에 탕 임금은 상림(桑林)에 제단을 차리고 하늘에 기도를 드리며 자신의 행위를 반성했다. 그러자 가뭄이 풀렸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탕도상림(湯禱桑林 탕 임금이 상림에서 기도를 드렸다는 말)의 유래이다.

대우가 물을 다스린 것이든 도강언이든 또는 탕 임금이 상림에서 기도를 드린 것이든지 막론하고 모두 천재(天災)에 대한 중국 전통문화의 태도를 반영한다. 형세에 따라 유리하게 이끄는 것과 덕을 닦고 재앙을 없애달라고 비는 것은 천리와 자연법칙에 순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공은 무신론을 신봉하면서 줄곧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진행해 왔으며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하다”고 허풍을 떨었다. 당연히 자연재해를 자신의 폭정에 대한 경고로 여기지 않았으며 개과천선할 생각은 더욱 하지 않았다. 중공이 상용(常用)하는 나라를 다스리는 수단은 또한 투쟁사상의 지도를 깊이 받았기 때문에 자연재해에 대항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다른 한편 중공은 유물론의 영향으로 자연계가 가져다 줄 눈앞의 경제적 혹은 농업의 이익에만 신경을 쓸 뿐 객관적이며 가장 기본적인 생태법칙마저 소홀히 하면서 자연을 개조하거나 이용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바로 이런 사상의 지도하에서 공산당은 “대공정(大工程)”을 벌리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데 전국의 인민을 동원해 소란을 떤다. 사람들 앞에서 무소불능(無所不能)의 힘을 보여주고 자신의 담이 크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중공은 어리석게도 “호수를 막아 밭을 일구고” “산림을 불태워 밭을 일구며” “풀을 없애고 밭을 일구어” 중국인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손실과 생태적인 재앙을 안겨 주었다.

장강(長江)을 예로 들자. 중국은 자고로 황하에는 재해가 있어도 장강에는 없다고 했다. 그만큼 황하는 늘 범람하여 재난을 일으켰지만 장강에는 물난리가 드물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장강 상류에 있는 원시림에 약 4000억㎥에 달하는 저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후 원시림을 멋대로 벌채하여 저수 능력이 1000억㎥로 줄어들었다. 즉, 3000억㎥의 저수 능력을 중공이 파괴한 것이다. 이는 싼샤 공정(싼샤 댐의 저수 능력은 300억㎥도 안 된다) 10개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이다. 또한 중공이 호수를 막아 밭을 만드는 바람에 장강 중하류 지역에서 50년 동안 없어진 호수 면적은 약 1억 2천㎢에 달하며 이는 중국내 5대 담수호 면적을 다 합한 것보다 많은 양이다. 물을 다스리는 데에서 나무를 심고 숲을 조성해 수토(水土)를 완전하게 보전하는 방법이 있으며 이는 “호수로 밭을 만드는” 인공적인 파괴방식을 포기하여 실현할 수 있다. 하지만 중공의 당(黨)문화 사전에는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없다.

중공은 내몽골에서 풀을 뽑아 밭을 일구기 위해 천년이 넘도록 형성된 나무들을 태워버리고 종자를 뿌려 농사를 지었다. 첫 3년 동안은 토양 위에 쌓인 부식층 때문에 비료를 주지 않아도 대풍을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재미는 3년을 넘지 못했다. 농작물은 수토(水土)를 붙잡아두는 기능이 없어 거센 바람과 비에 씻겨 순식간에 사막이 되어 버렸다. 거대한 면적의 천년 초원이 3년간의 황무지 개간으로 거의 다 훼멸되어 자손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큰 면적의 사막과 태양을 가리는 모래바람만 남겼다.

중공 신장(新疆) 병단(兵團)은 알칼리성 토지에 농작물을 심기 위해 한 무(畝)당 수천㎥의 물을 소비하여 소금을 씻어냈다. 즉 토지를 반복적으로 물에 잠기게 해 포화되게 하면 아래로 스며든 물이 경작지 층의 알칼리를 토양 심층으로 내려가게 한 것이다. 그러나 2, 3년 후, 지하의 수위가 상승하면서 알칼리를 지면 위로 되돌려 경작지는 더는 쓸모가 없게 되었고 원래 있던 나무들이 모두 없어져 사막만 남았다. 중공은 50년대에만 이런 방법으로 200만 무에 이르는 사막을 조성했다. 타리무하(塔里木河)의 수위가 내려가 결국 하천이 말라버렸고 원래 하천을 따라 관개했던 녹주(綠洲)도 황무지로 변했다. 이 역시 중공이 인위적으로 초래한 만회할 수 없는 생태 재앙이다.

이뿐만 아니라 중공이 길러낸 소위 ‘과학자들’은 원자탄으로 히말라야 산맥을 폭파해 너비 50km의 구멍을 내 인도양의 따뜻한 습기를 네팔을 거쳐 청장고원으로 끌어들이자는 정신 나간 의견을 제출한 바 있다. 이런 발상의 근원 역시 ‘하늘과 싸우고 땅과 투쟁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이런 자연관의 영향 하에 사람들은 경제적 이익이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무절제하게 자연환경을 파괴하여 오늘날 중국의 각종 자연재해와 환경문제를 조성했다. 홍수와 싸우고 가뭄과 싸우는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일이 발생할 당시의 드높은 기세를 보는데 이미 습관이 되었지만 도리어 자연재해를 조성한 원인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다. 실제로 현재 중국의 각종 환경문제를 조성한 근본 원인은 바로 ‘하늘과 싸우고 땅과 투쟁하는’ 중공의 당문화 사유이다.

2) 당이 지시만 언제 어디서든 투쟁

장시간에 걸친 당문화의 주입으로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당이 지시하면 어디든 가서 싸우는데’ 사람마다 계급투쟁의 관념이 있다. 구체적인 표현을 본다면, 당에서 일단 어느 군중에 대해 ‘성격을 규정(定性)’하거나 심지어 약간의 암시만 해도 전 사회가 주동적으로 박해에 참여하거나 혹은 당에 의해 ‘이색분자’로 규정된 군중을 경시하거나 멀리하며 공격당한 피해자에 대해 경계하고 두려워하거나 냉담하다. 아울러 민중들의 발언과 행동은 또 진일보로 중공이 선양하는 “광대한 인민 군중의 지지를 받는” 근거가 된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 중공은 이제 계급투쟁을 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사상은 모두 사업과 돈벌이에만 집중되어 대부분 정치의식이 냉담하며 일상생활에서는 당문화의 영향이 크지 않다고 여긴다. 또 어떤 사람은 오랜 동안의 정치적 시련을 통해 일찍부터 당문화의 실질을 보아냈기에 중공의 정치운동에 염증을 느껴 자신은 당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여긴다.

사실, 중공이 지난 몇십 년 동안 발동한 사람을 괴롭히는 잔혹한 투쟁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에게 파급되었다. 무신론과 투쟁사상을 기초로 하는 당문화는 사회에 널리 퍼졌고 몇 년에 한 번씩 반복되는 투쟁형식과 결합되어 사회 전체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활 속에 침투되었다. 사람들은 기만당하거나, 충동적이며 맹목적으로 중공을 따라 악한 짓을 하거나 혹은 생존과 이익을 위해 주동적으로 중공을 따라 사람을 괴롭히거나, 혹은 어쩔 수 없이 중공의 운동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지 않거나 혹은 염증을 느껴 관련된 사실을 알려 하지도 않는다. 사실 이는 모두 직간접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사상통제를 강화하려는 중공에게 협력하는 것이며 당문화의 작용 속에서 자각적이거나 비자각적으로 중공의 지휘봉에 따라 춤을 추고 돌격하는 것이다.

(1) 맹목적으로 중공을 따르면서 ‘당이 지시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워’

이런 정황은 오늘날 역사에 대해 좀 아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비교적 친숙한 것이다. 1950, 60년대에 중공이 고취한 ‘인간천당’이란 몽상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고 있으며 게다가 중공이 일관적으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이 위대하다고 거짓 선전을 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중공의 호소에 충동되고 기만당해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아주 많은 괴상한 짓을 해왔다.

예를 들면 중공이 인민공사를 만들 것을 호소하자 사람마다 피가 끓어 “공산주의로 달려들어” 가고자 했다. 몇 달 동안 인민공사의 물결이 농촌을 집어삼켰다. 집집마다 모두 저장했던 식량을 아무 대가 없이 식당에 바쳤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들에는 굶어 죽은 사람들로 넘쳐나는 참극이 발생했다.

중공은 강철 제련을 큰 폭으로 늘렸고 전국적으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이것을 가장 큰 임무로 여겨 모두들 강철을 제련하러 갔다. 시골 사람들은 가마솥을 부쉈고, 도시 사람들은 철창을 뜯거나 스팀 파이프를 뜯어냈으며 흙으로 만든 용광로에서 몇 백만 톤에 달하는 아무 쓸모도 없는 폐철을 제련해 냈다. 동시에 아주 많은 농민들은 농사를 내팽개치고 ‘광산을 찾아’ ‘강철을 제련’하러 떠났다. 들판에 무르익던 수많은 농작물들이 썩어 들어가도 아무도 거둬들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추산한 바 쓰촨(四川)성에서만 ‘버려지고 낭비된 양식이 총 생산량의 15% 즉, 220만 톤’에 달한다고 한다. 허난(河南)성에서는 50%에 이르는 곡식을 버려놓아 수확하지 못했다.

중공은 4가지 재해 제거를 제출했고 이에 참새마저 ‘전투’ 대상이 되었다. 남녀노소가 빗자루를 휘두르고 솥과 사발을 두드리며 고함을 질러댔다. 공장에서는 기적을 울리고 자동차는 경적을 울렸는데 참새 떼들이 놀라 달아났고 땅에 앉을 곳이 없어 결국 놀라서 죽고 지쳐서 죽었다. 하지만 참새 숫자가 줄어들자 도리어 해충이 크게 증가해 큰 흉작을 조성했고 기근은 더 심해졌다.

당이 지시하기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운다. | 에포크타임스

1968년 마오쩌둥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발표했다. “지식 청년들이 농촌에 가서 빈하중농(貧下中農)의 재교육을 받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이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피가 끓어올라 수백만에 달하는 도시의 대학과 중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부모, 친척과 고향을 떠나 농촌과 변두리로 가서 “하늘과 싸우고 땅과 투쟁하면서” ‘혁명’의 새로운 고조를 지속시켰다(사실상 변칙적인 노동 개조를 받은 것이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중공은 ‘네 가지 낡은 것’ 을 파괴하도록 고취했고 사찰, 도관, 불상과 명승고적, 서화, 골동품은 곧 때려 부술 대상이 되었다. 무수한 문물들을 태워 버렸고, 유명인들의 조상 묘지, 죽은 사람의 유골마저 ‘혁명’의 투쟁 목표가 되었다. 공자, 왕희지(王羲之), 악비(岳飛), 해서(海瑞), 장거정(張居正), 원숭환(袁崇煥), 포송령(蒲松齡) 등. 어쨌든 역사 서적에 이름이 올라간 사람이라면 묘를 찾아내 1966년에 전부 다 파헤쳤다.

중국 불교의 발상지인 백마사도 공산당의 파괴를 면할 수 없었다. | 에포크타임스

중공은 자본주의의 꼬리를 자르기 위해 농민들이 텃밭에서 키우던 채소, 과일, 가축을 죄다 빼앗아 갔다. 어떤 농민들은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남몰래 계란을 내다 팔아 생활 용품으로 바꾼 것조차 ‘자본주의의 꼬리’로 고발당했다.

이런 것들은 미친 듯한 파괴력과 황당한 행위를 하게 했다. ‘당이 지시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운다’는 것과 이런 맹목적인 투쟁정신은 긴밀히 연계된 것이다.

(2) 생존과 이익을 위해 ‘당이 지시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워’

세 가지 전형적인 상황이 있다. 먼저 첫째는 각급 정부, 사법(司法), 집행, 감독 기구의 관리, 기층 직원들로 중공의 ‘정책’을 집행하는 도구에 해당한다. 중공이 당근과 채찍을 이용해 그들을 협박하면 그들은 중공을 따라 악한 짓을 한다. 중공은 한편으로 완고한 지시를 층층 아래로 전달하여 이를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관직에서 쫓아낸다. 다른 한편 중공은 또 음으로 양으로 장려하는 방식을 채용해 물질적인 수단으로 양심을 위배하고 중공을 따라 악한 짓을 하는 자들을 부추긴다. 중국인들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도처에서 모두 탐관과 부패를 욕해 왔다. 그러나 중공은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인사, 민간 신앙을 탄압할 결심과 능력이 있고 매체, 인터넷을 봉쇄할 능력도 있지만 부패만은 근절하지 못한다. 그 원인은 바로 중공이 각급 관리들에게 탐오와 부패의 기회를 주고 이런 음성적인 장려를 통해 그들이 중공의 지휘에 따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탄압하도록 부추기고 정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민중들은 경찰, 도시 관리인원들이 제멋대로 행패를 부리고 온갖 나쁜 짓을 저지르는데 대해 모두 아주 분개한다. 인터넷 조사를 해보면 네티즌치고 그들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원인은 바로 중공이 이런 기층 인원들에게 불법적인 수단으로 ‘수입을 챙길’ 기회를 줌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도록 부추기고 필요시 ‘당이 지시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울 수 있게 한’ 데에 있다.

예를 들면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후 처음에 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북경에 상방(上訪)하러 갔다. 그러자 중공은 각 지역의 상방인원 수로 현지 ‘치안상황’을 가늠하는 지표로 삼았고 각 지역 관원, 경찰들은 전력을 다해 상방 인사들을 체포하여 체벌을 가하거나 혹형, 벌금으로 파룬궁 수련생들을 협박하며 더 이상 상방하러 가지 않겠다는 보증을 서게 했다. 직장에서도 한 사람이 상방하면 온 직장의 상여금을 없애는 등의 방식으로 사람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파룬궁 수련생을 증오하도록 만들었다.

“이래도 파룬궁을 연마할래?” “전향하지 않으면 태워버려!” :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중공의 잔혹한 박해. | 에포크타임스

이 외에도 중공은 파룬궁 수련생들의 전향 비율을 높이기 위해 이를 각급 감옥, 노교소, 구치소의 성과 지표로 삼았다. 이 때문에 수많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이들 기구에서 고문과 시달림을 받았고 심지어 학살당하기도 했다. 고문에 가담한 아주 많은 관리와 경찰들이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우리도 방법이 없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직장을 잃는다.”라고 말했다. 각 지역의 610사무실이 파룬궁 수련생에게 불법적인 벌금을 진행하는 것은 이미 흔한 일이다. 아울러 2001년 이후 많은 노교소, 감옥과 병원이 결탁하여 파룬궁 수련생의 생체에서 장기를 적출한 후 폭리를 챙기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제 1선’에서 중공의 박해정책을 충실히 집행하는 자들에게 주는 음성적인 장려이다.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가해지는 각종 고문들. | 에포크타임스

다른 한편 중공은 사회 자원을 전면적으로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계는 이미 당의 지휘에 복종하는가에 긴밀히 연계되었다. 정치적인 풍향을 예의주시하고 당이 금기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은 중국인들이 생활 경험이 되었다. 예를 든다면, 중공 매체, 각급 관원이 백성들의 생명과 관계되는 큰 일에 부딪혔을 때, 예를 들면 조류독감(AI), 사스, 쑹화(松花)강 오염사건 등에서 ‘당중앙’이 태도를 표시하기 전에는 일률적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켜야 하며 소식을 봉쇄해야 한다. 원래 돌림병 상황을 발견할 때는 일찌감치 격리 조치를 취하고 민중들에게 통지해야 하며, 오염을 발견했다면 빠른 시일 내에 오염의 영향을 받는 모든 지역에 통보하여 대책을 세울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모두 무슨 높고 깊은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며 오직 양심만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중공 매체, 관원들은 이런 관건적 시각에 자신이 틀리게 말할까 봐, 당 중앙과 일치하지 못하여 밥그릇을 뺏기고 직장을 잃을까 봐 두려워 차라리 양심을 위배할지언정 중공의 지휘를 따른다.

‘당이 지시하기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운다’는 것에는 또 한 가지 표현이 있다. 바로 ‘당’의 선호가 조작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한 표준이 있을 때에도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좌파가 될지언정 우파가 되진 않는다”는 것인데 표현되는 것은 당의 표면적인 요구보다 더 지나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중공은 인터넷에 어떤 명사가 들어 있는 문장을 봉쇄해야 한다는 명확한 규정이 없음에도 많은 사이트에서는 흔히 자체적으로 매우 큰 봉쇄 범위를 정해 놓았다. 예를 들면, ‘자유’, ‘대만’, ‘독립’ 등의 단어가 들어간 문장은 설령 중공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일지라도 많은 사이트에서 이 단어들은 봉쇄 대상에 속하는 키워드이다.

둘째는 공개적인 ‘비판투쟁대회’ 등을 이용해 민중들의 ‘혁명열정’을 선동하는데 모두 다 모인 열광적인 분위기 속에서 많은 민중들은 비판 받는 대상이 마을에서나 지역에서 좋은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입장이 견정함을 표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투쟁과 적발’에 참여한다. 예를 들면 중공이 정권을 탈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동한 ‘토지개혁’, ‘반혁명 진압’ 운동은 늘 ‘군중비판대회’를 채용했다. 당에서 먼저 성질을 규정한 다음 민중들을 선동해 ‘기소’하게 하며, 곧 이어 마음껏 처결하게 하는 것이다. 흔히 현지 중공 ‘지도자’가 머리를 끄덕이기만 하면 아래 민중들은 이에 호응해 “죽여라!”라고 말하는데 즉 때려 죽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격앙된 군중 정서 가운데 감히 ‘지주’, ‘반혁명 분자’에게 동정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다.

셋째, 중공은 운동 가운데 먼저 한 패의 이른바 ‘죄악이 극히 큰 자들’을 탄압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매 사람을 협박하여 자아 ‘고백’과 ‘반성’을 시켜 이른바 ‘자백하면 관대히 처리하고 항거하면 엄격히 처리’한다. 고발하면 상을 주고 공을 세우면 속죄시킨다’는 정책을 선포하여 사람들이 빨리 고비를 넘어가려는 심리를 충분히 이용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게 하고 혹은 기회를 엿보아 투기적으로 고발하게 하여 남을 해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성을 왜곡한 것이며, 친지, 친구, 동료를 ‘검거하고 고발’하여 자신의 입장이 ‘당과 한편’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게 한 것이다. 일찍이 중공이 ‘옌안 정풍운동’, 1952년에 ‘자본가’를 겨냥해 발동한 ‘오반(五反)’ 운동 같은 것들은 모두 이런 수법을 채용하여 사람들이 ‘고비를 넘기기 위해’ 서로 고발하게 했다. 1957년의 ‘반(反)우파’ 운동은 우파 지표를 각 단위에 할당하는 방식을 채용해 여러 사람들에게 동료를 고발하도록 강요했다.

(3) 무관심도 ‘당이 지시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우는’ 것

몇십 년 동안 운동을 겪으면서 사람들의 사상은 더욱 복잡하게 변했다. 공산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고, 당 두목에 대한 광적인 개인숭배도 자취를 감췄으며 공산당의 거짓, 사악, 투쟁도 많은 사람들이 보아냈다. 지금 공산당이 정치 운동을 발동할 때 상대하는 백성들은 과거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사람들은 이제 공산당의 정치투쟁에 말려들기 싫어하며, 마음속으로 나쁜 생각을 품고 정치 자본을 얻으려는 소수의 나쁜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군중들은 이런 운동에 더는 적극적으로 뛰어들려 하지 않는다. 아울러 자신은 아주 ‘초연’하다고 느끼는데 사실 이런 ‘초연함’은 바로 사건의 세부적인 정황과 옳고 그름에 대해 탐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의 해명이나 관련 사실을 알아보려 하지 않으면서 자신과는 무관하며 쓸데없는 일에 관여하는 것보다는 삼가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이는 ‘당이 지시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운다’는 것의 일종 간접적인 표현이다. 당문화 중에서 사람들이 당을 믿지 않고 당을 싫어하며 정치를 싫어하기 때문에 도리어 ‘당이 지시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운다’는 황당한 일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중공은 한편으로 휘말려들고 싫어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수수방관하며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은 듯이 표현하기를 바란다. 비유해 말하자면 한 패의 도적들이 버스에 올라 강탈하고 강간할 때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바로 전체 승객들이 모두 귀머거리와 소경이 되어 그들이 악한 짓을 할 때 아무런 압력과 거리낌도 받지 않는 것이다. 아울러 피해자는 절망을 느껴 격렬한 반항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중공이 견해가 다른 사람, 민간의 인권수호 인사, 민간 신앙에 대해 탄압하는 것을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여기거나 심지어 개인의 양지, 도덕적 책임을 버리고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청렴하고 고상한 인물’이 된다면 중공은 민간에 대한 탄압을 더욱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당문화 중에서는 사실 진정으로 ‘초연’하기란 아주 어렵다. 공산당은 절대로 진정한 ‘초연’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당신은 늘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을 읽으며, 라디오를 들을 것이며, 인터넷을 볼 것이 아닌가? 이렇게 큰 나라에서 모두 중공의 선전인데 당신이 듣지 않으려 해도 할 수 없다. 직장, 학교, 향촌(鄕村)과 가도(街道) 위원회도 모두 당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통로이다. 사람들은 날마다 정치 속에 잠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던’ 사람이 일찍부터 저마다 모두 ‘정치가’로 되었다. 이때, 만약 중공에 반항하여 그로부터 중공의 정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도리어 소극적으로 중공에 협력한다면 그것은 사실 바로 자신의 ‘정치적 면모’를 충분히 펼쳐 보인 것으로 거기에 무슨 ‘초연’한 것이 있는가?

공산당의 공세가 오기만 하면 자신은 ‘초연’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초연’을 표현한다. 당이 태도 표시를 하라고 하면 곧 태도 표시를 하고, 서명하라고 하면 곧 서명하며, 당에서 누가 나쁘다고 하면 곧 따라서 나쁘다고 말한다. 당이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면 곧 하지 않으며, 당이 누구와 결렬하라고 말하면 곧 결렬하며, 당이 누구의 성격을 규정하면 곧 그와 감히 접촉하지 못한다. 심지어 중공이 주입하는 거짓말을 들을지언정 피해자의 진실한 상황을 감히 알아보려 하지 못한다. ‘초연’은 당과 투쟁하지 않는 것이며 당이 시키는 대로 하는 ‘초연’이며 당이 어디로 가라고 하면 곧 가서 싸우는 초연이다. 이런 ‘초연’은 ‘정치화된 초연’에 불과하거나 ‘초연의 정치화’라고 할 수 있으며, 중공 정치에 참여하는 또 다른 한 가지 형식일 뿐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침전되어 내려온 각종 당문화 요소가 새로운 시기에 종합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의아해 할 것이다. 자신은 정치에 대해 반감을 가진다고 여기면서 진작부터 ‘당이 어디로 가라고 하면’ 곧 ‘가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도리어 ‘어디로 가서 싸운다’고 하는가? 사실 바로 이러하다. 사람들은 지금 문화대혁명이 얼마나 가소로운가 하고 느끼며 오늘날 자신은 절대 그런 바보가 되거나 그렇게 정치화되지 말아야 하며 무슨 파벌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정치적인 격정이 공산당에게 이용당해 문화대혁명과 같은 이런 비극이 발생했다고 여긴다. 지금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반감과 냉담은 마땅히 더는 이런 황당한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보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천지를 뒤덮을 듯한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보라. 사람마다 모두 문화대혁명의 재현이라고 느끼고 있으며, 아울러 그 선전 비방과 요언 날조, 원한을 선동하는 공세는 현대화된 언론 매체까지 이용하여 문화혁명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 만약 과거의 운동이 사람들의 맹목적인 정치 열정을 이용한 것이라면 오늘날 중공이 정치 운동을 추진하는 것은 아주 큰 정도에서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과 공포,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소위 초연한 태도에 의지한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결과는 모두 ‘당이 지시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싸운다’이다. 이것은 민중을 박해하고 학살하는 중공의 행위가 목적을 달성하도록 한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이른바 초연과 정치에 대한 이른바 ‘무관심’은 중공의 박해가 더욱 손쉽게 이루어지고 더욱 참혹하게 전개되게 했다. 특히 중공이 공공연한 박해에서 몰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것으로 변경한 후에는 더욱 음험하고 악랄한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중공을 해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탈퇴하는 것. | 에포크타임스
“우리 영감은 파룬궁을 연마한 적이 없는데?” “종이에 적힌 대로 읽기만 하면 치료비를 무료로 해준다니까요.” : 중공 CCTV의 날조 | 에포크타임스

중공의 정치는 마치 고속으로 달리는 기차와도 같아 당신이 그 안에 앉아 있기만 하면 당신은 곧 기차의 일부분이 된다. 당신이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지, 주동적으로 움직이든 피동적으로 움직이든 상관이 없다. ‘초연’은 비극의 발생을 피할 수 없으며 오로지 사람들이 중공 당문화의 울타리를 모두 뛰쳐나와 중공의 정치 박해에 협력하지 말고 중공을 탈퇴하여 중공을 해체시켜야만 비로소 근원으로부터 문화혁명의 재현을 근절할 수 있다.

(4) 계급투쟁 관념의 작용과 표현

‘당이 지시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운다’에서 ‘싸운다(打)’는 글자에는 연구할 만한 것이 있다. 그것은 중공 계급투쟁 사유의 살아있는 모습이다. “동지에 대해서는 봄날처럼 따스하게 대하고 원수에 대해서는 엄동설한처럼 냉혹하다”, “입장이 확고하고 애증(愛憎)이 분명하다”는 말에서 보듯이 마치 싸우지 않고 투쟁하지 않으면 곧 다른 해결책이 없는 것 같다.

공산당은 애초부터 계급투쟁 이론을 건립했다.(『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다 계급투쟁의 역사이다.”고 함). 그 후 이 이론은 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 등에 의해 발전되었다. 중공이 통치권을 탈취하기 전에 계급투쟁 이론을 고취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당시 합법적인 정부를 뒤엎는 유일한 구실이었기 때문이다. 중공이 정권을 세운 후에도 끊임없이 계급투쟁을 펼친 것은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살육하기 위해서였다. 이른바 계급투쟁 이론은 당문화의 초석 중 하나이다.

투쟁철학은 전체 사회를 수시로 동원할 수 있는 준(準)군사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때문에 어떤 대규모 운동이든 상관없이 그 운동 속도는 모두 놀라울 지경이다. 당에서 지시하면 어디든 가서 싸우는 도구로 형상화된 군대 외에도 중공은 각종 사업영역을 모두 ‘전선(戰線)’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 역시 군사적인 관리로서 절대적으로 상명하복해야 한다. 오직 중공이 한 가지 목표 혹은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기만 하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순응하여 함께 움직인다. 사람들은 일상생활 중에서 늘 다음과 같은 말들을 보고 듣는다. 경제활동을 ‘××전투’라고 부르고 과학 연구를 할 때도 ‘공격전을 한다’고 하며 직장이 이동한 것을 ‘새로운 전장으로 달려간다’고 하며, 무엇이든 다 ‘공격하고’, ‘투쟁’하는 것을 지니고 있으며 억지로 강행하는 심태이다. 앞에서 제기한 ‘홍수와 싸우고 가뭄과 싸우는’ 등 자연재해를 대하는 문제에서도 봉쇄와 투쟁하는 방법을 채용할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문제와 모순에 대해서도 중공의 사유는 모두 ‘투쟁’과 ‘강요’이다. 어떤 사회 모순이든지 나타나기만 하면 중공은 폭력을 사용하여 ‘맹아 상태에서 소멸’해 버린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러하다. 중공이 진정으로 계급투쟁을 진행하여 사람을 괴롭히고 사람을 박해할 때면 표현이 더욱 사납다.

여기에서 제기할 것은 중공의 이른바 계급투쟁이란 ‘계급’간의 투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역사 반혁명’, ‘우파’, ‘주자파(走資派)’ 등 ‘계급원수’들은 투쟁받기 전에 이미 생산 수단에 대한 점유를 상실했음에도 공산당은 여전히 그들을 계급의 적으로 세워 놓는다. 이유라면 그들의 사상, 입장이 여전히 ‘무산계급의 대립면’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급’을 구분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사실 사람들의 사상이다. 사상이 중공에게 승인받지 못하면 일률적으로 계급의 원수가 되어 제거 당한다.

일찍이 생산 수단을 점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 투쟁을 받은 ‘자본가’들이나 오늘날 ‘기업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라도 오직 중공이 그 사상과 입장을 인정하기만 하면 곧바로 ‘무산계급’으로 구분될 수 있으며, 이른바 ‘무산계급의 선봉대’인 중공에 가입하여 중공 당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실업 노동자, 땅을 잃은 농민은 불안정 요소로 본다. 만약 그들이 감히 상방하여 억울함을 외치고 불만을 표현하여 중공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한다면 이 진정한 ‘무산계급’이라도 무력으로 진압할 수 있다.

오늘의 사회 속에서 ‘계급투쟁’ 의식은 더 광범위하게 밖으로 뻗어 나가고 있으며 표현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나 그 실질은 모두 모종의 표준에 따라 사회성원을 분류하는 것으로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견해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다. 생활 깊이 침투한 이런 ‘계급투쟁’ 의식의 구체적인 표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을 강요하여 자기 의도대로 일을 하도록 하며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다. 공격, 폄하, 다른 사람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상대방의 마음, 명예와 인격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며, 도리가 없고, 좋게 말하지 않는다. 남과 다투고 욕하며 싸운다. 권력을 사용하여 이익, 생활조건, 사람의 감정, 혹은 각종 사회관계와 통로를 통해 각종 방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압력을 가하고 상대방을 압도하며 굴복시킨다. 생활 중에서나 사회적인 문제에서 다른 사람을 거의 배려하지 않으며 적극적이고 건설적으로 일을 좋게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늘 쓰는 것이 투쟁과 파괴적이며 부정적인 수법을 지니고 있다.

매 개인은 개성, 재능, 사업, 가정상황, 재산의 많고 적음, 생활환경, 문화 배경이 모두 다르다. 인류사회는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 차이와 모순이 존재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이런 차이의 원인을 계급에 귀결시키고 투쟁의 방식으로 이런 차이와 모순을 해결하려 한다. 이리하여 중국인이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간단하게 변했고 검은 것이 아니면 흰 것이며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친구가 아니면 곧 원수가 된다. 사람의 사유와 행위는 본래부터 복잡하기에 완전한 대립과 완전한 일치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협력이나 인정도 모순이 없거나 혹은 서로 다른 견해가 없는 기초 위에서는 건립될 수 없다는 것을 간과했다. 구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서도 남을 배려하고 남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며 겸손한 것과 같은 중화민족의 전통적 미덕을 망각했으며 서양의 단체정신, 포용성과 다원화도 말할 나위가 못 된다. 조금이라도 부합하지 않거나 차이가 있어도 자연히 투쟁을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중국인들의 내부 마찰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깊은 체험이 있으며, 그 가운데 계급투쟁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만약 1980년대 이전에 발동한 정치 운동 중에서는 민중들은 동원하고 핍박하고 재물로 유혹한 후에야만 비로소 참여할 수 있었다면, 그 후 몇십 년 동안, 운동 속에서 사람들의 두려움이 점차 자라남에 따라, 중공이 투쟁사상을 주입하고 ‘당의 위대함’을 선전함에 따라, 중공의 지휘에 따라 춤추며 돌격하는 것이 점차적으로 중국인의 사상 방식에 녹아들어가기 시작하여 일상적인 사유와 행동의 자연스런 상태로 되어 버렸다.

결론

정치란 단지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아울러 제일 중요한 부분도 아니다. 당문화가 침범한 이후 중국인의 사생활은 강제로 정치로 끌려 들어갔다. 우리의 전통 명절은 폐지되거나 내포가 변질되었고 우리는 핍박에 의해 당이 배치한 명절을 쇠야 하고 당의 희로애락을 기념하는 축전을 우리 자신의 희로애락을 기념하는 것으로 삼아야 했다. 혼인 대사는 당이 주최해야 하고, 젊은이들이 결혼할 때도 천지와 부모에게 절하는 의식이 사라졌으며,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손님을 대하듯 서로 존경함을 표시하는 것도 없어졌다. 대신 당에 감사드리고 충성심을 표시하는 것으로 변했다.

우리가 홍수, 가뭄과 싸우고, 산아제한 문제를 토론할 때 마땅히 인식해야 할 것은 중공에게 과학적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중공이 아예 과학적인 정책결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공이 문제를 해결하는 지도사상은 과학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투쟁철학’이다. ‘홍수와 싸우고 가뭄과 싸우며 천지와 싸우는’ 것은 중공의 자연에 대한 태도가 바로 투쟁임을 반영한다. 인구 문제는 교육에 대한 투자와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완전히 해결할 수 있음에도 중공은 굳이 인도적이며 온화한 모든 방법을 버리고 살인과 강제로 출산을 억제했다. ‘남녀는 매 한 가지이며 세상의 반은 여자이다’를 선전하여 여자들을 남자와 경쟁하도록 선동했는데 그 배후에 자리한 것은 여전히 ‘투쟁(鬪)’이었다. ‘당이 지시만 하면 어디든 가서 싸운다’에서 ‘싸운다(打)’는 글자 역시 ‘투쟁’사상을 반영한다.

중공이 당문화 중의 투쟁사상,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란 사악한 설을 주입한 후 중국인들은 생활 속에서 투쟁사상으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습관화되었다. 모순에 부딪히면 생각하는 것이란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한다”나 “한 걸음 물러서면 가없이 넓은 경지”인 것이 아니라 강제, 살인, 군중운동 등 투쟁 수단이다. 자연계와 관련된 문제에 부딪치면 생각하는 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목을 꼿꼿이 세우고 하늘을 거슬러 행하는 것이다.

‘투쟁철학’의 근원을 깊이 파헤쳐 보면 중공이 무신론과 유물론을 선전한 것과 아주 큰 관계가 있다. 바로 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천지를 경외하지 않으며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투쟁사상이 널리 보급될 수 있었던 원인이다.

오직 당문화를 벗겨내야만 우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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