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당(黨)문화]제7장 생활 속의 당문화(상)

2007년 9월 11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13일

하편:당문화의 구체적인 표현 

【당문화 해체】 제7장: 생활 속의 당문화(상) 


목차

1. 중국 전통 책력을 농력(農曆) 또는 음력으로, 설을 춘절(春節)로 부름 

2. 전통 명절을 없애버리고 당 명절을 배치 

3. 결혼할 때 천지신명에게 알리는 대신 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 


위대한 문명은 모두 오랜 세월의 누적과 연화 과정을 거쳐 왔다. 5천년 중화(中華)문명 중에 여러 대(代)의 제왕이 서거했고 역대로 여러 왕조가 끝났지만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으며 백성을 사랑하고 재물을 아끼는 가치의 핵심만은 종래로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이런 가치의 지도하에 전통 중국 사회에는 다양한 사회부문이 존재하여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ㅡ생존 요구, 정서적 요구, 안전에 대한 요구, 정신적인 요구들을 만족시켰다. 정치란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며 사회란 사람에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그 역(逆)은 아니다. 종교 신앙, 윤리도덕, 풍속 습관, 이런 사회적 기본 내용은 정치에 대해 제약하고 인도(引導)하는 작용을 한다. 정권이 정의(正義)의 궤도를 이탈하면 사람들은 사회에서 공인하는 준칙으로 정권을 규범하거나 바로잡으며 심지어 정권을 뒤엎고(하늘을 대신해 도를 행함) 정권을 다시 세울 수 있었다. 공자는 “예를 잃으면 민간에서 찾아라(禮失而求諸野 역주: 한서 예문지)”라고 했다. 의미는 만약 조정에서 예의(禮儀)를 잃었다면 민간에 가서 찾으라는 것이다. 이처럼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사회에서 가치의 중요성은 정권보다도 더 크다.

중국 전통 문화의 심후(深厚)한 정신적 내포는 전체적으로 말해서 중국 전통 사회가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사회라는 것을 결정한다. 건강한 사회란 인민들의 심지(心智)가 건전한 것을 의미한다. 심지가 건전한 인민이라면 공산당의 우롱과 위협을 듣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공산당은 사회생활 중에서 전통의 요소를 전면적으로 뿌리 뽑고 당 문화로 대체해야 했다.

공산당 통치하에서 사회는 고도로 정치화되었고 정치는 고도로 일원화되었다. 공산당은 ‘불파불립(不破不立 역주: 낡은 것을 타파하지 않으면 새것을 세울 수 없다.)’, ‘대파대립(大破大立 역주: 문화대혁명 기간에 낡은 사상․사물을 철저하게 비판, 타파하고 새로운 사상과 사물을 단호하게 수립하자는 의미)’, ‘이풍역속(移風易俗 역주: 낡은 풍속과 습관을 고친다는 의미)’, ‘파구입신(破舊立新 역주: 사상, 풍습 등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대치한다는 의미)’을 내세한다. 이런 살벌한 구호 속에서 타파한 것은 5천년 유구한 중화문명이었으며 건립한 것은 중공의 사악한 당문화였다.

당문화로 빚은 만두 : 중공은 전통의 요소를 단절하기 위해 가정, 의식주, 관혼상제, 역법, 명절 등 과거의 모든 것을 타파하고 당문화로 대체했다. | 에포크타임스

어쩌면 자신은 당문화에 오염되지 않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텔레비전과 신문의 시사를 아주 적게 본다거나, 기본적으로 중공 정치 학습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중공이 실행한 것은 “당이 일체를 영도한다”는 것이지 “당이 일체를 영도하여 당신의 개인 생활을 덜어 주는 것”이 아니다. 당문화는 중국인들의 생활에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다. 1949년 중공이 정권을 잡은 이후 중국 대륙에 당문화의 독해를 받지 않은 곳은 없다.

중국사회에 대한 당문화의 파괴는 심각하고도 철저하다. 역법이나 명절, 관혼상제, 의식주, 심지어 가정과 양육마저 중공의 의도대로 변질되었다. 아래에서 몇 가지 간단한 예를 들어 생활 속의 당문화에 대해 토론해 보고자 한다.

1. 중국 전통 책력을 농력(農曆) 또는 음력으로, 설을 춘절(春節)로 부름

오늘날 중국인들은 전통적인 역법(曆法)을 농력(農曆) 혹은 음력(陰曆)이라고 부르며, ‘정월 초하루’를 춘절(春節)로 부른다. 여기에서 사용한 ‘농력’, ‘춘절’ 등의 설법은 뚜렷한 당문화의 함의를 지니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단지 한 명사의 변화로 보이지만 수천 년 역사의 전승은 이로 인해 단절되고 말았다.

1) 황력(皇曆)을 농력 혹은 음력으로 부름

중국인들은 역사를 아주 중시해 왔으며 역사에 대한 기재의 상세함과 정확함은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이나 혹은 아프리카와 비교해 볼 때도 차이가 몹시 크다. 이것은 물론 중국인들이 역사 기록에 대한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 특유의 역사 편찬의 이기(利器)인 기년방식(紀年方式)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역사”는 바로 “어느 해”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를 기재하는 것이다. 만약 기년(紀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곧 역사를 편찬하는데 아주 큰 장애를 초래한다. 바로 이 때문에 유럽의 역사에서 통일 역법(17-18세기)이 존재하기 이전의 연대는 모호하거나 심지어 혼란했던 것이다.

중국 전통 역법은 간지(干支)로 연도를 기록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소위 “간지”란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줄인 말이다. 이 중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를 10 천간이라고 하고,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를 12 지지라고 한다. 기년(紀年)은 순서에 따라 간지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오는데 갑자(甲子)를 시작으로 60년을 주기로 순환하는데 끊임없이 돈다. 이와 같은 간지 기년의 방식은 중국 역사로 하여금 연대를 정하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몇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중국인들은 여전히 아주 쉽게 중국 사서(史書) 중의 기년을 서기로 대응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중국인들은 월(月), 일(日)과 시간까지도 모두 간지로 기재했다. 바꾸어 말하면 천간과 지지에서 각기 한 글자를 이용하여 매 시각을 모두 연, 월, 일, 시의 간지로 표기할 수 있다. 때문에 모두 여덟 글자로 특정한 시간을 표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06년 6월 6일 아침 6시를 간지로 표기하면 병술년(丙戌年) 갑오월(甲午月) 병인일(丙寅日) 신묘시(辛卯?)에 해당한다. 만약 이 시각에 출생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생진8자(生辰八字 역주: 우리나라에서 보통 사주팔자라고 부르는 것)”는 바로 병술(丙戌), 갑오(甲午), 병인(丙寅), 신묘(辛卯)가 된다.

중국 최초의 역법은 헌원황제(軒轅黃帝)가 반포한 것이다. 헌원황제가 ‘인문초조(人文初祖)’로 존중받는 것에서도 역법에 대한 중국인들의 중시를 보아낼 수 있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기재된 황제,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와 순(舜)은 모두 역법을 수정했다. 순임금 시대에 사람들은 이미 일 년의 날짜 및 절기 구분에 대해 상당히 정확히 알고 있었다.

헌원황제의 초상 | 에포크타임스

지금 사람들이 사용하는 양력은 바로 태양력(양력으로 간칭)으로 그것은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주기를 기초로 한 것이다. 때문에 양력에서 달의 구분은 실제 달의 주기와는 관계없는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이슬람교 역법은 전형적인 태음력(음력으로 간칭)으로 그것은 완전히 달의 주기를 기초로 달을 정한 것이다. 이 경우 1년 12개월은 대략 354일이 된다. 그러므로 33년이 지나면 양력과 1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음양 평형을 중시한 중국 고인(古人)들이 제정한 전통 역법은 달의 주기와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 주기를 동시에 고려했다. 매월 평균 길이는 삭망월(朔望月)에 가까운데 ‘삭일(朔日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놓일 때 지구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날을 말함.)’을 매월의 초하루로 정했다. 그러므로 매월 중간에 ‘망일(望日 보름)이 있게 된다. 한편 윤달을 설치하여 일 년의 평균 길이를 실제 공전주기에 가깝게 했으니 이는 ‘음월양년(陰月陽年)’식의 음양합력이다. 이 역법은 매 년이 기본적으로 계절 변화에 부합할 뿐만 아니라 또 매 달의 날짜와 달의 주기를 서로 대응시킬 수 있다. 그 외에도 일찍이 순임금 시기에 계절 변화의 24절기(節氣) 구분을 이미 완성했다. 전통 역법 중의 절기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공전주기의 변화에 따라 결정하는데 이것은 태양력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중국 전통 문화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중시했고, 도가에서는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라고 여겼다. 때문에 천상(天象)에 대한 관측을 몹시 중시했다. 한(漢)나라 초기에 사마천(司馬遷)이 《사기》를 쓸 때 전문적으로 ‘천관서(天官書)’를 썼는데 별의 운행 규칙, 위치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영향 등 각 방면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한편 천간과 지지를 오행(五行)에 대응시킴으로써 방위, 색깔, 계절, 오장(五臟), 사회 구조 등에 진일보 대응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주역 예측학이 발달했다. 간지로 월(月)을 표기할 때에는 여기의 ‘월’ 역시 전통 역법 중에서 실제 달의 운행주기를 기초로 한 월이었다. 즉 주역 예측 역시 반드시 전통 역법을 기초로 한다.

역사적으로 한 황조(皇朝)가 건립된 후 황제가 새로 등극하거나 혹은 무슨 큰 일, 천재지변 등이 발생할 때면 모두 연호를 고쳤다. 그러므로 역법 속에 또 연호를 더했다. 예를 하면 우리가 잘 아는 ‘정관(貞觀)’, ‘영락(永樂)’, ‘강희(康熙)’ 등은 모두 연호에 해당한다. 전통 황조의 역서(曆書)는 모두 황제가 반포했기 때문에 황제의 연호와 연계되어 있었고 아울러 관방에서 출간했다. 때문에 전통 역법을 ‘황력(皇曆)’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최초의 역법이 황제(黃帝)로부터 내원한 까닭에 ‘황력(黃歷)’이라고도 부른다.

황력(皇曆)은 간지 기년, 24절기를 포함하여 매일의 길하고 흉함, 마땅함(宜)과 꺼림(忌), 혼례, 의식과 잔치(仪式庆典), 건축이나 이사, 일상생활, 제사와 장례 등의 방면과 관련된다.

중국 역법은 음양오행(陰陽五行) 사상을 충분히 체현했고 자연 순환의 운화(運化) 법칙 즉, 시공(시간과 방위)이 서로 움직이고 ‘음’과 ‘양’이 작용한 결과를 함축하는 동시에 우주의 상생상극, 화복(禍福)의 전환, 왕조의 변환, 순환왕복 등 법칙에 대한 중국 고인(古人)들의 이해를 반영하였다. 그 배후에 반영된 것은 도가 문화와 중국 전통 사회의 천지신명을 경외하고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人和)를 고려하는 가치관이다.

중국 역법은 음양 평형, 천인합일, 예측학의 내포로 인해 중공이 소멸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중국 역법과 음양오행. | 에포크타임스

중공이 정권을 잡은 후 ‘황력(皇曆)’이 전통 사회의 통치 질서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 중 아주 많은 예측학, 풍수 등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고 여겨 ‘황력’을 폐지했다. ‘황력(黃歷)’ 혹은 ‘하력(夏歷)’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역사를 돌아보게 할 수 있기에 중공은 전통 역법을 ‘음력’으로 부르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음력’이란 말은 마땅히 틀렸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중국 역법은 ‘음양합력’인데 ‘음력’이라고 부르면 전통 문화 중의 음양평형이란 관념을 깨뜨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공은 ‘음’이란 글자 역시 여전히 도가의 술어이므로 이 역시 수련의 내포를 지닌 것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중공은 1968년 ‘네 가지 낡은 것’을 없앨 때 전통 역법을 ‘농력(農曆)’으로 고친 것이다.
중공이 전통적인 황력을 농력이라고 부르자 사람들에게 일종의 착각이 생겼다. 마치 전통 역법의 역할이 농업에만 제한된 것 같고 농업에서만 쓰이는 것으로 여겼다. 이는 또한 중공의 유물론 원칙과도 일치하는데, 즉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하듯이 농업 사회에서 생겨난 역법은 그 작용이 농사에만 국한된다는 것이다. 마치 농민들에게만 쓸모가 있을 뿐 현대 사회와 다른 사람들과는 별로 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전통 역법은 이때부터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사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전통 황력의 작용은 절대로 농업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생활과 더욱 밀접한 부분이 있으며, 직접적으로 ‘천지인’의 관계를 반영하는 것을 포함하여 천간과 지지를 기초로 오행의 상생상극에 근거하여 확정한 매일의 길흉과 의기(宜忌), 그리고 하늘을 공경하고 신을 믿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각종 명절이나 제사 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일상생활과 긴밀히 연관된 이런 문화 내용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수시로 자신의 전통 문명을 되돌아보게 할 수 있었다. 중공은 그것을 쉽게 농력이라 불렀지만 실제적으로는 박대(博大)한 문화내포를 함축한 전통 황력을 얕잡아 보고 파낸 것으로 전통 문화의 전승을 단절시켜 버린 것이다. 오늘날 젊은이들과 농력을 말해 보면 다만 얼마 남지 않은 겨우 몇 가지 명절만 알 뿐이며 농민들의 농사와 관계가 있다는 것만 알뿐 그 중에 포함된 심후한 전통문화의 내포는 모른다. 그 외 중공 당문화 중에 농민은 늘 ‘정치적 각성’이 높지 않고 ‘봉건, 우매, 낙후’ 등과 연계되어 있다. 중공이 황력을 농력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전통 역법에 대한 일종의 폄하이다.

2) 신년(新年)을 춘절(春節)로 호칭

설을 쇠는 것은 중국인 사회에서 최대의 전통 명절이다. 《설문해자》중의 ‘년(年)’의 의미는 ‘오곡이 무르익는다’는 뜻이다. 옛날 사람들은 풍성한 수확을 거둔 후 신명(神明)의 보우에 감사를 드리기 위해 신에게 감사드리는 제사를 거행했으며 아울러 새해에도 기후가 순탄하길 기원하는 중요한 의식을 거행했다.

전통적인 신년(新年)은 섣달 초파일부터 시작해 정월 보름에야 끝난다. ‘섣달 초파일(臘八)’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개오(開悟)하여 성불하신 날인데 민간과 사찰에서는 이날 모두 납팔죽(臘八粥)을 먹어 새해에도 오곡이 풍성하고 가축이 흥성하기를 빌었다.

이어 섣달 이십삼일에는 ‘작은 설을 쇤다.’ 이 날은 조왕신(灶王爺)이 승천하는 날이다. 민간에서는 조왕신이 일 년 동안 식구들의 일거일동을 감독한 상황을 섣달 이십삼일에 천정(天庭)에 가서 보고하는 날이라고 여긴다. 섣달 그믐이 되면 다시 조왕신의 새로운 초상을 붙인다. 이런 활동은 중국인들이 “머리 석자 위에 신령이 있다(頭上三尺有神靈)”는데 대한 일종의 표현이기도 하다. 조왕신의 감독 역할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히 자신의 행위에 대해 단속을 하게 된다.

조왕신의 초상 | 에포크타임스

섣달 삼십일을 ‘섣달그믐(除夕)’이라고 부르는데 이 날 신년 축하가 최고조에 이른다. 이는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그중 천지상[天地桌]을 차려놓고, 문신(門神)을 붙이고, 복신(福神), 재신(財神), 귀한 신, 희신(喜神), 태세신(太歲神)을 맞으며, 조왕신의 초상을 청해오고, 춘련(春聯)을 붙이며, 폭죽을 터뜨리는 등은 모두 중국인들이 신을 공경하는 전통과 관계가 있다. 천지상은 신불을 공양하고 신을 맞이하기 위해 임시로 만든 상이다. 춘련의 원형은 도부(桃符)인데 전설에 귀신이 복숭아나무를 두려워한다고 여겨 오대(五代) 때 촉(蜀)나라의 군주 맹욱(孟旭)이 복숭아나무로 만든 부적에 “신년납여경 가절호장춘(新年納餘慶,嘉節號長春)”이란 글을 쓴 것이 춘련의 정식 시작이었다.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것도 설을 쇠는 중요한 부분이며 대개 자신의 집에 조상의 위패를 순서대로 정문 대청에 세워놓고 제물(祭物)을 진설했다. 그런 다음 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나이 순서에 따라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논어》에 이르기를 “초상(初喪)을 삼가고 멀리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운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慎終追遠,民德歸厚矣 역주:《논어 학이(學而)》)”. 때문에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것은 효도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옛 사람의 도덕 전통에 대한 계승이기도 하다.

1949년 9월 27일, 중공은 정권을 탈취한 후 정부를 세울 토론을 하면서 ‘정월 초하루’를 ‘춘절’로 고쳤다. 마치 그저 ‘봄’을 경축하는 일반적인 명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만들었다. 이것은 그럴듯한 이름처럼 보이지만 중공이 전통 문화를 비판하고 대체하며 무신론을 선양할 필요에 따라 만든 것이다. 이렇게 고침으로써 전통적인 설 명절에 신명의 보살핌에 감사드리고 신명과 선조를 공경하는 문화적 내포가 사라졌다.

이때 설날에 나누던 덕담이 “금년에 북경에 가서 마오 주석을 뵐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혁명 정신을 대대로 전하자!” 등과 같은 정치적인 말로 변했으며 춘련은 “착취에서 벗어나도 공산당을 잊지 말고, 행복할 때도 마오 주석을 잊지 말자!”로 변했으며, 신을 공경하고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것이 “쓰라린 과거를 회상하고 오늘의 행복을 생각하는” 것으로 변했으며 조직적으로 정치적인 영화를 보고 ‘교육적 의의’가 있는 갈라 공연을 조직한다. ‘단배’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인민 공사에는 새 풍속이 많기도 하네. 시어머니 작은어머니 모두 노래 부르네. 춘절에는 미신을 믿지 말고 모두들 무대에서 공연을 하네.”였다. 설에 집에 붙이는 그림은 신을 공경하고 복을 빌던 것에서 ‘대약진’, “인민 공사는 좋다”, “춘절에 노삼편(老三篇)을 학습하자”, “온 집이 공보(公報)를 읽자!”로 변했다.

중공 신문에서는 백성들이 설을 쇠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어떤 사람은 온 가족이 모인 기회를 이용해 마오쩌둥 사상 가정 학습반을 꾸릴 작정을 했고, 어떤 사람은 그믐날 밤에 쓰라린 과거를 회억하는 밥(忆苦饭)을 먹을 준비를 하면서 ‘이 설밥은 계급 교육의 밥으로 우리는 꼭 뱃속에 넣을 것이며 마음속에 기억하며 영원히 계급의 쓰라림을 잊지 않으며 영원히 당을 따라 혁명할 것이다!’ 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가정 비판회를 열거나 혹은 친척친구를 만나 함께 ‘사상 수확’을 교류하며 ‘문화 대혁명의 아주 좋은 형세’를 마음껏 이야기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전통 명절인 설은 공산당에 의해 백성들에게 당문화를 주입하는 정치수업으로 변질되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전통적인 경축 방식이 약간 회복되긴 했으나 30년 동안 파괴를 겪고 새로 태어난 세대는 이미 전통을 다시 회복할 가능성이 없어졌다. 최근 20년 동안의 ‘춘절 연합 갈라’를 중공은 중국 백성들의 ‘새로운 풍속’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다. 그러나 이 갈라는 완전하게 ‘주선율’을 노래했는데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주제로 시종 관통하고 있다. 아울러 격조는 날이 갈수록 거칠고 저속하다. 천백년 동안 설 속에 포함되었던 정신적 추구와 인생의 감회는 중공에 의하여 거의 다 파괴되었다

2. 전통 명절을 없애버리고 당 명절을 배치

중공은 전통 명절인 설을 ‘춘절(春節)’로 부른 것 외에도 또 아주 많은 명절을 없애버렸고 그를 대신해 당 명절을 배치했다. 이를 통해 당 문화로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전통문화의 영향을 대체한 것이다.

중국의 전통 명절은 모두 수련, 신불(神佛)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비교적 중요한 전통적 명절로는 설을 제외한 외에도 또 원소절(元宵節), 청명절(清明節), 단오절(端午節), 우란분회(盂蘭盆會), 중추절(中秋節), 중양절(重陽節), 동지(冬至), 그 외에도 욕불절(浴佛節), 칠석(七夕) 등이 있다.

북송 시기의 그림 《청명상하도》 | 에포크타임스

원소절은 보통 ‘정월 대보름’이라고 한다. 원래 도교의 ‘상원절(上元節)’에서 온 것인데 전설에 의하면 천궁대제(天官大帝)의 탄신일이라고 한다. 한나라 명제(明帝)가 불법(佛法)을 믿고 존중하여 사찰과 민간에 명을 내려 이날 하루 등불을 켜게 함으로써 불법이 크게 밝은 것을 상징하게 했다. 이때부터 원소절은 또한 등불을 밝히는 날이 되었다.

청명절은 조상의 제를 지내고 성묘하는 때를 말한다. 단오절의 기원에 관해서는 하나는 굴원을 제사 지낸 데서 기원했다는 설과 용신(龍神) 숭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중추절은 주(周)나라에서 기원한 것으로 주나라 천왕(天王)이 매년 한가위에 달에 제사를 지냈으며 나중에 점차적으로 달을 감상하는 풍속으로 남았다. 중양절은 9월 9일을 말하는데 중국의 술수(術數)에서 ‘구(九)’는 가장 높고(도가에서는 9층천을 말한다), 극히 넓으며(九州方圓), 극히 깊고(九地之下), 장구함 등을 상징한다. 이때 사람들은 국화를 감상하고 산수유를 몸에 달고 국화주를 마셨다. 동지는 제왕(帝王)이 천단(天坛)에 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날이다.

욕불절(浴佛節)은 음력 사월 초팔일인데 또 석가탄신일(佛誕節) 또는 용화회(龍華會)라고도 한다. 이날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하신 날이다. 이 날 부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찰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재회(齋會)에 참가하며, 시주를 거행하고 방생 등의 활동을 한다. 칠석은 7월 7일을 말하는데 견우와 직녀의 전설에서 기원한 것이다. 우란분회는 음력 7월 15일을 말하는데 망자를 달래는 명절이다. 이 날은 목건련(目犍連) 존자가 그 모친을 아귀지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재를 베풀어 스님들께 공양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이다.

중국의 명절을 간단히 요약하면 제사, 신화 혹은 부처, 도교와 관계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이런 명절들이 보존될 수 있고 아울러 전통을 좇아 경축할 수 있다면 중국 문화 중에서 신과 관련 부분들이 대대로 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공산당이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인들과 중화 전통의 문화 도덕, 전통 문화 가치 사이의 전승과 연계를 끊어 버리기 위해 중공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더는 전통 문화의 영향과 보호를 받지 못하게 했고 완전히 당문화 속에 잠기게 했으며, 일상적인 풍습을 통해 민중들에 대한 세뇌를 진행했다. 중공은 정월 초하루를 ‘춘절’이라고 바꿔 남겨놓은 이외에, 기타 전통적인 명절들 중 중공이 공휴일로 지정한 것은 하나도 없다. 전통적인 명절 풍속은 중공의 압제로 생존 공간을 잃어버렸고 유감스럽게도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중공은 다른 ‘명절’을 제정하여 자신의 통치를 위해 봉사하도록 했다. 이런 ‘당 명절(黨節)’에는 ‘3․8 부녀절’, ‘5․1 노동절’, ‘5․4 청년절’, ‘6․1 아동절’, ‘7․1 당 생일’, ‘8․1 건군절(建軍節)’, ‘10․1 국경절(國慶節)’ 등이 있다.

명절을 쇨 때면 명절의 기원을 되돌아보는 것이 늘 그날의 인기 화제가 된다. 그러나 중공이 지정한 명절은 ‘계급투쟁’ 혹은 ‘혁명’과 관계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거나 혹은 중공 자체의 이정표적인 기념으로 명절을 정치화한 이런 작법은 바로 사람들을 중공의 이데올로기에 순종하게 하려는 목적이며, 중공의 성립과 발전을 경축하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당절(黨節)에는 휴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노래 경연 대회’, ‘문예공연’들을 조직해 공산 악당의 공덕과 은덕을 찬양하게 한다. 여기서 강조할 것은, 중공이 걸핏하면 그것의 명절 앞에 ‘국제’라는 두 글자를 씌우는데 마치 정말로 전 세계적으로 성대한 명절인 듯하다. 하지만 외국에 나온 후에야 사람들은 몇몇 작은 공산 국가들을 제외하고 외국 사람들이 쇠는 것은 모두 자기 민족 전통의 명절로 근본적으로 ‘3․8’, ‘5․1’, ‘6․1’ 따위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산당은 고의적으로 ‘노동자, 부녀와 아동’은 착취당하는 계급과 군체(群體)임을 과장하여 그들을 선동해 투쟁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공산국가의 ‘노동자, 부녀자와 아동’이야 말로 진정하게 압박을 받고 있다. 공산당이 이 몇 가지 명절을 이용하는 것은 그것의 계급투쟁의 필요에 협력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3․8 부녀절’에 흔히 볼 수 있는 활동은 모범 혹은 ‘3․8 붉은 기수’를 선출해, 여성을 주체로 한 운동회, 문예공연 등이거나 혹은 표창회, 경축회, 갈라 등 집회의 성격을 띤 활동을 거행한다. 최근에는 3․8절 경축에서도 새로운 것을 창조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어떤 방식을 사용하던지 막론하고 주제는 이런 명절을 이용해 사람들 머릿속에 “여자는 세상의 절반”이며 “남녀는 모두 같다”는 당문화를 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여성에 대한 당의 ‘관심’을 표현하며, 당이 부녀를 ‘해방’시켜 ‘평등’한 지위를 얻게 했다는 것을 두드러지게 하는 동시에 여성 모범들로 하여금 당의 공덕을 노래하고 충성을 표현하게 하여 다른 사람들을 세뇌한다.

‘5․1 노동절’은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를 중심으로 약 35만 명이 참가한 대규모 파업과 시위에서 기원한 것으로 시위자들은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5․1이 당절로 변하자 경축 활동은 주로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주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또 하나의 특색은 ‘노동 모범’을 선거하는 것인데 아래에서 위에 이르기까지 사업이 출중하고 성과가 좋은 사람 혹은 각 항목 각 업종의 두드러진 대표에게 영예를 주거나 심지어 직접 입당시켜 스스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기쁜 가운데 자신의 일체는 당이 베풀어 준 것임을 잊지 않게 한다. 이런 우수한 자들과 통일 전선을 통해 각 업종을 진일보로 통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외면을 강화한다.

‘5․4 청년절’은 1919. 5. 4 운동에서 기원한 것이다. 원래는 주권을 수호하기 위한 애국 운동이었으나 공산당의 선전을 통해 ‘각성한 중국 무산계급이 최초로 독립적인 정치역량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한 표지로 되었다.

‘6․1 아동절’을 경축하는 나라는 모두 ‘사회주의’ 혹은 ‘이전 사회주의’ 국가들이다. ‘아동절’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치된 결론이 없다. 중공은 이 명절도 ‘반제국주의’에 귀결시켰다. ‘아동절’의 경축 활동은 부녀 연합회에서 관할한다. 공원에 가거나 문예 공연을 하거나 간에 아이들이 명절을 쇠는데 도리어 아이들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이들이 말을 하려면 어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어린이 말’을 해야 한다. 각종 활동은 교사들이 모두 준비해 놓는데 그 의의는 단순히 경축과 오락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5강4미(五講四美)’, ‘계승자가 되자’, ‘영욕을 알고 6․1을 경축하자(知榮辱慶六一)’ 등 활동의 주제는 모두 당의 어느 단계 정책과 요구에 부합해야 한다. 아이들이 늘 보고 듣는 것은 당문화 속에서 문예라는 명의를 빌려 정치적인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이다. 또 ‘주제대의 날(主題隊日)’, ‘노래 대회’가 이 있는데 천진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허위적인 방식에 적응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6․1 무렵은 소선대(少先隊)에 들어가는 날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소선대 깃발’ 아래에서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받아들이고 공산주의 사업을 위해 평생 분투할 것”을 선서한다. 사실상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중공의 사악한 정치 속으로 끌어넣는 것이다.

‘7․1’은 이도저도 아닌 ‘명절’이다. 왜냐하면 중공은 7월 1일 성립된 것이 아님에도 중공에 의해 ‘당의 생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중공은 소련이 1920년 8월에 보이틴스키를 중국에 파견하여 건립한 것으로 당명 역시 소련이 지어준 것이다. 당시에는 ‘제3 인터내셔널 중국 지부ㅡ또는 중국 공산당이라 칭함’이라고 했다. 그것의 사명은 소련을 대신해 ‘중화민국을 뒤엎고 중국 국민당을 소멸하는’ 무산계급 혁명이었다. 1921년 7월에 소집한 것은 다만 중공의 대표대회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추론해도 먼저 공산당이 있었고 대표대회는 나중에 있어야 한다.

중공 제1차 당 대표대회는 소련 사람이 돈을 대어 열렸다. 나중에 왕정위(汪精衛)에게 빌붙어 매국노가 된 천궁보(陳公博)가 중공 창시인이자 제1대 대표였다. 그는 갓 결혼한 부인을 데리고 회의를 이용해 상해로 ‘공짜여행’을 왔고 대동(大東)여관에 투숙했다. 7월 31일, 천궁보가 투숙한 옆방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프랑스 조계지 경찰들이 와서 안건을 조사하게 되자 중공은 자싱(嘉興) 남호(南湖)로 옮겨 회의를 열었다. 그때에는 정당을 설립하는 것이 합법적이라 경찰이 중공 대표를 체포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지만 중공은 도리어 경찰이 온 것은 ‘대적 투쟁’의 험악함이라고 과장했다. 1981년, 중공 당사 연구실은 1921년 8월초 《신보(申報)》에 실린 살인 사건 보도로부터 중공이 설립된 시간을 7월 23일로 추산해 내고 아울러 《중공 당사 대사년표(中共黨史大事年表)》에 써 넣었다.

북벌 기간에 국민 혁명군이 출정하여 군벌과 싸울 때 소련의 사주를 받은 중공은 폭동, 파업, 농촌에서 반란을 일으켜 지방 정권을 탈취했다. | 에포크타임스
중공 제1차 당대회 대표들 : 왼쪽 상단부터 천궁보(1922년 중공을 이탈해 1938년 왕징웨이 괴뢰정부를 따라 매국노가 됨), 리다(李達, 중공 내부 투쟁에 의해 1923년 탈당), 저우포하이(周佛海 1924년 중공을 탈퇴해 1938년에는 왕징웨이 괴뢰 정부 추종), 리한쥔(李漢俊 중공 내부 투쟁에 의해 1924년 축출), 바오후이성(包惠僧 1927년 탈당), 류런징(劉仁靜 1929년 중공에 반대하다 축출됨), 장궈타오(張國燾 1938년 장제스에 투항) | 에포크타임스

‘7․1’은 ‘명절’이긴 하지만 ‘휴일’은 아니다. 하지만 도리어 각급 당위원회와 중공 선전부에서는 사회적으로 전력을 다해 선전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외부적으로 그럴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더욱 그러하다. 당원은 각종 조직 활동에 참가해야 하며, 당의 각급 지도자들은 연설을 해야 하는데 역시 해마다 한 번씩 당원들에게 다시 충전시켜 당성을 강화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 외에 신입 당원을 입당시키는 것도 대개는 7․1 무렵을 선택한다. 중국에서 온 사회가 7․1을 명절로 승인하는 것은 바로 중국에 대한 중공의 점거를 승인하는 것이다. 이런 명절은 매년 한 번씩 중공에게 수혈(輸血)해 주고 중공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작용을 한다.

‘8․1 건군절’은 중공이 ‘난창기의(南昌起義)’ 폭동을 경축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당시의 배경은 국민 혁명군이 장제스(蔣介石)의 통솔 하에 1926년 북벌 전쟁을 일으켜 북양(北洋) 정부를 토벌했다. 인민들의 옹호가 있었기에 북벌군의 진전은 순조로웠고 국가는 곧 통일되는 듯했다. 그러나 중공은 한편으로는 스탈린의 명령을 받고 끊임없이 북벌을 파괴했고 심지어 무장폭동의 방법으로 광동까지 공격해 국민당이 북양 군벌을 무너뜨리는 것을 저지했다. 장제스는 할 수 없이 1927년 4월 27일 국민당 중에서 공산당을 제거했고 중공은 그해 8월 1일 난창폭동을 발동하여 무장 할거(割據)를 했다. 난창 폭동은 중공이 자신의 군대를 장악한 발단이었기에 ‘건군절’로 부른 것이다.

‘10․1’은 중공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을 건립한 날이다. 그럼에도 중공은 전 인민들에게 공동으로 소위 ‘국경절’을 경축하라고 요구한다. ‘국경’ 활동에는 중대한 정치적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바 경축 행사의 주체는, 북경에서 거행되는 국빈 연회, 열병식, 불꽃놀이, 행진이다. 한편으로는 무력을 자랑하여 국민들을 놀라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꽃놀이, 국빈 연회, 원예 등으로 태평한 것처럼 꾸민다. 천안문 광장에 손중산(孫中山)의 거대한 초상을 놓아 대만과 ‘통일전선’을 나타내고, 행진으로 ‘만민이 옹호’하는 가상을 만들어 낸다. 이때쯤이면 텔레비전에서는 언제나 ‘개국대전(開國大典)’ 등 영화를 상영해 중공이 ‘해방’시키기가 쉽지 않았음을 추억하게 하여, 인위적으로 중국은 중공이 건립한 나라라는 정의를 내리게 함으로써 “공산당이 없으면 新중국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당과 국가를 뒤섞는다. 사람들에게 마치 중국은 중공이 건립한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사실상, 지금 아주 많은 중국인들은 10․1을 ‘국상일(國殤日)’이라고 부른다. 중공은 당을 건립한 그 때부터 중국인들에게 끝없는 고난을 가져다주었으며 특히 전국 정권을 탈취한 후에는 약 8천만 중국인들을 비정상적으로 죽게 했다. 아울러 수백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팔아먹었으며, 중화문화의 정화를 훼멸시켰고, 도덕과 생태방면에 만회할 수 없는 파괴를 조성했다. 중공은 인민들을 강요하여 그것의 성립과 발전을 경축하게 하는데 이것은 인민들에게 나날이 심각해지는 자신의 고난을 경축하게 한 것과 같다.

1949년 이후 중공의 박해로 사망한 사람의 숫자는 8천만 명에 달해 두 차례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를 합한 것보다 많다. | 에포크타임스

중공은 ‘5․1’, ‘10․1’을 일주일간의 긴 휴가로 변화시켰는데 비록 날은 많지만 스스로 조절할 여지는 없다. 중국인들은 이 며칠간 여행, 결혼 혹은 기타 중요한 활동을 배치하는데 이런 활동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 놓아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자신의 결혼사진 혹은 여행 기념사진을 가리키며 “이것은 내가 어느 해 ‘국경절’에 찍은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로부터 은연중에 중공의 명절을 일반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중대한 사건을 연계시키게 했다.

3. 결혼할 때 천지신명에게 알리는 대신 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야

1) 정통 문화 속의 혼례

정통 문화는 4대 예절을 중시하는데 바로 관혼상제이다.

‘관례(冠禮)’란 성인이 되는 예절을 가리키는데 유가의 예절에 따르면, 남자는 20살이 되면 관례를 통해 성년이 된 것을 나타내는데 진정으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상례(喪禮)’는 사람이 세상을 뜬 후의 장례의식을 말하는 것으로 흔히 승려나 도사를 청해 망자의 혼을 달랜다. ‘제례(祭禮)’란 바로 조상과 신에게 제를 지내는 예절이다. 중공은 정권을 탈취한 후, 위 세 가지 예의를 모두 버렸는데 이는 그 속에 하늘과 신을 경앙하는 것을 포함하여 제사를 경건하게 지내는 요소와 관계가 있다.

그런데 ‘혼례(婚禮)’는 필경 인생의 4대 즐거운 일 중의 하나이다. “죽거나 살거나 함께 고생하자며, 당신과 굳게 언약했었지, 섬섬옥수 고운 손 힘주어 잡고, 오순도순 백년해로하자고(死生契闊 與子成說 執子之手 與子偕老)” 중국의 옛 사람이든 서양인이든 막론하고 혼인은 일생의 약속이므로 천지신명에게 예를 올리고 정중하게 혼례를 치렀다.

《예기(禮記)》에는 전문적으로 ‘혼의(昏義)’를 따로 언급한 장(‘昏’은 가차한 글자로 ‘婚’과 같다. 옛 사람들은 혼례를 황혼 무렵에 거행했기 때문에 이 글자로 가차한 것이다)이 있다. 이곳에서는 ‘납채(納采), 문명(問名), 납길(納吉), 납징(納徵), 청기(請期), 친영(親迎)’ 육례(六禮)이다. 그 중 ‘납채’는 혼사를 제기하는 것이고, ‘문명’은 신부 측 성명을 물어 길흉을 점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납길’은 점친 기쁜 소식을 신부 측에 알려 주는 것이고, ‘납징’은 신랑 측에서 여자 측에 예물을 보내는 것이다. ‘청기’는 신랑 측에서 점을 쳐 선택한 혼례날을 신부 측에 보내 허락을 받는 것이다. ‘친영’은 신랑 측에서 신부를 맞아 오는 것을 가리킨다.

유가에서는 혼례는 남녀가 합하여 위로는 사당을 지키고 조상에 제를 지내는 일을 책임지게 하고 아래로는 후대를 키우는 것으로 여겨 혼례는 정중하고, 신중하며, 혼인을 존중하는 것을 바른 예로 보았다. 신부를 맞는 날, 신랑신부는 먼저 천지에 예를 올리고 하늘과 땅에 혼인의 증인이 되어줄 것을 청하며 부모님께 절을 올려 키워주신 은혜에 감사드림과 아울러 혼인의 증인이 되도록 한다. 부부가 맞절을 하는 것은 손님을 대하듯 서로 존중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서양에서도 신자가 결혼하려면 교회에 가서 천주를 모시고 증인으로 삼는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선서문을 읽어야 한다. “나는 오늘부터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 할 것을 약속합니다.”

2) 혼례에 대한 중공의 왜곡

정통 문화 중의 혼례는 한편으로는 천지신명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륜을 겉으로 드러나는 기쁨과 함께 예절의 정중함을 잃지 않고 표현하는 것으로 조상에 대한 존경, 부모님께 대한 효성, 그리고 부부간의 은혜와 의리를 표현하는 것이다.

혼례의 세부적인 절차는 흔히 사람 일생의 가장 행복한 추억거리이다. 때문에 공산당도 필연코 혼례를 그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수호하는 중요 방식으로 만들려 했다. 중공의 간섭으로 중국인들의 혼사는 강렬한 정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예를 들면,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당 조직’의 비준이 있어야 하며 서로 다른 ‘계급’ 사이의 혼담은 경고를 받거나 비준하지 않는다. 그런데 당 간부는 흔히 ‘조직’에서 배우자를 맞춰주는데 이런 가정들은 당에 대한 감격으로 충만 되기에 당의 ‘미시적인 전투 보루’로 변한다. 혼례의 의식은 ‘새로운 일을 새로 할 것’을 고취하기에 더는 천지신명에게 절하지 않고 대신 당에 대한 찬가로 바뀌었으며 당이 전통적인 신의 위치를 대신했다.

《백년풍속변천(百年風俗變遷)》은 중공이 정권을 세운 후의 혼례형식을 제기했다. 복장에서 남자의 마고자 창파오(長袍), 여자의 봉황 모양의 모자와 예장이 레닌의 복장으로 바뀐 외에도 결혼 증인이 천, 지, 부모로부터 ‘당지부 서기’로 변했다. 결혼 시간도 ‘5․1’, ‘10․1’과 같이 중공이 규정한 명절을 선택하여 ‘천지에 절하던’ 데에서 ‘마오 주석의 초상에 경례’하는 것으로 변했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결혼 전에 더욱 마오쩌둥 어록을 읽어야 했다. “우리는 모두 사면팔방에서 하나의 공동 혁명 목표를 위해 함께 모였다. 혁명 대오 중의 일체 사람은 모두 서로 관심을 갖고 서로 애호하며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 이리하여 혼인이란 사사로운 일이 ‘혁명’의 높이로 솟아오르게 되었다. 이중 한 가지 구절을 주의해 살펴보면, 바로 ‘혁명 대오중의 일체 사람’만이 비로소 “서 로 관심을 갖고 서로 애호하며 서로 도와주어야” 하며 혁명성이 인성보다 높다는 것이다. 동시에 또 “하늘이 크고 땅이 크다 해도 당의 은정(恩情)만은 못하다”, “부모의 정이 깊다 해도 마오 주석의 은정만은 못하다”, “마오쩌둥 사상은 대물림의 보배이니, 누가 반대한다면 그는 곧 우리의 원수라네”를 불러야 했다. 결혼식장에서도 ‘계급투쟁’의 활줄을 팽팽히 틀어쥐고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심을 표시해야 했던 것이다.

‘하늘이 크고 땅이 커도(天大地大)’라는 이 노래는 1966년 싱타이(邢台) 지진이 발생한 후 전해지기 시작했다. 혼례 때 ‘찬미시’와 같은 이런 가곡을 불렀는데 이것은 공산당이 자신을 신격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아울러 사람들로 하여금 달콤한 혼인을 추억할 때 자연적으로 중공을 찬미하는 이런 가사들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문화대혁명 이후 아주 긴 시간 동안, 직장이 있는 많은 사람들, 특히 체면이 있는 사람들의 혼사일지라도 여전히 당 조직, 당 지도부의 개입을 피하지 못했고, 신랑 신부는 당의 관심에 감사를 표시해야 했다. 지금은 비록 중공이 혼인 형식에 구체적으로 간섭하지는 않지만 몇십 년 격리를 거친 정통 혼인예절은 이미 버려졌다. 그런데 이와 함께 혼인에 대한 신성함과 책임감마저 함께 버려졌다. 오늘날 매우 많은 혼례는 난잡하기 이를 데 없으며 이미 그 속의 신성함과 전통적 예의의 규범이라곤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많은 가정의 모순, 부부 사이의 감정 파탄, 하룻밤 정사의 유행은 중공이 정통적인 혼인 관념과 혼례 형식을 파괴한 것과 관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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