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주도했던 亞太 협력체 ASPAC… 집단안보체제로는 발전 못해

박정희 "아시아·태평양 자유민주국가 연대하여 국제공산주의에 맞서야"
최창근
2022년 07월 1일 오후 4:15 업데이트: 2022년 07월 1일 오후 4:22

북미·유럽 지역의 집단 안보체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사한 아시아·태평양 지역 안보 공동체 구상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구상됐다. 한국-대만 주도로 창설이 추진되었던 태평양동맹(太平洋同盟·Pacific Pact)은 미국·인도 등의 반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대신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 간 ‘반공(反共)’ 연맹인 아시아민족반공연맹(Asian Peoples Anti-Communist League·APACL) 창설(1954년), 범세계적 반공연맹인 세계반공연맹(World Anti Com­munist League·WACL) 출범(1967년)으로 이어졌다.

서울에서 개최된 한국반공연맹 제7회 정기총회.

태평양동맹 창설을 추진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기본 구상은 ‘미국 중심의 동아시아 체제하에서 일본의 역할을 한국이 대신해야 하며, 불가능할 경우 지역 안보 기구의 구성을 통해 한국이 이니셔티브를 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구상은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후 ‘민선’ 대통령이 된 박정희에게로 이어졌다. 박정희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하여 ▲국제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국가 안전 보장 ▲수출지향적인 경제성장 두 가지에 주안점을 두었다. 당시 그에게는 안보와 경제성장은 당시 한국사회가 지니고 있었던 다른 문제, 즉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신장, 부의 분배, 남북한 민족통일 등의 문제보다 중시되고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더하여 안보와 경제는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히 연관된 것으로 파악했다.

베트남전쟁 발발은 박정희 대통령의 아시아·태평양 인식 전환에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운명공동체’라고 인식했다. 6·25전쟁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쟁도 단지 일국의 내전(內戰)이 아닌, 국제 공산주의의 호전성의 결과로 파악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중국 공산당의 팽창주의를 주목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국 공산당의 최종 목적은 세계 공산화이며, 폭력 혁명 노선에 기반하여 1950년대부터 6·25전쟁 파병(1950년), 티베트 침공(1950년),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위협 고조(1958년), 중국-인도 전쟁(1962년) 등을 일으키고 베트남전쟁도 배후 조종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베트남 공산화 이후에는 인도차이나반도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나아가 한국도 중국 공산당의 위협에 직접 노출될 것이라 예상했다.

베트남전쟁 파병 장병을 격려하는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이 국제 공산주의의 공세에 취약하다고도 판단했다. 그 이유로 호주·뉴질랜드 등 대양주(大洋洲) 일부 국가를 제외한 역내(域內) 국가들의 빈곤 문제를 들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이 외적으로는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자국의 독립을 지키고 내적으로는 경제 발전을 이루어야 하는 공동 과제를 안고 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박정희 대통령의 판단과 구상은 ‘자유아시아’ ‘자유태평양’ ‘자유 아시아·태평양’ 등의 개념으로 구체화됐다.

베트남전쟁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외교 다변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회였다. 베트남전쟁 발발로 아시아 지역에서 공산주의의 위험이 다시 한번 대두된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 자유, 균형된 번영의 위대한 아시아·태평양 공동사회의 건설’을 비전으로 제시했다.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태평양 지역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안보 동맹국으로서 한국의 위치가 확고한 것으로 판단했다. 나아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베트남, 인도차이나반도의 상황이 동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며, 그곳에 개입하고 있는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동아시아의 미래를 주도할 것이라고 보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 공동 운명체를 논하면서 ‘평화혁명’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평화혁명은 군사력을 통한 ‘억지(deterrence)를 통해 평화를 보장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집단 안전보장 체제의 구축을 통해서 억지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을 포함하여 동남아시아 국가, 호주·뉴질랜드를 포함하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집단 안전보장 체제를 형성하고 한국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밑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집단안보체제 구상은 이승만 정부 시기 논의된 태평양동맹으로 대표되는 집단 안보체제 구상의 맥을 이었다. 다만 일본 문제에서는 입장을 달리했다. 반일(反日)주의자로서 대(對)일본 강경파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집단 안보체제에서 일본을 배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1960년대 전후 부흥에 성공한 일본이 경제적 역량에 걸맞은 역할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이자 한국을 36년간 식민 지배한 일본의 재무장을 우려했다. 다만 미국에 이어 일본도 아시아·태평양 지역 집단 안보에 재정적 기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각료 이사회(Asian and Pacific Council·ASPAC) 총회.

박정희 대통령의 구상은 1966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태평양 지역 각료 이사회(Asian and Pacific Council·ASPAC)로 구체화됐다. 회의에는 주최국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대만(중화민국),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베트남(남베트남), 호주, 뉴질랜드 등 9개국을 회원국으로 라오스, 인도네시아가 옵서버로 참가하였다. 아시아·태평양 지역 각료 이사회에서는 ▲회원국 상호 간 유대·결속 강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제 분야 협력 증진 ▲자유·평화 그리고 새로운 아시아·태평양 공동사회(共同社會) 건설을 목표로 제시했다. 회의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국에서 개최된 최고위급 국제회의였다.

서울에서 창립 총회(제1차 각료회의)가 열린 후 1967년 태국 방콕에서 제2차 각료회의, 1968년 호주 수도 캔버라에서 제3차 각료회의, 일본 1969년 도쿄에서 제4차 각료회의, 1970년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제5차 각료회의, 1971년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서 제6차 각료회의가 개최됐다. 이어 1972년 서울 제7차 각료회의를 개최했다. 그러다 1971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유엔 가입과 중화민국(대만)의 유엔 퇴출, 아시아·태평양 지역 각료 이사회 회원국과 중국과 수교 등 국제정세 변화 속에서 1973년부터는 총회가 무기한 연기되어 활동이 중지됐다.

결과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구상한 태평양동맹에 이어 아시아·태평양 지역 각료 이사회도 ‘아시아·태평양 지역 집단 안보체제 구성’이라는 본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미완에 그쳤다. 다만 중국의 부상과 위협이 현실화된 오늘날, 지역 협력의 목적을 단지 국제공산주의라는 역외로부터의 위협의 저지에만 두지 않고 더불어 역내 강대국인 일본의 참가를 통하여 오히려 일본 패권주의의 발현을 저지하고자 했던 아시아·태평양 지역 각료 이사회의 목표 설정은 시사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