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몰락’ 아르헨, 복지 축소에 대규모 시위 “일하기 싫다”

오텀 스프레더만
2022년 08월 3일 오전 8:01 업데이트: 2022년 08월 4일 오전 8:07

성인 43%만 취직…인구 절반 이상이 보조금 의존
국가부채 450억 달러, 인플레이션 60% 치솟아
소득주도 성장, 포퓰리즘으로 복지 늘리다 경제 붕괴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90일 넘도록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시위대는 지난 2019년 집권한 중도좌파 정부의 보조금 삭감에 항의하고 보조금 확대와 사회적 기본소득 보장 등을 요구하며 시내 도로를 점거 농성하고 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세계 5대 경제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급격하게 임금을 올리며 소득 주도 성장을 내세우고, 무상 복지를 확대하는 등 포퓰리즘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국가 부채가 450억 달러(약 59조원)에 달하는 아르헨티나는 지난 3월 국제통화기금(IMF)과 채무 협상을 체결하면서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를 모면했지만, 최근 공급망 대란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전 세계적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또다시 디폴트 위기에 몰렸다.

지난달 물가는 전년 대비 60.7% 올랐고, 올해 물가 상승률은 70%가 넘을 것으로 전망됐다. 성인 중 직업을 가진 인구는 43%에 그치며 절반 이상이 국가 보조금 등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지난 6월부터 가계 소득을 기준으로 전기·수도 요금 보조금을 삭감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 IMF와 체결한 채무 협상안의 핵심 사안이다.

이어 다른 보조금에 대한 삭감이 거론되자 성난 주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보조금 삭감에 반대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 20년간 아르헨티나는 각종 명목의 보조금을 꾸준히 확대했고 전체 인구 4538만 명(2020년 기준) 중 절반 이상인 2200만 명이 어떤 식으로든 정부 보조금에 의존해 생활하게 됐다.

정부 보조금은 임금에서 공공요금, 교육, 의료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측면에 걸쳐 있으며 하루 8억 페소(약 189억원)가 복지 프로그램에 지출되고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 정부의 후한 보조금 정책을 문제로 지목하고 있다. 정부가 재정 적자로 디폴트 위기에 몰려서도 지속 가능하지 않은 복지 사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 MARKUS SCHREIBER/POOL/AFP via Getty Images=연합뉴스

부에노르아이레스 시위는 ‘피케테로스'(Piqueteros·피켓을 든 사람들)’ 주도로 보조금 삭감 폐지와 IMF 반대,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피케테로스들은 도로를 점거한 채 장시간 농성하며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한다. 교통을 마비시키고 시민에게 불편을 주며 요구사항을 들어줄 때까지 버티는 형태의 시위를 벌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15년째 사는 택시 운전사 고메즈는 “이건 미친 짓”이라며 “피케테로스의 요구는 한마디로 광기”라고 비판했다.

그는 “그동안 5명의 대통령이 취임하고 물러나는 것을 봤지만 나아진 것은 없다”며 “우리 나라 (인구) 절반은 일자리를 원하지 않고, 나머지 절반은 다른 사람을 위해 세금을 내길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IMF와의 채무 조정안 협상을 주도한 아르헨티나 재무장관 마르틴 구즈만은 지난달 초 갑작스러운 사퇴를 발표했다. 정부 내부 갈등으로 인해 자신의 일을 할 수 없다는 불만 때문으로 여겨진다.

현 아르헨티나 대통령인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더불어 온건파로 분류되는 구즈만 전 재무장관은 고통스럽지만 구조조정과 IMF와의 협상을 통해 아르헨티나 경제 체질 개선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부통령을 필두로 한 강경 좌파는 이를 반대하며 구즈만 축출을 추진해왔다.

크리스티나 부통령은 2007년과 2011년 대선에서 두 차례 승리해 아르헨티나의 44대, 45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녀는 보조금과 재정지출 확대를 주장하며 IMF 의존을 비난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아르헨티나 부통령. | Reuters/Marcos Brindicci=연합뉴스

즉, 아르헨티나의 집권 연립여당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국가 부도 위기를 외국 구제금융을 늘려 해결해야 한다는 온건파와 기존 복지 제도를 유지하면서 세금을 인상해 외국 원조 없이 해결해야 한다는 강경 좌파 세력으로 나뉘어져 있다.

세금 인상을 통한 경제 위기 해결 방안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현재 아르헨티나의 일부 지역은 인구의 40% 이상이 빈곤선 이하로 살고 있다.

구제금융을 늘려 경제 위기를 해결하겠다는 방안 역시 대통령이 지지하는 현재 방식으로는 단기적 압력 해소에 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영컨설팅 기관인 마켓플레이스 페어런스의 재무 매니저 로버트 도넬리는 “이 방법은 단기적으로 경제 압박을 해소할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정부가 수출을 확대하고 외국인 투자를 더 많이 유치해 구제금융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재 아르헨티나 경제는 페소화 붕괴, 높은 인플레이션, 정부의 전략 부재 등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가 추락한 상태다.

시장조사기관인 인컴베이스드 리서치의 해리 로렌조 수석 재무담당자는 “정부 지출부터 안정시켜야 한다”며 “국가 부채의 주요인이었던 복지 제도 축소에도 손을 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무기한으로 생계 보조금을 지원해주는 복지 제도인 ‘임파워 워크’에 생계를 의존하는 120만 명은 일을 해야 보조금을 받을 수 있다는 복지 제도 개정안에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도로 점거 농성 시위 중인 한 여성은 “정부는 우리가 똑같은 보조금을 받고 8시부터 5시까지 일하기를 바란다”며 더 많은 돈을 주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현재 모든 가계 수익을 전적으로 정부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위대도 “정부는 우리에게 복지 혜택을 받는 대신 일하러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며 “출근하라는 것이 우파의 정책”이라고 반발했다.

시위대는 보조금을 더 많이 지급하라며 이를 들어주지 않으면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지난달 아르헨티나 독립 206주년 기념 연설에서 보조금 지급을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하는 단체들을 비난하고 국난 극복을 위한 통합을 강조했다.

그는 “통합은 통합과 관련된 사람들의 의지 문제”라며 “역사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가장 필요한 것이 통합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