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필드에서 살아남다

2015년 3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11월 9일

날움 씨는 크메르 루즈가 수도를 점령하던 날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근무하던 400명 정도의 의료진 중 한 명으로 거대한 화재가 나라를 집어삼킬 때도 의사는 언제나 중립을 지켜야 하며, 정치·인종·신념에 상관없이 인명을 구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남았다.

이제 그는 자기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안다. 많은 다른 사람처럼 그는 인간이 그토록 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프랑스가 건설한 프놈펜의 한 병원에서 일하던 그는 환자들로 북적이던 어느 오후, 검은 옷을 입은 괴한들이 캄보디아의 수도를 비우고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 날을 기억한다. 그는 많은 업무로 매우 바쁜 상태였기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내와 두 아들을 프랑스로 보냈다. 이 덕분에 병원 책임자의 역할을 다하며 환자를 돌볼 시간을 벌었다.

병원은 450여 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었으나 내전 때는 1000명 이상의 환자들이 몰렸다. 모든 침상이 가득 찼고 많은 환자와 부상자가 바닥에 누워있었다.

병동 중 한 건물에는 영유아를 포함한 100여 명 이상 아동이 수용됐다. 크메르 루즈가 수도를 점령했던 1975년 4월 17일, 그는 그곳에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날움은 작은 침대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괴한들이 병원에서 직원들을 쫓아낼 때 움은 의사와 간호사가 없으면 누가 환자들을 돌보겠냐고 물었다. 그들은 움에게 나가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돌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았던 움은 아이들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아이들 모습이 마음속에 남아있다며, 아이들을 구해야 했던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매일 자신을 따라다닌다고 전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병원은 아무도 없는 텅 빈 유령 병원이 돼버렸다.

처형장

나의 장인 어른이기도한 움은 1975년에서 1978년 사이에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집단 학살을 겪어야 했던 지식인 중 한명이었다. 그는 최근 ‘크메르루즈의 의사(A Doctor Among the Khmer Rouge)’라는 저서를 펴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했다. 그는 크메르루즈가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의 피해자 중 한 명이다.

프랑스 언론은 그를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다룬 소설 속 주인공과 비슷하다며 ‘캄보디아의 닥터 지바고’라고 불렀다. 크메르루즈는 정의감 있고 친절한 사람부터 교육을 받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배경을 가진 이들을 학살했다. 그들이 살인을 자행한 방식도 다양했다. 사람들을 총살하고 질식시켜 죽였다. 또, 산채로 오븐에 넣어 죽이거나 죽을 때까지 구타했고 생매장했거나 굶어 죽였다. 미국 예일 대학교는 생존자들의 다양한 진술을 모아 엮어냈다. 한 노인은 “우리 이야기를 글로 쓰려면 강물만큼 많은 잉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헨리 키신저 전 장관은 1982년 펴낸 그의 저서 ‘격변의 나날들(Years of Upheaval)’에서 “지난 10년 동안 캄보디아만큼 연이어 불행을 겪은 나라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키신저는1965년 북베트남인들의 캄보디아 침략, 1969년 이후 미국의 폭탄을 투하와 내전을 언급했다. 캄보디아는 내전으로 크메르루즈가 권력을 쥐게 되면서 대량 학살을 겪었고, 1978년 북베트남의 침공을 받았다. 움은 이런 역사를 직접 목격했다. 인권 단체인 ‘문화적 생존(Cultural Survival)’은 지식층을 주요 표적으로 삼았던 크메르루즈 학살에서 의료진 45명만이 살아남았다고 밝혔다. 움은 집단 처형장에서 탈출한 유일한 의사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옥이었다”고 말했다.

28일 간의 행군

학살은 곧바로 시작됐다. 움은 병원에서 쫓겨난 뒤,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는 긴 행군을 해야 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무장한 군인들은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이들을 이끌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게 일어났다. 그는 흰색 의사 가운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다. 사람들은 소지품을 챙기기는커녕 가족들을 찾을 시간조차 허용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군인들은 계속 앞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젊은 군인들은 이따금씩 허공에 총을 발사하며 계속 걸으라고 위협했다.

마침내 사람들은 밥을 먹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은 한 줄로 서서 군인들이 나눠주는 밥 한 뭉치를 받았다. 반바지를 입고 윗옷을 잘 여미지 못한 한 남성이 군인에게 밥을 달라고 하자, 검은 옷을 입은 군인 한 명이 트럭에서 내렸다. 무장한 군인은 남자의 손을 등 뒤로 묶더니 줄 서있는 사람들 속에서 밀어냈다. 움은 곧이어 총성을 들었다고 말했다. 남자가 땅으로 굴러 떨어졌고 붉은 먼지가 일어났다. 행군은 한 달 동안 계속됐고 이와 비슷한 처형이 빈번히 일어났다. 어딜 가든 시신을 볼 수 있었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농장에 수감된 채 논에서 강제 노동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여러 차례 이동을 거듭했는데, 이는 수감자들이 방향을 알 수 없게 하고 서로 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식사를 위해 소량의 쌀이 배급됐다. 정신적 압박은 계속됐다. 크메르루즈는 수감자들이 보는데서 사람을 죽이고 시신을 논에 방치했다. 움은 “(군인들이) 땅을 얕게 파서 시신을 묻었기 때문에 항상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를 맡아야 했다”고 회상했다.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공포시대에 그 누구도 이 일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들은 척, 말하고 싶어도 입을 다물어야 했다.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됐다. 두 눈으로 모든 것을 목격했어도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

탈출

움은 수용소 4군데를 옮겨 다녔다. 크메르루즈가 권력을 차지한지 6개월쯤 지나 후, 움은 마지막 처형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다. 기차를 타고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중에 밖을 내다봤지만 어린이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당시 어린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두치로 더 잘 알려진 수용소 최고 책임자 카잉 구엑 이아브(Kaing Guek Eav)는 프놈펜에 있던 S-21 수용소에서 1만 6000명의 캄보디아인을 고문하고 살해한 혐의로 2009년 재판에 회부됐다.

재판에서 이아브는 수용소 간수들이 아이들의 머리를 나무에 박아 처형했냐는 질문에 대해 구금된 아동들에 대한 크메르루즈의 정책을 진술했다. 그는 “어린이들을 수용해 봐야 얻는 것이 없었고 자라서 복수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자라 부모를 학살한 크메르루즈 정권에 복수하는 것을 모면하기 위해 그들은 어린이들과 영유아를 모두 살해했다.

움은 수감자로 지낸 지 한 달 정도가 흐르자 탈출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마지막 수용소로 이동할 때까지 탈출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수용소는 태국과 인접한 국경 근처에 위치한 마을인 포이삼롱에 있었다. 그 마을엔 10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움이 탈출을 결심했을 때, “이것은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이 될 것이라고 직감했다”고 말했다. 생포되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문을 받을 것, 그들은 모든 죄를 씌워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움은 셔츠 소매를 찢어 매일 조금씩 쌀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힐 경우 자살할 수 있는 아주 약도 조금 구했다. 탈출은 쉽지 않으며 벌판을 수십㎞ 지나야 했다. 발각되면 바로 체포되거나 사살될 것이 분명했다. 들에서 일하는 수감자가 그를 발견하고도 보고하지 않으면 그가 대신 사살당할 것이다. 벌판이 끝나면 정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개도 피해야 했다. 개가 짖으면 그들은 내가 도망간 방향을 알게 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개는 없었다. 군인들은 개마저도 모두 죽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탈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간수들은 크메르루즈가 권력을 쥔 날을 기념해 1976년 4월 16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수감자들은 3일 동안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저녁 7시가 되자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밝은 보름달이 떠 있었다. 간수들은 모두 들떠있었다.
움은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밀림 속에서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여행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빈 몸이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해낼 수 있다는 의지를 다지고 또 다졌다. 해가 지고 한 치 앞도 볼 수 없이 캄캄한 밤, 그 동안 모아둔 쌀 한 꾸러미를 가지고 헤쳐 나갔다”고 말했다.

난민-망명자

논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움은 낮에는 빽빽한 풀숲 속에 숨어 잠을 청했다. 밤에는 논에 쌓인 흙더미를 따라 걸었다. 매일 밤 그는 8~10㎞를 걸었다. 저 멀리 집들이 보였고 사람들이 집 주변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날도 있었다.

열흘 정도 논을 따라 걷고 나자 정글에 도달했다. 그는 혼자만의 새로운 규칙을 정했다. 논을 걸어온 것과는 반대로, 어둠을 틈타 먹이를 사냥하는 맹수들을 피하기 위해 낮에 걷고 저녁에는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속에 숨어 잠을 청했다. 그는 땅으로 떨어지기 전에 잠에서 깰 수 있도록 끈으로 나무 가지에 팔을 묶었다.

밀림은 만만치 않았다. 움은 말라리아에 걸렸고 점점 허약해졌고 방향 감각을 상실했다. 시간 감각도 잃어버렸다. 마침내 그는 한 마을에 당도했다. 태국 국경 근처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캄보디아인들과 모습이 비슷한데다 캄보디아어를 사용했다. 마을에서는 밤마다 사람들이 음악을 연주했다. 움은 그들이 불을 끌 때까지 기다렸다. 초가집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움은 개 3~4마리와 마주쳤다. 개들은 크게 짖기 시작했다.

한 남성이 개 찢는 소리를 듣고 소총을 들고 집 밖으로 나왔다. 그는 움이 있는 방향으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움은 이리 저리 피하며 어둠 속으로 도망쳤다.
다음날 밤, 움은 강가에 도착했으나 강을 건널 힘이 없었다. 그는 높은 풀숲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서 잠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 나뭇가지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풀숲 사이로 고개를 내밀자 캄보디아인처럼 보이는 노인이 서 있었다. 움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그는 노인에게 태국으로 가는 지름길을 물으며, 자신은 태국으로 탈출해 프랑스에 있는 가족과 재회하고 싶다고 캄보디아어로 말했다. 노인은 그에게 이미 그 곳이 태국 땅이라고 말했다.

움은 주저앉아 노인의 다리를 부여잡고 감사하다고, 이제 자신은 안전하다고 반복해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너무 크게 말하지 말라”며 “여기서 100m 떨어진 강 건너는 캄보디아다. 반대쪽 강둑은 크메르루즈 지역이기 때문에 조심해야한다”고 말했다. 움은 노인의 말이 여전히 생생하다.

죽음의 문턱

불행히도 태국 땅을 밟은 것으로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움은 불법으로 국경을 넘었다는 이유로 찬타부리에 있는 감옥으로 보내졌다. 사방이 각각 2.5m 밖에 되지 않는 감방에 20명이 수감됐다. 이곳에서 움의 병세는 더욱 깊어졌다. 감옥에 갇힌 지 첫날 밤, 점호 중 그는 눈앞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느끼며 쓰러졌다. 의식을 차렸을 땐 감방 안에 있었다.

그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국경을 넘어 그 많은 역경을 이겨낸 것이 고작 태국의 감옥에서 죽기 위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는 살아남아 세상 사람들에게 캄보디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줄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에 낙심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후회와 슬픔으로 가득했다.
손가락이 굳고 몸이 떨렸다. 현기증을 때문에 오래 앉아있을 수 없었다. 자꾸 뒤로 쓰러졌다. 의사였던 그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간수에게 프랑스 대사관에 편지를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말한 내용을 다른 사람이 대필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캄보디아에서 온 의사이며 현재 감옥에 있고 3~4일 내로 누군가 도와주러 오지 않으면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편지를 받아본 프랑스 대사가 그를 구하기 위해 대리인을 보냈다. 움은 우선 태국 병원으로 옮겨졌고, 1976월 6월 1일 프랑스 병원으로 이송됐다. 프랑스 병원에 누워있던 움은 두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큰 아들은 9살, 둘째 아들은 4살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아이들은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마냥 행복해했다. 움은 이에 대해 더 깊게 말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망명자의 삶

그 당시 세계는 캄보디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기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움은 크메르 루즈의 범죄를 밝혀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신문사가 움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다. 1978년 4월 그는 오슬로에서 노르웨이 의회가 주관한 캄보디아 문제에 대한 공판에서 발언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움과 다른 생존자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이후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은 캄보디아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게 됐다. 하지만 지금도 캄보디아인들의 역경은 끝나지 않았다. 캄보디아는 현재 입헌 군주 국가를 표방하지만 공산당 출신인 훈센 총리가 25년 이상 권력을 쥐고 있다. 베트남 공산당 정부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받고 있는 훈센 총리는 캄보디아 국민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다.

훈센 총리는 베트남 국경 근처인 동부 지역에서 크메르 루즈 군의 대대장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그는 크메르 루즈가 내부 숙청을 했던 1977년 베트남으로 달아났다. 이후 그는 베트남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반란군 지도자가 되었고 1979년에 베트남의 통치 하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2014년 8월에 있었던 S-21 수용소 책임자 처벌을 위한 재판에서, 국제 인권 단체인 휴먼라이트와치(Human Rights Watch)는 훈센이 크메르 루즈가 자행한 살인, 강제 노동, 각종 학대를 심판하는 재판을 막아왔다고 주장했다.

휴먼라이트와치의 아시아 담당관인 브래드 애덤스는 언론 발표에서 “크메르 루즈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찾아주는 활동은 훈센 총리의 정치적 간섭으로 엄청난 피해를 받았다”며, “이는 재판에 회부하는 데 긴 시간이 걸렸고,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애덤스는 “정의를 기념해야 할 날이 잃어버린 기회를 떠올리는 날로 변질됐다”고 밝혔다. 움은 현재 고국에서 추방당한 상태다.

움은 현 캄보디아 정부가 지속되는 한 돌아갈 엄두는 꿈도 못 꾼다. 하지만 그는 자국민을 대상으로 자행됐던 범죄가 언젠가 정의의 심판을 받을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처음에는 크메르 루즈가 그 다음엔 베트남인들이 공산주의를 통해 캄보디아인에게 가해진 폭정에서 자유로울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움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인류의 고통과 불운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과 같다. 이런 악행을 세상에 폭로하는 것은 세계의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자, 알려지지 않은 무고한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우리의 도덕적 의무이다. 그것은 인류의 기억과 역사를 위한 우리의 도덕적 의무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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