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룽지 총리 따라 중난하이 들어갔었죠” 1999년 ‘4·25’ 목격담

차이나뉴스팀
2021년 4월 20일
업데이트: 2021년 5월 3일

1999년 쿵웨이징(孔維京, 당시 49세)은 베이징의 공상은행 지점에서 예금 홍보와 조사 연구 업무를 담당하는 경제사(중국 자격증의 일종)였다. 그녀는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본인이 은행장에게 알려지고 심지어 장쩌민(江澤民) 전 공산당 총서기에게까지 알려질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쿵 씨가 1999년 4월 25일 주룽지 당시 총리를 따라 중난하이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파룬궁 수련을 통해 건강과 마음의 안정을 찾은 수많은 수련자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이날 수련자의 일원으로서 국가신팡국(信訪局·민원국) 평화청원에 참여했고, 공교롭게도 중난하이 서문에 위치한 신방국 대문 맞은편 인도에 서 있다가 상황을 파악하러 나온 주룽지 총리가 무작위로 지목한 사람 중에 포함됐다.

이날은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었다. 중국 서민들 사이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던 ‘파룬궁’이란 이 불가(佛家) 기공이 한순간에 세계 무대에 올라가게 됐다. ‘파룬궁 수련자’, 이들 대부분은 평범한 중국인이었지만 이날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됐다.

소심한 성격이지만 오해를 풀기 위해 용감하게 나서다

쿵 씨는 어릴 때부터 겁이 많고 소심했다. 공공장소에서는 감히 말도 못 했고, 누가 욕을 하거나 눈을 부릅뜨면 겁이 나서 울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이 싸우는 장면을 봐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래서 쿵 씨는 파룬궁 수련 서적인 <전법륜(轉法輪)>을 처음 접했을 때 저자의 솔직함과 대담함에 크게 놀랐다. 그녀는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

‘이 기공사는 어쩌면 이렇게도 솔직하고 진실하고 바를 수 있나? ‘봉건 미신’으로 여겨지는 이런 것들을 이렇게 대담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진(眞)·선(善)·인(忍)’이 우주의 진리라고 말하기까지 하니 놀랍지 않은가? 이것은 ‘하늘과 투쟁하고, 땅과 투쟁하고, 사람과 투쟁한다’는 공산당의 주장과 대립되지 않는가? 장차 공산당이 정치운동을 벌이게 되면 투쟁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왜 이 사람은 자신의 안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글을 썼을까? 위험할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은가?’

그녀는 다른 기공사들은 신비감을 더하고 정치적인 위험을 피하기 위해  ‘천기를 누설하면 안 된다’며 어떤 도리(道理)도 말하지 않는 데 비해 파룬궁의 사부님은 심오한 진리를 모두 전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이것이 사심이 없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쿵 씨는 또, 파룬궁은 좋은 사람이 되는 법을 가르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파룬궁의 사부는 도덕을 중시하고 선한 행동과 남을 배려하는 정신을 가르쳤다.

그 외에도 파룬궁은 연공 동작을 가르친다. 동작은 간단하고 배우기도 쉽지만, 건강 증진 효과가 탁월하다. 쿵 씨 역시 많은 혜택을 보았는데, 파룬궁 수련 전에 앓고 있던 위통, 신우신염, 류머티즘, 좌골신경통 등의 질환이 깨끗이 나았다.

그 후 수십 년간 그녀를 지배했던 무신론 관념이 완전히 무너졌고, 본격적인 수련을 통해 삶의 참뜻을 찾고 신성(神性)을 회복하는 고차원 수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9년 4월 24일 밤, 쿵 씨는 톈진(天津)의 수련생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신방국(信訪局)에 가서 파룬궁의 진상을 알리기로 했다. 그녀는 1989년 6.4 때 창안가(長安街)에서 발생한 일들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튿날 아침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은행 유니폼을 입고 직원증을 갖고 중난하이 신방국에 갔다.

중국에는 예부터 “물 한 방울의 은혜라도 넘치는 샘물로 보답하라”, “하루를 모신 스승이라도 평생 아버지같이 존경하라”는 말이 있다. 쿵 씨는 자신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한 스승과 법(法)이 비방받고 있는데 가만있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룽지에 의해 무작위로 지목돼 중난하이로 들어가다

1999년 4월 초 파룬궁을 여러 번 비방했던 당시 정법위 서기 뤄간(羅干)의 동서인 허쭤슈(何祚庥) 중국과학원 원사가 톈진교육학원의 한 저널에 또다시 파룬궁을 비방하는 글을 실었다. 4월 23일과 24일, 톈진 공안은 진실을 알리려 찾아간 파룬궁 수련자 45명을 체포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베이징·톈진 지역의 파룬궁 수련생들은 국무원 국가신방국에 가서 청원했다.

4월 25일 오전 7시경 쿵 씨는 베이징대 퇴직 교수와 글을 모르는 이웃집 할머니와 함께 푸유제(府右街, 신방국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거기엔 유명 배우도 있었다. 모두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또 베이징 교외 옌칭(延慶)에서 밤새워 온 70대 할아버지도 만났고, 팡산(房山)구에서 세 살짜리 딸과 함께 온 젊은 어머니도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외교부 고위 간부와 군복 차림의 현역 군인이 인파 속에 서 있는 것도 보았다. 그녀의 앞줄에는 인민대학 학생 두 명이 서 있었다.

사회 각계각층의 평범한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조용히 인도에 서 있었고, 차도와 시각장애인 전용도로를 차지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경찰은 흩어져 서 있던 수련생들을 줄지어 서 있게 했다. 8시경 안쪽에서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쿵 씨가 앉아서 연공을 하려 할 때 갑자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주룽지 총리가 중난하이 서문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주룽지는 수행원 몇 명을 데리고 성큼성큼 길을 건너 파룬궁 수련생들 앞에 왔다.

주룽지 총리는 걸음을 멈추고 “당신들은 왜 여기에 왔나요? 무슨 요구가 있나요?”라고 물었다.

수련생들은 “우리는 연공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수련 환경이 보장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답했다.

주 총리가 되물었다. “누가 연공을 못 하게 했나요? 나는 지시를 했어요. 중앙에 3불 정책이 있습니다.”

수련생들 속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답했다.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톈진에서 수련생들을 체포했습니다.”

주 총리가 다시 물었다. “누가 오라고 했나요? 누가 당신들의 대표인가요? 당신들은 대표가 있습니까? 대표가 나와서 나랑 이야기합시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왔다고 답했다.

주 총리가 다시 한번 요구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어요? 대표가 이야기하게 하세요.”

그때 누군가가 손을 들며 “나는 나 자신을 대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너도나도 손을 들며 “나는 자신을 대표합니다” “나도 자신을 대표합니다”라고 했다.

주룽지는 무작위로 세 사람을 가리키며 “당신! 당신! 당신! 당신들은 들어가서 나와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쿵 씨는 자신이 지목되자 곧바로 “예!”라고 대답했다. 쿵 씨는 함께 지목된 두 사람과 함께 주룽지 총리를 따라 중난하이 서문으로 들어갔다.

주 총리의 수행원이 이들 세 사람에게 “어느 기관? 이름은? 전화번호는?”이라고 물었다.

쿵 씨는 “하이뎬구 사무소 둥성 분리소입니다”라고 답했다. 다른 한 사람은 모 대기업의 회계이고, 또 한 사람은 중국과학원 지구물리학연구소의 대학원생이었다.

주 총리는 걸어가면서 신방국의 아무개 국장과 중앙판공청의 아무개 주임을 이리로 오라고 하라고 수행원에게 말했다. 이어 세 사람은 서문 안 북쪽에 있는 ‘응접실’이라는 팻말이 걸린 집으로 들어갔고 주 총리는 자리를 떴다.

오래지 않아 두 명의 간부가 와서 작은 수첩을 꺼내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수련생 대표들은 톈진에서 발생한 상황을 설명하고 세 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톈진에서 체포한 수련생 45명을 즉각 석방할 것, <전법륜> 등 파룬궁 서적을 공개적으로 출판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공정하고 합법적인 수련 환경을 제공할 것 등이었다.

쿵 씨는 신방국 책임자에게 파룬궁 수련에 관해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파룬궁 저서를 더 많이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승낙을 받은 후 길 건너편에 가서 수련생들이 가져온 책 6~7권과 ‘영원히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쓴 일부 노수련생들의 연명 서한을 가지고 ‘응접실’로 돌아갔다.

그녀가 다시 돌아갔을 때, 수련생 한 명이 더 와있었다. 항천부(航天部) 2원(二院)의 수련생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두 관리는 최대한 빨리 상부에 보고해서 중앙의 답변을 전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수련생 대표들에게 밖에 있는 수련생들이 먼저 돌아가게 하라고 권유했다. 또 “베이징은 수도이고 당신들은 모두 베이징 기업이나 기관의 간부나 직원이므로 베이징의 국제적 이미지와 국제적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등의 말을 했다.

쿵 씨는 함께 간 대표들과 나와서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수련생들에게 상황을 전한 후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상부의 답변을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을 때 앞 도로변에 중무장한 병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맨 앞줄에 있던 수련생들 바로 옆에 서 있었지만 동요하는 수련생은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총을 든 군경이 모두 철수했다. 수련생들은 오후 9시가 넘도록 기다렸다가 제기한 3가지 요구가 모두 해결됐다는 답변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청원 현장에 있었던 쿵 씨는 당시 상황을 간단히 정리했다.

“장장 열몇 시간을 푸유제, 원진제, 시안먼, 베이하이, 창안제에 머물렀던 파룬궁 수련생 만 명은 집으로 돌아갔다. 땅에는 종잇조각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경찰들이 버린 담배꽁초까지 깨끗이 주웠다.”

“중공이 나중에 ‘파룬궁이 중난하이를 포위 공격했다’, ‘중앙 지도자는 나온 적 없다’고 했는데 모두 탄압을 위해 빌미를 찾는 거짓말이다.”

4·25 이후 쿵 씨는 갑자기 ‘유명’해졌다. 그녀는 장쩌민이 직접 본점 사람을 불러 “당신들 공상은행에서도 간 사람 있다”고 호통을 쳤다는 말을 들었다.

4·25 이후 두 달도 채 안 돼 중공은 파룬궁 탄압을 시작했다. 쿵 씨 또한 감시당하고, 체포되고, 퇴직금을 정지당하고, 가족이 연루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녀는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이혼했다. 이혼한 날짜는 이듬해 7월 20일이다. 그 후 10여 년 동안 그녀는 단란했던 가정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쿵 씨는 중공의 탄압 수단이 가혹했지만 파룬궁 수련생들이 한 일은 국가와 국민에게 유익한 일이라며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4·25 이전에 파룬궁을 수련한 것이 나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였다면, 4·25 이후에는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특히 요즘 사회의 도덕이 추락하고 있을 때 인간성도 양심도 없는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파룬궁 수련생들의 모든 노력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진선인’만이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다.”

쿵 씨는 올해 4·25를 맞아 22년 전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사건을 원만히 해결한 주룽지 총리를 떠올렸다. 그녀는 주룽지 총리가 살아생전에 4·25의 진실을 기록해 후세에 남겨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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