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푸틴 대통령의 빛바랜 전승기념일 열병식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전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2022년 05월 13일 오후 5:13 업데이트: 2022년 05월 16일 오전 9:19

5월 9일은 러시아의 ‘위대한 애국전쟁(The Great Patriotic War)’ 전승일이다. 즉, 77년전 베를린에 진격한 소련군이 나치 독일군의 항복을 받아낸 2차 대전 전승기념일로서 러시아가 최대 명절로 여기는 날이다. 금년에도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서는 어김없이 기념 열병식이 열렸지만 왠지 빛바랜 행사로 느껴졌다. 동원된 병력과 장비도 예전보다 축소되었고, 정신적·육체적으로 지친 모습으로 등단한 푸틴 대통령의 연설에도 강렬함을 느낄 수 없었다. 러시아 전승절 행사를 바라보는 세계의 눈도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푸틴은 2월 24일에 개시한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 군사작전’으로 부른다. 하지만, 대부분 나라들의 눈에는 군사 강대국이 멀쩡한 이웃 주권국을 쳐들어가 무차별적 파괴와 살상을 벌이는 ‘공연한 전쟁(unprovoked war)’이자 ‘전쟁범죄’다. 푸틴은 ‘나토(NATO)의 동진(東進)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기 위한 주권국가의 정당하고 올바른 행동’이라고 주장했지만, 서방국가들의 눈에는 헌법 개정으로 평생 집권의 길까지 터놓은 상태에서 22년간 철권통치를 계속하고 있는 러시아의 절대권력자가 세계의 절반을 호령했던 소비에트 제국의 향수에 젖어 벌인 ‘광기(狂氣) 어린 도박’으로 보일 것이다. 게다가 푸틴 자신이 일주일이면 끝장낼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전쟁이 밀고 밀리는 지루한 공방전이 되면서 러시아군의 병력 및 장비 손실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렇듯 세계의 부정적 시각과 미국과 유럽의 서방국들이 주도하는 대러시아 경제제재 속에서 각종 와병설에 시달리는 70세의 독재자가 자국군의 졸전에 실망하고 있는 상태에서 열린 열병식이 국민과 세계의 축하 속에 열리는 행사가 되기는 어려웠다.

빛바랜 열병식에 무기력한 연설

러시아는 열병식을 위해 130여 대의 미사일, 전차, 장갑차, 전투차량 등을 동원했지만 서방을 긴장시킬 위협적인 신무기를 선보인 것은 아니었고, 열병식 때마다 핵전쟁 지휘기로 알려진 일류신(IL-80) 폭격기를 앞세우고 모스크바 상공을 누비며 위용을 자랑했던 공군 퍼레이드도 없었다. 러시아 당국은 날씨 문제로 취소했다고 밝혔지만 당일 일기가 그렇게 불순한 것이 아니었음을 감안한다면 반드시 날씨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 승리를 선포하고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 거행하려 했던 군사퍼레이드도 열리지 못했다. 푸틴 대통령은 12분짜리 연설을 통해 ‘미국과 나토의 위협으로 인한 특별 군사작전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함으로써 일단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데 그쳤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을 ‘크리미아 방식’으로 병합하여 동부에서 완충지역을 얻고 남부에서 크리미아 반도와 연결되는 영토를 확보하겠다는 목표가 그대로임을 시사하는 대목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2014년 흑해의 전략 요충지인 크리미아 반도를 점령한 후 주민투표 형식을 통해 러시아에 합병했었다.

그럼에도 푸틴의 연설은 그가 원래 말하고 싶어 했던 것들이 대부분 빠진 ‘무기력한 내용’이었다. 서방이 우려했던 대우크라이나 선전포고나 총동원령은 없었다. 교착 상태에서 공방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승리를 선언할 수 없었고, 자국 내 반전 여론이 만만치 않은 여건에서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는 사자후를 토할 수도 없었다. 핵사용 위협도 하지 않았고, 그동안 침공의 명분으로 주장했던 ‘탈나치’를 구체적으로 촉구하지도 않았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 유대인의 후손인 마당에 탈나치를 위해 군사작전을 벌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일인지는 푸틴 대통령 본인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치독일과의 전쟁에서 희생된 2천7백만 명의 러시아인들에 대한 그의 추모는 러시아 국민의 가슴을 파고들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입은 인적 손실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었다. 러시아는 3월 27일 전사자가 1,351명이라고 밝힌 이후 지금까지 전사자 규모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서방 전문가들은 전사자를 1만5천~2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중에 러시아의 신형 전차들은 미국제 대전차 미사일에 의해, 장갑차는 영국제 휴대용 소형 미사일에 의해, 최신형 전투헬기들은 폴란드제 견착식 대공무기에 의해, 그리고 흑해 주둔 러시아 함정들은 터키제 드론에 의해 파괴·추락·격침되고 있다. 즉, 러시아가 싸우고 있는 상대는 우크라이나뿐이 아니며, 우크라이나군이 서방국들이 제공하는 각종 무기로 러시아의 대형 무기들을 파괴하는 ‘저비용 고효율’ 전쟁을 벌이고 있어 향후 전세도 낙관 불허다. 요컨대, 푸틴 대통령의 무기력한 열병식 연설은 최종 승리의 불확실성과 이에 대한 불안감,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신병들을 죽음의 전선으로 내몰고 있는 데 대한 국민의 따가운 시선,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지고 있는 러시아 경제와 국민의 삶, 자신이 벌인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자신과 자신의 나라가 너무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 현실에 대한 회한 등을 두루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가 잃고 있는 것들

푸틴 대통령은 제2차 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치밀한 사전준비와 함께 상대를 방심하게 만드는 선전전을 펼쳤다.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굴러가지 않았고, 러시아는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공적’으로 내몰리고 있다. 모스크바를 지키는 근위대와 캄차카에 주둔한 부대까지 끌어다가 전선에 투입하고 있음에도 서방으로부터 물자와 장비를 지원받는 우크라이나군의 항전은 그칠 줄을 모른다. 5월 9일 바이든 대통령이 랜드리스법(Lend-Lease Act)을 서명함에 따라 미국의 지원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독일은 분쟁지역에는 살상무기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전통까지 깨면서 전쟁장비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제2차 대전 동안 미 랜드리스법의 최대 수혜국 중 하나였던 러시아가 이 법의 타깃이 되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은 주변의 반러 정서를 촉발하여 이웃국들을 적으로 만들고 있다. 폴란드, 루마니아, 스웨덴, 체코 등 구소련의 위성국가였다가 나토 회원국이 된 국가들은 러시아의 위협을 실감하여 물심양면으로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으며, 카자흐스탄, 조지아 등 구소련의 일부였던 나라들은 독립성 유지를 고심하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1991년 이전 소련은 지구 육지 면적의 15%인 2천2백만㎦를 차지하는 영토대국이었지만,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15개 공화국이 분리·독립함으로써 러시아의 영토는 1천7백만㎦로 축소되었다. 알짜배기 국토 1/4을 상실한 것이었다. 구소련의 일부였던 인접국들은 푸틴 대통령이 ‘고토 회복’을 꿈꾸는 야심가라는 사실에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며, 심지어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는 친러국인 벨라루스에서도 “우리도 어느 순간 합병당할 수 있다”는 경계심이 팽배해 있다.

임박한 것으로 보이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가져올 최대의 역풍이자 푸틴 대통령에게 최대의 손실이 될 전망이다. 중립국인 스웨덴과 핀란드는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나토 가입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으나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가입 여론이 들끓었고, 이에 이들 정부는 6월 나토 정상회의에 맞춰 조만간 가입 신청을 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이들 국가가 나토에 가입하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위치한 역외 영토인 칼리닌그라드에 핵무기를 배치하겠다고 경고했지만, 러시아가 이미 오래전부터 칼리닌그라드에 핵무기를 저장하고 있는 상태여서 새로운 변수가 될 것 같지 않다. 스웨덴과 핀란드가 애타게 갈구하는 것은 회원국 중 한 나라가 공격받으면 나토 전체가 공격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다른 회원국들이 자동으로 개입하도록 명시하고 있는 나토 헌장 제5조가 제공할 안보보장이다. 푸틴이 ‘나토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시작했다는 ‘군사작전’이 오히려 나토의 확대를 촉발하고 있음도 역사의 아이러니다.

푸틴 대통령 자신도 ‘Lose-Lose 게임’의 피해자

우크라이나 전쟁은 쌍방이 큰 피해를 입는 ‘lose-lose 게임’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 열세하에서 이웃 강대국에 의해 ‘파괴와 살상’을 당하는 우크라이나가 최대의 피해국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러시아산 에너지 금수로 인한 에너지 가격 급등, 세계적 경제 침체의 장기화, 식량 부족, 민항기의 러시아 영토 우회로 인한 에너지 및 시간 낭비 등 국제사회가 입고 있는 피해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를 제외한 최대 피해자는 러시아일 것이며 개인적으로는 푸틴 대통령 자신이 최대 피해자가 될 전망이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협력으로 석유가를 급락시켰고 러시아 핵무기를 무력화시키는 우주방어계획(SDI)을 들고 나왔다. 소련은 에너지 판매 수익이 급감하는 중에 SDI를 돌파하는 새로운 핵무기 개발에 국력을 탕진하다가 파산했고 1991년 소련 연방은 해체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는 러시아를 또다시 파탄으로 몰고갈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푸틴 대통령은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는 자신이 시작한 전쟁으로 전 세계의 혐오대상이 되었고, 국내적으로는 국민을 힘들게 만들고 수많은 젊은이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어쩌면 이 전쟁이 그의 정치적 종말을 예고하는 서막일지도 모른다.

이렇듯 모두가 피해를 보는 전쟁에서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세계적인 에너지난, 식량난, 자원난 등이 한국 경제를 힘들게 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전략적으로도 숫자로 산출하기 어려운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북한이라는 당면 위협과 중국이라는 최대 미래 위협에 직면한 한국으로서는 그 배후에 위치한 러시아와 비적대·우호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더 크게 보면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도 유사한 전략적 당위성이 존재한다. 즉, 미국도 중장기적으로는 중국이라는 더 큰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잘 지낼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한·러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독재자의 ‘특별 군사작전’으로 이런 미래전략 구상은 물거품이 되는 듯하다. 푸틴 대통령이 하루빨리 의미 없는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정상으로 돌아오는 결단을 내려줄 것을 희망한다.

이 기사는 저자의 견해를 나타내며 에포크타임스의 편집 방향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