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종전선언과 국제정치

김태우/ 전 통일연구원장, 전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2021년 11월 1일
업데이트: 2021년 11월 1일

종전선언은 평화협정의 일부일 수도 있고 평화협정을 위한 서막일 수도 있다. 현재 한반도 종전선언을 둘러싼 국제정치가 어지럽게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각 당사국 정부들의 전략 기조가 드러나고 있다.

북한은 종전선언·평화협정이 주체통일 여건 조성을 위한 핵심적 대남 전략의 하나임에도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하면서 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을 설득하기를 원하고, 한국은 평양 정권이 발하는 메시지의 행간을 읽으면서 ‘종전선언을 위한 세일즈맨’ 역할을 자임하여 미국을 설득하는데 올인하고 있다.

미국은 종전선언에 유보적이지만 한국 정부의 ‘몽니’를 거절하지 못해 한·미 간 협의에 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또 다른 당사국인 중국은 자신들에게 손해가 될 것이 없는 종전선언 문제가 국제정치 아젠다로 부상한 것을 즐기면서 조용히 지켜보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는 많은 전문가들이 북한과의 섣부른 종전선언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들을 경고하고 있다. 이들은 1973년 파리평화협정 이후의 자유 베트남과 2020년 미국-탈레반 평화협정 이후 아프간에서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한반도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 한국 내부의 혼란과 방심으로 이어져 한 국가의 패망과 대학살로 귀결될 수 있다는 개연성을 걱정한다. 지금이 대남 적화통일 전략을 고수한 채 핵강국의 길을 걷고 있는 북한과의 종전선언이 필요한 시기인가를 반문한다. 그러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한국의 우파 국민들과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냉정한 판단과 필요한 역할’을 기대한다. 북한이 원하는 종전선언을 중국이 지지하고 한국 정부가 이를 홍보하는 중에 한국에는 종전선언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언론이나 야당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종전선언을 향한 총력전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 번에 걸쳐 ‘낮은 단계 연방제’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고,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을 통해 ‘2018년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위해 노력하기로 김정은 위원장과 합의했다. 이후 문 대통령은 연속 3회에 걸쳐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종전선언을 위한 국제협력’을 요청했고, 북한의 김여정 노동당부부장은 9월 25일 담화를 통해 “흥미롭고 좋은 발상”이라며 화답했다. 이에 앞서 9월 초에는 노덕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방미하여 성김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만나 종전선언을 논의했다.

10월 19일에는 한·미·일의 정보수장들이 서울에서 만났다. 애브릴 헤인스 정보국장(DNI)과 일본의 정보수장인 다키자와 히로아키 내각정보관이 박지원 국정원장을 만난 것이다. 10월 23일에는 성김 대북특별대표가 방한하여 노규덕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과 회담했다. 26일 제이크 설리번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브리핑을 통해 “정확한 순서, 시기, 조건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내비치자 청와대는 “한미 간 시각차가 있을 수 있지만 이견은 아니다”라면서 진화하려 했다.

이어서 10월 29일 문 대통령은 바티칸을 공식 방문하여 2018년에 이어 두 번째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방북을 요청했다. 그동안 미국 민주당을 향한 한국 여권 정치인들의 로비와 미국내 좌파 한인단체들의 종전선언 로비도 활발했다. 이쯤 되면, 가히 ‘종전선언을 향한 총력전’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지난 5월 20일 미 민주당 하원에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촉구하는 ‘한반도평화법안’이 발의되었을 것이다. 이런 움직임들을 종합하면 남북 간 내면적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한국 정부가 미·일과 종전선언 및 대북제재 완화를 위한 의견 조율을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는 합리적 추정이 가능하다.

지난 9월 21일(현지시각) 임기 중 마지막 유엔 총회 연설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촉구했다 | 연합

종전선언·평화협정의 함정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위장 평화를 통해 상대의 안보태세를 이완시키려는 흑심(黑心)을 품은 일방이 포함되거나 군사적 상호억제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평화협정은 예외없이 파기되고 한 국가의 참담한 비극을 초래했다. 유감스럽게도 한반도는 이 두 가지 조건 모두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북한에게 있어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는 주체통일 여건 충족을 위한 지고의 과제이며, 노동당 규약은 ‘남조선에 대한 미제 침략무력의 철거,’ ‘강력한 국방력,’ ‘전국적 범위에서의 사회주의 사회 건설’ 등을 천명하고 있다. 북한의 핵강국 행보도 중단없이 지속되고 있다. 북한은 고체연료 다탄두 대륙간탄도탄(MIRVed ICBM), 장거리 순항미사일(C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및 이를 운용할 핵추진 잠수함(SSN), 변칙기동 탄도미사일(pull-up BM), 극초음속 무기(HGV, HCM) 등을 ‘최우선 개발 대상 전략무기’로 지정하고 연구와 시험발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 같이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무력화하거나 미 본토를 위협하여 한미동맹의 이완을 부추길 수 있는 ‘게임체인저’ 무기들이다. 이는 북한이 ‘핵보유 기정사실화’ 목표를 넘어 ‘핵강국 지위’를 추구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대화나 협상을 통한 북한 비핵화가 사실상 불가능함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이런 북한의 면전에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북한 비핵화를 가져온다”는 역순(逆順)의 논리를 펼치는 중이다. 종전선언이 한미동맹, 주한미군, 유엔사 등의 존재 이유를 약화시키고 한국을 더욱 혼란스럽고 위험한 나라로 만들 수 있다는 경험적 교훈은 안중에 없는 듯하다.

1938년 9월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은 히틀러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일부를 양보하는 뮌헨협정에 서명한 후 이제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지만 6개월 후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째로 점령했다. 1939년 히틀러와 스탈린이 서명한 독소불가침조약은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파기되었고, 1941년에 체결한 일소중립화조약도 1945년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본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거처 한반도까지 진군함으로써 사문화되었다.

자유베트남은 1973년 파리평화협정 이후 ‘민족, 평화, 반미’ 구호들이 난무하는 혼란에 빠졌다가 1975년 월맹이 협정을 깨고 전면 남침을 재개하자 56일 만에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군이 남겨준 수많은 군사장비들은 길바닥에 버려졌고, 조종사가 도주한 미제 전투기들은 날아오르지 못했으며,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이 버린 미국제 M-48 Patton 탱크를 타고 사이공 시내로 진주했다. 이후 수백만 명이 숙청·처형되었다. 2020년 2월 미국과 탈레반이 맺은 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1년반 후인 2021년 8월 7만 명에 불과한 탈레반군은 통계상으로는 30여 만명에 달하는 아프간 정부군을 단숨에 유린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경계해야 할 3대 망상

그래서 ‘여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종전선언’을 우려하는 한국인들은 미국 정부가 품어서는 안 될 세 가지의 망상을 지적한다.

첫째, 대화와 설득을 통해 북한 비핵화를 끝낼 수 있다는 망상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 준수되지 않고 폐기된 무수한 과거 합의들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지금 북한이 핵강국의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것이 망상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한국인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지나치게 외교적 성과에 연연한다면 망상을 진리로 착각할 수 있음도 우려한다.

둘째, 종전선언과 평화협상이 북한 비핵화를 견인할 수 있다는 망상을 경계해야 한다. 흑심들을 청산했다는 증거가 없는 가운데 전략무기 개발에 광분하는 북한을 상대로 종전선언부터 서두르는 것은 안보논리를 역행하는 것이며, 그것이 결국 한국이라는 아시아 동맹국의 상실과 함께 한국민의 비극을 초래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셋째, 중국이 북한 비핵화를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 것 역시 또 하나의 망상이다. 오늘날 중국이 대륙과 해양 그리고 우주 및 사이버 등 모든 공간과 군사, 경제적, 정치,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미국에 도전하면서 미·중 간에는 신냉전이 격화되고 있다. 미국에게는 ‘중국판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Shock)’이다. 아시아의 신냉전은 “현상유지 세력인 미국과 현상 타파세력인 중국 간의 전면 경쟁 구도 하에서 중·러·북 대륙세력과 미국과 미국의 민주주의 동맹국들로 구성된 해양세력 간에 벌어지는 세력 경쟁 및 군비경쟁”으로 정의될 수 있다.

이 구도 하에서 북핵을 둘러싼 미·북 갈등은 미·중 군비경쟁의 하부 경쟁구도에서 북한이 중국을 대신하여 미국을 견제하는 ‘대리 군비경쟁’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런 구도에서 중국이 북한에게 핵을 내려놓도록 압박을 가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미어쉐이머(John Mearsheimer) 교수가 말한 대착각(Great Dellusion)에 이은 또 하나의 큰 착각이 될 수 있다.

지금은 종전선언을 논할 때가 아니다

남북 간 공존과 상생은 매우 중요한 과제이기에 어떤 정부든 이를 위해 노력해야 마땅하다. 당연히, 여건이 충족되고 안보가 담보된 상태에서의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이라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은 종전선언을 논할 때가 못된다. 북한의 대남전략도 그대로이고 북핵 문제는 중국의 비호 아래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종전선언을 재촉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역주행’이 될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은 정부에게 “종전선언을 서두르는 것이 한국의 국익과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인가”를 묻고 있으며, ‘한반도평화법안’을 발의한 미국 민주당 의원들에게는 “종전선언이 한국과 한국 국민에게 강요할 수 있는 위험성을 고심해본 적이 있는가”를 묻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에게는 “지금은 종전선언을 논하기보다는 적어도 당분간 ‘북핵과의 불편한 공생’이 불가피함을 인정하고 동맹강화와 연합방위태세 점검에 더 많은 비중을 실어야 할 때가 아닌가”를 묻고 싶어 한다. 무엇보다도 바이든 대통령은 많은 한국인들이 종전선언이 한·미 간 의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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