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전 상임의장, 대만 방문 전 갑자기 사망…유족, 中대사관 관련성 제기

한동훈
2020년 05월 2일 오후 11:19 업데이트: 2021년 05월 16일 오후 1:15

지난 1월 숨진 체코 권력서열 2위 야로슬라프 쿠베라(Jaroslav Kubera) 상원의장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이 제기되면서 체코 정계가 술렁이고 있다.

쿠베라 상원의장은 지난 2월 대만방문을 예정했지만, 일주일 사이 건강이 급속하게 악화되며 72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숨을 거뒀다.

그간 애도 기간을 가졌던 유족들은 최근 언론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며, 쿠베라 의장이 주 체코 중국 대사관의 협박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지난달 27일 부인 베라(Vera) 쿠베라는 체코 방송에 “남편(쿠베라 의장)이 사망 3일 전 장젠민(張建敏) 주 체코 중국대사와 ‘불쾌한 밀실 회담’을 가졌다”고 했다.

이에 따르면, 장젠민 대사는 지난 1월 17일 프라하의 중국 대사관에서 신년맞이 저녁 만찬을 개최하고 쿠베라 의장 부부 등 체코 유력인사를 초대했다.

그러나 프라하에 도착한 쿠베라 의장 부부는 곧 갈라져야 했다. 장젠민 대사 측이 쿠베라 의장과 단독으로 만나려 안배를 해뒀기 때문이었다.

쿠베라 부인은 “중국 대사관 직원이 나를 행사장으로 안내했고, 장젠민 대사는 남편을 별실로 데려가 중국 측 통역과 셋이서만 대화했다”고 말했다.

이어 “남편은 20여 분 뒤 대화를 마치고 돌아와 굳은 표정으로 ‘대사관에서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말자’고 했다”고 전했다.

이날 1시간 30여 분 진행된 만찬을 끝내고 귀가한 남편은 밤새 정원을 서성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별일 아니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마 대사가 해임될 것”이라고만 했다.

장젠민 주 체코 중국대사가 야로슬라프 쿠베라 체코 상원의장에 보낸 서한 | 화면 캡처

그리고 3일 뒤 쿠베라 의장은 사망했다. 명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심근경색으로 추정됐다. 주치의에 따르면, 심장이상은 저녁 모임 당일이나 그 다음날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쿠베라 부인은 지난달 28일 또 다른 체코 언론과 인터뷰에서 “평소 명랑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남편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족을 보호하려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유족들은 쿠베라 의장이 지난해 말 대만방문 의사를 밝힌 이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엄청난 압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부인과 딸은 유품을 정리하던 중 고인의 가방에서 각각 체코 대통령부와 중국 대사관에서 보낸 편지를 발견했는데 이 편지를 보고 쿠베라 의장 사망원인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두려웠다고 했다.

또한 쿠베라 부인은 “중국이 배후에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 대사가 여러 차례 찾아와 대만 방문에 대해 말하자고 말했다”고 했다.

이와 관련 로이터 통신은 중국 대사관에서 보낸 편지를 입수했다며, 체코 고위 관료가 대만을 방문하면 중국 내 체코 기업에 보복하겠다고 위협하는 내용이 담겼다고 지난 2월 보도한 바 있다.

쿠베라 상원의장의 한 측근 역시 체코 언론에 “대만방문을 강행할 경우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다고 중국 대사관에서 경고했다”고 전했다.

체코는 최근 중국과 갈등을 빚어 왔으나, 국가적으로는 중국과 가깝다. 밀로시 제만 체코 대통령은 유럽 지도자 가운데 대표적인 친중 인사로 꼽힌다.

현재, 밀로스 비스트르칠(Milos Vystrcil) 신임 상원의장은 중국 대사의 협박 편지 사건을 ‘중대한 스캔들’로 규정하고 의회 차원의 조사를 요구하고 나섰다.

제만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지만, 비스트르칠 의장은 “쿠베라 의장과 유족, 그리고 체코의 주권과 자유를 위한 일”이라며 진상규명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