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어른’이었던 803호 할아버지를 찾습니다”

윤승화
2020년 6월 17일
업데이트: 2020년 6월 17일

“아직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좋은 인연이 많다는 걸 나누고 싶어요”

지난 15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천사 같던 윗집 할아버지 잘 계시나요?”라는 제목으로 사연이 하나 올라왔다.

이날 사연을 올린 글쓴이 A씨는 자신을 40대 후반 여성이라고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A씨는 11년 전쯤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떡 만드는 걸 좋아하는 A씨는 이사 떡으로 직접 시루떡을 쪄서 윗집에 인사를 갔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장수상회’

“띵동”

벨을 눌렀는데도 한참이나 소리가 없기에 가려고 하던 찰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이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였다.

“옷을 입느라 늦었네요. 미안합니다”

A씨가 건넨 이사 떡에 할아버지는 “요새는 이런 집 잘 없는데, 감사합니다”라고 거듭 고마움을 전했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길’

윗집을 시작으로 A씨가 이웃들에게 떡을 돌리고 온 사이, 할아버지는 A씨 집 문손잡이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하나 걸어두었다.

비닐봉지에는 호박 두 개와 호박잎이 들어있었다. 이와 함께 종이에 정성 들여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반가워요”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A씨와 할아버지.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말도 거의 하지 못하고 거동 자체가 불편한 아내를 할아버지는 혼자 다 보살피며 지냈다.

A씨는 “정말 지극정성으로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우시고 아침저녁 매일 두 번씩 꼬박꼬박 산책하시고, 할머니 옷도 매일 정성껏 색색깔로 갈아입히셨다”고 전했다.

A씨는 그런 할아버지 내외를 뵐 때마다 항상 반갑게 인사를 나눴으며, 음식을 할 때면 종종 나눠드리고는 했다.

A씨가 음식을 나눠드린 날에는 꼭 검은색 비닐봉지가 문고리에 걸려 있었다.

쌀 튀밥, 김부각, 깻잎, 콩잎, 장단콩, 귤, 사과, 곶감 등등..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지만 할아버지는 꼬박꼬박 검은색 비닐봉지를 놓고 갔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장수상회’

그러던 어느 날, 큰일이 생겼다.

A씨가 혼자 집에서 가계부를 정리하고 있던 어느 오후였다.

위층에서 쿵 하고 큰 소리가 났다.

A씨는 “평소에 휠체어 소리도 한 번 안 나는데 갑자기 소리가 나니까 촉이 안 좋았다”고 했다.

A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폰을 했지만, 윗집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A씨는 직접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결국 A씨는 119에 신고했다.

급하게 문을 뜯어내고 들어간 구조대와 A씨는 휠체어에서 떨어져 쓰러져 있는 할머니를 발견했다.

할머니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됐다. 병원에서는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설명했다.

뒤늦게 도착한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덜덜 떠는 손으로 A씨를 붙잡았다. A씨 또한 할아버지의 손을 꽉 잡아드렸다.

할아버지가 아내와 함께 병원에 있을 동안, A씨는 열쇠 수리공을 불러 할아버지 집 현관문을 고쳤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장수상회’

다음 날, 할아버지는 박카스 한 박스를 들고 고맙다며 찾아왔다. A씨가 괜찮다고 마다했지만 10만원까지 손에 쥐여주고 갔다.

그 뒤로, 할아버지는 A씨 가족의 수호천사가 됐다.

A씨는 “남편이 아침 7시 출근인데 누가 자꾸 차를 닦아놓는다고 해서 보니까 아침 5시 30분에 할아버지가 나오셔서 차를 닦아주고 계셨다”고 했다.

심지어 겨울에는 뜨거운 물로 차 앞 유리에 눈 언 것까지 다 닦는 할아버지였다.

A씨가 그러지 마시라고, 그러다 병나신다고 하는데도, 요리조리 차를 구석에 숨겨 주차해놓아도, 할아버지는 귀신같이 차를 찾아내어 닦아놓았다.

결국 A씨의 남편이 “제 취미가 손 세차다. 제 취미를 빼앗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나서야 할아버지의 세차는 멈췄다.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할아버지는 그 뒤로도 꼬박꼬박, 일주일에 두세 번 씩 A씨 집 문 앞에 각종 채소와 군것질거리를 걸어두었다.

따끈하게 찐 옥수수나 요구르트 따위의 간식을 받은 A씨는 받는 만큼 열심히 밑반찬을 만들어 할아버지 댁에 가져다드렸다.

그렇게 3년이 더 지났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자신을 모시기로 해 이사를 가게 됐다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아들만 둘인데, 막내딸 생긴 기분이어서 좋았어요”

할아버지는 그리고는 A씨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온라인 커뮤니티

옥가락지 하나와 은가락지 하나였다.

“우리 할머니가 생전에 쓰던 거 다 정리했는데, 붙박이장 치우다 보니까 서랍 틈에 딱 그 두 개만 남아있더라구…

할망구가 막내딸 생겨서 주라고 남겨놓은 건가 보다 싶어서 들고 내려왔어요”

할아버지의 아들들 또한 “아버지 통해서 이야기 많이 들었다. 감사하다”고 A씨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A씨는 “가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문득 할아버지가 떠오른다”며 “요즘 같은 세상에 누군지 몰라도 엘리베이터만 타면 고개 숙여 인사하시고 별일 없냐고 물어봐 주시던 할아버지 덕분에 저희 동은 아직도 엘리베이터에서 주민들끼리 마주치면 꼭 인사를 나눈다”고 덧붙였다.

“803호 할아버지 잘 계시지요? 덕분에 많이 행복했었어요.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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