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살인과 거짓의 한 세기

편집부
2021년 7월 2일
업데이트: 2021년 7월 2일

알림 :  이 기사는 충격적인 폭력과 고문, 살해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와 사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21년 7월 창당한 중국 공산당은 지난 100년 동안 중국인들에게 죽음과 파괴를 가져왔다.

마르크스주의와 투쟁 사상으로 무장한 공산당은 간첩, 지주, 지식인, 혁명정신이 약한 관리,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 종교인, 소수민족 등 반혁명 세력을 상대로 수많은 운동을 전개했다.

모든 운동의 목적은 하나였다. 지상에 ‘공산주의 천국’을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결과 역시 매번 똑같았다. 군중의 고통과 죽음이었다. 그사이 공산당 고위층과 가족들은 부와 권력을 축적했다.

공산당은 1949년 정권을 수립하고 이후 70년 이상 중국을 통치했다. 같은 기간 중국에서는 수천만 명이 비자연적 원인으로 사망했고 수천 년 역사의 전통문화가 거의 대부분 말살됐다.

중국은 1990년대 말부터 경제적으로 두드러진 성장세를 나타냈지만, 공산당은 글로벌 패권 추구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의 본성을 유지하고 있다. 수백만 명의 종교인, 소수민족, 반체제 인사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탄압받고 있다.

창당 100주년에 즈음해 중국 공산당이 저지른 굵직한 참사를 정리했다.

창당 초반부터 이어진 숙청작업

마오쩌둥은 공산당 창당 초기인 1920년대 ‘중국공농혁명군’을 이끌었으나 국민당에 토벌당하자, 지역 토비 등과 손잡고 장시성에서 ‘중국공농홍군’(홍군)을 편성했으며 이후 세력을 넓혀 1931년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장시 소비에트)이라는 과도정부를 건설했다.

마오쩌둥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을 국민당 정보기관인 ‘반볼셰비키 연맹’의 첩자로 모함하고 숙청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홍군 병사와 공산당원이 목숨을 잃었다. 국민당의 공격이 아닌 마오쩌둥에 의한 사망이었다.

이 숙청작업은 장시 소비에트 건설 직전인 1930년 여름에 시작돼 1년 남짓 이어졌으며, 이후 마오쩌둥이 1976년 사망할 때까지 지속된 편집증적 운동의 첫 번째 사건으로 기록됐다. 숙청이 끝날 무렵, 장시성 공산당 위원회는 당원 80~90%가 간첩으로 고발돼 처형됐다고 보고했다.

중국 역사학자 궈화(國華)는 1999년 한 기고문에서 당시 홍군 병사 약 4만 명 중 숙청으로 숨진 인원이 4400명이라고 추산했다. 또 다른 문헌에는 군사조직과 무관한 비전투원 1천여 명이 살해됐다고 기록했다. 공산당은 탄생 초기부터 끊임없이 조직원을 살해하는 기이한 집단이었다.

궈화는 기고문에 “국민당 간첩으로 지목된 당원들은 피부 태우기, 대나무 꼬챙이로 손톱 밑 찌르기, 여성의 경우 가슴 절단 등의 고문을 당했다”고 썼다.

중국 산시성 옌안에서 개최한 문예인들과 회의에 참석한 마오쩌둥(빨간 동그라미 안). | Public domain

1935년 공산당의 절대 권력을 쥐게 된 마오쩌둥은 1942년부터 공산당 본부가 있던 산시성의 외딴 산악지역인 옌안에서 ‘정풍운동’을 개시했다.

잘못된 정치·문화 풍조 추방을 내세웠지만, 사실 정풍운동은 마오쩌둥의 반대파에 대한 숙청이었다. 마오쩌둥과 그의 추종세력은 반대파에게 ‘국민당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상투적 수법을 반복했다.

1만 명 이상의 당원과 가족이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스파이라고 자백한 후 살해됐다. 관영 신화통신 전 편집장 웨이쥔이는 1998년 펴낸 책에서 “당시 중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모두 간첩으로 몰렸다. 12살, 11살, 10살, 심지어 6살짜리 간첩이 발견됐다”며 정풍운동을 비판했다.

웨이쥔이는 정풍운동으로 숨진 화가 스보푸와 그 가족의 비참한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42년 어느 날 공산당 관계자들이 갑자기 스보푸를 간첩 혐의로 고발하고 체포했다. 남편의 사형 선고를 감당하지 못한 그의 아내는 그날 저녁 어린 두 자녀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몇 시간 뒤 그녀와 두 자녀의 시신을 발견한 당 관계자들은 ‘그녀는 당과 인민에 깊은 증오를 가지고 있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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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캉에서 한 공산당 소속 병사가 지주를 총살하려 하고 있다. | Public Domain

집권 후 첫 대규모 운동 ‘토지 개혁’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 정권이 탄생했다. 이날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마오쩌둥은 곧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 3년간 계속된 토지개혁 기간, 마오쩌둥은 가장 가난한 계층인 농민을 동원해 ‘지주’들의 땅과 자산을 폭력으로 빼앗았다. 3년간 수백만 명이 죽었지만, 지주 대부분은 실제로는 남들보다 조금 더 부유한 농민이었다.

마오쩌둥은 스스로 독재자임을 인정했다. 그는 국민당과 연루된 “제국주의자들의 개들” “지주 계급, 부르주아-관리 계급” “반동분자와 그 공범자”에 대해서는 독재 권력을 휘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누가 제국주의자들의 개인지 여부는 공산주의자들이 판단한다.

세계적 권위의 중국 현대사 연구자 프랑크 디쾨터는 “토지개혁으로 숨진 희생자 다수는 맞아 죽었고 일부는 총살됐다. 희생자 대부분이 살해되기 전 고문을 당했는데,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실토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라고 전했다.

당시의 참상은 2019년 미국에서 발간된 책 ‘피로 붉게 물든 땅(The Bloody Red Land)’에 잘 묘사됐다. 이 책은 충칭 주민 ‘리만’씨를 중심으로 토지개혁의 실상을 전한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아버지가 지주로 몰린 리씨와 가족들은 당국으로부터 은닉한 재산을 실토하라는 압박을 받게 된다. 그러나 리씨의 아버지는 이미 마약 중독으로 가산을 탕진한 상태였기에 아무것도 실토하지 못한 리씨는 사지가 기둥에 묶이고 생식기에 무거운 돌을 매달아 허공에 걸리는 고문을 받는다.

배꼽에서 피가 쏟아지는 등 심각한 장기 손상을 입고 죽을 지경이 돼서야 겨우 풀려난 리씨는 그래도 자신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와 함께 끌려간 10여 명은 모두 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리씨와 가족들은 이후 수개월간 여러 차례 고문을 받게 되고 리씨는 후유증으로 22세의 나이에 실명한다.

이 책을 쓴 충칭사범대 전 교수 탄쑹은 토지개혁의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 토지개혁을 직접 겪은 쓰촨성 주민 100명 이상을 인터뷰하는 등 철저한 고증과 문헌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2017년 충칭사범대에서 해임됐고 미국으로 망명한 뒤에야 책을 펴낼 수 있었다.

탄쑹 전 교수는 공산당이 토지개혁을 벌인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중국인들을 당의 지배에 복종시키려는 것이었다”며 “채찍과 당근을 썼다. 당근은 주로 토지 배급으로 이뤄졌다. 토지가 어디에서 왔겠나. 그들에게는 토지가 없었다. 그들은 토지를 빼앗아 나눠줬다”고 말했다.

탄쑹 전 교수는 또한 “다른 목적도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돈이 매우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주들의 재산, 특히 금·은 같은 패물을 빼앗았다. 이를 통해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이렇게 빼앗은 재물은 농민들에게 배급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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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중국인 가족. 촬영 시기 및 장소 미상. | Public domain)

4500만명의 죽음으로 이어진 ‘대약진 운동’

마오쩌둥은 1958년 대약진 운동을 개시했다. 이는 곡물 생산량을 늘리는 동시에 중국을 공업 대국을 발전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을 선포하면서 “상당한 증거를 바탕으로 말하고 있다”며 “15년 안에 영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농부들에게는 뒷뜰에 용광로를 만들어 철을 생산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농민들은 흙벽돌을 쌓아 만든 용광로(토법고로)를 만들었지만, 철광석이 없었다. 결국 농기구와 금속 기물들이 용광로에 던져졌다. 산림은 벌목돼 땔감으로 쓰였다. 생산돼 나온 철은 쓸모없는 무쇠덩어리였다.

그 사이 농경지가 방치되면서 농업 생산량은 오히려 급속히 감소했다. 하지만, 윗선에 ‘게으른 인물’로 찍힐 것을 두려워한 지방 관리들은 실적 채우기 과열 경쟁을 벌였다. 실제 농업 생산량을 훨씬 웃도는 목표 생산량을 설정했고,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농민들이 먹을 곡물마저 징수했다.

대약진 운동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수천만 명이 아사하는 대기근을 초래했다. 중국 공산당은 가뭄으로 피해가 커졌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건은 사상 최악의 인재(人災)로 평가된다.

굶주린 농부들은 야생 동물, 풀, 나무껍질 심지어 점토까지 먹었다. 극심한 굶주림은 또한 많은 사람을 식인 풍습으로 몰아갔다. 사람들은 낯선 사람, 친구, 가족의 시체를 먹기 시작했고 부모가 아이를 죽여 먹거나, 자녀들이 나이든 부모를 잡아먹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15년간 영국 BBC와 가디언의 중국 특파원을 지냈고 2001년 ‘중국은 가짜다(The Chinese)’를 펴낸 재스퍼 베커는 앞서 1996년 발간한 책 ‘헝그리 고스트(Hungry Ghosts)’에서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과 대기근을 철저하게 분석했다.

베커는 이 책에서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지 않기 위해 서로 아이들을 맞교환하거나 시장에 팔았다”며 대기근 시기 중국에서는 20세기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의 식인 사건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13개 성에서 약 3천~5천 건의 식인 사례가 발견됐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 역사학자 위시광은 1980년대 후난성에서 촬영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는데, 사진 속 남성은 1세 정도의 어린아이 유골 옆에 서 있었고 유골은 남성의 아이이며 남성이 굶주림 끝에 잡아먹은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이 남성은 살인죄로 처형됐다고 덧붙였다.

프랑크 디쾨터는 ‘마오의 대기근’에서 대약진 기간에 죽은 사람을 4500만 명으로 추산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당시, 공산당원들이 한 남성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인민재판하고 있다. | Public Domain

5천년 문명을 말살한 ‘문화대혁명’

대약진의 재앙적 실패 이후, 권력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낀 마오쩌둥은 공산당과 중국, 중국인에 대한 지배력을 틀어쥐기 위한 새 운동을 준비했다. 바로 1966년 문화대혁명이다.

마오쩌둥은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권력자들’을 탄압하고 자신에 대한 숭배를 고착화했다. 국가권력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혼란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처형되거나 자살했다. 악명 높은 홍위병이 탄생했고, 이들은 전국에서 문화유산을 파괴했다.

문화대혁명은 사회 각계각층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동료 이웃 친구 가족을 대상으로 ‘반동분자’를 색출하고 신고하도록 장려하는 캠페인이기도 했다. 이 ‘반동분자’들은 생각이나 의견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이들이었다. 정치적 견해로 생사가 갈리는 험한 시절이었다.

탄압 대상은 주로 지식인, 예술가 혹은 마오쩌둥 이념에 찬성하지 않은 공산당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시골 오지로 보내져 강제노역을 당하거나 감옥 혹은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그에 앞서 인민재판에 넘겨져 군중들 앞에서 모욕을 당한 뒤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고 자아비판해야 했다.

중국 전통문화와 오랜 관습, 사상은 마오쩌둥에 의해 ‘낡은 4가지’로 규정돼 타도의 대상이 됐다. 문화유물, 건축물, 조각상, 예술품, 회화, 서적이 광분한 홍위병들의 손에 박살났다. 공식명칙이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었던 이 혁명의 실상은 그저 마오쩌둥의 권력 찬탈 운동이었다.

문화대혁명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장즈신(張志新)이다. 공산당원으로 랴오닝성 공산당 위원회 선전부 간부였던 장즈신은 39세였뎐 1969년 8월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을 비판했다가 감옥으로 보내졌다. 이곳에는 무려 3만명이 넘는 당원과 간부들이 수감돼 있었다.

장즈신은 충성스러운 당원이었지만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충성의 대상은 마오쩌둥이 아닌 당이었다. 장즈신은 감옥에서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간수들은 그녀의 입을 강제로 벌린 뒤 철사로 고정한 후 더러운 대걸레를 쑤셔넣었고, 머리카락은 모두 잡아 뜯어냈다. 또 그녀를 발가벗겨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남자 감방에 집어넣어 윤간하도록 하는 천인무도한 행위를 여러 차례 저질렀다.

그렇게 6년 가까이 수감됐던 장즈신은 1975년 정신분열증에 걸렸고 그해 4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간수들은 그녀가 총살 당하기 전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구호를 외칠 것이 두려워 칼로 기도를 잘라내 소리내지 못하도록 한 채 형장으로 끌고 갔다.

장즈신이 갇혀있는 사이 남편과 두 아이는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야 했다. 가족들은 장즈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울음조차 터뜨리지 못했다. ‘당의 처분에 분노했다’는 이웃들의 신고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 재앙은 권력 약화를 두려워한 마오쩌둥의 손에서 시작됐지만, 정작 마오쩌둥은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기도 전에 병으로 숨졌다. 그리고 그가 죽고 채 한달도 되지 않은 그해 10월 문화대혁명은 종료됐다.

중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프랑크 디쾨터는 2016년 미국 공영라디오 NPR과 인터뷰에서 문화대혁명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남겼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폐해는 “트라우마”라고 말했다.

디쾨터는 “문화대혁명은 사람이 사람을 적대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동료, 친구, 가족을 비난해야만 했다. 그것은 상실이었다. 우정의 상실,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의 상실, 누구나 돌변할 수 있으므로 사회적 관계는 믿지 못할 것이라는 그런 상실이다. 이것이야말로 문화대혁명이 남긴 진정한 상흔이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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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의 한 위탁 가정에 맟겨진 고아 아기. 2014.4.2 | Kevin Frayer/Getty Images

강압적을 시행된 ‘한 자녀 정책’

문화대혁명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79년 중국 공산당은 ‘한 자녀 정책’이라는 새 캠페인을 개시했다. ‘인구 증가를 억제해 삶의 수준을 높이겠다’며 시작한 이 정책은 대규모의 강제 낙태, 강제 불임, 영아 살해로 수많은 가정을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중국 보건부 자료에 따르면, 2013년까지 약 3억명에 가까운 태아가 낙태됐다.

강제 시술로 건강을 해친 여성들도 속출했다. 2013년 강제 불임 대상자로 지정된 장시성 주민 샤뤄닝 씨는 건강 문제로 시술 연기를 요청했지만 당국에서 돌아온 답변은 “밧줄에 묶어서라도 시술을 하겠다”였다. 시술 후 혈액 소변을 보고 두통과 복통에 시달리던 그녀는 결국 직장에서 해고되며 삶이 망가지고 말았다.

치솟던 출산율은 강압적인 산아제한 정책에 감소세로 돌아섰지만, 이제 중국은 인구 절벽이라는 새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공산당은 2016년은 ‘한 자녀 정책’을 중단하고 두 자녀 출산을 허용하면서 반짝 반등을 이뤄내기는 했지만, 이후 출산율은 계속 하락하며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

결국 공산당은 ‘두 자녀 정책’ 시행 5년 만인 올해 5월 31일 ‘세 자녀 정책’을 발표하며 사실상 산아제한을 폐지했지만, 내년부터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를 넘어서는 고령사회 진입과 사상 첫 인구 감소 등을 겪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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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4일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대와 군대 사이의 충돌로 부상을 입은 소녀가 수레에 실려 이송되고 있다. | MANUEL CENETA/AFP/Getty Images/연합

중국 역사를 20년 이상 퇴보시킨 ‘톈안먼 광장 학살’

1989년 4월, 개혁 성향이었던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한 학생들의 모임이 지금껏 중국 정권이 보지 못한 대규모 시위로 확대됐다.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 모인 대학생들은 통화 팽창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공산당 관리들의 부패, 대량 실직사태 등에 항의하면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에 대한 허용 등을 요구했다.

5월에 접어들면서 중국 전역에서 온 학생들과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톈안먼 시위에 동참했다. 비슷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학생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군대에 시위를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6월 3일 저녁, 탱크가 도시로 진입했고 광장을 에워쌌다. 다음날 새벽까지 유혈 사태가 빚어졌다. 무장하지 않은 시위대 수십 명이 탱크에 깔려 죽었고, 군중을 향한 무차별 사격으로 사망하거나 다쳤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장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베이징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일했던 릴리 장은 에포크타임스에서 그날의 상황을 전했다. 총소리에 잠이 깬 그녀는 다음날인 4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달려갔다. 간밤에 대량 학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병원에 도착해 전쟁터 같은 장면을 접한 그녀가 제일 처음 느낀 것은 온몸을 휘감는 공포였다. 흐느끼고 있던 동료 간호사는 그녀를 보자 “부상당한 시위자들이 흘린 피가 병원에서 강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응급실에 도착한 환자 중 18명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장씨는 “희생자들은 몸에서 탄환 조각이 나오고 상처부위가 크게 찢겨져 있었다. 진압부대가 시위대를 향해 덤덤탄(확산탄환)을 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너무 많이 출혈한 상태였다. 살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장씨는 치명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온 관영매체 중국체육일보 기자의 마지막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 기자는 의료진에게 “정말로 발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비무장한 학생과 시민들에게 발포하다니, 이게 무슨 집권당이냐”는 말을 끝으로 숨을 거뒀다.

영국 정부의 외교문서에 따르면, 유혈 진압을 지시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세 번째 최고자도자인 덩샤오핑은 톈안먼 학살 한달 전인 1989년 5월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200명의 사망자가 중국에 20년의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지금까지도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톈안먼 사태로 인한 사망자 숫자와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관련 자료나 출판물, 온라인 게시물을 철저하게 검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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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의 사복경찰이 톈안먼 광장에서 파룬궁 수련자들 체포해 연행하고 있다. 2000.11.31. | Minghui.org

정권 안정을 위해 추진한 ‘파룬궁 탄압’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 막바지에 “천하가 크게 혼란해야 천하를 크게 다스릴 수 있으며 7~8년마다 해야한다”고 말했다. 7~8년마다 대규모 군중 살인을 저질러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은 오늘날 여러 사회주의 정당에서 ‘7~8년 운동론’이라는 정권유지 비결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더욱 그러하다. 톈안먼 사건 발발 이후 10년, 사태 수습 기간을 고려하면 8년 정도 지난 1999년 중국에서는 또다른 대규모 유혈 진압이 전개됐다. 파룬궁 탄압이다.

그해 7월 20일 당국은 당시 약 7천만~1억명으로 추산되는 파룬궁 수련자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돌입했다. 파룬궁은 진실, 선량, 관용(인내)를 원칙으로 하는 수련법이다. 수련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파룬따파(파룬궁의 공식명칭) 인포센터에 따르면, 수백만 명 이상의 수련자들이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되거나 학교에서 퇴학당했으며, 감옥에 갇혀 고문을 받거나 살해됐다.

이 탄압은 70여년의 내부 숙청과 혁명을 거치며 다듬어진 잔인한 수단의 향연이었다. 그 최악은 강제 장기적출이다. 장기적출은 죽거나 혹은 살아있는 사람의 배를 갈라 장기를 도려냈다는 의미다. 당 간부들은 적출한 장기를 이식 수술용으로 팔아넘기며 돈벌이로 삼았다.

영국 런던의 민간독립법정인 차이나 트리뷰널은 2019년 중국 정권이 대규모의 강제 장기수확(적출)을 벌인 것이 매우 개연성 있는 사실이며, 감옥에 갇힌 수련자들이 주된 희생자가 됐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파룬궁이 왜 탄압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사회 안정을 해친다는 이유였지만, 공산당의 공포통치 아래 놓인 중국에서 그런 단체가 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추정해 볼 수 있는 탄압 이유는 파룬궁이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된 전통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도(道)를 추구하는 것은 중국인들의 오래된 민족성이었다. 중국은 예부터 유가, 도가, 불가의 가르침이 성행했다. 90년 초반 전해진 맨손 건강법이자 전통사상의 핵심인 진실, 선량, 인내를 강조한 파룬궁은 이러한 중국인들의 니즈(needs)와 맞아떨어졌다. 당시 거의 모든 지방에서 아침 저녁으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이는 곧 모든 가치 위에 군림해야만 하는 중국 공산당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시기적으로도 마오쩌둥이 주창한 ‘7~8년 운동론’과도 맞물렸다. 7천만명이 넘는 수련자들은 대다수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어느 회사 혹은 학교의 일원이었다. 14억 중국인을 겁주기에 적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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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장위구르 지역에 건설된 직업훈련센터. 직업훈련과 어울리지 않는 높은 담장과 철책, 감시탑이 눈길을 끈다. 2018.9.4 | Thomas Peter/Reuters/연합

소수 종교,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

파룬궁 탄압 후 10년이 흘러 2000년에 접어들면서, 정권은 또한번 다른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중국 인구의 80% 가량을 차지하는 한족을 티베트, 신장, 네이멍구(내몽골) 등으로 대거 이주시키며 해당 지역의 중국화를 추진했다.

이곳에는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소수’민족이 살고 있었지만, 중국 정권은 지역 학교에서 중국어를 공용어로 가르치도록 강요했다.

자신들의 문화가 말살될 위기에 놓인 티베트인들은 2008년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시위를 벌였다. 당국은 즉각 경찰을 투입해 유혈 진압했고 수백명 티베트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2009년 이후 지금까지 약 150명 이상의 티베트인들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얻기 위해 스스로 몸을 불사르는 분신으로 저항했다.

신징 지역에서는 위구르족을 비롯한 종교적 소수집단이 탄압대상이 됐다. 당국은 수용시설에 100만명을 감금해 ‘정치적 재교육’을 시행했으며 구타하고 고문했다. 소수민족 여성들에게는 강제 불임 시술을 가해 그 숫자를 더욱 소수로 만들고 있다.

지난해 공산당 당국은 일부 네이멍구 민족 학교에서 중국어를 공용어가 아닌 ‘국어’로 가르치고 몇몇 일반 교과목도 중국어로 표기된 것을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새 정책을 시행했다.

민족 문화와 언어를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감수하고 민족 학교를 선택했던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이에 항의한 댓가로 체포되거나 구금됐고 해직·퇴학 위협을 받았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소수민족 자치구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 감시 시스템을 설치하고 생체 데이터를 수집해 모든 주민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국경 밖으로도 통제의 손길을 뻗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창당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베이징과 상하이 인근 지역에서 드론 비행을 금지하하고, 베이징으로 들어오는 모든 택배화물에 대한 엑스레이 검사를 의무화했다.

또한 베이징 시내에서는 식칼이나 과도, 주방용 가위 등의 취급을 금지했다. 중국인들 모두가 100주년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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