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NTD 국제 인물화 공모전’ 금상수상작 ‘1999년 4월 25일’

캐더린 양, 이혜영
2020년 3월 16일
업데이트: 2020년 3월 22일

1999년 4월 24일, 토요일 밤이었다. 쿵하이옌은 한잠도 못 자고 깨어 있었다.

‘갈 것인가, 집에 있을 것인가?’ 만약 그녀가 집에 있는 걸 선택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안전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옳고 진실된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었다. ‘모두가 불의를 외면한다면. 그 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는 걸까.’

그로부터 세월이 훌쩍 지난 지금 그녀는 “만약 모든 사람이 그렇게 (진실을 외면하기로) 생각했다면, 오늘의 4월 25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에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999년 당시 하이옌은 명상수련법인 파룬궁을 5년째 수련하고 있었다. 파룬따파(Falun Dafa)로도 알려진 파룬궁은 1992년 중국에서 일반에 공개됐다. 당시 중국에서는 기공(기수련) 붐이 일고 있었다. 파룬따파는 기수련 외에 진실, 선량, 인내(眞善忍)의 원칙에 따르는 삶을 제시했다.

바로 전날인 금요일에는 톈진시의 한 대학 밖에서 수십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시위를 벌였다. 톈진시의 한 국영 매체가 파룬궁 수련자에 대한 허위사실을 보도한 데 대한 항의였다. 진압 경찰은 시위자에게 무차별한 폭력을 가하고 45명을 체포했다.

그 시위자 중 한 명은 하이옌의 친구였다. 그날 밤 하이옌이 친구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집은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곧 친구가 진실을 밝히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을 알게 됐다. 잠 못 이루던 하이옌은 ‘내일 베이징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체포된 수련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썼다.

다음 날인 4월 25일, 베이징 중난하이에는 무려 1만여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평화 청원 집회를 위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하이옌은 자신이 평화 청원에 참여한 그렇게 많은 시위자 중 한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쿵 하이옌(孔海燕)의 ‘1999년 4월 25일(一九九九年四月二十五日)’. | Haiyan Kong

제작 기간 5년

예술가로서 하이옌은 그 역사적인 날을 자신의 재능을 통해 기념하고 싶은 소망을 품게 됐다.

지난 5년 동안 하이옌은 홍콩에서 가로 길이가 4m 이상에 달하는 거대한 유화 작업을 했다.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한 긴 여정이었다.

그녀의 그림은 추수감사절 연휴 동안 미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갤러리의 하나인 뉴욕 ‘살마군디 아트 클럽’에 전시됐고, ‘제5회 NTD 국제 인물화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하이옌은 수상 소감으로 작품을 보여줄 기회를 제공한 NTD 공모전에 감사를 보냈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밝음, 희망을 주고 싶다. 전통적인 예술을 발전시키고 고전적 가치를 보여주는 예술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런 작품들에 기회를 주는 공모전 개최는 매우 뜻깊고 감사한 일이다.”

 

제5회 NTD 국제 인물화 공모전(5th NTD International Figure Painting Competition)에서 금상을 수상한 쿵 하이옌(孔海燕). | Chung I Ho/The Epoch Times

하이옌은 작품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이 그림의 길고 수평적인 형식은 중국의 두루마기 그림을 연상케 하며,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감상하는 동안 그림 안에 있는 세 가지 주요 사건을 볼 수 있다. 시위자 중 한 명과 경찰이 서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과 같은 장면들이다.”

그림에 그날 베이징에 모였던 1만명을 모두 담을 수는 없었다. 4m나 되긴 했지만 화폭에 담을 수 있었던 건 400여명 정도였다. 그중 200여명은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렸다.

홍콩에서 작업하던 그녀는 뉴욕으로 건너와 3개월 머물며 최종작업을 마무리했다. 작업실의 공간 문제로 4m가 넘는 그림을 멀찍이 떨어져 한눈에 본 것은 완성된 작품이 전시장에 걸린 뒤였다.

엄지손톱만 한 작은 얼굴 위에 그려진 신념에 찬 표정들을 가까이서 보노라면, 곧 관람객을 응시하고 있는 수백의 숙연한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실존 인물들이다. “나는 그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이옌은 말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가 1999년 4월 25일 중난하이에 모였던 사람들은 아니다.

하이옌은 원래 그날 베이징에 온 사람들을 그리려 했다. 그러나 자료 사진에서는 얼굴이 너무 흐릿해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고민하던 그녀는 다른 수련자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5년간 모은 얼굴들을 작품에 그려 넣었다.

그녀는 “모두들 내가 원했던 장면을 훌륭하게 표현해줬다”고 했다. 몇 시간 동안 불편한 자세로 서준 이도 있었고, 연주여행을 다니는 음악가가 바쁜 시간을 쪼개 그림을 위해 포즈를 취해 주기도 했다.

뉴욕 살마군디 아트 클럽(Salmagundi Art Club)에서 열린 제5회 NTD 국제 인물화 공모전(5th NTD International Figure Painting Competition) 관람객. | Dai Bing/The Epoch Times

구상에서 작품완성까지의 5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모험이었다.

홍콩에서 작업한 그녀는 중국 본토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많은 부분을 확인해야 했다. 베이징 중난하이 앞 도로에 늘어선 가로수의 종류를 알아내야 했다. 홍콩에서는 딱 한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회화나무의 일종이었다.

그림에 필요한 화구를 해외에서 찾기도 했다. 홍콩에 없는 물감과 붓을 프랑스와 대만에서 공수해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지인들의 적잖은 도움을 받았다. 자신만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유해준 동료 예술가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조언도 있었다.

길었던 예술의 여정

하이옌은 어려서부터 미술을 좋아했다. 미술계에 몸담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을 보고 레슨을 받게 했다. 전통 양식으로 그림을 가르치는 두 명의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은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명문 미술대학에 지원했다.

당시 미술대학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추상표현주의가 대세였다. 미술계의 표준이었고, 하이옌이 배운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모델 드로잉 클래스가 있었는데, 모델이 모델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드로잉이 좋은 드로잉으로 인식됐다. 수업의 목표는 미술을 사물이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미대에서는 무엇을 그렸는지 설명하기 어렵게 그리는 스타일을 개발하도록 가르쳤다. 학생들은 그게 미술가로서 성공하는 길이라고 배웠다.

하이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졸업 전시회 이후 미술품 수집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몇 년 후 준비한 두 번째 전시회 역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명성을 얻을수록 한편에서는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전위적인 작품은 단순히 독창성만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어두움, 비이성적인 정신상태를 추구해야 했다.

하이옌은 혼돈과 절망이 담긴 그림과 조소를 들여다보며 이것이 세계를 나타내는 최선의 방법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번째 전시회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기억했다. 친구들과 함께 전시회를 찾은 한 외국인이 그녀의 추상적인 작품 중 하나 앞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외국인은 그 그림을 사고 싶어 했지만, 하이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림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지금 하이옌은 그때 그 어두운 그림을 외국인에게 팔지 않아 다행으로 여긴다고 했다.

하이옌은 다른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털어놨다.

그녀가 신진화가일 무렵, 아들이 태어났다. 생활공간이자 작업실이었던 집에서, 아들은 이상하게도 그녀의 작품을 볼 때마다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그녀는 작품을 전부 벽을 향해 돌려놓아야만 했다.

어머니 역시 그녀가 작업실로 사용하던 방에 들어서면 항상 어둡고 음침한 기운이 느껴져 불편했다고 했다.

훗날 하이옌은 당시 자신이 이런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어두운 세계에 빠져들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랍다고 했다.

진실, 선량, 인내

예술가로 고민이 깊어가던 1993년 어느 날이었다. 공원을 걷고 있던 하이옌은 태극권처럼 느린 동작으로 맨손체조 하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뒤에는 ‘진실, 선량, 인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즉시 뭔가 뭉클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예술가로 표현하려던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나는 느낌이었다. 세 단어는 따뜻함과 자비로움을 상징하는 듯했다.

하이옌은 “수년 동안 어둠과 혼돈에 빠져 있었지만, 그날의 우연은 마치 하늘의 뜻 같았다”고 했다.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깨달음 말이다.

뉴욕 살마군디 아트 클럽(Salmagundi Art Club)에서 열린 제5회 NTD 국제 인물화 공모전에서 ‘1999년 4월 25일(一九九九年四月二十五日)’로 금상을 수상한 쿵 하이옌(孔海燕). |Chung I Ho/ The Epoch Times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그녀는 미술시장에서 꽤 값나게 팔리던 자신의 작품을 거둬들였다. 예상외로 홀가분했다. 이후 몇 년간 하이옌은 대학에서 미술강사로 일하면서 미술의 기초와 기본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일은 자신이 초심으로 돌아가는 과정 같았다.

그러나 의미있는 사건들을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재현예술가(representational artist)로 거듭나기까지는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

“사실 처음 받은 미술교육은 전통적 회화기법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그때까지 받은 모든 교육을 잊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해야 했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자아중심적인 독창성을 심어주기 위해 ‘평면성의 현실(reality of flatness)’ 등 포스트모던적인 예술철학을 공부하게 했다.”

다시 재현예술을 시작한 그녀는 자신의 기술이 얼마나 많이 쇠퇴해 버렸는지 절감해야 했다.

“어려웠다”며 무겁게 입을 뗀 그녀는 “대학 졸업 후 (미술의) 기초를 잊어버렸다. 뭘 그리면 선이 곧지 않았다. 비뚤어진 상태로 그림을 그리고 자신을 훈련해 왔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그녀는 “많은 게 관점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따뜻하고 진실되게 세상을 바라보는 법부터 배워나갔다.

뉴욕 살마군디 아트 클럽(Salmagundi Art Club)에서 열린 제5회 NTD 국제 인물화 공모전에서 ‘1999년 4월 25일(一九九九年四月二十五日)’로 금상을 수상한 쿵 하이옌(孔海燕). |Chung I Ho/ The Epoch Times

2007년 홍콩으로 이주한 하이옌은 ‘NTD 국제 인물화 공모전’ 소식을 듣고는 바로 4월 25일 사건을 그리고 싶어 했던 오랜 소원을 떠올렸다. “그것은 대규모로 이뤄진 역사적인 사건이었고, 완전히 평화로웠다.”

베이징에서 20년간 살았던 그녀는 “직접 4월 25일 평화 청원에 참여했었다”며 “베이징의 그 거리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기술적 완성도가 부족한 상태였다.

하이옌은 더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녀는 “예술가는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집에 내 그림이 걸려 있다면 그 작품에는 예술가의 성격도 어느 정도는 반영된다.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하이옌은 예술가는 어떤 삶을 걸을 것인지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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