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의 사악한 박해 : 1장 독재자의 논리

Wo Baozhang
2019년 9월 9일 업데이트: 2019년 9월 9일

우바오장(吳葆璋)

1999년 10월,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 피가로(Le Figaro)’ 편집장 알랭 페이르피트(Alain Peyrefitte)는 프랑스 공식 방문을 앞둔 중국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을 서면 인터뷰하면서 중국과 프랑스 및 국제 문제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장쩌민은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이 반년 전부터 파룬궁을 탄압한 이유를 ‘사교(邪敎)’라는 두 글자로 변명하고, 국제 언론계에서 이슈를 선점하려 했다.

중국 공산당 당국이 프랑스를 방문지로 선택한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특히 세계를 놀라게 한 ‘인민사원(the peoples temple) 사건’ 이후 프랑스는, 수년간 행정과 사법 두 방면으로 각종 사교가 프랑스에서 범람하는 것을 방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므로 중국 공산당은 이런 특수한 역사 환경을 지닌 프랑스를 방문해, 흑백을 전도하고 시비를 뒤섞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 주요 언론 사이에 프랑스를 방문하는 외국 지도자에 대한 특별 인터뷰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르 피가로’의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다. 다만 반드시 인터뷰 내용 전문을 그대로 발표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정계와 언론계에서 명성을 떨치고 싶었던 페이르피트로서는 당연히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쩌민이 방문하는 날 ‘르 피가로’는 약속대로 특별 인터뷰 내용 전문을 발표했다. 이 인터뷰 내용은 프랑스 여론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다. 심지어 일부 기자들마저 한동안은 깊이 사고하지도 않고 앵무새처럼 따라서 글을 썼고, 또는 두려워 입을 다물고 바른말 한 마디 꺼내지 못했다. 중국에서 한창 진행 중인 파룬궁 수련인에 대한 체포·구금·고문·세뇌에 대해 감히 물어보지도 못했다.

90년대 초, 중국인들은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 보편적인 의문을 가졌다. 40여년간 공산주의 통치를 받는 동안 수천만 명의 무고한 중국인이 심각한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대 분위기에서 심신을 건강하게 하는 수련 방법인 파룬궁(法輪功)은 ‘진(眞), 선(善), 인(忍)’ 의 가치를 제창했고, 중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면서 급성장했다. 각계각층의 환영을 받은 가운데 1998년 ‘중국국가체육총국’은 “파룬궁은 개인과 국가를 위하여 백 가지 이로운 점이 있을 뿐 한 가지도 해로운 점이 없다”고 발표하는 등 정부와 관영 언론도 파룬궁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극히 짧은 기간에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의 수가 1억 명에 이르면서, 중국 공산당 정권은 다른 눈으로 파룬궁을 대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잡은 후 시종 변함없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바로 공산당과 평행 선상에 있는 그 어떤 조직의 존재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공산당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수직으로 일체를 이끌어야 하며, 이를 그것이 안심하고 존재할 수 있는 근본 중 하나로 여겼다. ‘인민정치협상회의’라는 이른바 민주당파를 꾸려 당헌에 모두 공산당 영도를 옹호한다고 명시하게 했다. ‘인민대표대회’로부터 각 노동자, 청년, 부녀 조직과 같은 군중 단체, 공장, 학교, 상점, 도시, 농촌에 이르기까지 모두 당 조직 또는 당 지부를 설립했는데, 이는 중국 특유의 정치 현실이다. 당시 파룬궁이 출현했고, 제창하는 가치는 공산주의와 상반됐지만, 공산당원을 포함한 1억 명이 넘는 군중의 사랑을 받았다. 동유럽과 구소련의 거대한 변동을 지켜보던 중국공산 당은 파룬궁이 폴란드의 자유노조연대와 같다고 여기면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이런 결론이 나자 광적이고 야만적인 탄압이 시작됐다. 1989년 톈안먼 대학살 이후 또 수많은 무고한 중국인이 공산주의의 피해자가 되었다. 역대 정치 운동과 마찬가지로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체포를 감행했고, 그들은 항상 그래 왔듯이 구류, 감금, 세뇌에 앞서 거짓말과 황당한 논리로 짜 맞춘 대대적인 비판을 앞세웠다. 그 목적은 날조한 죄명을 이용해 실상을 알지 못하는 민중과 당국을 강요해 함께 각 방면에서 파룬궁을 ‘소멸’하려는데 있었다.

1956년은 내가 대학 생활을 시작하던 해였다. 나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모두 농구를 좋아했다. 어느 날 친구들은 반별 농구 시합을 열었다. 첫 시합이 곧 시작될 무렵 우리보다 나이가 좀 많은 동창생이 갑자기 운동장에 나타나더니 정색하며 나에게 말했다. “너희 뭘 하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시합해야죠.”라고 답했다.

그가 말했다. “시합이라니? 당 지부에 보고했어?” 내가 “이것도요? 아니요.”라고 답하자 그는 즉시 훈계조로 명령했다. “당 지부가 모르는 일이니 해산한다!” 그제야 친구들은 이 학생이 입학하기 전에 공산당 간부였고 지금은 또 1학년 당 지부 서기임을 알게 됐다. 나도 이 일로 처음 공산당 조직 원칙의 가르침을 단단히 받은 셈이다.

그 후 1년이 지나 1957년 ‘반 우파’ 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로써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에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사설이 발표됐다. 이어서 쓸데없이 장황한 비판문이 연속적으로 게재됐는데 죄다 억지로 꾸며낸 이른바 ‘반당 반사회주의 우파분자’의 이야기들이었다. 20년이 지난 후에야 당시 ‘우파’로 몰렸던 한 동창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우린 처음에 서로 쳐다보고만 있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네 우파 아니었어?”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내 머리에 바보 같은 모자(당시 공산당은 우파라고 지목한 사람에게 고깔모자를 씌우고 집단으로 그를 비판하게 했다)를 씌웠지만, 벗겨 버렸어.”

1966년에 시작된 이른바 문화대혁명 역시 역사극을 비판하는 데서 비롯됐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신화사의 무칭(穆靑)사장을 만났다. 홍위병이 신화사 총편집실을 점령한 후, 그는 이미 ‘반공 분자’로 적발돼 극렬한 비판을 받으며 원내에서 ‘노동 개조’를 당하고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서 물었다. “당신은 어찌하여 자본주의의 길을 걸었나요?” 그는 힘없이 말했다. “나? 30년 혁명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통하지 않았으니까…….”

1989년 6월 3일 밤, 나는 파리에서 전화로 베이징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광장 폭도’는 누구인지를 물었다. 상대방은 단지 “묻지 마세요. 본사는 이미 군이 관할하고 있어요!”라는 한 마디만 내뱉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매번 중대한 행동에서 우선 먼저 매스컴을 장악하는 것은 바로 독재 정권의 일관된 수법이었다.

파룬궁을 비판하는 문화선전 공세는 1996년 6월 17일, ‘광명일보’에서 시작되어 10여 개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이 명령을 받들어 뒤따랐다. 1999년 7월 23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인식을 제고하고 위해성을 똑똑히 보아내며 정책을 틀어쥐고 안정을 수호하자’라 는 사설을 발표해, 파룬궁은 ‘불법 조직’이라고 맹비난했다. 이로써 파룬궁을 금지·탄압하는 신호를 내보낸 셈이다. 이와 동시에 당국은 또 자신이 통제하고 있는 종교계 인사와 민간단체, 학술단체를 동원해 성명을 발표하고 토론회를 개최했다. 날조한 죄명에 대해 말과 글로 죄상을 폭로하는 전례 없는 참혹한 정치 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중국공산당이 파룬궁 단체에 붙인 꼬리표는 끊임없이 바뀌었다. ‘불법 조직’, ‘사교 조직’, ‘반동 적대 조직’, ‘서양 내 반 중국 세력의 정치 도구’, ‘반정부 조직’, ‘반동 정치 조직과 정치 세력’, ‘테러 조직’이라 했다. 이런 새빨간 거짓말 선전에 대해 나의 일부 프랑스 동료들은 상당히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1989년의 참혹한 베이징 6·4 사건 이후 신화사와 작별하고 프랑스 국제방송 이사회 요청으로 프랑스에서 중국으로 방송되는 중국어 방송 부서를 개설했다. 앞서 언급한 장쩌민의 프랑스 방문 후 곧 중국 대사관은 사람을 파견해 프랑스 방송국 이사장을 만나 프랑스발 중국 방송 문제를 이야기하자고 했다. 이사장 장-폴 크뤼젤(Jean- Paul Cluzel)은 중문부 주임과 함께 만날 것을 제안했으나 중국 외교관은 고집을 부리며 한사코 동의하지 않았다. 회견 후 크뤼젤은 웃으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홍위병을 접견하고 왔네요.”

얼마 후 다른 한 베이징 외교관이 내게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만나 자마자 그는 말했다. “내가 지금 당신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파룬궁 문제예요. 당신이 책임진 중국어 프로그램에서 더 이 상 파룬궁에 대해 보도하지 말아 주세요.” 왜 그런지 이유를 물으니 그는 주저 없이 말했다. “그건 사교예요. 오늘 당신에게 줄 많은 자료를 가져왔거든요.” 하면서 그는 책상 밑에서 큰 가방을 꺼냈다. 그 속에는 파룬궁을 모함하는 각종 선전 자료와 소책자, 선전 그림, 비디오테이프와 CD가 가득 들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명확히 알려 주었다. “사교는 당신들의 논조고 프랑스 방송국은 독립 매체예요. 독립적인 언론의 조사 없이, 우리는 보도하지 않을뿐더러 또 당신들의 뜻대로 파룬궁을 보도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에게 파룬궁 문제가 이미 정치화, 국제화된 이상 중국 당국은 마땅히 빗장을 풀고 국제 매체에서 파룬궁 문제에 대해 독립적인 조사를 진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장쩌민이 프랑스를 방문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프랑스 주재 중국 대사관 사이트에 파룬궁에 대한 거짓 선전을 위한 전문 코너가 생겼음을 발견했다. 이처럼 심지어 외교 영역에 연관되는 일까지 전력을 기울일 정도로 광적인 행태는 비록 일시적으로 사람을 속일 수 있었지만, 또 사람들의 경각심과 의심을 자아냈다.

장쩌민은 르 피가로지를 이용해 프랑스 여론과 시민을 속였으나 프 랑스 정부 및 의식 있는 사람들의 파룬궁 진실을 탐구하고자 하는 노력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프랑스 정부는 2002년 11월 법령을 발포해 범람하는 사교를 금지하기 위한 합동전담반을 총리부 직속으로 설립했다. 이 조직의 임무는 ‘인권과 기본 자유를 해치는 행위 및 기타 마땅히 지적받아야 할 행위를 통해 사교 현상을 관찰·분석하는 것’이다. 이 전담반은 또 ‘공권력에 협조하여 각종 사교가 범람하는 행동을 방지하고 진압’하는 책임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프랑스 당국은 파룬궁을 방지하고 진압해야 할 사교단체 명단에 넣지 않았다. 줄곧 현재까지 매주 주말이면 파룬궁 수련인들은 파리 에펠탑 앞과 다른 두 공원에서 공개적으로 수련(煉功·연공)을 하고 있다. 파룬궁 수련인들로 구성된 마칭밴드인 천국악단은 프랑스 정부에서 조직한 대형 문화 행사에 여러 차례 참가했으며, 프랑스 국민의회 의사당에서 여러 차례 탄압 실상을 알리는 보고회와 세미나를 개최했다.

재미있는 것은 수년간 파룬궁 수련인이 프랑스 주재 중국 대사관 앞에서 평화적 시위를 하겠다고 신청했으나, 프랑스 경찰은 번번이 갖가지 이유를 들어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2009년 7월 파룬궁 수련인들은 프랑스 사법당국에 프랑스 경찰 당국(la prefecture de police)을 고소했다. 파리행정법원(le tribunal administratif de Paris)은 최종적으로 긴급소송법관의 심의 결정(l’ordonnance du juge des referes)에 따라 파룬궁 승소를 판결했고, 동시에 프랑스 경찰에 대해 프랑스 파룬궁 협회에 1천 유로를 배상하라고 명령했다.

중국 문화와 전통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공산당 치하 중국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확실히 파룬궁의 진실을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역 대로 중국공산당의 탄압을 받은 단체 중 드물게 파룬궁 수련인은 탄압에 무너지지 않았고 때려도 흩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폭정에 항거하는 격문(檄文)인 ‘9평 공산당-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을 발표되면서 중국공산당의 본질을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됐다.

파룬궁 수련인은 공산당의 탄압을 받은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중국이 공산주의의 고난에서 탈출하게 하고, 민주 자유 역사의 큰 흐름에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큰 파도에 의해 역사의 선두에 던져져, 폭정에 평화적으로 항의하는 파룬궁 수련인들의 마음이 거울처럼 밝고 속세의 먼지를 털어버릴 수 있다면 ‘창생은 바른길에 들어서고(蒼生歸正道), 강산은 다시 맑고 밝아지리라(江山復明)’는 인간 세상의 선량한 꿈을 반드시 이룰 것이라 나는 확신한다.

파룬궁이 박해당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방(上訪·상급기관에 탄원)하는 사람들의 풍경이 베이징의 일상이 되었다. 경제 번영이라는 허울 속에서 일당 독재와 탐관오리의 억압을 받아 집과 가족을 잃었으나 억울함을 어디에 하소연할 길 없는 민중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해마다 끊임없이 베이징에 몰려들어 청원을 통해 조금이라도 공정함을 되찾으려 했지만 결국 문밖에서 거절당하고 심지어 투옥되었다. 그들이 중국에서 공산주의의 최후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사람들은 우려하고 있다. 당국은 이들에게 정치적 행동을 한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있는데 해결책이 없어 보인다.

공산주의의 죄악을 본체만체하고, 타인이 위험에 처해도 도움을 주지 않으며, 독재주의를 위해 변명하고, 심지어 그것이 국물이라도 나눠주기를 갈망하는 풍류 군자들, 그들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때의 영광을 위해 자신과 자손만대에 천고의 오명을 남기게 될 것을!

서두에 언급한 프랑스 언론인 알랭 페이르피트는 전 중국 총리 저 우언라이(周恩來)의 매력에 빠져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으로 판명됐다. 중국공산당 당국은 페이르피트가 사망한 후 우한대학교 캠퍼스에 파격적으로 그의 동상을 세워 학생들이 우러러보게 했다. 중국의 젊은이들은 그에 대해 무엇을 기억할 수 있을까? 전 중국공산 당 당수 장쩌민의 공범자로서 한창 잔혹한 박해를 당하고 있는 중국인 단체를 모독한 것 외에도, ‘중국통’이라 불리는 그는 또 1973년에 『중국이 깨어날 때 세계는 떨고 있을 것이다』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한창 문화대혁명으로 광란의 시대를 겪고 있는 중국에 오히려 최선을 다해 그 기세를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그의 주변인들의 말에 따르면 이 책에서 그린 중국은 ‘사실상 저우언라이가 말하던 그런 중국’이라는 것이다. 그는 많은 인구와 탄탄한 경제력을 갖춘다면 중국은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은 늘 삼족정립(三足鼎立·세 사람[세력]이 솥의 발과 같이 균형을 유지한다)이란 말을 한다. 페이르피트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이렇게 지적했다. “민주가 없고, 공산독재체제를 버리지 않는 한 중국의 발전은 정신병자가 꿈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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