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10만 명이 북한으로 간 까닭은? 북송 피해자 초청 대담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 저자 초청 북토크
이윤정
2022년 09월 6일 오후 6:00 업데이트: 2022년 09월 7일 오전 11:17

60여 년 전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조총련의 선전을 믿고 북한으로 갔던 재일 교포를 초청해 ‘재일 교포 북송 사업’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그리고 누가, 어떤 목적으로 북송 사업을 추진했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됐다.

태풍 힌남노 북상 소식과 함께 굵은 빗줄기가 시야를 가리던 9월 5일 오후 7시, 트루스포럼 서울대센터는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栄子) ‘모두 모이자’ 대표를 초청해 ‘재일 교포 북송사건의 실체’ 주제로 북토크 형식의 대담을 진행했다. 시민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은구 트루스포럼 대표가 사회를 맡고 김덕영 영화감독, 리소라 ‘모두 모이자’ 사무국장이 대담에 참여했다.

북송사건이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총 187회에 걸쳐 재일 교포 9만3339명이 북한으로 이주한 사건이다. 이들 중에는 1830명의 일본인 아내와 6730명의 일본 국적자가 포함됐다. 25년에 걸쳐 북으로 향했던 재일 한인의 98%는 고향이 남한이었다. 김덕영 감독은 이를 두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북한 사회로 넘어간 유일한 사례”라고 말했다.

가와사키(80) 씨는 북한 체제의 모순을 고발한 실화 소설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日本から北に帰って人の物語)’ 저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지난해 7월 한국어로도 출간됐다.

2021년 7월 한국어로 출간된 ‘일본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의 이야기’ | 에포크타임스

일본 교토에서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난 가와사키 에이코 씨는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선전을 믿고 북송선을 탔다. 열입곱 살 때였다.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2~3년이면 자유 왕래와 일본 방문이 가능할 것”이라는 조총련의 말에 큰 부담 없이 혼자 북한으로 갔다. 하지만 이후 43년 동안 부모·형제와 떨어져 인권 불모지 북한에서 비참하고 혹독한 삶을 견뎌야만 했다.

2003년 북한을 탈출해 이듬해 일본에 정착한 가와사키 씨는 2014년 탈북자와 일본인들로 구성된 NGO 단체 ‘모두 모이자’를 결성해 북송 재일 한인들의 귀환과 자유 왕래, 북한의 자유와 민주화,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사업들을 주도하며 활동하고 있다.

가와사키 씨를 비롯한 탈북자 11명은 2015년 일본변호사연합에 북한정부·일본정부·조총련·북한적십자·일본적십자·적십자국제위원회 등 6개 기관을 상대로 인권구제신청서를 제출했다. 과거 북송사업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직도 북한에 갇혀 있는 북송사업 피해자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이후 가와사키 씨는 2018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가 지난 3월 패소 후 항소했다. 다만 도쿄지방재판소는 “북한이 조총련과 함께 북한 상황에 대해 사실과 다른 선전으로 (북한행을) 권유했다”고 인정했다.

가와사키 에이코(川崎栄子) 씨가 ‘재일교포 북송사건의 실체’ 대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에포크타임스

가와사키 씨는 자신을 비롯한 10만 재일 교포들이 북한으로 가게 된 이유에 대해 “북한이 지상낙원이라는 조총련의 거짓 선전에 속았다”며 “마지막까지 반신반의하며 망설이던 사람들이 북한행을 결정한 건 국제적십자위원회가 나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주도하는 일이라면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덕영 감독은 이와 관련해 “국제적십자위원회의 7원칙(인도·공평·중립·독립·자발적 봉사·단일·보편)과 중립성의 원칙에 의하면 정치적인 개입이 있어서 안 되는 일이었다”며 “그런데도 북송 사건은 정치적 사건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지적했다.

이날 김덕영 감독은 재일 교포 북송 사건을 다룬 ‘이상한 낙원(A Strange Paradise)’ 영상도 소개했다. 김 감독은 2020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을 연출한 감독이다. 그는 현재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하와이로 간 대통령’ 다큐멘터리도 제작 중이다.

체제 간의 갈등·대립이 극심하던 1950년대 말, 무려 10만 명 가까운 재일 교포들이 북한으로 간다는 건 김일성 입장에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만방에 선전할 기회였을 것이라는 게 김 감독의 설명이다.

그는 “김일성은 북송사업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아주 많았고,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1958년부터 중국 북한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들이 철수를 시작했고 무려 30만 명에 달했다. 군사적·경제적 공백이 커진 북한은 부족한 노동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송사업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게다가 인도주의 수호자로 포장도 할 수 있고 한일 갈등을 조장할 수 있으며 남한 내 좌익 세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 감독은 “북한 체제의 기만적 선전 정책의 하나인 ‘지상 낙원’이라는 구호가 바로 이 재일교포 북송 사건을 배경으로 등장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덕영 감독은 “북한 체제의 기만적 선전 정책의 하나인 ‘지상 낙원’이라는 구호도 재일교포 북송 사건을 배경으로 등장했다”고 강조했다. | 에포크타임스

김 감독에 따르면, 1951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 맺어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재일 한인들의 지위가 무너졌다. 이로써 일본 사회에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새로운 ‘외국인’이 60만 명 탄생하게 된다.

그는 “이들은 의료·공무원·철도운전사 심지어 지방자치단체가 도로를 청소하는 일에서조차 배제됐다”면서 “일본 사회의 구조적인 억압과 차별 속에서 재일 한인은 대부분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고, 일본 사회에서는 이들을 일종의 트러블 메이커로 인식하는 여론이 조성됐다”고 부연했다.

김 감독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북송 사업을 계속 진행할 경우, 이는 일종의 정전협정 위반이자 대한민국을 향한 선전포고다’라고 규정하며 강경한 입장을 표명했다”면서 “그러나 일본 정부는 북송사업을 어떻게든 실현하기 위해 국제적십자위원회를 끌어들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당시 일본 언론의 재일 교포에 대한 보도와 일본 정치인들의 발언도 소개했다.
▲‘그들(재일 한인)은 상당히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있다’(아사히 신문)
▲‘북한, 일본의 생산성 추월’(당시 북송 재일 교포들이 모두 읽은 데라오 고로의 저서 ‘38도선의 북’)
▲“재일 조선인을 한꺼번에 한국으로 강제 송환할 권한을 일본 정부에 달라”(1949년, 요시다 시게루 전 일본 총리)
▲“악질 조선인 강제 송환 강화, 위험 분자, 사회주의자, 범죄자 추방, 재일조선인 추방이 일본의 가장 중요한 목표”(요시다 내각 공약, 1952년)

탈북 후 일본 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북한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리소라 씨는 북송사업 관련한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반일(反日)하자는 게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북송 사업 초기에 가장 먼저 북한에 간 사람들이 가족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면서 북송사업이 한 차례 중단됐으나 일본 정부가 조총련을 부추겨 재개됐다”며 “한국 정부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우리도 같은 입장이지만, 잘못한 부분은 지적하고 고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북한에 간 사람들이 속았다는 걸 안 후에 이런 내용을 쓴 편지가 외부로 어떻게 전달될 수 있었을까. 김덕영 감독은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다. 우표 뒤에 깨알같이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우리는 마을 밖으로 외출할 자유가 없습니다. 큰형, 여기 오지 마십시오. 여동생도 역시 북으로 와서는 안 돼요.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옳았습니다.”

북송 사업으로 가장 먼저 북한에 간 사람들이 가족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면서 북송 사업이 한때 중단됐다. | 에포크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