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8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08베이징을 손에 넣고 미사일로 대만을 위협

14차 4중 전회에서 중공은 제 3세대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작업을 마쳤다고 선포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이번 회의에서 덩샤오핑이 양 씨 형제를 군부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총 한번 만져보지 못한 장쩌민은 군부가 자신을 따르지 않을까 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노장령들이 늙을 대로 늙어 앞날이 멀지 않았고 군부에 점차 측근이 생기면서 장쩌민은 정치상으로 극히 중요한 요새인 베이징시로 창끝을 돌릴 타산을 하기 시작했다.

베이징시는 권력 투쟁에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베이징 군부, 베이징시 당위원회와 정부, 중앙 경호국을 확실하게 손에 쥐지 못하면 중공 최고 지도자라도 ‘안전’ 두 글자를 말할 수 없었다.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 마오쩌둥은 이미 전 국민의 우상으로 되었지만 당시 베이징시 서기였던 펑전(彭眞)은 야오원위안(姚文元)(역주 – 문혁 4인방의 한 사람, 마오쩌둥이 그가 쓴 글을 마음에 들어하면서 정치계에 발을 들여 놓았음)이 쓴 ‘신편역사극<하이루이(海瑞)가 해직되다>를 논함’을 인민일보, 베이징일보와 광명일보에 전재하지 못하게 했다. 상하이에서 야오원위안의 책을 출판할 수밖에 없었던 마오쩌둥은 당시 베이징을 ‘바늘도 들어갈 틈이 없으며 물방울도 스며들지 않는’ 독립왕국이라고 항복하듯 말했다.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66년 5월 16일이었는데 그 전인 3월 말 먼저 해결한 일이 베이징시 서기 펑전과 중앙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를 해직시킨 사건이었다. 이렇게 마오쩌둥과 같은 인물조차도 한 가지 큰일을 벌이려면 우선 베이징부터 손에 넣어야 했으므로 장쩌민도 이를 급선무로 생각했다.

1. 천시퉁(陳希同)과 원한을 맺다

간부를 등용하는 문제에서 장쩌민은 오직 하나의 원칙이 있었는데 바로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만 쓰는 것이었다. 이것만 보아도 장쩌민이 하는 일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천시퉁은 베이징 시장과 서기를 맡은 기간 성공적으로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고 2환도로와 3환도로를 닦아 놓아 베이징의 환경 개선에 큰 공헌을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상하이 서기로 일하는 기간 아무런 성과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상하이 시민들의 장바구니에 위기가 발생해 덩샤오핑은 주룽지를 급파해 위기를 넘겼다. 6.4문제에서도 천시퉁은 진압을 지지하며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았지만 장쩌민은 강경한 태도로 ‘세계경제도보’를 폐간시켰다가 또 자오쯔양 앞에서는 진압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면서 반성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천시퉁은 자신이 중공 정권을 지킨 공로가 있으므로 정치국 위원의 자리에서 더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장쩌민이 대가없이 올라오자 불만이 대단했다. 특히 천시퉁은 덩샤오핑과 사이가 매우 좋아 1992년 덩샤오핑이 수도 강철회사를 시찰할 때에도 천시퉁을 개혁파라고 공개적으로 치하했을 정도였으므로 천시퉁은 장쩌민을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때문에 장쩌민이 베이징을 통제하려면 천시퉁부터 해결해야 했다.

장쩌민은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려 했고 질투심이 강했으며 속이 좁아 자신을 얕잡아 보는 사람은 꼭 보복하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장쩌민은 천시퉁을 줄곧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했는데 몇 가지 일 때문에 더더욱 골이 깊어졌다.

첫 번째는 천시퉁이 연회를 마련해 자오쯔양의 추종자인 후치리(胡啓立)를 초청한 일이었다.

장쩌민은 ‘황제’가 된 후, 자오쯔양의 추종자들을 여지없이 제거해 버렸다. 자오쯔양을 철저하게 부정할수록 장쩌민의 보좌는 더욱 합법성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장쩌민은 객관적인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장쩌민은 총서기로 ‘당선’된 날부터 이미 자오쯔양이 조성한 ‘손실’을 만회할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자오쯔양이 총리와 총서기로 있는 기간 중국 경제와 정치체제 개혁에 가져다 준 성과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장쩌민은 국민들 가운데서 자오쯔양이 위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6.4 탄압 문제에서 여러 정치 원로들이나 심지어 일반 당원들과 달랐던 자오쯔양은 백성을 위해 한 몸을 돌보지 않는 영웅의 이미지를 굳혔다. 게다가 그가 집정하고 있는 기간 중국 국민총생산량은 급속히 증가했으며 중국인들의 생활수준도 대폭적으로 올라 국민들은 깊이 감격해하고 있었다. 민심, 경력, 성과 어디로 보나 덩샤오핑이 자오쯔양을 복귀시키면 장쩌민은 권력을 보존할 수 없을 것이 뻔했다.

장쩌민은 자리에 올라앉자마자 ‘반평화적연변’을 외치면서 개혁파, 그리고 자오쯔양과 사이가 밀접한 사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나 천시퉁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당시 자오쯔양과 동시에 관직에서 잘린 정치국 상무위원 후치리와 중앙서기처 서기 루이싱원(芮杏文)은 6.4사건으로 인해 떨어진 관리들 중 관직이 가장 높았다. 천시퉁은 그들과 왕래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비밀리에 후치리가 완리를 만날 수 있도록 했다. 장소는 수도 호텔로 정했는데 천시퉁은 직접 나섰을 뿐만 아니라 호텔 앞에서 후치리를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천시퉁은 일이 흠잡을 데 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공교롭게도 일본인에 의해 탄로나고 말았다. 그날 저녁 마침 베이징에 주재하고 있는 몇몇 일본 TV방송사와 신문사 기자들도 호텔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중 한 기자가 방을 잘못 찾아 천시퉁, 후치리, 완리가 술잔을 부딪치며 의논하는 것을 목격했다. 천시퉁은 일본 상인이겠지 하고 지나쳤지만 이튿날 일본 신문에 기사가 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신화사 ‘내부참고소식’지에 ‘국내의 새로운 동향’이라는 제목으로 이 소식을 장쩌민에게 전했다. 장쩌민은 능력 있고 경험 많은 천시퉁이 후치리와 왕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아직 덩샤오핑이 후치리를 내세워 자오쯔양의 복귀를 위해 다리를 놓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장쩌민은 천시퉁이 감히 자신이 가장 꺼리는 자오쯔양 측근들과 같이 있는 것은 일부러 자기와 맞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즉시 중앙 규율위원회에 이 일을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수도 호텔의 관계자로부터 이 일이 사실이라는 보고를 받은 장쩌민은 천시퉁에게 전화를 걸어 “당조직과 반대 방향으로 간다”고 질책했다. 천시퉁은 완리가 시켰으므로 거절할 수 없었다고 대처했다.

장쩌민은 감히 완리를 건드릴 수 없었으므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다. 나중에 덩샤오핑은 정말로 후치리를 복귀시켜 완리가 자오쯔양 세력과 사이가 밀접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장쩌민은 자오쯔양 세력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기에 천시퉁을 눈에 가시처럼 여기게 되었다.

옛 원한이 채 가셔지기도 전에 새로운 원한이 또 생겼다. 덩샤오핑이 1992년 봄, 남방시찰을 하기 전부터 천시퉁은 덩샤오핑이 개혁을 계속 밀고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시퉁은 베이징 TV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구호와 표어들을 끼워 넣었으며 모든 기회를 이용해 개혁에 관한 연설을 발표했는데 이 역시 천윈과 리셴녠 등 좌파 원로들에 빌붙어 있는 장쩌민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덩샤오핑이 자신에 대해 불만이 있다는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장쩌민은 관영 매체들에게 덩샤오핑의 남방시찰 보도는 반드시 통일적으로 중앙선전부의 보도만 전재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러나 천시퉁은 베이징시 당보(黨報)인 ‘베이징일보’에 “덩샤오핑 남방시찰 연설에 빠른 반응을 보여야 한다”고 요구했으며 이에 따라 베이징일보는 신화사보다 하루 빨리 선전(深圳) 신문에 실린 덩샤오핑의 연설을 보도했다. 개혁에 대한 천시퉁의 관점과 행동은 장쩌민이 융통성 없고 보수적임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었으며 매우 피동적이게 만들었으므로 장쩌민은 천시퉁을 더욱 증오하게 되었다.

남방시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덩샤오핑은 또 수도 강철회사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 그곳에는 강철회사의 저우콴우(周冠五) 이사장과 천시퉁 등의 사람들만 있었을 뿐 중앙 정치국에서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강철회사의 직원과 노동자들 앞에서 “최근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한 말을 따르지 않고 있다”, “베이징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중앙 최고층에 조차 저지하려는 사람이 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나중에 천시퉁에게 “13차 당대표대회 노선을 반대하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말을 장쩌민에게 전해달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장쩌민은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장쩌민은 천시퉁을 트집 잡기 위해 중앙판공실을 통해 왜 사전에 덩샤오핑의 강철회사 방문 일정을 미리 보고하지 않았느냐며 따졌지만 천시퉁은 중앙판공실에서 덩샤오핑의 사무실에 연락하여 덩샤오핑의 활동 일정을 미리 알아봐야지 베이징 정부를 찾을 일이 아니라고 면박을 주었다. 이에 장쩌민은 화가 불길처럼 솟았고 천시퉁을 제거하려는 결심을 더욱 굳혔다.

장쩌민이 상하이시 서기로 있을 때 천시퉁은 베이징시장으로 있었으므로 천시퉁은 장쩌민보다 알고 있는 소식이 더 많았다. 장쩌민도 천시퉁이 덩샤오핑, 리펑과의 사이가 매우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천시퉁을 만날 때마다 웃는 얼굴로 아첨하곤 했으며 총서기직에 오른 뒤에도 처음 몇 해 동안은 꼬리를 감추고 고분고분 했으며 적어도 리펑에게는 매우 순종했다. 그러나 14차 당대표대회에서 양씨 형제를 넘어뜨린 후부터 장쩌민은 갈수록 꼬리를 높이 쳐들었다.

천시퉁은 장쩌민의 이런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후치리 사건과 남방시찰과 관련된 일로 장쩌민이 그와 원한을 맺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쩌민이 1986년 상하이 학생운동 때 그에게 맞선 학생들에게 보복한 일도 들은 적이 있고 아무튼 천시퉁은 장쩌민이 사소한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고야 마는 사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천시퉁은 기왕 장쩌민에게 미움을 산 이상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직 덩샤오핑이 살아 있을 때 아예 장쩌민을 제거해 버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천시퉁은 1995년 초, 7개 성 당위원회와 연합해 덩샤오핑에게 장쩌민을 검거하는 편지를 전달했다. 이 편지의 내용에 대해 아직 아는 사람이 없으며 당시 덩샤오핑은 편지를 보고 의견을 발표하지 않았으며 보이보(薄一波)에게 주었다. 6.4사건이 일어나기 전, 8명 원로들은 자오쯔양의 후계자 문제를 의논하면서 덩샤오핑은 리루이환이나 차오스를 추천했지만 보이보는 장쩌민을 극력 추천했다. 덩샤오핑은 이미 나이가 많다 보니 또 다시 총서기를 바꿀 힘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방시찰 후에 벌써 손을 썼을 것이었다. 덩샤오핑이 편지를 보이보에게 준 것은 그가 추천한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보라는 목적이었다.

보이보는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데 능수이고 투기적이며 배은망덕하고 비열했기에 고위층에서의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1979년에 있었던 한 가지 일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그 해 보이보는 후야오방에 의해 명예를 회복하고 중공 제11기 4중 전회에서 중앙위원, 후임 국무원 부총리, 국무위원 및 중앙고문위원회 주임으로 되었다. 그러나 1987년 1월 15일, 보이보는 정치국 확대회의를 사회보면서 후야오방을 제거하려 했다.

보이보는 천시퉁의 검거 편지를 보고 장쩌민의 책임을 물을 대신 그의 약점을 잡게 됐다고 속으로 기뻐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장쩌민을 이용해 아들 보시라이(薄熙來)와 측근들의 승직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보이보는 장쩌민을 불러 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편지만 건네주었다. 장쩌민은 편지를 보자 얼굴이 파랗게 질렸으며 온 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덩샤오핑에게 좋은 말을 해서 총서기 자리를 잃지 않게 해달라고 보이보에게 애걸했다. 보이보는 힘이 닿는 데까지 노력해 보겠다고 대답하고, 엉뚱한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천시퉁을 제거해야 하며 우선 천시퉁의 주변 인물부터 손을 대는 것이 좋겠다고 꼬셨다. 장쩌민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나중에 보시라이가 벼락출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아버지 보이보와 장쩌민 사이의 이런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2. 천시퉁을 꺼꾸러뜨리다

1994년 말, 중공 제14차 4중 전회에서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권력을 모두 넘겨주자 장쩌민은 천시퉁에게 손을 쓸 시기가 성숙되었다고 생각했으나 아직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1995년 초에 있은 ‘검거사건’은 장쩌민으로 하여금 시급히 손을 써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이번에도 쩡칭훙이 장쩌민에게 계책을 내놓았다. 쩡칭훙은, 원로들이 물러난 후 그들의 자녀들이 한덩어리가 되어 권력에 위협을 줄 수도 있으나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지 않다고 했다. 왜냐하면 태자당은 정책의 허점을 이용해 부자가 되고 있으므로 ‘반(反)부패’를 내세우기만 하면 공안, 검찰, 법원과 중앙기율위원회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장쩌민에게 충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장쩌민은 원래 14차 대회가 끝난 후, 두 아들 그리고 일곱 고모, 여덟 이모를 비롯한 많은 친척들을 중앙과 지방 정부 요직에 배치해 자기의 기반을 더욱 튼튼히 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반부패’를 명분으로 적수를 없애야 했기에 그들을 잠시 기다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장쩌민은 적수도 제거하고 ‘반부패’도 어느 정도 진행되어 빈 자리가 많이 생기면 다시 친척들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흐뭇한 타산을 한 장쩌민은 보이보의 제안대로 먼저 베이징 부시장부터 제거하려 마음먹었다.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운 뒤, 장쩌민의 총부리는 왕바오썬(王寶森)을 겨누고 있었다.

1995년, 수도 강철회사의 전임 이사장 저우콴우가 부패 문제로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아들도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또 베이징시 비서그룹 수뢰사건이 드러났으며 부시장 왕바오썬은 4월에 베이징 외곽 화이러우(懷柔)현에 있는 치펑차(崎峰茶)라는 산에서 죽었는데 관영 언론들은 그가 총으로 자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 남아 있는 발자국, 상처 자국, 화약, 탄피 등의 단서로부터 보면 자살이 아니라 타살임을 알 수 있었다. 더 명확한 증거는 탄피를 땅속에서 발견했다는 점이었다. 경찰들은 탄피를 찾을 수 없어 지뢰 탐지기로 땅속에 묻힌 탄피를 찾아냈다. 왕바오썬이 죽은 곳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으며 사건 발생 후 현장이 잘 보호되어 있었으므로 탄피가 땅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은 그가 죽을 때 곁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국가 안전부 내부 소식에 따르면 당시 장쩌민이 파견한 국가안전부 스파이가 왕 부시장을 죽였다고 한다.

왕바오썬의 죽음은 천시퉁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중공 정계의 게임 규칙에 따르면, 무엇을 언론에 내보내는지는 전적으로 최고 지도자의 기분에 달렸다. 왕바오썬의 죽음이 CCTV에서 떠들썩하게 보도되고 있다는 것은 권력 투쟁의 폭풍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우콴우의 아들 저우베이팡(周北方)이 판결을 받자 덩샤오핑마저 후사를 우려하며 장쩌민을 섣불리 대했다가는 가문의 후손들도 재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시퉁은 검거 편지를 제출한지 몇 달이 지났지만 장쩌민이 여전히 자리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덩샤오핑이 그를 교체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자신이 액운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쩌민은 무진장 애를 써서야 겨우 천시퉁이 “1991년 7월부터 1994년 11월 사이, 외교적 왕래에서 귀중한 선물 22점(금품 8점, 손목시계 6개, 고급 사인펜 4개, 사진기 3대, 녹화기 1대)을 받았는데 가치가 55.5만여 위안에 달했다(신화사 베이징 1998년 7월 31일 소식)”는 증거를 찾아냈다. 이만한 선물은 정치국위원 자리에 있는 관리로 놓고 말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매우 청렴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천시퉁은 공금횡령죄 13년, 직무 유기죄 4년으로 합쳐서 16년 판결을 받고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2003년 말, 천시퉁은 전립선암에 걸린 후 보석으로 석방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 기간 천시퉁은 5만자에 달하는 고소장을 써 장쩌민의 정치박해를 폭로하면서 자신은 권력투쟁의 희생물이라고 했으며 장쩌민 부자(父子)의 경제 부패를 고발했다. 천시퉁은 일찍이 장쩌민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 과정에서 장쩌민의 아들 장멘헝이 불법으로 국유자산 1,500만 위안을 유용했다고 폭로했다. 그러나 이것은 수감 중인 천시퉁이 언론에 말할 수 있는 일부일 뿐으로 숨겨진 내막은 그가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게 될 때에야 남김없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중공의 ‘반부패’ 운동이 권력 투쟁에 이용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중국 국민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었다. 현재 중공 고위층에 높이 앉아 있는 큰 탐관오리들인 자칭린(賈慶林), 황쥐(黃菊), 천량위(陳良宇) 등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다. 부패는 이미 전반 중공 사회의 매 한 세포마다 침투되었다.

3. 대만해협 위기

1996년에 들어서자 곧 대만해협에 위기가 발생했다.

3월 23일,대만에서는 처음으로 민주 대선을 실시했다. 총통 후보자는 리덩후이(李登輝) 외, 무소속 인사 천뤼안(陳履安)과 린양강(林洋港) 및 민주당 펑밍민(彭明敏)이 있었다.

장쩌민은 대만 민주선거가 국내 민중들에게 영향을 줄까 봐 불안해했다. 중국에서 민주선거를 무기한 지연시키기 위해 중공은 부단히 ‘국정론(國情論)’, ‘소질론(素質論)’과 “민주선거는 중국 전통문화에 어울리지 않다”는 등 황당한 논리들을 퍼뜨려 왔다. 때문에 중국 대륙 민중들과 같은 민족이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핏줄이 서로 이어져 있는 대만에서 대선이 성공한다면 중공의 논리는 사실상 부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선거를 거치지 않고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독재자 장쩌민은 속이 타들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장쩌민은 1995년 초, “조국통일 대업을 이루기 위해 계속 분투하자”는 제목의 연설을 발표했는데 새로운 내용이 없었다. 당시 대만과 중국과의 관계는 긴장한 편이 아니었으나 홍콩 반환을 앞두고 장쩌민은 대만 문제와 관련해 역사에 길이 남길 수 있는 업적을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무능한 자기 주제를 몰랐던 장쩌민은 하마터면 전쟁을 일으킬 뻔했다.

1988년, 대만 총통이 된 리덩후이는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등의 나라들을 잇달아 방문하면서 대만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장쩌민을 불쾌하게 만들었는데 가장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은 리덩후이가 1995년 5월, 개인 신분으로 모교인 코넬대학을 방문하려하자 미국정부가 국회 상하원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를 허락한 것이었다. 리덩후이는 모교에서 “나는 마음속에 항상 국민들이 원하는 바를 생각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연설을 발표해 그의 민주사상을 피력했다. 이런 리덩후이가 이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대만에서 처음으로 민주선거를 실행하려고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중공 군부 원로들의 선동 하에 장쩌민은 그를 한 번 혼내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사훈련 문제에서 장쩌민은 상당히 신중했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총을 만져 보지 못했고 한 번도 전투를 지휘한 적이 없는 군사위 주석이었기 때문이었다. 군사에 대해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던 그에게 있어서 가장 큰 바람이라면 군인들에게 정치 이론을 주입시켜 자신의 지휘에 복종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에서 오는 압력 때문에 장쩌민은 대신 지휘를 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이 사람은 또 반드시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심복이어야 했다. 이렇게 되어 장쩌민이 찾은 사람은 군사위 부주석 장완녠(張萬年)이었다.

4. 군부 내 장쩌민의 대리인

장완녠의 승직은 매우 아이러니했다. 1992년 장쩌민이 지난(濟南)부대를 시찰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장완녠은 지난부대 사령관이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놓칠세라 “장쩌민을 핵심으로 한 당중앙과 중앙군사위를 따르자”며 충성심을 보였다. 그 말속의 숨은 뜻은 장쩌민이 당중앙 핵심일 뿐만 아니라 중앙군사위의 핵심이라는 것이었다.

당시 장쩌민은 직위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군부 내에서 시급히 측근을 배양해야 했다. 장쩌민이 장아이핑과 사이가 밀접했고 장아이핑을 비롯한 제3야전군 출신들이 양씨 세력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장쩌민을 좋아한다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장쩌민은 ‘양아버지’의 상급들을 후배의 신분으로 대해야 했으므로 많이 불편했다. 때문에 오직 장쩌민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장령만이 군부 내에서 장쩌민의 대리인으로 적합했다.

장완녠이 외친 구호에 흡족한 장쩌민은 베이징에 돌아오자 바로 장완녠을 중앙군사위 총참모장으로 임명했으며 1993년에는 또 상장(上將)으로 진급시켰다. 장완녠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장쩌민의 앞에서 총참모부에 간부들을 모아놓고 큰 소리로 ‘부대는 영원히 당의 지휘를 따를 것이다”라는 노래를 불렀다. 이는 “영원히 장쩌민 주석의 지휘를 따르겠다”는 것과 같았기에 장쩌민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장완녠의 아첨이 엄청난 수확을 얻게 되자 그를 따라 배우는 사람들이 늘었으며 역시 헛수고 하지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위융보(于永波)였다. 그는 장쩌민에게 과분할 정도로 아첨한 덕분에 1992년 총정치부 주임이 되었으며 1993년 상장으로 되었다. 2001년 초, 위융보는 장쩌민이 중난하이 화이런탕(懷仁堂)에서 군부대 고위급 장령들을 초대한 연회석에서 “장쩌민주석 만세”를 불러 한 때 웃음거리로 되었다.

다른 한 아첨 전문가는 궈보슝(郭伯雄)이었다. 1992년까지만 해도 궈보슝은 소장급 장령인 47군 군장일 뿐이었다. 90년대 초, 장쩌민은 산시(陝西)에서 시찰하면서 47부대에 들렸다. 점심을 잘 먹은 장쩌민은 낮잠을 자려 했다. 궈보슝은 기회를 놓칠세라 보초병을 보내고 자신이 직접 문밖에서 보초를 섰다. 장쩌민이 두 시간이나 자고 있는 사이 궈보슝은 지루하기 그지없었으나 자리를 뜬 사이에 장쩌민이 깨어나게 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까 봐 화장실도 가지 않고 버텼다. 장쩌민이 잠에서 깨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다가 보니 한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었으므로 매우 흡족해 했다. 장쩌민이 그 군인이 나이가 좀 많다는 생각이 들어 자세히 보았더니 47부대 군장인 궈보슝이었다.

장쩌민은 어디서도 군장이 직접 보초를 서 주는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에 대해 호감이 생겼다. 그리하여 궈보슝은 베이징부대 부사령관으로 승직했으며 나중에는 연속 세 단계 뛰어 올라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임명되어 역시 상장 계급을 달게 되었다.

이러한 군사위 주석에 이러한 아첨쟁이 장령들이었기에 리덩후이는 중공의 군사 위협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5. 군사훈련

중공은 모두 3차례 군사훈련을 진행했다. 한 차례는, 1995년 8월 15일부터 25일까지 대만과 90마일 떨어진 동해에서 미사일을 발사했다. 다른 한 차례는, 같은 해 12월 2일 실시하는 대만 입법위원회 선거를 교란하기 위해 11월 15일부터 25일까지 둥산다오(東山島)에서 해군훈련을 진행했다. 이듬해 초, 중공은 대만과 마주하고 있는 연해지역에 병력을 추가 배치했다.

중공의 빈번한 군사훈련과 병력 이동을 보자 미국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2월 하순, 중앙정보국 국장 존 도이치(John Deutch)는 중공의 군사훈련이 “잘못된 계산 혹은 의외의 사고”를 초래할까 봐 근심했다.

중공 군부는 대만 해협 센터라인을 초과하는 거리에 미사일을 쏜 다음 잠수함을 동원, 대만 주변의 섬을 점령하려는 진공계획을 세우고 훈련에 돌입했는데 이러한 훈련에는 40억 위안의 거금이 들었다. 당시 클린턴 정부는 중공에 “미사일 발사 훈련은 매우 경솔한 행동”이라고 직접 명확하게 입장을 밝히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예상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시에 미국은 인디펜던스호와 니미츠호 항공모함을 대만해협으로 출동하게 했다.

장쩌민은 군부 내 강경파들이 절대 훈련 계획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정작 자신은 미국과 맞설 용기가 없었다. 그는 충돌이 일어나게 될 경우, 더 능력 있는 군부가 틈을 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덩샤오핑의 말을 들고 나왔으며 첫째, 미사일은 대만을 통과하지 않고 둘째, 전투기와 군함은 해협 센터라인을 넘지 않으며 셋째, 대만 주변의 섬을 점령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규정을 세웠다.

당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내린 이 결정을 대만 스파이였던 해방군 소장 류롄쿤(劉連昆)이 리덩후이 총통에게 보고했다. 리덩후이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공산군이 쏘는 포탄은 모두 공포탄이어서 비만 내려도 무용지물이 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류롄쿤은 1998년, 대만 군사정보국을 배신하고 베이징에 넘어간 두 명의 관리에 의해 군사기밀을 누설한 일이 드러나면서 1999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6. 장쩌민의 쇼

1995년 말, 장쩌민은 베이징을 시찰하면서 ‘3강(講)’을 이야기했는데 장쩌민이 처음 발명해낸 ‘이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3강’에서 장쩌민이 가장 많이 쓴 문구가 ‘정치를 말한다(講政治)’는 것이었는데 장쩌민은 “정치를 말한다는 것은, 정치적 방향, 정치적 입장, 정치 기율, 정치적 감별 능력, 정치적 예리성을 말한다”고 해석했다.

‘3강’은 사실 장쩌민이 자신의 개인 권위를 수립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른바 ‘정치를 말한다’는 것도 ‘공산당을 확고하게 따르자’는 것, 다시 말해서 당의 ‘핵심’ 장쩌민을 확고하게 따르자는 것이었다. 당시 덩샤오핑이 아직 살아 있었고 장쩌민의 보좌도 든든하지 못했으므로 ‘3강’이 나왔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다른 일처럼 전 세계를 들썩이지 못했다.

그 다른 한 가지 일이란 바로 장쩌민의 ‘머리 빗기’였다.

1996년 6월, 장쩌민이 스페인을 방문하자 카를로스 국왕이 장쩌민과 함께 의장대를 사열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장쩌민이 갑자기 빗을 꺼내더니 국왕의 앞에서 머리를 빗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저녁에 열린 연회에서 왕비의 오른쪽에 앉은 장쩌민은 또 카메라를 앞에 두고 빗으로 머리를 빗는 것이었다. 6월 25일, 스페인에서 가장 큰 신문인 ‘엘파스’와 기타 여러 신문들에서는 모두 제1면 톱기사로 ‘카를로스 국왕, 장쩌민의 머리 빗기를 보다’라는 제목으로 기사와 사진을 실었으며 전 세계 여러 신문들에서도 뒤이어 이 뉴스를 전재했다. 해외의 화교들은 이 뉴스를 보고 중국의 체면이 무참히 깎였다고 생각했다.

카를로스 국왕은 외교 예절을 무시하는 장쩌민의 행동이 매우 기분 나빴던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중국외교부 의전실은 장쩌민의 이런 점잖지 못한 행동을 끝까지 지적해 주지 않았다.

장쩌민이 TV 카메라 앞에서 머리를 빗은 장면은 여러 차례 기록되어있다. 1993년 3월, 베이징에서 전인대가 열릴 때에도 장쩌민은 간부석 가운데 앉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빗을 꺼내들고 정성들여 머리를 빗고 있었다. AFP가 찍은 이 사진은 전 세계에 전해졌다. 1995년 10월 24일, 장쩌민은 유엔 ‘세기보정(世紀寶鼎 역주 – 중국이 유엔이 기증한 청동기 문물)’ 앞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세계 각국 기자들 앞에서 양복 안쪽 호주머니에서 빗을 꺼내더니 또 한 번 머리를 빗었다.

장쩌민의 매번 외국 방문은 외교 회담이라기보다는 공연이 되었으므로 ‘광대’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96년,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장쩌민은 주동적으로 남사군도(南沙群島) 주권을 포기한다고 했으며 공동으로 경제 개발을 진행하자고 했다. 그날 저녁 필리핀 라모스 대통령은 유람선에 장쩌민을 만찬에 초대했다. 장쩌민은 조금 전에 보았던 상원의원 아로요(그녀는 2001년 필리핀 대통령으로 당선되며 국민들에게 ‘미녀대통령’이라 불린다)를 생각하며 흥이 넘쳐 마이크를 잡더니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 ‘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소리 높이 불렀다.

장쩌민이 쇼를 하는 열정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였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를 읊거나 노래를 불렀으며 또 영어를 몇 마디 하면서 우쭐대기도 했다. 2000년, 뉴욕 월돌프 호텔에서 장쩌민은 화교들을 만났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중국 서부개발 계획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장쩌민은 갑자기 당시(唐詩)를 읊었다. “양관(陽關)을 떠나면 옛 사람을 못 만나니, 술 한 잔 더 마시고 가시옵소소” 또 다른 한 사람이 언제 퇴직하는지 묻자 “나는 바람 타고 돌아가리라”라는 시를 읊었다. 장쩌민은 미국을 방문한 기간 또 클린턴 대통령의 앞에서 갑자기 링컨의 연설을 영어로 한 단락 외워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1999년 프랑스를 방문하기 전, 장쩌민은 먼저 영국에 들렀는데 그는 공기가 매우 좋다고 하면서 어디가나 “네추럴 가스(natural gas)”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신선한 공기를 말하려고 했을 것이지만 그가 사용한 단어는 ‘천연가스’라는 의미이며 영어에서 속된 말로 ‘방귀’를 뜻했다. 그 이튿날, 현지 중국어 신문에는 바로 장쩌민을 비웃는 기사가 실렸다. 사실 장쩌민은 일찍이 상하이 시장으로 있는 기간에도 이런 추태를 보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그가 외국 손님을 모시고 공원을 유람하게 되었는데 그는 상하이가 매우 개방되었고 젊은이들이 공원에서 공개적으로 연애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손으로 젊은이들을 가리키면서 그들이 ‘메이크 러브(make love)’(영어로 성교한다는 뜻)한다고 말해 외국손님들을 놀라게 했다.

1999년 10월 24일, 프랑스의 한 박물관을 참관 중이던 장쩌민은 갑자기 흥이 생겨 프랑스 대통령 시라크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영부인 베르나데트의 손을 잡고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시라크가 무슨 영문인지 알기도 전에 장쩌민은 또 베르나데트의 손을 잡고 큰 소리로 웃어댔다. 시라크 대통령은 이 일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으며 프랑스 국민들은 더구나 이것은 프랑스 민족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기여 분개했다.

2000년 4월 19일, 장쩌민이 터키를 방문했는데 터키 대통령 데미렐이 그에게 국가 훈장을 수여했다. 다 알다시피 이런 경우에 정상적인 예절에 따르면 주인이 훈장을 달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장쩌민은 참지 못하고 훈장을 집어 들더니 자기가 직접 가슴에 달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2002년 2월 21일, 장쩌민은 인민대회당에서 연회를 베풀어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맞이했다. 장쩌민은 연회에 모인 백여 명의 손님들 앞에서 ‘나의 태양(오솔레미오)’을 목청껏 불렀다. 미국 대통령 부시는 박수를 치고 나서 파월 국무장관에게 농담으로 세레나데를 한곡 부르라고 했으나 파월은 예절 있게 미소지으며 사절했다. 연회 도중 장쩌민은 또 미국 영부인 로라의 손을 끌어다 춤을 추었으며 흥이 채 가시지 않자 또 미국 국가안전고문 라이스 및 베이징주재 미국 대사의 부인 사라와도 춤을 추었다. 2002년,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 장쩌민은 더욱 심한 추태를 보였다. 연회석에서 장쩌민은 밥을 먹다말고 갑자기 일어서 높은 소리로 노래 한곡을 불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경악케 했다. 당시 부인 왕예핑은 얼굴에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이슬란드 최대 신문사가 큰 사진과 함께 이 에피소드를 상세히 보도했다.

한 국가 지도자의 외국방문에는 지켜야 할 외교적 예의와 존엄이 있다. 이 존엄은 개인이 아닌 국가에 속한다. 만약 장쩌민이 국가 주석이 아니라면 그가 어떻게 바보짓을 하며 외국 정상들의 환심을 사려 하든지 누구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 국가주석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그가 외교적 예의와 국가 존엄을 돌보지 않고 쇼를 한다면 다만 그 자신의 추태만이 아닌 것으로 국제사회에서 국가와 민족의 존엄까지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7. 파룬궁의 신속한 발전

1995년부터 1996년 사이, 민간에서 파룬궁을 수련하는 인원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수련자가 2천만 이상으로 되었으며 게다가 증가 추세는 여전히 수그러들지 않았다.

파룬궁 창시자인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1951년 5월 13일 지린(吉林)성 궁주링(公主嶺)시의 한 보통 지식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입대했다가 1982년에 제대해 창춘(長春)시 한 식용유회사에서 일했다. 리훙쯔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불가(佛家)에서 단독으로 전수하는 대법(大法)을 수련했으며 1984년부터는 단독 전수하던 대법을 널리 보급하기 적합한 기공으로 개편하고 파룬궁(法輪功)이라고 불렀으며, 1992년 5월 13일 창춘에서 공개적으로 공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리훙쯔 선생은 식용유 회사에서 일할 때, 일반 직원이었으며 그와 그의 가족은 회사 기숙사에서 소박한 생활을 했다. 리훙쯔 선생의 집에 다녀온 수련생의 말에 따르면 집안에는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복도에는 등도 없었다고 한다. 공법을 전하기 시작할 때, 리훙쯔 선생은 몇몇 제자와 함께 다녔는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처음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그들이 누군지 몰랐다. 그들은 인파가 붐비는 베이징 기차역에서 처음 며칠 밤을 보냈는데 거기서 밥을 먹고 긴 의자에서 잠을 잤다.

92년부터 94년까지 2년 동안, 리훙쯔 선생은 전국에서 모두 54차례 공법을 전수하는 학습반을 열었는데 매번 학습반 시간은 8일에서 10일정도였다. 이렇게 리훙쯔 선생은 전국 여러 도시들을 오가며 학습반을 여느라 기차를 탈 때 일반석조차 사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들은 힘들면 기차 바닥에 앉아 쉬고 배가 고프면 라면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으며 졸리면 좌석이나 기차 벽에 기대 토끼 잠을 자곤 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의 수혜자가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리훙쯔 선생은 학습반 수강료를 전국에서 가장 적게 받았다. 10일 동안 학습반 비용은 겨우 40위안이었는데 이는 다른 기공사들이 받는 비용의 절반에서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수강료가 너무 적어 비교가 되자 불만이 있는 기공사들이 적지 않았다. 중국 기공과학 연구회에서도 이 때문에 여러 차례 리훙쯔 선생에게 수강료를 높일 것을 요구했지만 리훙쯔 선생은 사람들의 경제 형편을 생각해 줄곧 동의하지 않았다.

리훙쯔 선생이 1992년에 공법을 전하기 시작할 때, 중국에는 기공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진짜와 가짜가 한데 섞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태극권, 오금회(五禽戲)등 전통 공법을 연마해 신체가 건강해졌지만 가짜 기공사에게 속아 돈만 많이 쓰고 병이 낫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파룬궁은 처음부터 수천가지 기공 중에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는 파룬궁의 병을 치료하고 신체를 건강히 하는 신기한 효과와 갈라놓을 수 없었다.

1992년 9월, 파룬궁은 중국 기공연구회 직속 공파(功派)로 되었다. 그해 12월, 리훙쯔 선생은 제자들을 이끌고 베이징 국제무역 빌딩에서 열린 동방건강박람회에 참석했다. 리훙쯔 선생의 이름과 파룬궁에 대한 소문은 재빨리 퍼졌으며 적지 않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박람회의 총 책임자인 리루쑹(李如松) 선생과 총고문 장쉐구이(姜學貴) 교수는 리훙쯔 선생의 공력(功力)과 파룬궁의 공헌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했다. 장 교수는 “리훙쯔 선생은 92년 동방건강 박람회의 스타입니다. 저는 리 선생님이 이번 박람회를 위해 지팡이, 휠체어에 의지하는 사람과 기타 행동이 불편한 사람들이 기적과도 같이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게 하는 등 많은 기적을 창조한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박람회 총고문으로서 여러분들에게 파룬궁을 추천합니다. 파룬궁은 확실히 건강한 신체와 새로운 정신 풍모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993년 8월 31일, 중국 공안부 소속인 ‘불의와 용감하게 싸우는 사람들을 위한 재단’에서 중국 기공과학 연구회에 감사 편지를 보내 리훙쯔 선생이 그들이 개최한 제3차 전국 표창대회에 참석한 대표들을 무료로 치료해준데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1993년 9월 21일, 중국 공안부 ‘인민공안보’는 “파룬궁이 불의와 용감하게 싸운 모범 인물들을 위해 무상 치료를 제공했다”고 하면서 공안부 대표들이 “치료를 거친 후 보편적으로 아주 좋은 효과를 보았다”고 보도했다.

파룬궁이 널리 전해짐에 따라 파룬궁을 수련하여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불치병에 걸렸다 건강을 되찾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파룬궁 창시자인 리훙쯔 선생은 사람들로부터 ‘리대사(李大師)’라는 존칭을 얻게 되었으며 베이징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고질병 심지어는 불치병이 완쾌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친척과 친구들에게 공법을 소개하여 연공하게 했는데, 이런 전파 방식은 극히 빨랐다.

파룬궁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지 신체에만 그치지 않았으며 ‘진(眞), 선(善), 인(忍)’의 원칙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가르쳤고 마음을 정화하여 더 높은 경지로 오르게 했다. 중국 경제의 시장화가 보급되고 본격화됨에 따라 사람들의 강렬한 이익 추구는 사회도덕을 급속하게 추락시켰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환경이었기에 ‘진, 선, 인’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더욱 파룬궁의 진귀함을 느꼈다. 파룬궁이 사회에 널리 전해지면서 각 계층 수련자들에 대한 영향은 비할바 없이 컸다. 이는 단지 신체뿐만이 아닌 도덕과 정신에 대한 영향도 가리킨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탄압이 시작된 1999년 이전의 언론 보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롄(大連)일보’는 1997년 3월 17일, ‘한 노인의 소리 없는 공헌’이란 제목으로 고령인 성리젠(盛禮劍) 노인이 1년이란 시간을 이용해 촌민들을 위해 길이가 총 1,100여 미터나 되는 길 4개를 닦았다는 보도를 실었다. 사람들이 노인에게 어디에서 일하며 돈을 얼마나 받고 일하는지 물으면 노인은 “나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오, 좋은 일을 할 뿐이지 돈을 받지 않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다롄만보(晩報)’는 1998년 2월 21일, 다롄 해군함정대학 학생 위안훙춘(袁紅存)이 14일 오후, 다롄 자유하(自由河) 얼음구멍 3미터 밑까지 빠진 한 어린이를 구해 ‘살아있는 뤄성자오(羅盛敎)’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학교에서 그에게 2등 공로을 수여했다는 보도를 실었다. 당시 위안훙춘은 파룬궁을 수련한지 2년이 되었다.

‘중국경제시보’는 1998년 7월 10일, “나는 일어섰다”라는 제목으로 셰슈펀(謝秀芬)이라는 여인이 일찍이 베이징 301병원에서 척추가 손상되어 하반신 마비가 왔다는 진단을 받고 16년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으나 파룬궁을 수련한 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보도를 실었다.

‘양청만보(羊城晩報)’는 1998년 11월 10일, “어린이와 늙은이 모두가 파룬궁을 연마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사진 보도를 실었다. 보도에서는 8일 아침, 광둥(廣東)성 체육위원회 무술협회 관계자들이 광저우 열사능원 등지에서 5,000여 명 파룬궁 수련자들의 단체연공을 관람했다고 전했다. 체육위원회 간부가 몇몇 수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의 수련 이야기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은 원래 전신마비 환자여서 신체 70%가 마비되었으며 대소변도 가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얼굴에 혈색이 돌고 연공 동작도 민첩하고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보도에서는 또 93세 노인과 2살짜리 어린이가 연공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과 함께 현재 광둥에만 25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으며 파룬궁은 비용을 받지 않고 자원으로 공을 전하고 있음을 강조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장쩌민은 1999년 파룬궁을 탄압할 때, 자신은 파룬궁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 1993년에 파룬궁이 신기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중공의 퇴직 간부들은 건강에 매우 신경을 썼으므로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부인 왕예핑도 진작부터 파룬궁을 수련했으며 장쩌민은 ‘전법륜(轉法輪 역주 – 파룬궁 수련서적)’을 읽어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병 치료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장쩌민은 베이징에 소문이 자자한 리훙쯔 대사(大師)를 통해 자신의 전생(前生)과 정계에서의 자신의 앞날을 알고 싶어 했으며 또 누가 자신에게 충성하는지, 누가 자신의 정적(政敵)인지, 앞으로 벼슬길에 난이 있는지, 권력을 보존하기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알고 싶어 했다.

1993년 여름, 장쩌민은 두 차례나 사람을 파견하여 리훙쯔 선생을 만나려고 했으나 리훙쯔 선생은 그의 생각을 알고 “병을 치료하는 것은 괜찮지만 정치는 말하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리훙쯔 선생을 찾아온 관리는 늘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사에 따르는데 습관되었는데 이와 같은 면박을 당하자 놀라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했다. 그 관리는 리 대사가 장쩌민의 심사를 환히 꿰뚫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일반 사람이 아니라며 놀랐고 리 대사가 전에 만나본 기공사들과는 달리 아첨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중간에서 챙길 것이 별로 없겠다는 것 때문에 실망했다. 때문에 그는 리 대사와 장쩌민이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 리 대사에 대한 호평이 다시금 귀에 들리자 장쩌민은 또 만나보려는 욕심이 들었다. 이번에는 2주전에 만날 시간을 정했다. 그러나 중간에서 일하는 관리가 자신이 얻을 게 없다는 생각과, 또 장쩌민이 묻는 문제를 리 선생이 대답하지 않아 난처한 일이 생길까 봐 이유를 만들어 장쩌민에게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극력 장쩌민을 설득해 하루 전에 그 약속을 취소했다.

1995년, 리훙쯔 선생은 국내에서 법을 전하는 것을 마무리 지었다. 그해 연초 리훙쯔 선생은 파리에 가서 법을 전수하고 당시 중국대사관 관리들을 만났으며 또 요청에 의해 중국 대사관 문화부에서 설법 보고회를 가졌다. 뒤이어 리훙쯔 선생은 또 스웨덴과 미국에 갔으며 파룬궁은 이때부터 세계각지로 전파되었다.

중국에서는 1996년 1월부터 ‘전법륜’책이 베이징청년보가 선정한 10대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줄곧 앞 순위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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