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7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07덩샤오핑이 남방시찰로 경제개방 실시하고, 장쩌민은 양씨를 숙청하고 정권을 탈취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 정계에서 사라지면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유력한 조수를 잃었다. 제3세대 지도자의 핵심인 장쩌민은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반대했다. 덩샤오핑은 생각하던 끝에 딸 덩난(鄧楠)의 도움을 받아 남방 시찰의 길에 올랐다. 그는 늙고 쇠약한 몸으로 멈춰버린 개혁개방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움직이려고 결심했다.

1992년 1월 17일, 덩샤오핑을 실은 전용 열차는 베이징에서 출발해 남부로 질주했다. 당시 88세 고령이었던 덩샤오핑은 부인과 딸, 그리고 친구인 양상쿤(楊尙昆)과 함께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우창(武昌), 선전(深圳), 주하이(珠海)와 상하이를 시찰했는데 ‘덩샤오핑의 남방시찰[南巡]’로 유명하다.

덩샤오핑이 남방시찰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장쩌민이 극좌적인 노선을 고집하며 개혁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이 남방시찰을 진행하고 발표한 연설 보도를 가로막은 사람 역시 장쩌민이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나중에 뻔뻔스럽게 개혁의 공로를 자신에게 돌리고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외국인을 매수해 자신의 평전을 쓰게 했다. 사실 당시 덩샤오핑을 도와 개혁개방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사람은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양상쿤, 양바이빙 형제였고 덩샤오핑의 뒤를 이어 경제 발전을 가장 크게 추진시킨 사람은 주룽지였다. 중국공산당 제14차 대표대회 이후 군사권을 잃은 양씨 형제는 장쩌민과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러던 1998년, 장쩌민과 쩡칭훙은 양상쿤을 죽음에로 내몰았을 뿐만 아니라 줄곧 양바이빙을 궁지에 몰아넣어 후환을 없애려고 생각했다. 장쩌민이 이렇게 한 것은 사적인 원한과 질투 때문뿐만 아니라 개혁의 공로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는데 있어서 그들 형제가 장애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1. 덩샤오핑의 최후통첩

1992년 1월 18일, 우창에 도착한 덩샤오핑은 후베이성 당위원회 관광푸(關廣富) 서기와 궈수옌(郭樹言) 성장을 만났다. 덩샤오핑은 두 사람에게 “13차 대표대회 노선을 반대하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말하고 이 말을 장쩌민에게 전달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이를 안 장쩌민은 앙심을 품고 덩샤오핑의 남방시찰 연설이 발표된 후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시하지 않았다.

이튿날, 선전(深圳) 특별구에 도착한 덩샤오핑은 이례적으로 긴 연설을 발표해 장쩌민에게 최후통첩을 내렸다. “개혁개방은 막을 수 없는 대세로 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 때문에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은 관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이와 동시에 덩샤오핑은 양상쿤과 완리에게 연말에 열리는 중공 제14차 대표대회에서 발표할 총서기를 포함한 인사변동 명단을 준비하게 했다. 덩샤오핑은 친구이자 국가주석, 군사위 부주석인 양상쿤과 남방시찰 일정을 함께 했으며 개혁개방 추진에 유리한 인물들인 차오스(喬石), 류화칭(劉華淸), 예쉬안핑(葉選平), 주룽지, 양바이빙 등과 각각 단독으로 만났다. 덩샤오핑은 또 장쩌민 대신 차오스를 발탁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남방을 시찰하는 기간, 자오쯔양이 경제를 책임진 5년 동안 “큰 발전을 가져와 공로가 크다”고 거듭 칭찬했으며 시찰이 끝난 뒤에는 여러 차례 사람을 파견해 자오쯔양에게 잘못을 승인하도록 설득했으나 자오쯔양은 따르지 않았다. 공산당 내부에서 자오쯔양처럼 당성(黨性)이 아닌 양심을 꿋꿋하게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보기 드물었다.

장쩌민은 총서기 자리에 앉은 2년 동안 극좌적인 노선으로 나아가며 ‘반평화연변(演變)’을 떠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개혁을 반대하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한 덩샤오핑의 말은 장쩌민의 급소를 찔러 줄곧 불안하게 했다. 2월 20일 오전, 장쩌민은 정치국 회의를 열고 덩샤오핑의 연설을 전달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연설을 전국 각지에 전달하는 문서로 만들 때, 장쩌민은 “당 간부들의 사상을 불안정하게 할 수 있다”는 구실로 “개혁개방은 막을 수 없는 대세이고 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기에 개혁하지 않으면 관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부분을 비롯한 많은 내용을 삭제했으며 덩샤오핑의 남방시찰을 언론에서 자세하게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2월 하순의 어느 날, 정치국 상무위원 리루이환(李瑞環)이 ‘인민일보’ 사장 가오디(高狄)에게 왜 덩샤오핑의 남방시찰 연설을 발표하지 않고 아무런 반응이 없는지 묻자 가오디는 오히려 당당한 태도로 “덩샤오핑은 지금 일반 당원이기 때문에 어떤 신분으로 발표해야 될지 우리도 난감합니다”라고 말했다. 가오디가 감히 리루이환과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장쩌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쩌민에게 총서기 자리를 준 사람이 덩샤오핑이며 군대를 손에 쥐고 있는 덩샤오핑이 언제든지 장쩌민의 자리를 다시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2. 혼비백산

1992년 3월 20일부터 4월 3일까지, 베이징에서 제7기 전인대 5차 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의의 초점은 당연히 개혁 진행여부를 둘러싼 토론이었다. 장쩌민이 덩샤오핑의 남방시찰 연설내용을 삭제하면서 중공 정치투쟁에서 가장 위력 있는 군부가 나서기 시작했다. 회의에서 중앙서기처 서기, 군사위 비서 겸 정치부 주임인 양바이빙이 가장 먼저 “개혁개방의 순조로운 진행을 보호할 것”이라고 태도를 표시했으며 ‘해방군보’에 똑같은 제목으로 사설을 발표하도록 지시해 공개적으로 덩샤오핑을 지지했다. 군 장령 중에서 이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허치쭝(何其宗) 부참모장이었다. 양바이빙의 이번 행동은 직접 장쩌민을 겨냥했으므로 장쩌민은 양바이빙과 허치쭝 두 사람을 뼈에 사무치도록 증오했으며 나중에 끝내 보복하고야 말았다.

회의 기간인 3월 26일, ‘선전특구보’는 제1면에 ‘동풍이 불어오니 봄이 오네…덩샤오핑의 선전 시찰’이라는 제목으로 가장 먼저 덩샤오핑의 남방시찰과 중요한 연설을 보도했다. 같은 날 오후 ‘양청완보(羊城晩報)’에서 ‘선전특구보’의 보도 전문을 전재했으며 이틀 뒤에는 상하이 ‘원후이보(文匯報)’, ‘중화공상시보(中華工商時報)”에서도 잇달아 보도를 전재했다. 그러나 장쩌민파들이 통제하고 있는 신화사는 나흘이나 지난 3월 30일에야 뒤늦게 보도를 내보내 장쩌민의 꼬인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양바이빙은 군대를 대표해 덩샤오핑의 남방시찰 연설을 공개적으로 지지해 덩샤오핑의 가장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해방군의 지지는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기세를 꺾어 놓았으며 형세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장쩌민은 군대의 칼끝이 자신을 압박함을 느끼자 당황했고 항상 그래왔듯이 바람 따라 노를 젓기로 결심했다. 4월 1일, 일본 정치인사들을 접견할 때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연설을 지지하는 척 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그가 전혀 성의 없는 빈말만 했다고 평가했다.

중공 제14차 대표대회 개막이 몇 개월 앞으로 다가오자 양바이빙은 군대의 힘을 앞세워 중공 고위층에서 역량을 과시했고 베이징의 정치 형세는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남방시찰 후, 능력 없고 기회주의적이며 진실하지 못한 장쩌민에 대한 덩샤오핑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5월 22일, 덩샤오핑은 무더위를 무릅쓰고 베이징 강철회사를 시찰하고 강철회사의 간부와 노동자들 앞에서 “일부 사람들은 나의 연설을 겉으로만 지지하는 척하고 또 일부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는데 사실은 반대하는 것이다. 현재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개혁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당시 덩샤오핑과 함께 있었던 베이징 정부 관리 리시밍(李錫銘)과 천시퉁(陳希同)이 덩샤오핑의 지시대로 이 말을 장쩌민에게 전달했다.

이 기간, 정치국상무위원, 법률위원회서기, 중앙당간부학교 교장 차오스도 “덩샤오핑의 연설을 단지 형식적으로 지지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여러 번 지적하면서 간접적으로 장쩌민을 비평했다.

부총리 톈지윈(田紀雲)은 덩샤오핑의 개혁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톈지윈은 차오스의 요구에 따라 1992년 5월, 중앙당간부학교에서 장쩌민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그를 비평하는 연설을 발표했다. 그는 “‘좌’적 영향을 제거할 때, 특히 기회주의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항상 입장을 바꾸면서 기회만 있으면 개혁개방을 반대하는데 이런 사람이 대권을 장악하면 국가와 인민에게는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라고 말했다.

형세가 불리하자 다시 개혁파의 모습으로 가장하려 했던 장쩌민은 뜻밖에 톈지윈에게 들통 나자 괘씸해 죽을 지경이었다.

리셴녠은 오래전부터 개혁개방을 지지한 톈지윈을 증오했다. 6.4사건 직후인 1989년 10월 27일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장쩌민이 자오쯔양의 개혁성과를 부정하자 톈지윈이 즉석에서 “성과는 다 같이 노력한 결과이고 문제가 생기면 누구에게나 책임이 있다”며 지적했다. 이를 안 리셴녠은 “자오쯔양의 앞잡이가 또 설쳐대는군!”하고 욕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 톈지윈이 장쩌민을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을 때 장쩌민의 가장 큰 배후 지지자인 리셴녠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 장쩌민을 안타깝게 했다. 5월 말, 전문 의료진이 리셴녠의 병세가 위태롭다고 보고하자 장쩌민은 더더욱 불안해 졌다. 형세가 불리해지자 그는 부득이 태도를 바꿔 자산계급화한 개혁을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6월 9일, 장쩌민은 차오스와 군인, 경찰들에 둘러싸여 중앙당간부학교 회의실에 들어갔다. 당교의 강사와 학생들은 그 광경을 보고 “장쩌민이 차오스에게 압송되어 왔다”고 조롱하듯 말했다. 이날 장쩌민은 차오스의 압력으로 덩샤오핑의 남방시찰연설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하지만 장쩌민은 체면을 잃었다고 느껴 차오스를 더욱더 증오하게 되었다. 회의가 끝난 뒤, 사람들은 “보기만 해도 장쩌민이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수군댔지만 겉으로나마 장쩌민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다.

그 해 여름, 총서기인 장쩌민의 인기는 바닥으로 떨어져 일부에서는 장쩌민이 총서기 자리를 보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소문마저 떠돌았다. 6월 21일, 리셴녠이 베이징에서 병으로 사망하자 장쩌민은 형세의 변화에 못 이겨 덩샤오핑의 개혁개방노선을 지지한다고 뒤늦게 밝혔다. 그러나 장쩌민은 관직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으로 갈수록 두려워졌고 특히 과거와 현재에 국민들에게 진 피의 빚을 함께 갚을 날이 올까 봐 침식을 잊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몰래 덩샤오핑을 찾아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그를 따라 개혁개방을 끝까지 진행하겠다고 ‘결심’을 표시했다.

장쩌민은 양씨 형제, 차오스, 완리, 톈지윈 등으로부터 오는 강대한 압력을 느꼈으며 그들을 증오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개혁을 반대하던 데로부터 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장쩌민에게 있어서 어떻게 하면 자신을 사상이 개명한 개혁파 인물로 포장해 이 고비를 넘길 것인지는 아주 중요한 과제였다. 자신의 역사를 숨기고 왜곡하는 것이 장기인 장쩌민은 “사실 따져보면 장쩌민도 역시 경제개혁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라고 쿤에게 자신의 평전에 써넣게 했다. 이는 처음부터 개혁을 방해하고 ‘반평화연변’을 떠벌린 장쩌민의 많은 수작들을 순식간에 덮어 감췄으며 오히려 보수파에 의해 납치당한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덩샤오핑은 장쩌민을 한번 찾아가 이야기하면 끝났을 것이며 구태여 군사권을 쥔 양상쿤과 함께 남방시찰을 떠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3. 음모를 꾸미고 독계를 쓰다

그 해 6, 7월 경, 덩샤오핑과 천윈은 제14차 대표대회 중공고위층 인사배치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고위층 권력투쟁은 백열화 되었다. 장쩌민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중앙사무실 부주임 쩡칭훙은 매우 조급했다. 야심 많고 욕심 많은 쩡칭훙은 무능한 장쩌민을 이용하는 것이 최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 왔다. 때문에 그는 장쩌민이 자리에서 떨어지면 자신의 정치생명도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쩡칭훙은 음험하고 계책에 능란했으며 내색하지 않고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재간’이 있었다. 쩡칭훙의 부친 쩡산(曾山)은 전에 내정부장을 역임했고 어머니 덩류진(鄧六金)은 옌안(延安)에서 보육원 원장을 역임했다. 중공 고위층 관리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옌안보육원에서 자랐기에 덩류진을 어머니로 불렀다. 쩡칭훙의 출신은 그로 하여금 고위층 권력투쟁에 익숙하게 했으며 자신을 보호하면서 상대를 공격하는 방법, 복잡한 형세 속에서 권력을 공고히 하고 보다 큰 이익을 얻는 방법, 특히 상대에게 불리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루머를 퍼뜨려 상대를 공격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했다. 쩡칭훙은 이 모든 기교를 나중에 중공 고위층 권력투쟁에서 반복적으로 이용했다.

쩡칭훙은 얼이 나가 있는 장쩌민에게 차근차근 분석해주었다. “덩샤오핑은 장쩌민 대신 차오스를 총서기 자리에 올려놓을 것이므로 차오스 그리고 양씨 형제, 완리, 톈지윈, 리루이환 등은 모두 적수이며 그 중에서 가장 큰 위협은 양씨 형제이다. 양씨 형제는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덩샤오핑의 신임을 받고 있으므로 그들을 건드리려면 난이도가 가장 크고 가장 위험하다. 하지만 양씨 형제를 제거해야만 가장 위험한 적수를 없애고 위기에서 벗어나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다.” 쩡칭훙은 또 “군인 출신인 양씨 형제의 권력은 전적으로 덩샤오핑의 신임에서 온 것이고, 그들은 정치적 술수에는 서툴기 때문에 방법을 만들어 덩샤오핑과 양씨 형제간의 관계를 갈라놓는 것이 관건이다. 덩샤오핑이 두려워하는 것은 개혁개방 노선이 무산되는 것과 자신이 죽은 후에 6.4사건의 명예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오쯔양과 관계가 밀접했던 양상쿤은 무력으로 학생들을 진압하는 것을 반대했으므로 6.4문제에서 덩샤오핑과 양상쿤이 사이가 벌어지게 할 수 있다”고 대책을 대주었다. 군대 내에서 자신을 깔보는 양씨 형제에 장쩌민은 화가 나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지라 쩡칭훙의 분석과 대책을 들은 후, 보복과 권력 보존을 위해 희망을 가지고 양씨 형제를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쩡칭훙과 장쩌민은 양씨 형제를 대처하는데 전력하기로 하고 쩡칭훙이 중공판공실에서 일하는 편리한 조건을 이용해 양씨 형제를 타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했다.

제2야전군 출신인 덩샤오핑은 군사위 주석을 맡고 있을 때 기타 부대 출신들을 배척했는데 제3야전군과 제4야전군 출신들의 불만이 특히 컸다. 당시 군사권을 장악한 양씨 형제는 덩샤오핑과 같은 출신이었고 권력 또한 컸으므로 사람들의 불만은 자연히 양씨 형제에게 집중되었다. 개혁 개방 초기, 덩샤오핑은 보다 많은 국가 자원을 경제 발전에 투입하기 위해 군대에게 간고하고 소박한 생활을 할 것을 요구했고 이 요구를 확실히 집행시킨 사람이 바로 양씨 형제였다. 덩샤오핑은 또 간부들의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이유로 군사위 부비서장인 장아이핑(張愛萍), 양더즈(楊得志), 위추리(餘秋裏) 등을 설득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을 대신해 올라온 사람은 장아이핑보다 3살, 양더즈보다 4살, 위추리보다 7살 이상인 양상쿤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더욱 양씨 형제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제3야전군 5사단 사단장이었던 리셴녠은 군에서 배척 받은 제3야전군 4사단 사단장 장아이핑, 참모장 장전(張震), 1사단 사단장 예페이(葉飛), 3사단 참모장 훙쉐즈(洪學智) 등이 양씨 형제를 배척하는 것을 장기간 전력으로 지지했다.

장아이핑이 6.4사건에서 학생들에게 총을 쏘는 것을 반대했기에 장쩌민은 자리에 올라앉은 첫 몇년 동안은 일부러 장아이핑과 거리를 두었다. 삼촌 장상칭(江上靑)이 전에 장아이핑의 부하로 있었기에 장쩌민은 처음에는 ‘열사의 고아’로 자칭하면서 이른바 ‘양아버지’의 상관에 대해 매우 공경하는 척 했다. 그러나 총서기가 된 후, 장쩌민은 학생들에게 총을 쏜 결정을 지지하기 위해 장아이핑을 냉대했다. 그러나 양씨 형제를 넘어뜨리기 위해 장쩌민은 또 다시 장아이핑을 가까이 하기 시작했다.

쩡칭훙은 장쩌민이 군대 내에 아무런 밑바탕도 없지만 군대 내의 이런 불만을 이용해 양씨 형제를 고립시키고 나아가 덩샤오핑과의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의외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음을 보아냈다.

그 해 8월, 제14차 당대표대회 준비와 인사변동 문제로 천윈과 갈등을 빚는 등 지나치게 신경을 쓴 탓에 덩샤오핑은 중풍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양바이빙은 양상쿤으로부터 미리 이 소식을 알고 8월 하순, 46명 고위급 장령들을 불러 베이징에서 간단한 회의를 열었다.

군대 고위급 장령들이 장쩌민을 무시하는 것은 이미 공개된 비밀이었다. 덩샤오핑이 장쩌민에게 배치해 준 ‘보좌관’ 양상쿤은 장쩌민이 총을 만지기만 하면 덜덜 떨며 아직 사격이 뭔지도 모른다고 비웃었다. 회의에서 양바이빙은 덩샤오핑의 몸이 좋지 않다고 밝히고 장쩌민이 군사위 주석 직무를 맡는데 대해 토론했다. 양바이빙은 또 아직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며 개혁개방이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군대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회의 참가자들에게 해결책을 내놓게 했다. 회의 참가자들은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고 무능한 장쩌민이 개혁개방을 반대한 것을 비판했고 군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다 패기가 없어 군사위 주석직을 맡을 수 없다고 반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장쩌민은 양바이빙을 더욱 증오했으며 그 후부터 줄곧 어떻게 하면 양씨 형제를 궁지에 몰아넣을 것인지만 생각했다. 쩡칭훙은 덩샤오핑의 칼을 빌려 양씨 형제를 망하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한편으로는 밖에 루머를 퍼뜨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병석에 있는 덩샤오핑에게 양씨 형제가 덩샤오핑의 권력을 탈취할 기미가 보여 매우 걱정 된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자 덩샤오핑은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을 시켜 알아보도록 했는데 정말 밖에서 그런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리하여 양씨 형제는 덩샤오핑의 신임을 잃기 시작했다.

4. 루머를 퍼뜨려 정권을 탈취

중공 14차 대표대회를 맞이하기 위해 베이징 정부는 각 부문 임원들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9월 7일부터 10일까지 중앙군사위는 회의를 열고 군대 방면의 인사 배치를 토론했다. 군대 인사조직 대권을 장악한 양바이빙은 새로 선발한 중, 고위급 장령 100인의 명단을 류화칭과 양상쿤에게 제출해 허가를 받은 뒤, 다시 장쩌민의 심사를 받으려 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이 명단이 덩샤오핑과 양씨 형제의 관계를 갈라놓는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명단을 보관한 채 돌려주지 않았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덩샤오핑과 양상쿤 사이의 관계를 갈라놓기 위해 동시에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덩샤오핑은 만년에 자주 외출하지 않았기에 주로 자녀들로부터 외부 소식을 전해 들었다. 태자당의 한 성원인 쩡칭훙은 이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덩샤오핑의 자녀를 이용하려고 마음먹었다. 쩡칭훙은 태자당 친구 류징(劉京)과 위정성(兪正聲)을 통해 덩푸팡(鄧朴方)(역주 – 덩샤오핑의 아들)과 연계를 취하게 했다. 류징은 문화대혁명 중 반란파 두목이었는데 “아버지가 영웅이면 아들은 호걸, 아버지가 반동파면 아들은 망나니”라는 ‘혈통론(血統論)’을 주장했던 한 사람으로서 쩡칭훙이 다녔던 베이징 공업대(지금의 베이징 이공대학) 동창생이었으며 당시 쿤밍(昆明)시 시장이었다. 위정성은 당시 칭다오(靑島)시 시장이었다. 위정성과 류징은 일찍 덩샤오핑의 큰아들 덩푸팡이 이끌고 있는 중국장애인연합회 이사회에서 부이사장직을 맡았다. 쩡칭훙의 뜻에 따라 위정성과 류징은 덩푸팡을 만난 자리에서 양씨 형제의 위험을 과장해 말하며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뒤이어 쩡칭훙은 직접 덩푸팡을 만나 “장쩌민은 덩샤오핑에게 충성하며 능력이 있지만 양씨 형제에게 눌려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양바이빙이 제출한 ‘100인 명단’을 말하며 양상쿤, 양바이빙이 자신의 세력으로 군대 내에서 덩샤오핑의 세력을 대체하려 하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하다고 했다. 또 자오쯔양의 복귀에 대해서는, 만약 자오쯔양이 다시 돌아와 정치협상회 주석직을 맡는다면 사실 덩샤오핑이 간접적으로 잘못을 승인하는 것이 되며 게다가 양상쿤이 6.4문제에서 마음속에 갈등을 가지고 있고 명예회복을 시키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기에 일단 양상쿤과 자오쯔양이 연합하면 형세가 아주 뒤바뀌고 말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쩡칭훙은 덩샤오핑의 마음의 병인 6.4문제를 덩샤오핑과 양씨 형제의 관계를 갈라놓는데 이용했다. 쩡칭훙은 또 덩푸팡에게 만약 정말 형세가 뒤바뀌게 되면 덩샤오핑은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위협까지 했다.

이와 동시에, 장쩌민과 쩡칭훙은 양씨 형제를 공격하는 자료를 수집하는데 박차를 가했고 배후에서 양바이빙의 ‘100인 명단’ 사건을 확대시키고 루머를 퍼뜨렸다. 그리하여 한동안 베이징에서는 “양씨 형제가 안하무인격이다”, “양상쿤이 덩샤오핑을 대신하려고 한다”, “양상쿤, 양바이핑이 무혈정변을 일으키려 한다”, “덩샤오핑이 멀지 않아 사망한다”, “양상쿤이 군사위 주석이 되려 한다.” 등등 양씨 형제에 대한 갖가지 소문이 난무했다.

중공 군대 내부에는 원래 파벌이 많아 모순이 복잡했으며 양씨 형제에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이를 이용해 장아이핑, 왕다오한 등 사람을 찾아 군대 내에서 양씨 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시켜 덩샤오핑에게 군대에서 세력이 큰 양씨 형제가 정권을 탈취하려는 야심이 있으므로 중앙군사위원회를 개편해 양씨 형제의 군사권을 박탈할 것을 제안하게 했다.

5. 큰 고비를 넘기다

장쩌민이 ‘100인 명단’을 접수하고 처리하지 않아 양상쿤이 이유를 물으니 짱쩌민은 덩샤오핑의 의견도 들어 보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쩡칭훙이 덩푸팡을 만난 뒤, 장쩌민은 정치부 부주임 위융보(于永波)와 함께 덩샤오핑을 직접 찾아가 덩샤오핑의 앞에서 양씨 형제가 야심이 있어 군사권을 빼앗으려 한다고 말했다. 당시 중앙군사위 부주석 류화칭도 그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 장쩌민과 쩡칭훙은 양씨 형제가 “군사권을 탈취하려 한다”, “6.4사건에 명예를 회복시키려고 한다”등의 소문이 사방팔방에서 덩샤오핑의 귀에 들어가게 했다. 덩샤오핑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고 특히 이번에 중풍에 걸리면서 후사를 빨리 배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14차에서 개혁개방 노선을 굳히는 동시에 6.4사건의 명예회복을 방지해 죽은 후에 욕먹는 신세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다. 장쩌민의 충성 공세로 덩샤오핑은 장쩌민과 쩡칭훙의 음모에 완전히 빠져든 데다 천윈과 보이보(薄一波)까지 가세하는 바람에 장쩌민을 교체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엉뚱하게 양씨 형제의 군사권을 박탈하고 류화칭, 장전(張震) 등 노장을 군사권을 취득한 장쩌민의 보좌관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내심 장쩌민을 신임하지 않았던 덩샤오핑은 그를 그저 과도시기의 인물로 삼고 더 장래성이 있는 젊은 후계자를 물색했다. 그리하여 중공 제14차 대표대회에서 덩샤오핑은 장쩌민의 후계자로 49세 나이인 후진타오를 지명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중공 역사에서 후계자의 후계자를 배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덩샤오핑이 생전에 후진타오를 한 세대를 뛰어넘어 제4세대 지도자로 지정한 것은 당연히 제3세대 지도자 핵심인 장쩌민에 대한 불신임 때문이었다. 후진타오가 덩샤오핑이 직접 지정한 후계자라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지만 장쩌민은 쿤이 쓴 자신의 평전에서 “나(장쩌민)는 10년 전부터 그(후진타오)가 마음에 들었다”고 썼다. 장쩌민은 나중에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물러나지 않아 국민들의 질책을 받았지만 자신의 평전에서는 오히려 지도자의 연령층을 낮추는 것을 지지했다며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장쩌민은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대부분 서방 지도자들과 한 시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후진타오를 국가 부주석으로 임명하여 국제 사회에서의 중국의 이미지를 개변하기를 바랐다”고 썼으며 사람들이 모두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우리가 후진타오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다”라고 썼다. 이렇듯 장쩌민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모두 평전을 통해 다시 엮어냄으로써 진실을 감췄다.

류화칭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이미 퇴직한 덩샤오핑은 14차가 열리기 전야인 10월 6일, 중앙정치국에 중공군사위원회 인사 배치와 관련해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편지에는 “앞으로 류화칭, 장전이 장쩌민을 도와 군사위 일상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장래 후계자 선택은 군대에 익숙한 사람이 담당해야 한다”라고 썼으며 새로운 군사위 지도자 성원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제기했다.

드디어 중공 제14차 대표대회가 10월 12부터 18일까지 7일간 베이징에서 열렸고 회의에서 양씨 형제는 뜻밖에 군사권을 박탈당했다. 양바이빙은 유명무실한 정치국위원으로 되어 겉보기에는 승직한 것 같았으나 사실은 군사권을 박탈당한 것이었다.

계략이 뛰어난 덩샤오핑이지만 이번만은 후배 장쩌민과 쩡칭훙 두 사람의 음모계책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때부터 덩샤오핑과 양씨 형제는 60년 동안 쌓아온 우정을 외면한 채 발길을 끊었다. 자신의 가장 유력한 지지자였던 후야오방, 자오쯔양, 양씨 형제를 잘라 버린 덩샤오핑은 사실 스스로 망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류화칭은 덩샤오핑에게 충성하기는 했지만 나이가 많은데다 능력의 한계가 있어 정치투쟁 중에서 장쩌민과 쩡칭훙의 적수가 될 수 없었으며 몇 년 후 역시 숙청되고 말았다.

6. 두 얼굴

이중적인 장쩌민은 언제나 사람을 이용할 때에는 비굴하게 아첨하지만 필요 없을 때에는 헌신짝 버리듯 했다. 양씨 형제에 대한 장쩌민의 태도변화가 가장 전형적이었다. 1989년 11월, 중공 제13차 5중 전회에서 덩샤오핑이 군사위원회 주석직무를 내놓고 대신 장쩌민이 올라갔다. 취임 연설에서 장쩌민은 “충분한 준비가 없고 능력이 모자란다”, “군사 업무에 생소하다”등 자신 없는 말을 하며 양씨 형제에게 충성심을 보였고 양상쿤이 군사위 제1부주석, 양바이빙이 군사위 비서장을 맡는 것이 자신의 업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쩌민의 이 연설은 10여 일 뒤 ‘인민일보’, ‘해방일보’ 등 여러 주요 관영 신문 제1면에 발표되었다.

장쩌민이 겸손한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연설을 관영 신문 제1면에 발표했다는 것은 양씨 형제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덩샤오핑의 앞에서 양씨 형제를 모함한 사람 역시 장쩌민이었다.

이런 이중적인 수법은 덩샤오핑의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덩샤오핑이 살아 있을 때,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부인 줘린(卓琳)을 만나면 멀리서부터 웃는 얼굴을 보이면서 아부했지만 덩샤오핑이 사망한 뒤에는 덩샤오핑의 자녀들을 사정없이 심하게 대했다. 중국에서 가장 부패한 관리로 불리는 장쩌민의 아들은 덩샤오핑의 아들을 부패의 혐의가 있다며 잘라 버리려 했고 덩샤오핑과 관련된 언론에 대한 그의 가족들의 해석권을 박탈했다.

장쩌민이 처음 베이징으로 불려가 덩샤오핑을 만났을 때의 모습을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장쩌민은 당시 굽실거리며 억지로 웃음을 지은 채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런 장쩌민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덩샤오핑에게 아첨하러 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런 모습은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덩샤오핑이 웃으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새로 올라갈 총서기라고 소개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하던 일만 하면서 한 번씩 힐끗 쳐다볼 뿐이었다.

장쩌민이 베이징에 들어간 후, 가장 먼저 해결하려고 한 일이 바로 덩샤오핑의 저택을 드나들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처음 덩샤오핑의 저택에 들어갔을 때, 장쩌민은 누가 비서이고 누가 간호사이며 누가 외손자이고 친척인지 잘 몰랐으며 심지어 잡일을 하는 사람과 경호원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장쩌민에게는 하나의 원칙이 있었는데 즉, 덩샤오핑의 저택에 들어가면 누구에게도 절대 미움을 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의 저택은 늘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나 경험이 풍부한 장쩌민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쩌민은 복도나 정원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심지어 어린이를 보아도 튀어나온 배를 가급적 들이밀고 허리를 약간 굽히며 얼굴에 웃음을 띠운 채 공경하게 “먼저 지나가세요”라고 말했다. 이런 과분한 행동은 아이들을 즐겁게 했지만 많은 사람들을 구역질나게 했고 경호원과 보일러 일꾼들은 꿍꿍이가 있다며 두려워했다.

다 알고 있다시피 덩샤오핑은 담배를 즐겨 피웠다. 때문에 그의 건강을 위해 특별 제작된 담배까지 별도로 생산되었다. 덩샤오핑의 간호사는 그가 제때에 약을 먹도록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담배를 적게 피우라고 일깨워주는 일도 했다. 덩샤오핑이 담배를 피우려 하면 간호사는 방금 전 피웠던 시간을 알려주면서 조금만 더 참으라고 권했다. 니코틴은 아편보다 중독성이 심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사람에게 인이 박히게 만든다. 때문에 애연가들은 담배를 피우고 싶을 때 피우지 못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덩샤오핑이 담배를 피우고 싶어할 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의 건강을 생각해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권고했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장쩌민은 민첩하게 준비해 두었던 담배를 꺼내 라이터 불까지 붙여서 덩샤오핑에게 건네주었다. 덩샤오핑의 간호사는 놀랍기도 하고 화도 났지만 장쩌민이 덩샤오핑의 환심을 얻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덩샤오핑의 자택에서 덩샤오핑에게 차를 따르고 물을 부어주며 슬리퍼를 가져오는 등 잡일은 모두 간호사와 경호원이 했다. 덩샤오핑의 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시중 받는데 습관이 되어 잡일은 아예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장쩌민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장쩌민은 늘 간호사 혹은 경호원이 이미 손을 내밀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질러 물을 따르거나 슬리퍼를 가져가 그들은 난처하게 만들었다.

덩샤오핑의 집에 드나드는 ‘귀족’들은 지금도 그때 국가주석인 장쩌민이 앞장서 물을 따랐던 일을 흥미진진하게 담론하고 있다.

덩샤오핑 탄생 97주년 기념일인 2001년 8월 22일, 덩샤오핑의 발탁으로 오늘날이 있게 된 장쩌민은 언론에 찬양하는 문장들을 발표해 은인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동시에 그의 추종자들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이고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들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배은망덕하고 의리 없는 장쩌민은 도리어 중앙선전부에 명령을 내려 덩샤오핑을 기념하는 문장을 언론에 발표하지 못하게 했다.

7. 이력서를 뜯어 고치다

1992년 10월에 열린 제14차 당대표대회를 통해 장쩌민은 총서기 자리를 확실하게 지켰지만 여전히 자신의 경력이 부족함을 느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즉시 비서에게 명령하여 이미 검열했던 이력서를 다시 가져오게 하고 “1946년 4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사업을 시작했다”라고 쓴 부분에 물음표를 달았다. 비서는 장쩌민이 이력서를 고치려고 한다는 것을 바로 눈치를 채고 즉시 이력서를 책임진 직원을 찾아가 “총서기께서 상하이 교통대학에 입학한 1943년부터 이미 상하이 지하당 주변조직과 가까이 했다는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라고 말했다. 상하이 지하당에 가까이 한 것도 아니고 주변 조직에 가입한 것도 아니며 그저 주변 조직에 ‘가까이’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얼마나 ‘가까이’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어 장쩌민은 해방전쟁시기 간부로부터 항일전쟁시기 간부로 변신했으며 경력이 한 단계 많아지게 되었다.

중공14차 제1차 전회가 열린 뒤, 장쩌민의 뜻에 따라 신화사가 발표한 ‘중국공산당 제14차 중앙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지도자 프로필’에서는 장쩌민에 대해 “1943년부터 지하당이 이끄는 학생운동에 참가했고, 1946년 4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라고 썼다. 사실 1943년 장쩌민은 난징 괴뢰정부의 중앙대학에 다니고 있었기에 상하이 지하당 주변조직과 가까이 했다는 것은 사실무근이었다. 상하이 학생운동에 익숙한 차오스는 신화사가 발표한 장쩌민의 프로필에 어처구니없는 부분이 추가된 것을 보고 장쩌민에 대한 혐오와 분노가 더해갔다. 14차 이후, 장쩌민과 차오스사이의 모순은 갈수록 첨예해졌다.

8. 덩샤오핑을 증오하다

1992년 중공 14차에서는 2002년 16차에서 장쩌민의 권력을 전부 후진타오에게 넘겨주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했다. 덩샤오핑은 또 리루이환, 완리 등의 사람에게 마음속 타산을 낱낱이 이야기해줌으로써 확실한 집행을 보장했고 동시에 장쩌민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그들을 위로해 주었다. 10월 19일, 덩샤오핑은 14차에 참석해 전체 대표들을 회견하고 정치국 상무위원들과 후진타오와 악수하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나온 사진에서 덩샤오핑과 후진타오가 중간에 있었고 장쩌민은 뒤에 있었다. 장쩌민은 자신의 체면이 깎였다고 노발대발하면서 사람을 파견해 자신과 기타 인물들을 사진에서 모두 지워버리게 했다. 중공중앙 판공실에서 나중에 후진타오에게 준 사진은 배경이 새까맣게 된 채 덩샤오핑과 후진타오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12년이 지난 2004년, 덩샤오핑 탄생 100주년 기념일 때, 이 사진은 놀랍게도 3종류의 같지 않은 판본이 나타나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14차 이후 후진타오라는 인물이 갑자기 떠오르며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정보부문에 밀령을 내려 후진타오의 일거일동을 엄밀히 감시하게 한 동시에 그에 대한 모든 자료를 수집했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위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잘 알고 그때부터 권력을 물려받기 전까지 매사에 조심하는 길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음모로 양씨 형제를 넘어뜨리고 총서기 자리를 지키는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담력과 야심이 팽창한 두 사람은 음모계책을 꾸미는데 더욱 열중했으며 가짜정보와 불리한 자료를 산포하는 방식으로 중공고위층에서 사람을 끌어 모으고 반대 의견이 있는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타격했다. 때문에 쩡칭훙은 중공고위층에서 ‘블랙킬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했다.

14차 이후, 장쩌민은 겉으로는 덩샤오핑을 공경하는 척 했으나 속으로는 덩샤오핑이 자신을 제거하려고 후계자를 정한 것 때문에 이를 갈았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죽은 뒤, 덩샤오핑의 가족에 보복을 했는데 보일러실 일꾼, 경호원과 같은 사람들도 빼놓지 않았다. 이것은 뒤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9. 군대 사유(私有)화

6.4사건 이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는 징시(京西)호텔에서 중공 제13차 4중 전회가 열렸다. 그날 저녁 당시 중앙판공실 주임이었던 원자바오(溫家寶)와 중앙판공실 부주임 겸 중앙경위(警衛)국 국장 양더중(楊德中)이 신임 총서기 장쩌민에게 자오쯔양에 대한 심사 상황과 단속 계획을 보고했다. 장쩌민은 양더중이 원래 자오쯔양의 경호원으로 자오쯔양에게 매우 충성해 왔지만 그가 관직에서 떨어지자 그를 단속하는데 나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생들이 흘린 피를 밟고 중공 최고위층에 오른 장쩌민은 늘 위기감을 느꼈다. 1976년 ‘4인방’을 체포한 사람도 중앙경위국 국장 왕둥싱(王東興)이었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장쩌민은 자신에게 더 없이 충성하는 측근에게 중앙경위국 국장직을 맡기려고 했으나 저우언라이, 후야오방, 자오쯔양의 신변 경호원으로 있었던 양더중의 자격이 당당했으므로 제거할 구실이 없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방법을 찾아 그의 주위에 신임하는 사람들을 적절히 배치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 총참모부 경위국에서 일했던 유시구이(由喜貴)는 쩡칭훙에게 달라붙어 환심을 산 뒤, 다시 장쩌민에게 아첨하여 신임을 얻었으며 중앙경위국 부국장으로 되어 양더중의 신변에서 일하게 되었다.

장쩌민은 나중에 권력이 공고해지자 군장령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중공의 규칙을 타파하고 중앙경위국 국장 양더중을 매수하여 그를 군대 최고급 장령으로 되게 한 뒤, 다시 퇴직할 것을 권하여 제거하고 유시구이를 중앙경위국 국장으로 임명하고 그의 부대를 장쩌민 자신의 개인 부대로 만들었다.

중앙경위부대는 인민대표대회 위원장, 정치협상회 주석을 포함한 모든 고위층 지도자들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었다. 쩡칭훙은 이 부대를 각별히 중시를 하면서 명령을 내려 정치 교육을 통해 당에 충성하고 장쩌민에게 충성하게 했다. 유시구이는 쩡칭훙과 손잡고 보호한다는 구실로 관리들의 신변에 첩보원을 배치했다.

장쩌민은 중앙반공실 주임 원자바오도 신임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신변에 있던 비서 자팅안(賈廷安)과 쩡칭훙을 중앙판공실에 배치해 원자바오의 조수로 있게 했으며 또 자오쯔양이 건립한 중앙정치체제개혁연구실을 없앴다. 그리하여 원자바오는 계속 중앙반공실 주임직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 후부터 총서기 비서들은 그가 아닌 부주임 쩡칭훙이 책임졌다. 장쩌민이 원자바오를 신임하지 않는 것은 판공실의 사람들이 다 느낄 수 있었다.

14차가 열린 후, 장쩌민의 지위는 잠시 확고한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 3월, 중공 제8기 인대에서 쩡칭훙이 중앙반공실 주임으로 임명되고 원자바오는 중앙농촌사업지도소조 부소장으로 옮겨감으로써 중앙판공실은 장쩌민 측근들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

장쩌민은 별의별 방법을 다해 기타 중앙 지도자들을 감시했으며 동시에 그 자신도 감시를 받을까 봐 걱정되어 누구나 경계하며 보냈다. 장쩌민은 총서기 자리에서 물러난 후, 군사위주석의 신분으로 아예 자신이 직접 중앙경위국 제1정치위원직을 겸했다.

1994년 14차 4중 전회에서 덩샤오핑이 정치계에서 정식적으로 손을 씻는다고 선포했다. 쩡칭훙은 장쩌민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공지 문서에 큰 논란을 일으킨 한 단락을 첨부해 넣었다. “당의 역사가 표명하다시피 반드시 실천 중에서 형성된 확고한 중앙지도자 집단이 있어야 하며 이 집단에는 반드시 하나의 핵심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런 지도자 집단과 핵심이 없다면 당의 사업은 승리할 수 없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는 마오쩌둥 독재시기를 연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지만 장쩌민은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진작 자신이 총서기 직무에서 내려앉은 뒤에는 국내 언론에서 “후진타오를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자신을 치켜 올리는 것은 되지만 다른 사람을 치켜 올리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이것 역시 장쩌민의 특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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