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6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06사막폭풍으로 간담이 서늘해지고 위기 속에서 좌파의 길을 고집

장쩌민이 총서기 자리에 올라간 지 일년이 조금 더 되었을 때 미국과 이라크 간에 걸프전이 발생했다. 미국이 이 전쟁에서 ‘사막의 폭풍’ 작전으로 크게 승리하면서 덩샤오핑은 중국의 향후 발전을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갑자기 쿠웨이트를 침공해 하루 만에 쿠웨이트를 완전히 함락시켰다. 이라크의 이런 침공 행위는 국제 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 등 여러 서방국가들은 유엔안보리의 허락을 받아 쿠웨이트의 영토 수복을 위해 이라크에 군사적인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이라크의 사악한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중공과 친한 사이였으며 양국은 암암리에 밀접하게 왕래해 왔다. 그러나 당시 중공은 6.4천안문사건으로 국제사회에서 매우 고립된 상태였으므로 후세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못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장쩌민은 6.4천안문 민주화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학살한 ‘공로’로 총서기 자리에 올랐다. 그의 별명이 ‘클리쿤(허풍쟁이)’인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허풍치고 쇼를 하며 상급에 고자질 하는 것이 그의 장기였다. 걸프전은 중국 총서기인 장쩌민의 정치적인 위기극복 능력을 검증하는 기회였다.

이렇게 큰 난제를 맞은 장쩌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때서야 그는 총서기가 편안한 자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중국은 6.4대학살 이후 서방국가들로부터 무기수입 금지 제재를 받고 있었으며 사이가 가까운 국가도 별로 없었다. 외교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덩샤오핑은 ‘말을 적게 하고 끼어들지 말자’는 정책을 취하고 걸프전 결의안 유엔안보리 회의에서 기권했다. 이는 장쩌민으로 하여금 시험에서 무사히 벗어나게 했다.

1. 사막의 폭풍

1991년 1월 17일 아침, 미국 등 다국적군은 이라크에 대해 ‘사막의 폭풍’ 군사 작전을 실행하여 몇 주내에 사담 후세인의 군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이라크는 결국 유엔에서 통과한 12개 조항의 관련 결의안을 접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따라 2월 28일 0시, 다국적군은 이라크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면서 42일간 지속된 걸프전이 막을 내렸다.

이번 전쟁 기간의 중국 신문을 펼쳐보면 이라크가 ‘인민전쟁’(역주 – 일반 민중이 함께 참여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군사전략)과 ‘유격전’ 등의 전략을 펼쳐야 한다는 기사가 난무하고 있었고 심지어 미국이 베트남전 시기처럼 깊은 수렁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미국 등 다국적군은 육해공군을 골고루 동원하는 입체적인 전략과 선진적인 무기를 결합해 국제 사회를 경탄케 하는 작전을 펼쳤다.

당시 미국 정보기관은 통신위성, 관찰위성, 레이저 분석위성으로 이라크 군사정보를 감청, 분석하고 스폿위성에서 보내오는 적외선 사진을 활용했으며 첨단 컴퓨터로 정보를 처리해 이라크를 독안에 든 쥐로 만들었다. 또 전쟁이 시작된 첫 6시간 동안, 미국은 강력한 전자파로 이라크의 지휘 시스템을 마비시킨 동시에 스텔스 전투기를 투입해 공중에서 대량의 교란물을 투하해서 적군의 레이더에 가짜 신호를 보내 사담의 SAM-6 대공미사일을 무력화시켰다. 사담의 군대는 삽시간에 귀머거리와 장님이 되고 말았다.

미군이 첨단 무기를 사용해 손실을 최소화시키면서 이루어낸 걸프전 승리는 중공 고위층을 경악하게 했으며 덩샤오핑으로 하여금 많은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군대를 현대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지만 총을 만져본 적이 없는 장쩌민은 군사방면의 감각이 없는데다 미-중 양국의 군사력 대비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한국전쟁이나 중월전쟁 정도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막막하기만 했다.

장쩌민은 ‘1999년, 싸우지 않고도 이긴다’(역주 –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의 저서, 공산주의는 정신적으로 이길 수 있으며 20세기에 종말될 것이라는 내용)의 내용을 떠올렸다. 공산 중국은 이데올로기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미국과 천양지차였다. 동유럽의 급변으로 냉전이 끝나면서 민주는 유럽으로부터 점차 동쪽으로 만연되고 있었으며 소련 하나만 중간에 남은채 중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르바쵸프 또한 민주화 물결의 압력을 받고 있었고 가장 큰 홍색제국은 흔들리고 있었다. 중공의 일당독재는 미국이 정신적 영향력과 선진적인 무기를 앞세우고 냉전을 지속하거나 군사 공격을 실시할 경우 극도로 위험한 처지에 빠질 우려가 있었다.

이러한 세계정세를 앞에 둔 장쩌민은 눈앞이 캄캄했다. 아직 베이징 정부에서 자리를 굳히지 못한데다 중공의 전도에 대해 조금도 자신 없는 장쩌민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장남 장몐헝(江綿恒)에게 전화해 학위는 나중에 따도 되니 대학을 졸업한 뒤 우선 취업부터 해서 미국에 남아 있도록 노력하라고 제안했다.

2. 소련에 아첨

1989년 6.4대학살 이후, 시스템 공학과 통합에서 선진적인 미국은 중국에 대해 무기 수출금지 제재를 실시했다. 중국은 시스템 공학과 통합에서 경험이 부족했지만 이 방면의 인재들을 고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중국은 러시아 경제가 빈약한 점을 이용해 경화(硬貨)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전문가의 풍부한 경험을 얻었으며 90년대부터 이미 약 1,500명의 러시아 전문가들이 중공군의 현대화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덩샤오핑과 양상쿤(楊尙昆) 등 중공 원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군사위 주석인 장쩌민은 반드시 뭔가를 해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러시아에서 최첨단 무기들을 구매한다고 거금을 투자했지만 알고 보니 모두 구소련의 도태된 무기와 창고를 정리하는 장비들이었다. 그 때 사들인 전투기(SU-29s, SU-30s포함)들은 각각 1997년, 1998년,2000년과 2001년에 거쳐 모두 5차례 추락 사고가 발생했다.

2000년 8월, 장쩌민은 또 1975년에 개발되어 1994년에 도태된 러시아 항공모함 ‘키예프’를 보물이나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톈진항에 사들였다. 관계자들은 ‘키예프’ 항공모함을 구매하는데 총 7,000만 위안의 거금을 대출했다고 말했다. ‘키예프’가 드디어 톈진항에 들어서자 중국 전문가들은 많은 기술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가치 있는 부분은 전부 제거되고 없었다. 군부는 사기 당했다고 장령들에게 고소했다. 어리석은 일을 한 장쩌민은 더욱 불안하게 되었고 그 자신의 말대로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당시 소련은 경제가 불안정했을 뿐만 아니라 무력으로 가맹국들을 진압한 이유로 국내외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중공은 군사 장비를 강화하기 위해 소련을 지지하면서 1990년 10월, 소련 공산당과 군사 합작을 실시하고 소련으로부터 최신형 무기를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 1월 25일,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중공 총서기 장쩌민이 5월에 소련 방문을 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마오쩌둥이 1957년 모스크바 ‘시월혁명’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이래,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 소련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장쩌민이 소련을 방문하자 개혁파 주요 인물인 옐친이 그를 만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장쩌민은 보수세력인 야나예프 부통령을 만나 소련이 사회주의 노선으로 다시 돌아오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역시 장쩌민이 개혁을 반대하는 좌파라는 것을 잘 설명한다. 장쩌민과의 회담은 3개월 후, 야나예프 부통령이 정변을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감금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

장쩌민은 소련 방문 기간에 소련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하고 자기의 권력을 확고히 하기 위해 모든 대가를 아끼지 않고 아첨했다. 그는 중-러 국경문제를 다시 논의하는 것에 대해 동의했다. 동시에 KGB의 세심한 배치로 스파이 신분의 옛 애인을 다시 만나게 된 장쩌민은 자신의 과거사가 KGB의 수중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소련의 요구대로 타이완 면적의 수십 배에 달하는 국토(사실은 러시아에 강점된 중국 영토이다)를 비밀리에 고스란히 러시아에 넘겨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제14장에서 자세하게 서술할 것이다.

3. 덩샤오핑에 대한 과소평가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실시하고 시장을 활성화시켜 경제상에서 미국과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으며, 몇 개 경제특구만으로는 부족하므로 반드시 전국적으로 경제를 개혁하고 전면적으로 개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고 있는 장쩌민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개혁개방에 따라 국민들을 통제하기가 갈수록 더 힘들며 이에 따라 어렵게 얻은 관직을 잃을까봐 걱정했다. 고위층에 올라 간 장쩌민은 우쭐거리기 시작했고 덩샤오핑마저 무시하려 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맞서기위해 “사기업과 자영업자들을 망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일체 불안정한 요소를 맹아 상태에서 소멸하자”는 대응책까지 내 놓았다. 그러나 우스운 일은 장쩌민의 가족이 중국에서 가장 큰 부패관리로 되자 그는 또 “자본가를 입당시키자”라고 말했다.

덩샤오핑은 천윈과 리셴녠의 말을 믿고 장쩌민을 쉽게 총서기 자리에 올려놓은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1990년 봄,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시장 주룽지를 여러차례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그가 중공 고위층에서 보기 드문 경제 방면의 인재이고 기백있고 실속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으며 장쩌민처럼 잔머리나 굴리고 허풍떠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상하이에 있는 장쩌민의 추종자들이 이 일을 장쩌민에게 보고하자 장쩌민의 질투심은 또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무덕, 무능한 장쩌민은 권력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 능력있는 사람을 보면 질투를 부렸다. 겉으로 볼 때는 장쩌민이 대권을 손에 잡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으며 과도 시기의 일시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최고 직위에 오른 장쩌민은 득의양양했지만 자신의 지위가 아직 확고하지 않고 경력, 능력과 인맥 등에서 모두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권력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그로 하여금 강렬한 질투심이 형성되게 했고 경력, 능력과 인맥이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들을 전부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했다.

1991년 2월,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음력설을 보내기 위해 베이징을 떠나면서 “베이징에서는 내가 말을 해도 듣는 사람이 없으므로 상하이로 가겠다”고 말했다. 상하이에서 덩샤오핑은 주룽지를 국무원에서 일하게 할 생각이라고 말했고 양상쿤에게 부탁해 상하이 정부 관리들에게 이 소식을 전달하게 했다.

1991년 음력설을 맞아 덩샤오핑은 상하이에서 연설을 발표해 개혁개방과 시장경제 활성화를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해방일보’ 총편집국장 저우루이진(周瑞金) 등은 덩샤오핑의 이 연설과 관련해 ‘개혁개방에 앞장서자’,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개혁개방에 임해야 한다’, ‘더 확실하게 개방을 추진해야 한다’, ‘개혁개방은 대량의 능력과 인격을 겸비한 간부를 필요로 한다’ 등 4편의 문장을 썼다. ‘황푸핑(皇甫平)’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이 문장들은 1991년 음력 초하루 날 ‘해방일보’에 처음 실렸는데 그 배후에는 사실 덩샤오핑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이런 일들을 하면서 장쩌민을 무시했으며 그에게 통보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덩샤오핑과 상하이 시장 주룽지의 직접적인 관여 하에 발표된 개혁개방 관련 문장들은 장쩌민의 질투와 반발을 샀다. 장쩌민은 개혁의 추세에 대해 침묵했을 뿐만 아니라 베이징 정부 내의 좌파인물들의 공격과 비판을 지지했다. 장쩌민은 사람을 파견해 상하이에 머물고 있는 덩샤오핑을 감시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은 베이징에서 덩샤오핑을 누르기 위해 기타 원로들을 찾아다니면서 바쁘게 보냈다.

같은 해 4월 12일, 제7기 전인대 4차 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반대 의견들을 물리치고 상하이 시장 주룽지를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했다. 5월, 덩샤오핑은 주룽지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기 위해 그와 함께 베이징 강철회사를 시찰했고 “우리 당 고위층 간부들 중에 경제를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주룽지와 같은 인재는 더 높은 자리에서 일해야 한다”고 칭찬했다. 이는 소심한 장쩌민에게 또 다시 놀라움과 질투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부터 장쩌민은 측근에게 부탁해 꼬투리를 잡게 하고 기회만 있으면 주룽지를 내리누르고 배척, 타격했다.

장쩌민이 암암리에 자신을 반대한다는 것을 알고 덩샤오핑은 그에게 강렬한 불만을 갖게 되었다. 정치국 상무위원 차오스와 부총리 톈지윈(田紀雲)이 여러차례 개혁을 지지하는 연설을 발표하자 덩샤오핑은 “이렇게 훌륭한 연설은 오랫만에 듣는다”고 칭찬했다. 이는 또 장쩌민 마음속에 차오스와 톈지윈에 대한 원한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장쩌민 등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강렬한 불만과 실망이 이어지는 가운데 덩샤오핑은 양상쿤, 완리 등과 상의하여 자오쯔양을 다시 복귀시키려고 했으며 이듬해 열리는 제14기 전인대 회의에서 중공 지도부를 대폭 개편하려 했다. 이 소문을 들은 장쩌민은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4. 소련공산당 붕괴로 시작된 ‘공황’

1991년 6월,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을 복귀시키기 위해 먼저 그의 지지자들인 후치리(胡啓立), 옌밍푸(閻明復)과 루이싱원(芮杏文)을 복귀시키고 후치리를 기계전자공업부 부부장으로, 루이싱원을 국가기획위원회 부주임으로, 옌밍푸를 민정부(民政部) 부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몇 달 뒤인 1991년 말, 강대해 보였던 소련공산당이 며칠 사이에 무너져 전 세계 정치구도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켰다. 소련공산당의 해체는 중공으로 하여금 자신감을 잃게 했고 충격을 주었다. 강대한 소련공산당도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중공은 긴장 상태에 빠졌다. 중공은 늘 “소련의 오늘이 우리의 내일”이라고 말해왔는데 이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으니 자신의 장래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은 또 늘 미(美)제국주의와 일체 반대 세력은 모두 종이호랑이라고 말했지만 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정세의 급변은 공산당이야 말로 진정한 종이호랑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나무가 넘어지면 원숭이들도 흩어지듯 독재 정권들은 잇달아 붕괴되었다. 소련의 해체 외에도 베를린 장벽의 붕괴, 폴란드의 노동조합의 승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발생한 벨베트 혁명, 헝가리의 민주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사형, 불가리아의 제1차 전국 대선 등으로 공산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폴란드는 10년, 헝가리는 10개월, 독일은 10주, 체코는 10일, 루마니아는 10시간 걸렸다”고 생생하게 표현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산정권의 연쇄적인 붕괴는 장쩌민으로 하여금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중공 창당 70주년 기념일 행사가 열린 1991년 7월 1일,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경제건설 중심’ 노선을 포기하고 반(反)‘평화연변(演變)(역주 – 평화적인 방법으로 중국 체제를 유도하는 방식)’을 중점으로 할 것을 요구하면서 사상 통제를 강화했으며 “4가지 기본원칙을 지키는 개혁개방과 자본주의화한 개혁개방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쩌민은 “이론적으로 개혁개방에도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이 있다”고 하면서 직접 비판의 화살을 상하이의 ‘황푸핑’과 주룽지 및 덩샤오핑에게 돌렸다. 개혁개방을 강하게 반대한 장쩌민의 이런 연설은 좌파들의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튿날, 장쩌민은 큰 압력을 받고 있는 주룽지 부총리를 홍수 피해가 난 후베이(湖北)에 보내 재해 상황을 알아보게 하고 자신은 베이징에서 좌파들과 함께 주룽지를 공격할 새로운 음모를 꾸몄다.

장쩌민은 공산당의 정치적인 고압정책이 중국 경제가 낙후한 근본 원인임을 모르고 오히려 개혁개방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좌파적인 길로 가려고 했는데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었다.

쿤은 ‘장쩌민평전’에서 개혁에 공이 큰 장쩌민이 중국을 개변시켰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장쩌민은 처음부터 극도로 보수적이었고 개혁을 조금도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회주의적 태도와 쇼를 잘하는 장기 덕분에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을 속일 수 있었다.

장쩌민은 나중에 사태의 변화로 어쩔 수 없이 개혁을 지지하는 쪽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국민들에 대한 사상 통제만큼은 고삐를 늦춘 적이 없었다. 장쩌민은 사상자유를 극도로 증오했으며 반체제 인사들을 애국하지 않는다고 질책했다. 그는 자신의 평전을 쓴 작가 쿤에게 “나는 그들의 혈관 속에서 흐르는 피가 중화민족의 피가 맞는지 의심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나라와 국민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애국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장쩌민처럼 국토를 팔아먹는 일본 매국노와 러시아 스파이가 애국자란 말인가?

5. 리펑과 군부에게 아첨

베이징 정부에 발을 들여 놓은 처음 몇 년 간, 장쩌민은 좌,우 두 세력의 압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6.4대학살 사건으로 국내외의 비난을 받고 있었으므로 아주 불안정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외교적으로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는데, 6.4대학살 사건이 있은 후 많은 나라들에서는 일정 기간 동안 대사들을 귀국시켰으며 무역 제재를 가하고 무기 수출을 금지해 수출경제에 의거하는 중국 경제에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리펑은 장쩌민의 상급이었으나 장쩌민이 베이징에 오면서 하급으로 바뀌어 두 사람은 조금은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수력부 출신인 리펑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정치국에서 회의를 할 때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공동으로 회의의 사회를 보았는데 장쩌민이 항상 리펑의 눈치를 보며 행동해 사람들은 ‘장쩌민-리펑체제’라 불렀다. 장쩌민은 부임된 후 리펑이 추진하고 싶어하는 ‘싼샤(三峽)댐 공정’과 관련해 첫 시찰을 나갔으며 논란에 휩싸인 ‘싼샤댐 공정’ 예비안이 전인대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장쩌민의 아첨은 적나라했다. 항상 과학을 입에 달고 다니던 공산당과 장쩌민은 이때 와서는 최고 전문가들을 모두 한쪽에 밀어두고 교통, 발전, 이민, 생태, 환경, 군사 등 방면에서 발생할 많은 부작용들은 무시한 채, 수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연예계 스타, 노동모범 및 소수민족 대표들에게 국책과 국민생활에 직접 연관되는 프로젝트를 판단하고 결정하게 했다. 장쩌민이 이렇게 황당한 짓을 한 것은 리펑에게 잘 보이려는 목적밖에 없었다.

무덕, 무능하고 군사적인 경력이 조금도 없는 장쩌민은 1989년 11월 군사위 주석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군 장령들은 총 한번 만져 보지 못한 장쩌민의 지휘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당시 장쩌민은 감히 덩샤오핑처럼 군 장령들을 자신의 뜻대로 임명할 수 없었고 군대에 인맥이 없었다. 때문에 거금을 들여 소련에서 낡은 무기를 구매한 외에, 장쩌민은 매국노 아버지에게서 배운 선전 기교를 이용해 해방군을 찬양하는 영화 몇 편을 만들었다. 이는 한 방면으로는 군대에 아첨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6.4사건 후 해방군을 증오하는 국민들을 세뇌시키기 위해서였다. 장쩌민은 거액을 투자해 제작한 전쟁영화 ‘대결전(大決戰)(역주 – 공산당이 정권을 탈취하기 전 약 1년 반 동안 펼쳤던 국민당과의 전쟁을 반영한 영화)’을 포함한 일부 영화의 제목을 직접 써주었다.

그리고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 장쩌민은 생각지 못했던 기교를 알게 되었다. 당시 리(李)씨 성을 가진 감독이 ‘개국대전(開國大典)’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는데 장제스를 중공의 요구대로 표현하지 않고 인간성을 가진 인물로 부각했다. 영화 심사를 책임진 관계자는 장제스를 잔인하고 흉악한 인물로 만들지 않는다면 개봉하지 못할 것이라고 위협했으나 감독은 이 요구를 거절했다.

사상이 개방적인 리루이환(李瑞環)이 이 일을 알고 장쩌민을 요청해 그 영화를 한 번 보기로 했다. 장쩌민은 영화에서 나오는 일부 구하기 힘든 역사 장면에 호기심을 갖고 감독에게 어디서 구해왔는지 물었다. 감독은 그런 장면은 구해온 것이 아니라 직접 찍은 것인데 특수 처리를 하면 기록 영화 화면처럼 보인다고 대답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장쩌민은 매우 만족해하면서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서 감쪽같이 속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영화 제작에서 이런 수법을 이용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하지만 장쩌민은 거짓 선전에 이용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독자들은 제17장에서 장쩌민이 국민들을 속이는데 이 수법을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6. 덩샤오핑의 반격

1991년 8월 31일, 상하이에서 ‘황푸핑’이 ‘해방일보’ 제1면에 또 ‘간부들의 정신상태를 논한다’라는 글을 발표해 “정신적으로 흔들리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다. 간부들은 반드시 사상을 해방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이에 맞서 중앙인민방송국에서는 9월 1일, ‘인민일보’ 리더민(李德民) 편집국장과 다른 한 편집국장이 함께 쓴 사설 ‘일체는 개혁개방을 위해서이다’를 발표했다. 당시 국민들에 대한 정신 통제를 주관해온 정치국 상무위원 리루이환은 덩샤오핑에게 반격을 가한 이 사설을 발표하도록 허락했다. 발표하기 전, ‘인민일보’ 가오디(高狄) 사장은 “개혁개방은 우선 사회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 따져 보아야 한다”라는 내용을 추가해 ‘황푸핑’과 더 팽팽하게 맞섰다. 다음날 리루이환은 덩샤오핑의 지시에 따라 가오디 사장이 추가한 내용을 삭제했다. 덩샤오핑은 ‘인민일보’가 자신을 비판하려 든다며 분노했고 장쩌민을 더더욱 신임하지 않았다.

그 해 말, 제3세대 지도자 핵심인 장쩌민에 대한 덩샤오핑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명의상 덩샤오핑은 아무런 지위도 없었지만 여전히 군대를 손에 꽉 틀어쥐고 있었다. 군대는 덩샤오핑의 가장 친한 친구 양상쿤과 가장 신임하는 양바이빙(楊白氷)이 거느리고 있었다. 양상쿤과 덩샤오핑은 1932년에 알게 되어 60년 동안 사귀어 온 절친한 친구였고 양바이빙은 1988년 9월, 덩샤오핑이 직접 임명한 군 장령으로서 덩샤오핑이 군부대에 실시했던 노선을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었다. 이 밖에 군사위 부주석 류화칭(劉華淸)은 덩샤오핑의 오래된 부하로서 덩샤오핑에 대한 충성이 지극했다.

덩샤오핑은 평범, 나약, 무능하며, 질투심이 많고 보수적이며 완고한 장쩌민이 개혁개방을 막으려고 망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때문에 덩샤오핑은 손에 있는 군권을 이용해 마지막 힘을 모아 중공 제14기 대표대회에서 개혁을 반대하는 장쩌민 등의 인물들을 내려 보내고 개혁개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올려놓으려고 결심했다. 덩샤오핑은 장쩌민 대신 차오스를 중공 총서기로, 리펑 대신 리루이환이나 주룽지를 국무원 총리로 임명하려 했고, 완리는 계속 전인대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천윈이 좌우지하고 있는 중공중앙 고문위원회를 철저히 해산시키기로 계획했다.

덩샤오핑은 이 방안과 관련해 사전에 양상쿤과 완리에게 의견을 청취했고 차오스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차오스가 각 지역에서 한 연설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해 주었다. 이는 질투심이 많은 장쩌민으로 하여금 차오스를 원수로 보게 했고 나중에 덩샤오핑이 사망한 뒤, 자신보다 젊은 차오스를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임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서술할 것이다.

덩샤오핑은 또 가택 연금되어 있는 자오쯔양을 전국 정치협상회 주석으로 임명하려고 준비했다. 덩샤오핑은 개혁에 대한 자오쯔양의 확고한 태도에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지만 그의 가장 큰 마음의 병인 6.4문제에서 자오쯔양이 절대 잘못을 승인하지 않아 고민되었다. 덩샤오핑은 자오쯔양이 추후 6.4사건의 명예를 회복시켜줄까 봐 사람을 파견해 복귀하려면 6.4사건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라고 자오쯔양에게 전했다. 그러나 자오쯔양은 자신이 잘못이 없다고 하면서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자오쯔양은 “내가 왜 반성하지 않는지 압니까? 저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잘못이 없는데 왜 반성해야 합니까? 반성문을 쓰면 진상을 밝힐 수 없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파견했던 사람이 전한 말을 듣고 난 덩샤오핑은 마음속에서 만감이 교차해서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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