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5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05‘세계경제도보’ 봉쇄와 6.4천안문사건 대학살을 통해 베이징 정부에 발탁

1989년은 장쩌민 정치 생애 중 가장 중요한 한 해였다. 의심할 바 없이 장쩌민은 6.4천안문사건의 가장 큰 수혜자였다. 당시 상하이시 당위서기였던 장쩌민은 원래 퇴직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6.4민주화운동 진압에서 중요한 배역을 맡음으로써 단번에 당•정•군(黨•政•軍) 최고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쥔 핵심 인물로 뛰어오르게 되었다.

1.도화선 – 후야오방의 사망

1989년 초, 덩샤오핑의 경제 개혁은 중국에 생기를 불어넣음과 동시에 불안정한 국면도 조성했다. 국민 경제가 끊임없이 성장하고 시장 공급이 점차 풍부해졌지만 세수(稅收)는 오히려 3분의 1로 줄었으며 통화팽창율이 20%에 달했다. 폭등하는 물가에 대한 불안으로 생필품을 미리 대량으로 구매하는 것은 시민들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갈수록 국유기업 부도율이 높아지는 바람에 수많은 국유기업 노동자들이 실직했다. 새로운 경제 체제의 수혜자와 낡은 경제체제의 수혜자 간의 모순도 갈수록 심해졌다. 일찍 장사에 나선 사람들은 부유해졌지만 많은 국유기업 직원들은 각종 복지와 퇴직보장을 잃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숫자가 방대하여 새로운 사회계층을 형성했고 사회 빈부 격차는 급속히 확대 되었다.

당시 중국 국민들은 불법적인 경제행위를 하는 관리들을 가장 증오했다. 중국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모순을 해결하고 국가계획을 최소비용으로 완성하기 위해 1985년부터 농산물, 주요 공산품 및 공급 부족상품에 대해 ‘이중가격제’를 시행했다. 즉 국가계획 내의 생산 부분은 계획된 가격에 따라 구입했으며 계획을 초과한 부분은 그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구입했다. 그러나 일부 관리들은 국가의 지시문(批文)을 이용해 계획내 가격으로 공급이 부족한 제품을 구입해 계획외 가격으로 팔아 거액의 이윤을 챙겼다.

갈수록 많은 중공 관리들은 직접 장사를 하지 않고도 권리를 이용해 사회 재부를 제멋대로 약탈하고 탐오했으며 상품주문, 할당액 등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친척이나 친구에게 주었다. 때문에 당시 베이징의 많은 사무소와 고급 호텔에는 베이징 고위층 관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이러한 수입품 지표와 각종 할당액을 얻으려고 장기간 거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지시문 한 장 혹은 할당액만 얻을 수 있으면 그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중공의 미숙한 개혁이 조성한 기형적인 체제는 수많은 관리들이 상인과 결탁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이런 더러운 거래는 관료와 상인들을 살찌게 했으나 가격 격차의 부담을 고스란히 안아야 했던 국민들은 큰 피해를 보았다.

1988년, 국가가 통제한 이중가격제 가격차만 해도 3,569억 위안에 달해 그 해 국민소득의 30%를 차지했다. 관리들의 자녀들은 권력을 이용해 지시문을 암거래하여 하룻밤 사이에 벼락부자로 되었다.

이러한 관리들의 불법 경제행위는 중공의 부패를 충분히 보여주었으며 전면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민심은 격동하는 암류(暗流)처럼 사회 저층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과도 같았다.

4월 15일, 개화된 개혁파로 불리는 후야오방(胡耀邦)이 정치국 회의에서 심장병으로 갑작스럽게 쓰러진 뒤 1주일 후에 사망했다. 그의 사망은 민주개혁을 갈망하던 국민들에게 비애와 절망을 안겨주었으며 그것은 분노로 발전되었다.

그날 저녁, 베이징대 학생들은 화환을 만들고 캠퍼스 곳곳에 대자보를 붙였다. 15일부터 17일 사이, 명문 대학인 베이징대, 칭화대, 중국인민대, 베이징사범대, 정법대 등 대학들에서는 모두 대대적으로 후야오방을 추모했다. 4월 17일, 수천 명 학생들이 학교 정문을 나서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학생들은 인민영웅기념비 아래에 화환을 놓고 ‘후야오방을 추모하자’, ‘부패를 쓸어버리자’,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자’, ‘관료주의를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내세웠다. 이에 호응해 전국 각지 대학생들은 잇따라 대규모 집회, 시위행진, 청원 등의 활동을 진행했다. 며칠 후, 학생 운동이 확대되어 학생들은 국가지도자들과 대화할 것을 요구했고 정치개혁으로 민주와 법치를 실현할 것을 호소했다.

4월 25일 저녁, 중국 CCTV는 뉴스에서 ‘반드시 기치선명하게 동란을 반대하자’는 인민일보의 사설을 여러차례 반복 방송하면서 학생들이 ‘안정을 파괴했다’고 질책하고 그들의 행동을 ‘불법’이라고 규정했으며 동란을 제지할 것을 호소했다. 이 사설은 다음 날인 4월 26일, ‘인민일보’에 게재되었다.

사설은 “이는 계획 있는 음모이며 목적은 인심을 흩어지게 하고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려는데 있다”, “본질은 중국공산당과 사회주의 제도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는 등등으로 학생 운동을 ‘동란’으로 몰아갔다.

이는 학생들의 강력한 불만을 야기했다. 마침 전통적인 학생운동 기념일인 5.4절이 가까워 오면서 학생 운동은 또 다시 확대되었다. 4월 17일 시위 당시, 칭화(淸華)대 학생대열의 맨 앞에는 백발의 교수 몇 명이 현수막을 들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한 유명작가의 말, “오랫동안 꿇어 앉아 있었으니 이제는 일어나서 거닐어보자”라는 문구가 씌어져 있었다. 교수들은 몇십 년 동안, 중국의 지식인들은 사실 공산당에 무릎 꿇고 그들을 위해 송가를 부를 수 있었을 뿐 사회의 양심으로써 허리를 펴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중공이 정권을 잡은 이래, 백발의 교수들이 공개적으로 길거리에 나가 집권자들에게 항의한 일은 한번도 없었기에 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위험한 신호였다.

5월 13일, 학생들은 천안문에서 단식을 시작하면서 정부가 그들과 평등하게 대화할 것을 요구했으며 정부가 실제적인 방안을 내놓아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 동시에, 수천만 베이징 시민, 공무원, 언론 기자들도 잇따라 길거리에 나와 학생들을 지지했다.

‘인민일보’ 4.26사설과 함께 사건을 확대시킨 또 하나의 도화선은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 장쩌민이 ‘세계경제도보(導報)’를 폐간시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몇몇 당내 고위층 관리들로 하여금 무력으로 이른바 ‘안정’을 바꿔올 결심을 내리도록 했다.

2. ‘세계경제도보(導報)’ 폐간 사건

중공 정권은 합법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민주적으로 산생된 정부가 법에 의해 평온하게 권력이 교체되는 것과 달리 항상 독재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고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사상과 행동은 모두 중공 핵심층으로 하여금 만족할 수 없게 했다. 그들의 요구에 부합되는 총서기를 찾아내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을 때 마침 장쩌민이 ‘세계경제도보(導報)’를 폐간시킨 사건이 있었다. 중공 고위층은 이 사건을 만족스럽게 생각했으며 장쩌민이야 말로 그들이 찾고 있던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89년 학생운동 초기에는 학생들만 참여했지만 ‘세계경제도보’ 사건이 전환점이 되어 전 국민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했다.

‘세계경제도보’ 사건 역시 후야오방의 사망으로 발생했다. 이 신문의 창간자 겸 편집국장은 나이가 일흔이 넘는 친번리(欽本立)라는 지식인이었는데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신문은 민주적인 사상을 제창하여 30여 만의 수준 높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전국적인 여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후야오방이 세상을 떠난 지 4일 후인 4월 19일, 도보신문 편집국장들이 연구토론회를 개최했다. 친번리는 이번 회의를 애도에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토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회의 참가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회의에서 다이칭(戴晴)은 중국공산당의 70년 역사와 몇몇 총서기들의 운명을 언급하면서 총서기들은 나중에 모두 좋지 않은 운명을 맞았는데 원인은 “권력교체 절차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4월 20일, 상하이시 당위원회 선전부에서는 ‘세계경제도보’가 특별 코너를 만들어 후야오방을 추모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선전부장 천즈리는 이 사실을 즉시 장쩌민에게 알렸다. 21일 오후, 장쩌민은 당위원회 부서기 쩡칭훙(曾慶紅)과 천즈리 두 사람을 보내 ‘도보’ 편집국장 친번리를 찾아가 사건을 진일보 알아보게 했다. 친번리는 그들이 확실히 다음 호부터 여러 면을 이용해 ‘도보’와 ‘신관찰’ 잡지사가 4월 19일 베이징에서 개최한 후야오방 추모 좌담회 내용을 게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쩡칭훙과 천즈리는 친번리에게 다음 호의 교정완료 판본을 되도록 빨리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이튿날 저녁 8시 반, 쩡칭훙은 친번리에게 제439기 ‘도보’ 교정본에서 옌자치(嚴家祺), 다이칭(戴晴) 등 사람들의 발언내용을 포함한 500자를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친번리는 정부가 신문 편집국장 책임제에 동의했다고 강조하고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질 것이다. 장쩌민 시장이 교정본을 보지 못했기에 책임이 있다고 해도 당위원회와 선전부와는 상관없다”면서 내용삭제를 거절했다.

쩡칭훙은 화를 내면서 “이건 전반 사회에 영향을 주는 일이기 때문에 누구의 책임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친번리는 자기가 책임진다며 삭제하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쩡칭훙은 그를 설득하지 못하자 장쩌민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장쩌민은 친번리가 이렇게 강하게 나올 줄 예상치 못했다. 쩡칭훙마저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오자 장쩌민은 이 일을 ‘도보’의 명예이사 왕다오한에게 알렸다. 왕다오한과 함께 친번리를 만난 장쩌민은 친번리에게 당장 교정본을 바꾸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왕다오한도 옆에서 당성 원칙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씨름 하는 동안 십 몇 만부의 신문이 이미 찍혀 나왔으며 400부 정도가 도매상에게 판매되었다. 이밖에, 적지 않은 양이 베이징에 들어가 겨우 2만부를 회수했으나 파급된 영향은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4월 22일 오전, 후야오방의 추도회가 인민대회당에서 열렸다. 양상쿤(楊尙昆) 주석이 추도회 사회를 보았고 대부분 고위층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장쩌민은 상하이에서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것을 통제하면서도 한편으로 화환을 보내 ‘추모의 뜻’을 표시했다.

4월 26일, ‘인민일보’에서 ‘반드시 기치선명하게 동란을 반대해야 한다’는 사설을 발표한 후, 장쩌민은 상하이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해 새벽까지 ‘도보’문제를 토론했다. 과단성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 장쩌민은 같은 날, 1만 4천명 당원이 참가한 대형 집회에서 친번리의 편집국장 직무를 중지하고 ‘도보’신문을 폐간한다고 선포했다.

4월 27일, 장쩌민은 류지(劉吉), 천즈리가 책임진 ‘상하이시 당위원회 정돈 지도팀’을 ‘도보’ 신문사에 파견해 주둔하게 했다.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데는 장쩌민 못지않은 천즈리는 장쩌민의 지시를 그대로 실행해 나갔다. 그녀는 ‘도보’ 신문사 직원들을 해산시키고 특별 금지령을 내려 편집국장들이 더 이상 기자로 활동하지 못하게 했다.

장쩌민의 가장 가까운 측근 천즈리는 친번리가 암 말기에 이르러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 병원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사람들은 천즈리가 웃는 얼굴로 찾아 왔기에 그래도 병문안을 온 줄 알았는데 뜻밖에 친번리를 당 규율에 따라 처벌한다는 통보문을 낭독할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천즈리는 천번리가 충격을 받아 일찍 죽게 하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편히 죽지 못하게 하려 했다.

‘도보’ 신문은 이 사건으로 국내외의 수많은 정의 인사들의 더욱 큰 지지와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쿤은 ‘장쩌민 평전’에서 시비를 전도한 채 전적으로 장쩌민의 입장대로만 기술해 ‘도보’ 사건에 먹칠했다. 그는 친번리와 기타 편집국장들을 ‘겉과 속이 다르고’, ‘논리에 부합되지 않으며’, ‘속임수를 쓰고’, ‘공공연히 장쩌민에게 도전했다가 마침내 가면을 벗은 사람들’로 묘사했고 장쩌민은 피해자로 묘사했다.

3. ‘6.4’ 천안문 사건의 전주곡을 작곡

장쩌민 및 측근들이 ‘도보’를 불합리하게 폐간시킨 사건은 상하이, 나아가 전국 언론계의 항의를 불러 일으켰으며 폭풍을 야기했다. ‘도보’가 폐간된 이튿날, 상하이 길거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도보를 돌려 달라’는 표어와 친번리의 직무를 회복시킬 것을 요구하고 언론자유를 요구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상하이 작가협회 일부 유명 인사들도 잇따라 시위에 참가했으며 베이징 지식인들과 언론계의 유명 인사들이 장쩌민에게 전보를 보내 친번리와 ‘도보’에 대한 처벌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상하이시 정부 앞에 앉아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은 계속 구호를 외쳤다. 시민들은 학생들의 구호에 동감을 표시한다고 하면서 “지금 정부의 가장 큰 잘못은 민주를 추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학생의 애국 열정은 긍정해야 합니다.”, “이건 동란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와이탄(外灘 역주 – 상하이 번화가)에는 대학생 약 8천 명이 모여 그 당시 상하이 학생들의 학생운동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저녁 10시가 넘어서야 돌아갔다.

장쩌민은 두려워졌다. 장쩌민은 ‘도보’를 폐간하면서 야기된 항의가 예상보다 심각했음을 시인했다. 사람들은 장쩌민이 상하이의 대규모 시위를 일으켰다고 질책했는데 사실 상하이에서 뿐만 아니라 베이징에서도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켰다.

베이징에서 기자 두 명이 선두가 되어 1,013명의 기자들이 서명한 탄원서를 전국기자협회로 보내 중앙선전부 관리와 대화할 것을 요구했다. ‘중국청년보’의 학교교육부, 과학기술부 리다퉁(李大同) 주임은 탄원서를 제출할 때, 내외신 기자들에게 탄원서에 서명한 기자들은 인민일보, 신화사, 경제일보, 중국청년보, 베이징일보, 베이징만보 등 30여 개 베이징 언론기관 기자들이라고 밝혔다. 탄원서는 3가지 내용을 열거하면서 대화를 요구했는데 첫 번째 요구사항이 국내외에서 강렬한 반향을 일으킨 상하이 ‘세계경제도보’ 편집국장 친번리의 직무를 회복시키라는 것이었다. 탄원서는 신문사에서 편집국장 책임제를 실행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며 사실이라 해도 개혁을 통해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4월 27일 밤, 당황한 장쩌민은 중앙고문위원회 위원인 리루이(李銳)에게 전화를 걸어 40분간 넘게 대책을 토론했다. 장쩌민은 리루이에게 베이징의 상황을 묻고 그의 인맥을 통해 사건을 무마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장쩌민은 전화에서 “견디기 힘들다” 등의 말로 심경을 고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4월 30일 저녁, 총서기 자오쯔양이 북한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자 장쩌민과 쩡칭훙은 즉시 비행기 편으로 베이징에 도착해 자오쯔양에게 사업보고를 했다. 장쩌민은 보고를 마친 뒤 자오쯔양에게 상하이 ‘도보’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는데 자오쯔양은 대답하지 않고 “당신이 보기에는?”하고 반문했다.

장쩌민은 말을 얼버무리며 자신과 자오쯔양 사이의 골이 매우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오쯔양은 장쩌민을 한번 쳐다보고는 “지금 이 문제를 토론할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만약 총서기가 의견을 내놓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일하기 힘들며 상하이로 돌아가 할말이 없게 됩니다”라고 하며 자오쯔양에게 태도를 표명해 줄 것을 간곡히 요구했다.

자오쯔양은 할 수 없이 “상하이시 당위원회가 ‘세계경제도보’ 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지 않아 일을 확대시켰고 자신을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장쩌민은 자오쯔양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강한 불만을 보인 자오쯔양의 비평에 장쩌민은 넋이 나갔다. 장쩌민과 가까운 천즈리는 “저 한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고 서기님을 연루시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해 둘 사이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졌다. 그 후 장쩌민은 비록 마음이 좀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을 통해 고위층의 태도가 어떤지 알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결과 장쩌민은 정부 내부에도 의견 차이가 있어 자오즈양의 말이 정부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월 13일, 베이징대 600명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 항의를 시작했으며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와 성원했다. 많은 외신 기자들은 카메라 초점을 그곳에 맞췄고 상하이시 당위서기 장쩌민이 민주를 파괴했다고 질책했다. 동시에 상하이에서도 4,000명 학생들이 정부 앞에 모여 베이징에서 단식하고 있는 학생들을 성원했으며 장쩌민에게 입장을 표명할 것을 요구했다. 장쩌민은 베이징 정부의 사정을 파악하고 있었던지라 얼굴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이는 학생들의 커다란 분노를 일으켰다. 사태가 또 다시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장쩌민은 할 수 없이 단식투쟁으로 병원에 입원한 학생들을 방문했다. 그러나 불과 며칠 후, 그는 베이징에서 계엄을 실시하는데 대해 견결한 지지를 표명했다.

4.‘믿음직한’ 후계자

5월 중순에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당내 모순이 고조되었다. 일부 관리들은 장쩌민이 학생들의 합법적인 요구를 잘 처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장쩌민이 학생들과 대화하여 운동은 애국적이며 합법적이라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오쯔양은 아예 ‘도보’ 사건이 상하이시 당위원회에서 일으켰기에 자체로 해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자오쯔양은 이와 같이 천윈과 리셴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장쩌민을 지명해 그들의 노여움을 샀다.

베이징에서는 학생들의 단식 항의가 계속되었다. 학생들은 4월 26일 ‘인민일보’ 사설을 철수할 것을 요구했으며 TV방송국에서 정부 지도자들이 그들과 대화하는 장면을 생중계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독재 정부로 말하면 그야말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중공을 더욱 난처하게 한 것은,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쵸프가 베이징에 도착해 중국 방문을 시작한 것이었다. 원래 양국 정상의 만남을 보도하려고 베이징에 몰려들었던 수백 명 기자들은 뜻하지 않게 더 중대한 뉴스거리를 만나게 되어 세계의 시선이 중공이 가장 꺼리는 곳에 집중되었다.

정치국 회의는 결국 대치를 극대화 시킨 채 끝났다. 실권이 없는 자오쯔양은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주어지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5월 19일 이른 새벽, 눈물을 머금고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하고 있는 학생들을 찾아갔다. 그는 사전에 정치국에 통보하지 않았으며 기타 고위층 관리들의 허락도 받지 않았다. 그는 다만 자신을 대표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 날 저녁 10시, 리펑(李鵬)이 연설을 발표해 “엄격한 조치로 동란을 제지시킨다”는 중앙의 입장을 거듭 천명했고 2시간 후, 천안문 광장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계엄을 실시한다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리펑의 연설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는 20일 새벽 2시, 장쩌민은 즉시 정부의 결정을 견결히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해 지방정부 지도자 가운데서 가장 먼저 호응해 나선 관리가 되었다. 이는 리셴녠에게 생일 케익을 보냈을 때와 똑같은 효과를 얻었으며 중공 고위층이 원하는 후계자임을 의심치 않게 했다. 쿤은 영문판 ‘장쩌민 평전’ 제162페이지(중문판에서는 삭제된 부분임)에서 “중공 원로들은 5월 20일에 이미 장쩌민을 신임(新任) 중공 총서기로 내정했다”고 언급했다.

5.대학살의 마지막 장애물 제거

6.4대학살을 자행하기 전에 한 가지 장애물이 있었는데 그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했더라면 중국은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을 지도 모른다. 때문에 중공 원로들은 5월 20일에 이미 장쩌민을 신임 중공 총서기로 내정했지만 그가 그 장애물을 제거해서야 비로소 총서기 자리를 정식으로 넘겨주었다.

5월 21일, 덩샤오핑은 비밀리에 장쩌민을 베이징에 불렀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장쩌민은 불안한 마음으로 덩샤오핑을 만났다. 뜻밖에 덩샤오핑은 ‘세계경제도보’ 사건을 칭찬했으며 상하이에서 고르바쵸프를 더 잘 영접했다고 치하했다. 그제야 장쩌민은 조였던 마음을 풀어놓고 자오쯔양의 말에 흔들리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덩샤오핑은 변화되는 장쩌민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에게 매우 중요한 임무가 있다고 했다. 덩샤오핑은 캐나다 방문을 갔다가 귀국을 앞당긴 인민대표대회 위원장 완리(萬里)를 어떻게든 상하이 공항에 내리게 할테니, 중공 원로들의 주장에 동의하도록 완리를 설득시키라고 하면서 만약 완리가 반발하면 베이징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시켰다. 덩샤오핑은 57명의 인대 상무위원들이 리펑의 계엄령이 합법적인지 여부를 회의를 열고 토론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만약 완리가 회의의 사회자가 되면 상황이 그들이 바라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국면을 통제하기 어렵다고 해석했다. 어려운 임무를 맡게 되자 장쩌민의 마음은 또 다시 긴장해졌다.

장쩌민의 생각을 다 알고 있는 덩샤오핑은 이는 정부가 장쩌민에 대한 한차례 시험이며 만약 임무를 멋지게 완성한다면 정치생애에서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슬쩍 암시했다. 자신의 미래와 직접 관계되는 이번 임무를 두고 장쩌민은 긴장되기도 하고 흥분되기도 했다.

장쩌민은 5월 23일 상하이로 돌아왔으며, 완리가 타고 있는 비행기는 5월 25일 오후 3시에 상하이 공항에 착륙했다. 장쩌민은 비행장에 나가 영접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덩샤오핑의 친서를 넘겨주었다. 완리는 평소 덩샤오핑과 사이가 괜찮았으므로 덩샤오핑은 편지에서 “몇십 년 동안 친구로 지내 온 정을 봐서라도 이 관건적인 시각에 협조해 주기 바란다”라고 간절히 요구했다.

완리는 상하이에 있는 6일 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장쩌민은 그가 대답하기 전에는 상하이를 떠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5월 27일, 완리는 끝내 정부의 계엄령에 동의한다는 공개 성명을 발표했다. 완리에 대한 장쩌민의 협박은 자오쯔양의 오른팔을 끊어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되어 장쩌민은 대학살을 위해 최후의 장애물을 제거했다.

완리가 성명을 발표한 당일, 덩샤오핑은 여덟 명 중공 원로들을 불러 놓고 총서기를 맡을 인물을 결정했다. 원래 덩샤오핑은 차오스(喬石)와 리루이환(李瑞環)을 추천했지만 천윈이 장쩌민을 적극 추천했다. 또한 리셴녠과 보이보(薄一波)의 잇따른 추천이 덩샤오핑이 생각을 바꾸는데 관건적인 역할을 했다. 리셴녠은 “비록 중앙에서 일한 경험이 부족하지만 장쩌민은 정치 두뇌가 있으며 나이도 적지 않으니 신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어 역사는 장쩌민을 권력의 정상으로 밀어 올렸으며 6.4대학살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자로 만들었다.

6.권력의 정상에 오르다

5월 30일, 장쩌민은 명령을 받고 재차 비밀리에 베이징에 갔다. 그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이번 걸음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가 베이징에 도착해 휴게실에서 잠깐 휴식하고 있는데 천윈의 비서가 들어와 “천윈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천윈은 돌려서 이야기 하지 않고 직접 “덩샤오핑 동지가 당신이 자오쯔양을 대신해 일하라고 전하게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이 관건적인 시각에 실수라도 할까 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가 베이징에 오기 전, 정치 대권을 틀어쥐고 있는 중앙 원로들이 덩샤오핑의 집에서 회의를 두 차례 열었으며 천윈은 제일 먼저 그를 후계자로 추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윈은 리셴녠이 “장쩌민이 당성이 강하고 이번 계엄에 대한 태도가 매우 단호하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천윈이 그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 그저 듣고만 있었다.

리셴녠의 앞에서 장쩌민은 많이 홀가분해 졌다. 리셴녠은 상하이 일들을 간단하게 물어 보고는 말했다. “덩샤오핑한테는 급하게 가지 않아도 됩니다, 이 일은 덩샤오핑 동지가 결정했기에 당연히 당신을 찾을 겁니다.” 장쩌민은 자신이 리셴녠에게 들인 정성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나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쩡칭훙의 조언을 떠올리며 묻는 말에만 짧게 대답하며 공손하게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 했다.

휴게실로 돌아간 장쩌민은 즉시 상하이에 3통의 전화를 했다. 첫 번째 전화는 쩡칭훙에게 했는데 “보아하니 돌아가지 못할 것 같네”라고 했다. 쩡칭훙은 긴장해서 물었다. “2, 3일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장쩌민은 “내가 여기 남아 일할 것 같은데 내일 베이징으로 올라오게”라고 말했다.

두 번째 전화는 원 상하이 시장 왕다오한에게 했다. 그는 왕다오한에게 “앞으로 많이 보살펴 주십시오”라고 했다.

세 번째 전화는 부인 왕즈핑에게 했는데 그녀에게 베이징으로 올라올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러나 왕즈핑은 묵묵부답이었다.

대세가 이미 정해졌다. 저녁 8시, 리펑, 야오이린(姚依林)등 중앙 관리들은 인민대회당에서 연회를 베풀어 장쩌민을 초대했다. 장쩌민은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계엄군이 베이징 시내에 진입하려던 행동 계획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가 6월 1일에야 새로운 방안이 나오면서 6월 3일 밤 정식 행동에 돌입하기로 정해졌다. 신임 총서기로 된 장쩌민은 5월말에 이미 문서를 작성해 계엄군에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6.4대학살이 일어났으며 지금까지 이미 16년이 흘렀다. 장쩌민은 이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를 바랐지만 해마다 이 날을 기념하는 추모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는 장쩌민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되었다. 장쩌민은 2002년, 국가 주석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정치국 상무위원들에게 몇 가지 꼭 지켜야할 사항을 규정해 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6.4사건의 명예회복을 해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장쩌민이 이렇게 한 것은 그가 바로 6.4진압의 가장 관건적인 참여자이며 가장 큰 이득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7.끝나지 않은 악몽

6.4사건 이후, 장쩌민도 그렇게 편하게 지내지 못했다. 그는 항상 누가 6.4사건과 자오쯔양의 명예를 회복해 줄까봐 두려워했다. 자오쯔양이 천안문 광장에 가서 학생들을 방문한 사진들은 그가 학생들을 학살하려 하지 않았다는 역사적 증거물로 되었다. 십 몇 년 동안 사람들이 6.4기념일에 늘 이 사진을 언론에 게재할 때마다 장쩌민은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승직을 간접적으로 질책하는 것 같아 머리가 아팠다. 장쩌민은 6.4사건 전에 자오쯔양이 자신을 비평한 일에 앙심을 품고 보안부문의 사람들마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자오쯔양의 가택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늦추지 않았다.

6.4사건 이후, 전 세계 거의 모든 매스컴에서 왕웨이린(王維林)이라고 부르는 청년이 맨몸으로 달려오는 탱크 부대를 막아선 사진을 전재했다. 해외 언론에서는 평화적으로 폭행에 맞선 그의 용기를 찬양했으며 그를 20세기의 영웅이라 불렀다. 왕웨이린은 당연히 6.4사건의 명예 회복을 촉구하는 잠재적 요인으로 되었다. 이에 분노한 장쩌민은 밀령을 내려 왕웨이린을 찾게 했으며 비밀리에 그를 처형했다.

2000년 미국 CBS 방송국의 유명 기자 마이크 월레스가 장쩌민을 인터뷰하면서 왕웨이린의 사진을 꺼내들고 “이 청년의 용기를 탄복합니까?”라고 물었는데 장쩌민은 “그는 절대 체포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라고 동문서답했다. 이는 오랜 경험을 가지고 있는 기자로 말하면 이미 답안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6.4사건에서 해외 중국인들이 찬양하는 영웅이 또 한 사람 있는데 바로 38군 쉬친셴(徐勤先) 군장이다. 그는 6.4때 학생들에게 총을 쏘라는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에 군사위 주석인 장쩌민에 의해 군사 법정에서 비밀리에 판결 받고 5년 동안 감옥에 감금되었다.

6.4사건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차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프랑스의 한 기자가 6.4사건에서 체포된 한 여 대학원생이 쓰촨(四川) 감옥에서 윤간당한 일을 물었는데 장쩌민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녀는 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장쩌민에게는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일은, 6.4 사건을 최대한 축소시키고 꺼내지 않아 결국 전체 중국인들이 6.4사건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갖게 함으로써 6.4사건이 명예회복을 받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그의 최고 권력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청소년 시절부터 아버지 장스쥔(江世俊)이 한 차례 대학살을 속임수를 이용해 민중의 기억에서 사라지게 한 것을 직접 본 적이 있는 장쩌민으로서는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버지 때보다 기술 조건이 훨씬 좋아졌다. 장쩌민은 즉시 명령을 내려 학생들의 폭력 행위를 과장, 부각시킨 TV프로그램을 제작하게 했다. 그는 일부 군용차들을 일부러 태우면서 현장을 촬영하게 하는 등, 전 국민들로 하여금 군인들이 부득이하게 총을 쏘았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직접 사건을 겪지 않은 국민들은 베이징에서 정말로 학생들의 폭동이 일어났다고 믿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장쩌민은 또 각 회사와 국가 기관에서 6.4민주화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을 지지하고 진압을 반대한 사람들을 낱낱이 조사했으며, 검거 적발을 장려하는 수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복했다. 거짓말과 위협을 동시에 가한 결과, 민중들은 더 이상 감히 6.4를 담론하거나 돌이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중에 사람들은 많은 일들에 대해 정확한 서술이나 판단을 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6.4사건 후 가장 논란이 되었던 문제 중 하나는 진압 당시 중공의 탱크가 사람을 깔아 죽였는지에 대한 여부였다. 전 중공중앙 문헌연구실 위원이자 저우언라이 연구팀 팀장이며 ‘만년의 저우언라이(晩年周恩來)’의 저자인 가오원첸(高文謙)은,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탱크 부대는 확실히 사람을 깔아 죽였습니다. 나중에 저는 해외로 망명 갔는데 많은 당사자들이 신화문 육부커우(六部口)에서 탱크가 천안문에서 철수하고 나오는 학생들을 덮쳐서 많은 학생들이 그 자리에서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다고 증언했습니다. 이 사건은 즉시 퍼져 나갔지만 필경 전반 사건 중에서 작은 부분이었죠. 육부커우 근처에는 중앙선전부의 기숙사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중앙선전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박사 공부 중인 젊은 관리가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중앙선전부의 후계자로 아주 신임을 받았는데 그가 당시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가장 큰 날조라고 주장했으며 만약 이 일이 전해 나가게 되면 결과는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탱크가 사람을 쫓아가서 깔아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다른 것은 더 해석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에 정부는 더더욱 이 소문을 날조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리 회사에서 조사했던 사람들은 이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면서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묻고 그 사람은 또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조사해 내려간 결과 나중에 중앙선전부의 그 박사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계엄부대로 끌고 가 고문을 가하겠다고 위협하며 ‘정말 보았소?’라고 따져 물었죠. 그는 ‘확실히 보았습니다, 저는 당원으로서 당에 대해 충성해야 하기 때문에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저는 확실히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계엄부대 책임자는 1,000볼트에 달하는 고압 전기 충격기를 손에 들고 위협하며 ‘정말로 보았소?’라고 물었습니다. 그 박사는 여전히 ‘보았습니다, 저는 확실히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고압 전기봉을 박사에게 들이대자 팍하는 소리와 함께 박사는 즉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좀 지나 그가 깨어나자 그들이 또 물었습니다. ‘정말 보았소?’ 박사가 또 보았다고 대답하자 전기봉을 다시 한번 들이댔고 그는 또 쓰러졌습니다. 이렇게 몇 번 반복하자 결국 박사는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박사는 신체뿐 아니라 정신도 망가졌는데 이것은 단순한 전기고문이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자신이 진실한 말을 한다고 표방하며 실사구시를 해야 한다고 국민에게 요구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진실한 말을 못하게 합니다. 저는 이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이 말이 생각납니다. ‘먹으로 쓴 거짓말이 어찌 피로 쓴 사실을 덮어 감출 수 있으랴.’”

6.4당시 베이징 체육대학에서 이론학과를 공부했던 졸업반 학생 팡정(方政)은 고속으로 질주하던 탱크에 두 다리가 깔려 절단되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16년 후, 팡정은 대기원시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저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넘어졌으며 탱크가 두 다리를 깔아뭉개며 지나갔습니다. 처음에 제 바지가 탱크의 톱니 달린 무한궤도 바퀴에 휘감겨 들어갔는데 매우 큰 압박감을 느꼈으며 몸이 땅에서 끌려가는 것을 조금 남은 의식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의사가 말해 주었는데 머리, 등 뒤, 어깨에 모두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탱크의 무한궤도 바퀴가 저의 두 다리를 잘라버리고 바지도 찢어지자 저는 바퀴에서 떨어져 나와 길옆 가드레일로 굴러서 부딪힌 채 정신을 잃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동태망(動態網 역주 – 중국 정부의 인터넷차단을 돌파시켜주는 사이트)을 통해 인터넷에 접속하면서 우연히 당시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해외의 웹사이트에서는 두 다리가 탱크에 깔려서 잘려나간 채 길가 가드레일 곁에 쓰러져 있는 한 사람의 사진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확실히 접니다. 저의 오른쪽 다리는 허벅지 윗부분까지 절단되었으며 왼쪽 다리는 무릎까지 절단되었습니다”라고 그는 증언했다.

이번 사건에서 장쩌민은 선전기구와 폭력기구를 익숙하게 이용하며 진상을 덮어 감추고 죄를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웠으며 사건에 불리한 사람들을 조사해 처리했다. 이런 수법은 나중에 파룬궁 진압에 똑같이 사용했는데 이는 차후에 서술하려고 한다.

장쩌민은 손에 너무나 많은 피를 묻혔으며 이 사실을 아무리 덮어 감추려고 해도 해마다 6.4기념활동은 중단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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