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4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04상하이 학생운동에서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아첨하여 한 단계 더 오르다

1. 카멜레온 상하이 시장

장쩌민은 상하이와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듯했다. 그는 난징 중앙대에서 매국노 노릇을 했지만 상하이 교통대학으로 전학하면서 그 한 단락 역사를 숨길 수 있었으며 베이징 국가전자공업부에 있을 때는 평범했지만 상하이에서 시장 및 당위원회 서기를 맡은 기간 학생운동을 진압한 피의 대가로 최고층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총서기로 된 후, 장쩌민은 손에 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상하이방의 역량을 키웠다. 때문에 사스 같은 위기에 부딪혔을 때, 장쩌민이 가장 먼저 떠올린 피신처도 바로 상하이였다.

장쩌민은 상하이 당위원회 서기 천궈둥(陳國棟), 상하이 시장 왕다오한이 함께 뒤에서 밀어준 덕분에 1985년에 다시 상하이로 가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은 공산당을 위한 것도 있었지만 장상칭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장상칭은 전에 왕다오한의 상사였다. 항일전쟁 초기, 왕다오한은 장상칭의 관할 하에 있는 중공 안후이(安徽) 자산(嘉山)현 당위원회 서기를 맡았으며 천궈둥도 장상칭의 덕분에 안후이 링비(靈璧)현 현장으로 되었다.

40여년 후, 이 화둥(華東) 출신의 두 중공 간부는 큰 벼슬을 하게 되자 장상칭의 양아들이라고 속이는 장쩌민을 있는 힘껏 밀어 주었다.

때문에 장쩌민이 높은 자리로 올라가게 된 것은 업무 능력과 관계가 없으며 권력을 열망하고 있던 중에 죽은 삼촌의 덕을 본 것에 불과했다.

상하이는 영향력 있는 여러 중공 원로들이 겨울을 나는 곳이다. 그들 중, 특히 대권을 손에 쥐고 있었던 천윈(陳雲)과 리셴녠(李先念)은 장쩌민이 계속 권세에 빌붙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천윈 역시 상하이 출신이었는데 준의회의(遵義會議) 후, 홍군이 북쪽으로 도주할 때 명령을 받고 상하이에 가서 지하당을 재개했으며, 중공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중앙 서기처 서기를 역임한 동시에 중공 정무원(나중에 국무원으로 명칭을 고쳤음) 부총리 겸 국가 재정경제위원회 주임을 맡았다. 천윈과 관계가 밀접한 간부들은 거의 모두 계획경제 정책을 지지했고 좌파적인 정치를 주장했으므로 보수파로 불렸다. 나중에 중앙 조직부 부장으로 된 천윈의 사돈 쑹런충(宋任窮), 제자 야오이린(姚依林)을 포함한 화둥 지역의 간부들은 거의 모두 천윈의 지지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천윈의 조수이자 화동 지역 재정경제위원회 주임이었고, 현임 정치국 상무위원회 쩡칭훙(曾慶紅)의 아버지 쩡산(曾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밖에, 천궈둥(陳國棟), 왕다오한 및 후리자오(胡立敎) 등의 사람들도 모두 천윈 수하에서 일했다. 특히 리셴녠은 덩샤오핑과 모순이 많았으며 개혁개방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다.

천윈, 리셴녠 세력과의 대치 속에서 제2세대 지도자인 덩샤오핑은 줄곧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으며 쌍방은 어느 쪽도 절대적인 우세를 차지하지 못했다. 상하이 시장인 장쩌민은 실질적으로는 보수파였으므로 천윈과 리셴녠을 만나면 굽실거리며 계획경제를 찬양하고 아첨했다. 하지만 동시에 덩샤오핑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조심했고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앞에서는 태도를 바꿔 개혁을 지지하는 척 했다.

2. 첫 번째 ‘폭력탄압’

장쩌민이 상하이에 왔을 때, 상하이에서는 마침 도시개혁을 진행 중이었는데 음식물과 생필품 가격이 1년 사이에 17%나 뛰어 올랐다. 이러한 물가상승을 중공은 중요한 고비로 생각했다. 그러나 상하이는 이 고비를 넘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사회적 불만과 동시에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학생들은 정부에 생활비를 증가시켜 줄 것과 간부 부패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 당시 최고 권력을 잡고 있었던 후야오방은 적극적으로 정치 체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으므로 장쩌민도 개혁파의 모습을 보였다. 그는 대학에서 1만여 명 되는 교사와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면서 생필품 가격의 상승은 예상 밖임을 승인하면서 시장경제 제도는 결국 가격을 적당한 범위로 안정시켜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당시 그 말을 믿었다.

1986년에 몇 가지 일이 발생했다. 7월, 당시 중국 과학기술대학 부학장인 팡리즈(方勵之)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해 일련의 강연을 하면서 민주를 제창했다. 9월, 대만 첫 야당인 ‘민주진보당(民主進步黨, 약칭 민진당)’이 성립되었는데 14년 후, 이 당은 대선 중에서 승리하여 중화민국 정당교체의 서막을 열었다. 당시 민주 계몽교육을 받은 적지 않은 대학생들은 미국의 소리 방송(VOA)에서 같은 민족인 대만에서 야당을 성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흥분했다.

그해 말, 안후이성 지방 인민대표선거에서 과학기술대학 당위원회에서는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당국에서 지정한 입후보자와 경선하지 못한다고 규정한 사건이 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12월 초, 중국 과학기술대학 학생 등 허페이(合肥)의 수 만 명 대학생들이 두 차례나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소식이 상하이로 전해지자 학생운동 규모는 확대되었다. 상하이 퉁지(同濟)대학, 교통대학 학생들은 잇따라 거리로 나가 호응을 하면서 민주, 자유, 평등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독재를 종식할 것을 요구했다. 그 후, 학생운동은 베이징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상하이 학생들은 장쩌민과 대화할 것을 요구했으며 정치개혁, 언론자유, 정치적 통제 완화 등의 요구를 제기했다. 장쩌민은 12월 8일 상해시 당위원회 선전부장 천즈리(陳至立, 현 국무위원)과 함께 상하이 교통대학에서 학생들과 대화했는데 매우 아이러니했다.

장쩌민은 강단에 올라 돋보기를 걸치고 미리 준비한 강연고 한 장을 손에 들고 학생들의 관심사와는 동떨어진 5년 경제계획의 성과를 한바탕 연설했으므로 아래 있는 3천여 명 학생들의 불만을 샀다. 화가 난 장쩌민은 학생들을 위협하듯이 쏘아 보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떠들며 항의했다. 어떤 학생들은 “신문과 TV에서 매일 말하는 것들은 필요없습니다, 이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입니다!”라고 소리쳤으며 또 어떤 학생들은 항의 구호를 외쳤다.

장쩌민은 소리를 가장 크게 낸 학생을 가리키며 “내 앞에서 떠들어도 소용없어! 이름이 뭐야? 그렇게 대단하면 강단에 올라와서 얘기해봐!”라고 화를 내며 말했다.

뜻밖에 이 학생은 정말 강단에 뛰어 올라가 마이크에 대고 민주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십여 명 학생들이 즉시 강단에 올라가 장쩌민과 마주 서서 변론하려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쩌민은 두 다리에 힘이 빠져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학생들은 언론자유를 요구하며 시위행진을 언론에 공개하고 공정하게 보도할 것을 요구했고 대자보를 붙이고 변론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 대학생들의 발언은 강단 아래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다.

장쩌민을 가장 당황하게 한 것은 학생들이 “당신은 어떻게 시장으로 되었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이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장쩌민은 억지로 웃어 보이면서 한걸음 한걸음 강단 변두리까지 물러섰다. 그는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함께 온 선전부장 천즈리에게 강단에 올라온 학생들을 나중에 보복할 수 있도록 사진을 찍어 두게 했다.

학생들의 격앙된 강연이 끝나고 장쩌민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그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면서 “방금 오면서 캠퍼스에서 ‘국민이 소유하고(民有), 국민이 다스리며(民治), 국민이 누리는(民享)’ 정부를 건립할 것을 요구하는 대자보를 보았는데 이는 1863년 11월 19일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제기했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 지금 링컨의 연설을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시 외울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흥분하고 있었던 학생들은 장쩌민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몰라 갑자기 조용해졌다. 임기응변을 하여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게 하는 것이 장기인 장쩌민은 학생들이 속임수에 넘어간 것을 보고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는 배를 쑥 내밀고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영어로 전날 밤 외워두었던 미국헌법 첫 부분과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개혁개방을 진행한 초기여서 학생들의 영문 수준은 보편적으로 높지 않았다. 장쩌민은 기억나는 데까지 외우고 나서 득의양양해하면서 “알아들었습니까? 중국과 미국의 상황은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민주는 공산당의 지도를 전제로 해야 한다는 등 장황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때, 한 학생이 “우리는 시위행진의 자유를 헌법으로 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언론의 자유를 요구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장쩌민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누가 교통을 가로막고 생산을 파괴하면 바로 개혁을 가로 막는 것이므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학생들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어느 한 국가든지 시위가 교통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시위를 제한하지 않으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헌법이 국민들에게 부여한 시위행진의 권리라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없다. 학생들은 더는 마이크를 쥘 기회가 없었지만 여전히 격동된 분위기 속에서 계속 장쩌민과 대치했다.

강의실 분위기가 3시간이 넘도록 점점 가열되자 장쩌민은 다른 일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강의실을 떠났다. 도망치는데 급했던 장쩌민은 나가다가 반쯤 열려져 있는 문에 머리를 부딪쳐 크게 다치지는 않지만 피를 많이 흘렸다. 장쩌민은 상처를 돌볼 사이도 없이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는 그대로 승용차에 올라 도망갔다. 장쩌민이 허겁지겁 꽁무니를 뺀 이 일은 학생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웃음거리로 전해졌다.

상하이 시장이었던 장쩌민은 사무실에 돌아오자 즉시 상하이 교통대학 당위원회 서기 허유성(何友聲)에게 전화를 하여 천즈리에게서 발언한 학생들의 사진을 찾아가게 했으며 이름과 학급을 알아내라고 명령했다. 사건이 커진 것을 의식한 허유성은 분부대로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장쩌민은 상하이 교통대학이 자산계급 자유화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모든 학생단체를 해산시키고 간행물을 폐간시켰으며 무도회를 제외한 단체 활동을 금지시켰다. 장쩌민은 그때부터 방탕한 생활에 물젖게 하는 수단으로 민주와 인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전이시켰는데 이 방법은 효과를 보았다. 1989년, 학생운동이 일어나 각지 학생들의 상호 성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상하이 교통대학 학생들만은 문을 닫아걸고 밤새도록 무도회를 열었으며 같은 해 5월 13일, 베이징 대학생들이 단식 투쟁을 시작해 상하이 대학생들이 모두 나와서 시위하면서 성원할 때에도 상하이 교통대학 학생들만은 여전히 매일 무도회를 열고 있다가 5월 19일, 계엄이 시작되기 전날에야 대규모 시위에 가담했다.

교통대학 학생들은 장쩌민과 대화가 있은 다음 날, 인민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고 시정부 앞까지 시위행진을 하면서 장쩌민과 대화를 계속할 것을 요구했다. 경험이 생긴 장쩌민은 이번에는 사전에 2,000명의 경찰을 광장에 긴급 출동시켜 대기하게 했다. 무력의 보호가 있게 되자 장쩌민은 더는 웃음을 띠지 않고 아주 강경하게 나왔으며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는데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대화는 실패했고 경찰들이 강제로 학생들을 해산시키고 가장 적극적인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 이틀 동안의 사건은 장쩌민으로 하여금 강압 정치의 중요함과 무장진압의 단맛을 보게 했다.

보복심이 극히 강한 장쩌민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은 가만두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사람들 앞에서 그를 난처하게 만든 학생들을 당연히 가만두지 않았다. 천즈리가 찍은 사진에 있는 학생들은 한 학급이 아니었으며 같은 학년도 아니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대학생들이 졸업한 뒤 직장을 국가에서 배치해 주는 제도를 실시했으므로 장쩌민은 손에 쥔 시장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그런 학생들을 전부 가장 가난한 국경 지역으로 배치했다.

3. 눈 내리는 밤에 케익을 보내고 암암리에서 후야오방을 꺼꾸러뜨리려고 하다

중국 정치계 사람들은 모두 하급과 민중을 독하게 대하는 사람일수록 상급에는 오히려 더 아부한다는 법칙을 알고 있다. 그들이 전혀 다른 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의 동일한 목적 즉, 보다 큰 권력을 장악하여 보다 넓은 기반을 통제하기 위해서이다.

상하이 시장은 다른 관료들보다 더욱 위로 기어오를 수 있는 남다른 우세가 있었는데 바로 영향력이 있는 몇몇 중공 간부들이 상하이를 휴양지로 선택하기 때문이었다. 장쩌민 같은 지방 간부는 원래 베이징에 가서 일부러 이런 사람들과 접촉하려면 무척 힘든 처지였기 때문에 그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교통대학 학생들에게 보복하는 독한 수단만큼 중공 원로들에 대한 장쩌민의 정성은 극진했다.

특별한 성과 없이 출세한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들을 딛고 올라갔다고 볼 수 있는데 장쩌민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덩샤오핑은 학생운동이 뜸해지자 1986년 12월 30일 “기치선명하게 자산계급 자유화를 반대하자”는 제목으로 연설을 발표했는데, 그 중에는 “상하이 군중들은 중앙에 보호층이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4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하는지 여부, 자유화를 반대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두 가지 의견이 있다고 한다”라는 말이 있었다. 장쩌민은 연설이 발표된 다음날 덩샤오핑의 연설을 읽었다. 장쩌민은 후야오방의 개혁 이념과 당내 보수 세력의 의견이 맞지 않아 천윈, 리셴녠 등의 사람은 일찍부터 후야오방을 제거해버리려고 하고 있지만 후야오방이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는 것은 덩샤오핑이 뒤에서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자유화 반대에 부진”하다고 공개적으로 후야오방에게 불만을 표시해 중앙 내부에서 후야오방을 넘어뜨리려는 분위기는 갈수록 짙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덩샤오핑의 연설을 본 장쩌민은 날듯이 기뻤다. 그는 이 관건적인 시기에 자신이 중앙과 완전히 일치하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덩샤오핑 등의 고위층들과 대화할 기회가 없어서 고심했다.

그런데 마침 그해 겨울, 국가주석 리셴녠이 예년과 마찬가지로 상하이에 와서 겨울을 보내면서 호텔에 머물렀다. 하루는 리셴년이 장쩌민을 불러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그 날이 생일이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시장이 된 후, 상하이 서민들의 장바구니에 위기가 생기게 했지만 중앙 몇몇 원로들의 생일은 잘 기억해 두고 있었다. 장쩌민은 리셴녠의 생일이 분명히 1909년 6월 23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되어 겨울로 바뀐 것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 당시 중국에는 내연녀를 뜻하는 ‘빠오얼나이(包二奶)’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개인 의사’와 같은 문학 작품 중에 기재된 것처럼 고위층 간부들의 혼외정사는 매우 보편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펑더화이(彭德懷)가 타도당한 것은 대약진 문제 때문이 아니라 ‘중난하이 문예공연단’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펑더화이는 공개적으로 “나는 춤을 추러 다니지 않지만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가 춤을 추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 춤을 추려면 그냥 추면되는 것이지 왜 꼭 ‘중난하이 문예공연단’을 만들어 젊고 예쁜 아가씨들을 온종일 가두어 놓는가 말이다. 백성들이 알면 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앙 고위층 간부들은 거의 사람마다 모두 춤을 추기 좋아했는데 리셴녠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상하이에 간호사출신의 내연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리셴녠을 극진하게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아들까지 낳아주었다.

‘총명한’ 장쩌민은 그 날이 리셴녠의 내연녀의 생일이 아니면 그녀가 낳은 아들의 생일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부부사이의 이불 밑 대화가 가장 힘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장쩌민은 당연히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장쩌민은 원래 리셴녠에게 후야오방 건을 말하려고 했는데 뜻밖에 이런 일이 생겼다. 그는 복잡한 마음을 억제하며 리셴녠에게 후야오방에 대한 태도를 조심스레 알아보았다. 장쩌민은 리셴녠의 생각을 알게 되자 즉시 원로님의 말씀은 평생 좌우명으로 삼겠다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해 리셴녠을 크게 기뻐하게 만들었다. 식사가 끝나자 장쩌민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왜냐하면 아주 중요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가 장쩌민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나서 또 분부할 일이 있는지 묻자 장쩌민은 없다고 하면서 그를 돌려보냈다. 차가 멀어져가는 것을 확인한 장쩌민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그 길로 발길을 돌려 생일 케익을 사러갔다. 날이 저물어 갔지만 장쩌민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혼자 택시를 타고 다시 호텔로 갔다. 그러나 그 때 리셴녠은 다른 손님들을 만나고 있었다. 호텔 경호원은 장쩌민이 다시 온 것을 보고 호의로 들여보내려고 했으나 장쩌민은 거절하고 문 밖에 공손히 서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추운데다 눈까지 내렸다. 항상 전용차에 앉아 다니는 까닭에 장쩌민은 얇은 외투만 입고 있었다. 밖에서 그렇게 오래 동안 서있을 줄 몰랐던 그는 추워서 덜덜 떨었다. 이를 본 경호원이 몇 번이나 들어오라고 했지만 장쩌민은 그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쩌민은 이렇게 하면 리셴녠과 그의 내연녀의 호감이 더 커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손에 생일 케익을 든 채 꼬박 4시간이나 서있었다. 하지만 리셴녠의 손님들이 계속 가지 않고 있어 장쩌민은 나중에 경호원의 권고대로 케익을 남겨놓고 실망한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손님들이 돌아 간 후, 경호원은 리셴녠에게 케익을 넘겨주며 장쩌민이 밖에서 눈을 맞으며 몇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리셴녠은 감동되어 어찌 할 바를 몰라 연이어 “장쩌민 그 사람 참 괜찮네, 지금 이런 사람이 아주 적단 말이야!”라고 말했다.

쿤은 ‘장쩌민평전’에서 “장쩌민은 리셴녠을 너무 극진하게 대한 까닭에 리셴녠의 사위라는 터무니없는 루머까지 나돌았다”라고 썼다. 확실히 이 루머는 서민들이 중공 고위층 내부 사정을 잘 모르고 장쩌민의 꿍꿍이도 잘 모르는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장쩌민은 이와 비슷한 많은 ‘노력’을 들인 덕분에 6.4 전야에 자오쯔양을 대체하여 중공중앙 총서기로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상세하게 서술하려고 한다.

4. 후야오방 퇴임

후야오방은 1987년 1월 16일, 덩샤오핑, 천윈, 펑전(彭眞), 보이보(薄一薄), 왕전(王震) 등이 소집한 민주생활 회의에서 퇴임했는데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가 핍박에 의해 퇴임했으며, 퇴임하라고 핍박하는 말을 듣고 후야오방이 너무 놀라 한참 동안이나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차례 회의에서 후야오방의 몇 십 년 되는 친구도 그를 배신했다. 정세는 이미 명백한 것이다. 후야오방은 이른바 당의 단결을 수호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반성을 하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말을 했다. “일을 하지 않더라도 인간답게 살겠다.” 회의가 끝난 후, 후야오방은 어린 아이처럼 조금도 숨기지 않고 통곡했다. 그가 가슴 아팠던 것은 몇 십 년 동안 진심으로 대해왔던 친구마저 그를 배신한 것이었다.

공산당은 후야오방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기에 ‘인간답게 살아도’ 소용이 없었다. 백성을 위해 말을 하는 사람은 독재 권력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펑더화이, 후야오방 및 자오쯔양은 모두 이를 증명해 준다. 그러나 장쩌민과 같이 아첨하고 겉과 속이 다르며 민중 탄압에는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는 사람은 공산당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장쩌민은 점차 원로들의 시선을 끌게 되었다.

1987년 10월, 장쩌민과 갈등이 몹시 심했던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 루이싱원(芮杏文)이 끝내 자리를 떠났다. 철저한 개혁파였던 루이싱원은 자오쯔양과 관계가 매우 밀접했다. 장기간 보수파 고층 관리들 편에 섰던 장쩌민은 루이싱원을 몹시 배척했으며 장쩌민이 조직한 ‘상하이방’도 항상 루이싱원과 맞섰으므로 그는 일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자오쯔양은 상하이시 당위서기로 임명된 지 일년도 채 안 되는 루이싱원을 중앙 서기처 서기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5. 주룽지에 대한 질투

장쩌민은 패거리를 만들어 상하이 기반을 차지했지만 상하이 시장을 역임한 2년 동안 시민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사실 1986년,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경제는 부활하고 있어 전국 인민들이 날로 풍부해지는 물자 공급에 대해 기뻐하고 있었지만 상하이 시민들은 오히려 표를 내고 대부분 생필품을 구매해야 했다.

그 원인은, 1986년 광둥성 성장 예쉬안핑(葉選平)은 국가에 세금 2.5억 위안을 바쳤지만 상하이 시장 장쩌민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그의 50배에 달하는 125억 위안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2년이 채 안 되는 사이에 장쩌민은 시민들을 ‘장바구니 위기’에 몰아넣었다.

장쩌민이 원로들에게 아무리 아부한다고 해도 그가 만들어 놓은 수습하기 어려운 국면은 덩샤오핑 앞에 떨어진 현실이었다. 덩샤오핑은 부득이 경제의 달인인 주룽지를 상하이 시장으로 급파해 파국을 수습케 하고 장쩌민은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를 맡게 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입만 놀리고 실제 일은 관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중공은 당시 ‘시장 책임제’를 실시했기에 시장의 한 마디 말은 무게가 있었다. 상하이를 형편없이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위층에 아부하는데 능숙했던 장쩌민은 1987년 중공 제13기 1중 전체 회의에서, 중앙위원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직하여 중공 최고 권력집단 내부로 진입했다.

주룽지는 태자당(太子黨)도 아니고 열사의 ‘고아’도 아니었으므로 당내에서 장쩌민보다 인맥이 훨씬 넓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1957년 반우파 투쟁 중에서 우파로 몰려 농촌에서 20년 동안이나 강제노동에 종사했다. 주룽지는 실제적인 능력 및 인격적인 매력으로 승직한 것이었다.

1988년 4월 25일, 주룽지는 낙타색 양복을 입고 붉은색, 검은색 줄이 엇갈린 넥타이를 매고 상하이시의 800여 명 인민대표들 앞에 나타났다. 규정에 따르면 인대 상무위원회 주임, 부주임, 시장, 부시장, 고급인민법원 원장과 고급인민검찰원 검찰장 입후보자들은 시정연설을 하되 15분을 초과하지 못했다. 앞 사람들은 모두 15분을 채우지 못하고 연설을 끝냈지만 주룽지는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많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회의장은 박수 소리, 웃음소리로 넘쳐나 분위기가 열렬했다. 질투심이 강한 장쩌민은 주룽지가 이렇게 환영을 받는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체면 때문에 장쩌민은 애써 그런 마음을 숨기며 사람들이 박수치면 마지못해 박수를 쳤고, 사람들이 웃으면 입을 벌리고 웃는 시늉을 했는데 그 표정은 우는 것보다 더 보기 싫었다. 평소 사소한 일에서도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장쩌민은 주룽지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자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주룽지는 상하이로 온 후, 작은 일들도 허술히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군중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는 것을 견지하면서 직접 답장까지 하는 등이다. 동시에 그는 몇 가지 큰일을 중점적으로 해결했다. 예를 들면 주변 성, 시와의 관계, 장바구니 공정, 교통 문제 및 상하이시 시정건설 등이다. 주룽지는 직접 황푸강(黃浦江)상류에 찾아가 오염문제를 해결하여 상하이 사람들이 마시는 식수의 질이 개선되게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성공은 주룽지로 하여금 크게 인심을 얻게 하였다.

이런 방면에서 장쩌민은 비교가 안 되었기에 문제제기 자체를 피했다. 장쩌민이 시장으로 있는 기간에 편안한 나날을 보내던 부시장과 국(局)급 간부들은 주룽지가 오자 진짜로 일을 해야 했다. 주룽지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화을 내면 특별히 무서워 보였다. 게다가 성격 또한 급해 간부들을 훈계 할 때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은 장쩌민에게 하소연했다. 장쩌민은 기회가 왔다하고 주룽지가 단결을 도모하지 않고 개인주의를 팽창시키고 있다며 비난했다. 그리하여 주룽지는 황당하게도 다시 훈계했던 간부들을 찾아가 자아비평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91년 4월, 제7기 인민대표대회 4차 회의에서 주룽지는 국무원 부총리로 당선되었다. 한번은 덩샤오핑이 일부러 주룽지를 가리키며 장쩌민에게 “나는 경제를 모르는데 그는 안다!”라고 했다. 그 뜻인즉 “자네는 경제를 모르지만 그는 안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장쩌민은 기분이 영 말이 아니었으나 덩샤오핑과 맞서지는 못하고 그저 주룽지를 더욱 질투하고 미워할 뿐이었다. 주룽지는 1992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되어 중국 최고 지도자층으로 진입했으며 1998년에는 중국 제5기 총리직에 올랐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는 장쩌민은 총서기, 국가주석과 군사위 주석을 역임한지 이미 여러 해 되었다.

6. 언론 통제

장쩌민은 제대로 하는 일은 없지만 허풍떠는 재간은 일류였다.

장쩌민은 어렸을 때부터 매국노 아버지를 따라 일본 괴뢰정권을 위해 선전 공작을 한 경력을 통해 언론의 힘을 잘 체득하고 있었다. 때문에 상하이에서 그는 중점을 언론 선전에 두었으며 선전부문에 자신의 직계 인력을 배치했다.

상하이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잡지들은 대부분 전국적인 매체였으므로 중앙의 원로들도 보고 있었다. 때문에 장쩌민은 시장으로 된 첫날부터 언론 보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졌는데 때로는 너무 집착하여 언론사 직원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6.4천안문 사건 전야에 장쩌민이 ‘세계경제도보(導報)’를 폐간시킨 사건을 우연한 사건으로 보고 있지만 사실은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장쩌민의 당연한 반응이었다.

예를 들면, 한 번은 자신을 나타내기 좋아하는 장쩌민이 기자회견에서 ‘면모’라는 중문 단어를 영어 단어 ‘Faces’로 대체했는데 ‘해방일보’는 이튿날 보도에서 서민들이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 영어 단어 ‘Faces’를 다시 중문 단어 ‘면모’로 고쳤다. 이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던 장쩌민을 화나게 만들었다. 비록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했지만 언론을 통해 자신을 자랑할 기회를 놓칠 줄 몰랐다. 장쩌민은 그의 개인 비서를 시켜 ‘해방일보’에 전화를 걸어 항의하게 했다. 장쩌민의 비서는 기사를 쓴 기자에게 “장 시장을 기쁘게 하려면 영어로 Face라고 쓰는 것이 좋겠소!”라고 말했다.

1986년부터 장쩌민은 시위원회 선전부를 대신해 상하이시 주요 언론의 편집국장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열었다. 역대로 상하이시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지만 이는 장쩌민의 주요한 공작으로 되었다. 같은 해 10월, 황푸강 강변에 있는 정부청사에 화재가 발생해 인근에 있는 몇 백 가구 주민들의 주택가가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불은 결국 꺼졌지만 물을 대량으로 사용한 탓에 시내 곳곳에서 낡은 급수관이 터져 일부 거리에 물이 넘쳤다. 당시 상하이 TV방송국에서는 두 차례나 사고 현장에서 사건을 보도했는데 장쩌민은 이러한 진실 보도가 시장인 자신의 체면을 구겨지게 했다고 몹시 화를 내고 일주일 후 열린 방화회의에서 선전부를 책망하면서 “이런 보도는 화재에 주의하라고 일깨워주는데 그치지 말고 상하이 기초시설 문제를 이해하게 해야 하며 문제가 점차 개진되고 있음을 보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또 한 번은 1987년 5월 4일, 장쩌민은 지방 인민대표들과 회의를 하면서 상하이 고속버스 터미널 부근의 수도관이 터져 거리에 물이 넘친지 1년이 넘지만 해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한 대표가 몇 번이나 자베이구(閘北區) 정부에 편지를 보냈지만 항상 “관련 부문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똑같은 답장뿐이었다고 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장쩌민은 공항, 부두와 기차역 건설을 아주 중요시했다. 새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서 수도관이 터진 것은 상하이의 얼굴에 먹칠할 뿐만 아니라 시장인 자신의 얼굴에도 먹칠한다고 생각한 장쩌민은 즉시 관계자들을 찾아 빨리 그 수도관을 고치라고 명령했다. 그리하여 문제는 그 날로 해결이 되었다.

몇 주일 후, ‘해방일보’ 기자 쉬진건(許錦根)은 그 인민대표에게 수도관이 터진 문제 해결의 진행 상황을 물었었는데 결국 장쩌민이 직접 이 작은 사건에 관여해서야 해결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쉬진건은 시장이 어떠한 일이라도 반드시 몸소 행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일에 몸소 행하는 다른 일면’이란 글을 써서 1987년 7월 6일 자로 ‘인민일보’에 발표했다. 그는 글에서 장쩌민이 개인의 체면만 중요시하면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는데 대해 비평하면서 “간부가 매 하나의 작은 일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이 못된다, 이는 하급 간부들이 의뢰심을 갖고 질질 끄는 작풍만 조성시킬 뿐이다”라고 썼다.

이 글을 본 장쩌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비록 누구라고 이름은 밝히지는 않았지만 창끝은 상하이시 최고 지도자에게 돌린 것은 분명했다. 특히 글의 결말은 장쩌민을 노발대발하게 만들었다. 결말에서는 “전국 일부 신문들은 일부 시장이 택시비가 높은 문제를 해결한 사실을 끊임없이 전재하여 표창하고 있지만 만약 이런 일들이 계속 나아간다면 물가국 국장 혹은 택시회사의 총 지배인을 해서는 뭘 하겠는가?”라고 썼다.

전국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신문 제1면에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다니 이게 어디 될 말인가! 장쩌민은 7월 10일, 상하이 선전기구의 모든 관리들이 참가한 특별 회의를 소집하고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 내리 치면서 “쉬진건은 자신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도시를 관리하는 것이 뭔지 조금도 모르고 있는데 마땅히 사무실에서 나와 바깥에서 돌아다니며 많이 보아야 한다!”라고 했다. 회의에 참석한 ‘해방일보’ 편집국장은 머리를 숙인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국 그 회의는 장쩌민이 쉬진건과 기타 관리들을 질책하는 강연장으로 변해버렸다. 사건은 여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장쩌민은 즉각 관련 언론들을 정돈했는데 진실한 말을 하는 편집국장, 관리들을 모두 제거했다. 이때부터 상하이 언론들은 다시는 장쩌민을 감히 평론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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