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3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03권세에 빌붙은 허풍선, 고위직에 오르다

1. 서양식 별명 ‘클리쿤’

1956년 초, 장쩌민은 30세 이립(而立)이 되자 모스크바 스탈린 자동차 공장에서 실습을 마치고 창춘(長春)에 돌아와 다른 직원들과 함께 제1자동차공장이 여름부터 생산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장쩌민은 처음에 공장 동력처 과장으로 임명받았다가 첫 해방표 자동차가 생산된 후 부처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그의 상사는 소련 전문가 한 사람과 처장 천윈취(陳雲衢) 뿐이었다. 천윈취는 전문가였지만 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장쩌민이 당지부 서기를 맡게 되었다.

장쩌민은 벼슬길에서 당원이라는 간판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다. 중공은 정권을 잡은 후 인재 등용에 일관되게 당간부를 중용하였고 비당원 전문가와 지식인을 신임하지 않았다. 장쩌민은 사실 공산당 혁명에 참가한 경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괴뢰정권 중앙대학에서 배양된 매국노 인재였다. 게다가 공산당이 상하이를 점령하기 전까지는 국민당을 위해 일했으므로 중공이 경계하며 개조하는 대상에 속해야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중공 열사인 삼촌 장상칭의 양아들이라고 거짓말을 꾸며 ‘열사의 고아’란 금빛 간판을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공산당이 신임하는 간부로 되었다. 당원간부이자 전문인재인 장쩌민은 그야말로 공산당이 환영하는 인물이 되었다.

장쩌민은 창춘 제1자동차공장에서 같은 남부 지방에서 온 선융옌(沈永言)을 알게 되어 친구로 지냈다. 그들 둘은 저녁에 한가할 때면 같이 한담을 했으며 일하다가 휴식할 때에는 같이 탁구를 쳤는데 장쩌민이 늘 졌다. 그러나 장쩌민은 질 때마다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러시아어로 몇 마디씩 뭐라고 하고는 토라져서 구석에 가서 앉아 있었다.

장쩌민은 전문 기술 방면에서는 동료들이 모두 비웃을 정도였지만 그의 재간은 따로 있었다. ‘도적은 말 잘하고 노래 잘한다’는 동북지방 사람들의 말대로 장쩌민의 장기는 입에 있었다. 러시아 민요에 통달한 까닭에 장쩌민은 공장에서 소련 전문가와 사이가 가장 좋았으며 기술적인 난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공장을 찾은 시찰단에 가이드를 해주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그리하여 동료들은 그에게 50년대 중국에서 유행한 ‘클리쿤(Klikun, 역주 – 구 소련의 코르네츄크의 연극에 등장, 사실을 날조해 제멋대로 보도하는 기자)’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클리쿤’은 구 소련 소설의 주인공인데 황당한 거짓말을 일삼고 권세가에 빌붙어 아부하는데 능란했으나 진정한 능력은 없는 인물이다. 이 별명은 장쩌민에 대한 평가이기도 했지만 공산당이 간부를 선발하는 기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공산당은 ‘공산주의는 천당’에서부터 ‘4가지 현대화’에 이르기까지, ‘샤오캉(小康 역주 – 중등 생활수준)’에서부터 ‘3개대표’에 이르기까지, 항상 실현하지 못할 ‘대단한’ 구호를 생산해냈으며 현재는 또 ‘조화로운 사회’라는 그림 속의 떡을 그리느라 여념이 없다. 공산당은 실질적인 생산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으며 위기에 부딪히면 살인하고 위기가 지나면 이어서 허풍과 속임수로 얼렁뚱땅 연명해 간다. 그러므로 공산당에게는 큰소리 치고 거짓말 잘하는 간부가 필수였다. 1958년, 마오쩌둥이 일으킨 ‘대약진’ 운동 중에서 이러한 현상은 극에 달했는데 그 당시에 관방 보도를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58년 6월 8일, ‘허난(河南)일보’가 쑤이핑(遂平)현에서 한 무(畝)당 2,105근의 밀을 생산해 냈다는 황당한 보도를 처음 내보낸데 이어 9월 18일, ‘인민일보’는 또 광시(廣西)성 환장(環江) 훙치(紅旗)농업사에서 무당 벼 130,434근을 생산해 냈다고 보도했다. 그리하여 농업부가 발표한 7월분 식량 생산량은 그 이전 해보다 69% 증가해 같은 시기 미국의 생산량보다 40억 근이나 더 많았다. 대약진 현상은 자동차 부문에서도 발생해 반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연구 개발해낸 자동차는 2백여 종이나 되었으며 V형 엔진, 유압동력 방향 조절판, 자동 변속장치 등 선진 기술들을 이용해 중국자동차 수준이 세계 선진 수준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세계 선진 수준’에 도달했다고 하는 자동차들 중에는 장쩌민이 근무하는 창춘 제1자동차공장에서 제조한 신제품도 포함됐는데 그 자동차들은 목재로 된 공기 펌프에 대나무로 된 차체를 지니고 있었다. 장쩌민은 이공과 출신이라 당연히 그들의 ‘창조’가 사람들을 속이는 외에 아무런 실용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당과 일치해 위로 기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이 맡겨준 황당한 임무를 완성하기 위해 언제나 그럴듯한 말로 직원들을 선동했다.

확실히 그 시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성과’를 얻지 못하는 시대였다. 1958년 말부터 1959년 초까지 창춘 자동차 제조공장은 구조 조정을 진행했는데 동력처는 동력 지사로 따로 분리되었으며 수완 좋은 장쩌민은 당의 구미에 맞았으므로 자연히 이 기회에 승진해 지사 사장으로 되었다.

2. 대기근 시대

대약진운동이 중국에 가져다 준 것은 경제난과 무서운 대기근이었다. 농민들은 원하지 않았지만 ‘인민공사’에 들어가 대약진 실현을 위해 강철을 제련했으므로 아무도 곡식을 심지 않았고 심었다 해도 걷어 들일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농민들이 집에 남겨 놓은 비상식량마저 모두 인민공사에서 걷어가 공동으로 먹었으므로 농촌에서는 사람들이 굶어 죽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대기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농촌 개별 지방으로부터 전국으로 만연되었고 농촌에서 도시로 진행되었다. 전문가들은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동안, 2천만에서 5천만의 중국인들이 기근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추산하고 있다. 기근이 심했던 지방에서는 친자식을 잡아먹는 참극까지 벌어졌다. 허난(河南) 신양(信陽), 쓰촨(四川) 런수(仁壽)현 등지의 농촌에서는 가족 혹은 마을 단위로 굶어 죽었다.

동북 지역은 사람이 적고 땅이 많아 피해를 덜 입은 지역에 속했지만 창춘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은 여전히 배불리 먹지 못했다. 당시 가장 힘든 일을 하는 남자들도 매월 30근의 식량밖에 배급 받지 못하자 장쩌민은 갈수록 동북에서 살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장쩌민이 소련에서 창춘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아내 왕예핑(王冶坪)과 어린 두 아들도 상하이에서 창춘으로 옮겨왔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처장부터 시작해 지사장을 담당한 ‘클리쿤’ 일가의 생활 조건은 월등하게 좋았다. 장쩌민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도 적지 않은 월급을 받았으며 4층에 있는 거실이 3개 달린 아파트를 분배 받았다. 그 아파트에는 소련식 보일러, 가스렌지, 위생실은 물론 동북의 낮은 기온에도 견디는 두 겹으로 된 유리창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거주 조건은 당시 중국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조건이었다. 또 그 때는 일반 중국인들이 강냉이떡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꿈이었을 정도의 대기근 시대였지만 장쩌민은 매일 닭 한 마리를 먹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일반인에 비해 월등한 생활 조건도 남부 지역 생활에 습관된 왕예핑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동북에서는 일년에 치마를 입을 시간이 며칠 안 되는 데다 대부분 무겁고 두꺼운 솜옷을 입고 지내야하므로 꾸미기 좋아하는 왕예핑은 장쩌민 때문에 빙설이 뒤덮인 곳으로 왔다며 불만이 많았다.

왕다오한이 장쩌민을 소련에 보내 공부하게 한 것은 친한 친구가 된 후배의 앞날을 위해서였지만 장쩌민이 연민의 정을 가졌던 상하이를 떠나게 했다. 장쩌민은 상하이의 번화함을 좋아했으며 소년 시절에 좋은 나날을 보냈던 기억 때문에 황포강변을 떠나기 싫어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승진에 유리하다고 생각했기에 주저하지 않고 떠났던 것이다.

상하이 출신인 왕예핑은 장쩌민의 여섯째 삼촌 장상칭의 아내 왕저란의 질녀였다. 상하이 외국어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장쩌민보다 두 살 어렸다. 여색을 좋하는 장쩌민은 난징에 있는 일본 괴뢰정부 중앙대학에서 상하이 교통대학에 전학간 뒤, 왕저란의 집에서 왕예핑을 몇 번 보고는 조금 끌리는 느낌이 있었으나 그대로 지나쳤다. 그러던 1949년, 공산당이 곧 천하를 차지하려 하자 장쩌민은 갑자기 꾀가 떠올라 왕예핑에게 구애하기 시작했다.

왕저란은 장스쥔 일가에 원망이 많았다. 장상칭이 죽을 때 공산당은 아직 ‘공비’로 불렸으므로 형님인 장스쥔은 여섯째 동생에게 공비와 결별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동생이 말을 듣지 않자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더이상 왕래하지 않았다. 장스쥔은 생활이 풍족했지만 장상칭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생각했기에 왕저란을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28세에 과부가 된 왕저란은 한 살과 세 살짜리 두 딸을 데리고 어려운 생활을 했다. 왕저란의 둘째 딸 장쩌후이는 쿤과의 인터뷰에서 “집에는 먹을 식량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것마저 없을 때가 많았다”고 밝혔다.

공산당이 정권을 수립한 후 형세가 뒤바뀌어 장스쥔과 그의 자녀들은 오히려 떳떳치 못한 신세가 되었다. 장쩌민은 허위 조작한 ‘혁명열사 고아’의 신분을 단단히 붙잡기 위해 왕저란 가족과 더욱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얼마 뒤, 상하이에 있는 친정에 찾아간 왕저란은 장쩌민이 질녀 왕예핑과 연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왕저란은 장쩌민의 속마음을 모르고 그가 의리도 정도 없는 매국노 아버지와 같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결혼에 동의했다. 1949년 12월, 중공의 ‘건국축제’가 두 달이 채 지나기 전에 장쩌민은 재빨리 왕예핑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열사의 고아’라는 금빛 간판을 장쩌민 이마에 단단히 박아놓았다.

왕저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은행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으며 퇴직 후 20년 동안 큰 딸 장쩌링과 함께 살다가 장쩌민이 상하이 시장으로 임명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양저우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는 나중의 일이다.

3. ‘부엉이’의 외도

결혼 후 장씨 부부는 한동안 사이가 괜찮았다. 왕예핑은 1952년과 1954년에 장몐헝(江綿恒)과 장몐캉(江綿康) 두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좋은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5년 장쩌민이 소련에 유학가자 왕예핑은 홀로 두 아들을 데리고 상하이에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소련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아 ‘모스크바 외곽의 밤’이란 노래처럼 두 남자가 한 여자를 따라다니는 현상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선천적으로 호색한 유부남인 장쩌민은 모스크바 자동차 제조공장에서 사냥감을 찾기 시작했다… 장쩌민은 귀국 후, 왕예핑에 대해 더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비록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왕예핑은 이러한 점을 느낄 수 있었다.

“빙설이 뒤덮인 볼가강 위로 삼두마차가 달리고 있는데, 슬픈 노래 부르는 이는 바로 마차꾼이라네.” 장쩌민은 소련에서 돌아온 이후 매일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와 동시에 그가 마음속으로 그리워하고 있는 여인은 당연히 매력이 넘치는 미녀 스파이 크라바였으므로 추운 겨울날 이 노래를 듣고 있는 왕예핑은 매우 괴로웠다. 남부 도시생활에 습관된 그녀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추운 동북으로 온 것도 억울한데 장쩌민은 매일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퇴근 후에는 소련 전문가와 춤을 추러 다녔으므로 혼자 두 아들을 돌봐야 하는 왕예핑의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다.

원래 남편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아내이다. 왕예핑은 장쩌민의 마음이 여전히 소련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소련에서 유학하면서 휴일 같은 때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 은근슬쩍 물어보곤 했는데 장쩌민은 평소와는 달리 말을 얼버무리거나 더듬거려 한층 더 의심을 받았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왕예핑이 못생겼다고 하면서 장쩌민이 집에서 부엉이를 키운다고 우스개 소리를 한다. 그러나 당시 창춘 자동차공장에서 일했던 직원들에 따르면, 왕예핑은 공장에서 가장 예쁜 세 미녀 중 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때 왕예핑은 30세 좌우밖에 되지 않은 꽃다운 나이인데다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서 왔으므로 특별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외국어를 전공한 왕예핑은 자동차공장에서 적합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으나 장쩌민이 간부였므로 공장 지도부는 그녀에게 비서 자리를 주었다. 그리하여 장쩌민이 제1자동차공장에서 지사장직을 맡고 있을 때 왕예핑은 다른 한 지사인 창춘 제2자동차공장에 출근하게 되었다. 왕예핑은 장쩌민을 의심하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 놓고 싶었지만 참고 있다가 끝내 하소연할 상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제2자동차공장의 지사장이었다. 그 때부터 왕예핑은 제2자동차공장의 지사장과 외도를 하기 시작했다.

좋은 일은 쉽게 퍼지지 않지만 나쁜 소문은 하루에 천리를 가는 법이라 왕예핑이 외도를 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런 일이 드러나면 여론이 대단했으며 견딜 수 없으면 자살까지 했다. 그러나 왕예핑은 소문이 난 뒤에도 대수롭지 않게 행동했다. 당시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의 화제는 모두 장쩌민의 아내가 외도한 일이었다. 장쩌민은 겉으로는 못들은 척 하면서도 집에 돌아가면 크게 싸웠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제1기계공업부 부부장 왕다오한을 찾아가 “아내가 외도한 사실을 다 알고 있으니 어떻게 지도자의 자리에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창춘을 떠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왕다오한은 자신을 관리로 발탁해준 은혜가 있는 장상칭의 ‘양아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해 1962년, 장쩌민을 국가 제1기계공업부 산하의 상하이 전기기계과학연구소 부소장으로 임명했다. 왕예핑도 꿈에도 그리던 상하이로 돌아와 남편과 같은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고 기술이라곤 전혀 몰랐지만 ‘과학 기술인원’ 직무를 맡았다. 회사에서는 왕 부부장이 직접 나서서 장쩌민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것을 보고 그에게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차오양(曹楊) 신촌(新村)의 큰 고급 아파트를 분배해 주었다. 이 일을 통해 장쩌민은 권력의 좋은 점을 다시 한 번 체험하고 더더욱 왕다오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으며 ‘은사’라는 단어도 말끝 마다 꺼냈다.

1965년 제1기계공업부에서는 일본에서 열리는 과학기술세미나에 대표단을 파견했는데 장쩌민도 포함되었다. 일본에 가기 전에 대표단은 홍콩에 들려 관광까지 했다. 장쩌민이 일본에서 돌아온 후 왕다오한은 그를 새로 설립된 우한(武漢) 열역학기계연구소 소장 겸 당위서기를 담임할 것을 제안했다. 이와 같이 왕다오한의 관심으로 장쩌민의 벼슬길은 줄곧 매우 순조로웠다. 장쩌민은 장상칭이 공산당 간부로 있었던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 동시에 일찍 죽은 것을 더욱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장상칭은 장스쥔과 혈연관계를 끊는 일까지는 없다 해도 매국노의 자식을 이처럼 돌봐주지는 않았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4. 우한(武漢)의 허풍쟁이

1966년, 장쩌민은 불혹의 나이인 마흔 살에 들어섰다. 그 해 5월, 장쩌민은 제1기계공업부 산하의 우한 열역학기계연구소 소장을 맡았으며 당위원회 서기를 겸직했다. 그리하여 13급 간부로 승직된 장쩌민은 중공 고위층 관리 서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는 마침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기 전야였다. 장쩌민은 연구소 소장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허풍대장’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회사에 온 시간이 짧아 사람들은 그렇다 할만한 문제를 가지고 장쩌민을 비판하지 못했다. 이건 장쩌민으로 놓고 말하면 의외의 행운이었다.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목적은 당내부에서 류사오치(劉少奇)등 사람들에게 빼앗긴 독재 권력을 다시 빼앗아 오기 위해서였다. 마오쩌둥은 학생과 일반 노동자들에게 반란으로 권력을 빼앗을 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당시 거의 모든 마오쩌둥의 적대 세력들은 투쟁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 감옥에 들어가고 심하게 구타 당했다. 특히 상하이에서 장춘차오(張春橋)와 왕훙원(王洪文)이 일으킨 반란은 매우 격렬했다. 기세 드높은 문화혁명이 종식된 후, 재난 속에서 살아남은 상하이 장쩌민의 동료들은 서로 행방을 알아보았는데 놀랍게도 허풍쟁이 장쩌민은 우한에 숨어 거의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1972년에는 루마니아에 파견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문화대혁명의 쓴맛을 볼대로 본 장쩌민의 동료들은 모두 감탄하면서 “허풍쟁이라고 비웃었더니 허풍을 떤 덕분에 문화혁명마저 넘길 수 있었구나”라고 했다.

사실 장쩌민은 문화대혁명 과정 중에 줄곧 두려움에 떨었다. 우한 열처리기계연구소가 새로 성립된 까닭에 직원들이 모두 각지에서 모여 왔으므로 원래 회사처럼 사람들 간에 많은 모순과 원한을 진 것이 없었으므로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개인적인 원한을 다른 명목으로 갚는 비참한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사실 장쩌민은 권력을 손에 쥔 소장이었기 때문에 빈번하게 진행되는 조사와 적발로 일본 괴뢰정부 시기의 일이 드러날까 봐 두렵기만 했다. 1966년 11월, 장쩌민은 친척 방문과 작업보고의 명의로 베이징에 들어가 정치적 형세를 알아본 후 그길로 상하이에 돌아가 또 몇 주일간 머물러 있으면서 수상한 낌새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동시에 당시 여전히 상하이에 있었던 왕예핑에게 절대 말조심하라고 얘기하고 특히 출신문제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왕예핑은 당연히 시키는대로 잘했다. 왜냐하면 장쩌민이 매국노가 되면 그 자신도 매국노 가족이 되므로 피해를 입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왕예핑은 장쩌민에게 방법을 가르쳐 주기까지 했는데 일부러 작은 일을 잘못해 반란파들의 주의력을 정치 국면과 관계없는 작은 일에 돌리게 하라는 것이었다.

장쩌민은 우한에 돌아간 후에 관건적인 일은 신중히 하면서 자신과 별로 관계없는 일에서는 모두 수긍하는 태도를 취했다. 군중들이 장쩌민은 착실하게 일하지 않고 허풍만 떤다고 비판하자 그는 “다들 맞게 말했습니다, 저는 확실히 허풍만 떨었습니다”라고 반성했다. 장쩌민은 어려서부터 양저우 연극배우들의 영향을 받아 호주머니에 언제나 빗을 넣고 다녔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빗을 꺼내들고 여자들처럼 머리를 빗으며 아주 만족해했다. 그래서 ‘자본주의파’를 비판할 때, 군중들은 ‘작은 빗으로 큰 머리를 빗었다’, ‘자산계급의 행동을 했다’라고 비평했는데 이것도 장쩌민은 흔쾌히 승인했다. 2003년, 장쩌민이 전인대회 기간 후베이(湖北) 대표단을 접견할 당시 이렇게 말했다. “반란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저는 마오쩌둥 주석이 가장 두렵다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저는 이 한마디 말 때문에 3일 동안이나 투쟁 당했지요.” 마음에 숨기는 것이 없다면 왜 마오쩌둥을 두려워했겠는가? 당시 다른 사람들은 우상으로 모시려고 안달이었는데 말이다! 당시 정치 심사를 하는 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조사해서 아주 오래 전의 사소한 일까지 다 조사해냈다. 이런 상황에서 장쩌민이 끝내 넘어지지 않은 것은 ‘혁명열사의 고아’라는 금빛 간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5. 장기간의 전략적인 투자

1969년, 중공 제9기당대표대회가 열려 중국정국에 변화가 발생했다. ‘열사의 고아’인 장쩌민은 정치 심사를 쉽게 통과하고 ‘57간부학교’에서 노동 단련을 한 뒤 1970년, 베이징 제1기계공업부 외무국 부국장으로 발탁되었다.

중공은 제9차당대표대회 이후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미국과 소련 두 대국은 모두 중공에 위협이 되었다. 중국과 소련 두 공산국가는 국경을 두고 마찰을 빚어 몇 차례 무력 충돌까지 일어났다. 중국은 고립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타 작은 형제 국가들을 끌어 모으려고 노력했다. 중국은 알바니아에 이어 루마니아를 끌어들였으며 루마니아와 파키스탄을 통해 미국과 화해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약 20년 동안(1970-1989년)미국과 연합해 소련에 대항하는 국제 전략을 시행했다.

루마니아 공산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중공은 루마니아의 공업 건설을 도와주기로 결정하고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 때 장쩌민은 러시아어를 알고 있는 우월한 점 때문에 팀장으로 선발되었다.

소문에 의하면 당시 저우언라이가 장쩌민을 접견했는데 장쩌민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중공 내부에서 가장 쉽게 넘어지지 않는 인물로 속은 잔인하지만 겉은 사람을 잘 미혹시키기로 소문났다. 외부에서는 저우언라이를 겸손한 군자로 보고 있지만 사실 그는 상하이 구순장(顧順章) 일가족 몰살 사건을 직접 주도해 팔순 할머니와 몇 살짜리 어린이 그리고 목숨을 구해준 은인까지 악독한 수단으로 살해했다. 저우언라이의 참여가 없었더라면 중공의 정치투쟁은 절대 그렇게 크게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저우언라이 접견 후에 장쩌민은 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71년 중국 전문가들과 함께 루마니아에서 15개 공장을 건설할 수 있을 지 조사를 진행했다. 그 이듬해 귀국한 장쩌민은 제1기계공업부 외무국 부국장으로부터 국장으로 승직했으며 8년 동안 자리를 지켰다.

1972년, 마오쩌둥은 중국사회와 경제가 자신이 벌인 문화대혁명 때문에 형편없이 파괴된 것을 보고 저우언라이와 의논하여 당 내부에서 ‘제2호 자본주의파’로 몰아 투쟁한 덩샤오핑을 복직시켜 정상적인 경제 질서를 회복하려고 했다. 장쩌민처럼 말재주로 살아가는 사람은 관건적 시각에는 힘을 쓰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한 동안 원래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외무국은 자리가 좋아 생필품이 귀했던 70년대에는 외무국과 조그만 관계가 있어도 모두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장쩌민은 그 기간 기회가 되는 대로 상급 간부들에게 뇌물을 가져다 바치면서 승직의 기회를 노렸다.

그 시기 왕다오한은 정계에서 내리막 길을 걷고 있었으나 장쩌민은 여전히 그를 잊지 않았다. 왕다오한의 당내 경력과 신분으로부터 보았을 때 언젠가 충분히 다시 일어설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장쩌민은 앞을 멀리 내다보며 전략적인 투자를 하기로 했다.

왕다오한이 매월 식용유 4량, 설탕 반근씩 분배받아 생활하고 있을 때, 루마니아에서 돌아온 장쩌민은 즉시 루마니아산 분말우유와 사탕 등을 가지고 왕다오한의 자택을 찾아가 그의 가족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장쩌민의 아들 장몐헝도 아버지가 간부들에게 자주 귀한 선물을 가져다 바친 덕분에 대학에 들어갔으며 1977년, 공농병(工農兵) 대학생의 신분으로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장쩌민은 실무에서는 평범해서 내놓을 만한 성적이 없었다. 훗날 장쩌민 평전을 위해 조직된 전문팀은 내막을 아는 사람들을 찾아 그의 공적을 알아내려 했으나 누구도 설득력 있는 사례를 말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장쩌민이 사무에 노력하지 않고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나 형세를 잘 따르고 상급 간부들을 바짝 따랐다고 평가했는데 이는 사실 ‘바람 따라 움직이는 파’라는 평가였다. 제1기계공업부 기술부서 어느 한 부서장이 장쩌민을 칭찬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평전 창작팀은 이미 세상을 뜬 그 부서장의 부인을 겨우 찾아내 방문했다. 부서장의 부인은 남편이 생전에 “장쩌민 그 사람은 성적이 3이라도 10이라고 말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장쩌민은 평소 늘 ‘관리사회현형기(官場現形記 역주 – 청 말기 관리사회를 반영한 소설)’를 연구했으므로 중공 통치하에서는 기회를 볼 줄 알고 형세를 잘 따라가며 허풍과 아첨을 잘해야만 관운이 트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 각종 정치 운동 중에서 장쩌민이 남을 골탕먹이면 먹였지 다른 사람이 장쩌민을 골탕먹인 경우는 없었다. 장쩌민과 같은 부서에서 일한 적이 있는 한 전문가는 지금도 장쩌민의 모함으로 자산계급 우파로 몰렸던 일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6. 권력의 맛

1976년은 중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해였는데 당시 장쩌민은 마침 50세였다. 그해 중국에서는 탕산(唐山) 대지진이 일어났다. 리히터 규모 8.0 이상의 초강력 지진으로 몇 십만 인구가 사망했다. 게다가 그 해 저우언라이, 주더(朱德), 마오쩌둥과 같은 중공 거두들이 잇달아 숨을 거뒀다.

1976년 9월, 마오쩌둥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예젠잉(葉劍英)은 마오쩌둥의 장칭(江靑)과 화궈펑(華國鋒)을 보살피라는 마오쩌둥의 유언을 어기고 왕둥싱(汪東興), 화궈펑과 손잡고 한 차례 모반을 일으켰다. 그는 왕둥싱이 장악하고 있는 8341부대를 이용해 당시의 중공 부주석이었던 왕훙원(王洪文), 정치국상무위원 장춘차오(張春橋), 정치국위원 장칭과 야오원위안(姚文元)을 체포했다. 장칭은 마오쩌둥의 미망인이었지만 마오쩌둥의 시체가 식기도 전에 조카 마오위안신(毛遠新)과 함께 죄인이 되어 “중공 간부들은 모두 끝이 안좋다”는 말을 증명했다.

4인방이 무너지자 중국 국민들은 모두 통쾌해 했다. 베이징에서는 다음과 같은 우스개 소리가 떠돌았다. 덩샤오핑을 비판하는 운동을 책임진 장칭이 어느 하루 길에서 덩샤오핑을 만났는데 덩샤오핑이 장칭에게 운동이 잘 되어가고 있는지 물었다. 장칭은 “이미 한 달 동안 기세등등하게 활동을 벌였는데 이제 한달만 더 하면 당신을 철저하게 넘어뜨릴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덩샤오핑은 장칭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만약 내가 당신을 비판하는 운동을 벌인다면 한 주일도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화궈펑과 예젠잉도 ‘상하이방’으로 소문 났던 ‘4인방’의 역량을 무시하지 못했다. 당시 상하이 4인방 악당들은 당 조직과 전국 국민에게 알리는 통보문을 발표하고 상하이에서 봉기를 일으키려고 작정했지만 군 내부의 지지를 얻지 못해 무산되고 말았다. 게다가 상하이방 주요 인물인 마톈수이(馬天水), 쉬징셴(徐景賢), 왕슈전(王秀珍)이 속임수에 넘어가 베이징으로 갔으므로 상하이방은 대세가 기울어 진 것을 보고 투항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화궈펑, 예젠잉이 이끌었던 중앙 정부는 쑤쩐화(蘇振華), 니즈푸(倪志福), 펑충(彭沖)을 상하이시위원회 제1, 2, 3 서기 겸 주임으로 임명했다. 이 세 사람은 또 중공중앙 공작팀의 팀장과 제1, 2의 부팀장으로 임명되어 상하이에 들어갔다.

그들은 상하이를 더욱 잘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상하이 출신 관리를 선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당시 제1기계공업부 외무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장쩌민은 상하이에서 일한 경력이 있었기에 임시 공작팀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상하이로 떠났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사실 상하이에 대해 부질없는 걱정을 한 것이었다. 상하이방은 상하이에서 몇 년 동안 통제권을 쥐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의 극좌적인 노선은 전혀 인심을 얻지 못했다. 중앙공작팀은 상하이에 들어가자 바로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던 제3군 3만여 명 군인들에게 명령해 수백 대 군용차를 몰고 상하이 외곽에서 “4인방을 타도하자”, “중앙정부의 영명한 결정을 굳건히 옹호한다”고 일제히 크게 외치게 했다. 이렇게 하루가 지나자 상하이시민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4인방은 철저히 망했다. 오랫동안 억눌린 상태에 있었던 상하이 시민들은 푸단대, 교통대, 사범대 학생들을 따라 거리에 나가 4인방이 타도된 것을 경축했다. 우스개 소리에서 덩샤오핑이 장칭에게 말한 것처럼, 일주일이 채 못 되어 4인방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이 때문에 상하이 시민들은 중앙공작팀을 열렬하게 환영했으며 장쩌민은 이러한 환대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팀이 필요 없게 되었으며 장쩌민도 아쉽지만 베이징으로 돌아가 제1기계공업부 외무국 국장 생활을 계속했다. 이번에 중앙공작팀으로 들어가 겪은 일들은 장쩌민에게 권력이란 어떤 것인지 체험하게 했으며 사람마다 도움을 청하는 득의양양한 생활은 아편을 피웠을 때처럼 인이 박히게 만들었다. 그 후 장쩌민은 반드시 위로 기어 올라가 더욱 큰 권력을 손에 쥐리라 결심했다.

7. 도박

장쩌민은 왕다오한에게 투자했지만 판돈을 잘못 걸었다. 1978년, 예상 밖으로 덩샤오핑이 복직해 제11기 3중 전회를 열고 개혁개방 정책을 내놓은 것이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을 비판하고 반우파 명예 회복운동’ 중에서 형세에 따라 덩샤오핑을 격렬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기에 하마터면 ‘3종류의 사람’에 분류돼 장래를 망칠 뻔했다. 1980년에 이르러서야 역전의 기회가 생겼는데 이번에도 왕다오한의 도움을 받았다.

1979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신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중앙에서는 구무(谷牧)를 주임으로 임명하고 국가수출입위원회와 외국투자위원회를 성립했는데 왕다오한은 부주임들 중 한 명으로 되었다. 1980년 8월, 왕다오한은 상하이 시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장쩌민은 제1기계공업부에서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왕다오한은 이 사실을 알고 구무에게 장쩌민을 추천하면서 그가 지식 있는 간부이며 열사의 고아라고 말해주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수출입위원회와 외국투자위원회의 부주임으로 승직되어 부부장급 관리가 되었다.

장쩌민은 임명된 후 처음으로 경제 특구 연구토론회에서 사회를 보았다. 전 중공중앙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의 비서 롼밍(阮銘)은 “나는 1981년 특구 연구토론회의에서 장쩌민을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당시 그는 수출입국 사무실 부주임이라 회의에서 사회를 보았는데 대부분 쓸데없는 얘기들만 늘어 놓았다. 그는 특구 개방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후야오방의 결정을 감히 반대하지는 못했으므로 애매한 말들을 했다. 그는 나에게 비교적 관료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상을 주었다”라고 회억했다.

장쩌민을 잘 아는 한 간부는, “장쩌민도 리펑(李鵬), 린한슝(林漢雄), 취자화(鄒家華), 예정다(葉正大) 등 사망한 중공 고위층 간부의 자녀들처럼 아버지의 전우들에 의해 올라온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장쩌민은 사방에서 작업을 벌여 꽌시를 이용한 기회주의자란 것을 알았다”고 했다.

당시 개혁파와 보수파의 투쟁은 여전히 매우 격렬했으며 장쩌민은 바람 따라 좌우로 흔들렸는데 다행히 나중에 개혁파가 우세할 것을 보아냈기에 판돈을 잘못 걸지 않았다.

일정한 직위가 있으니 위로 승직하기는 훨씬 쉬웠다. 장상칭과의 관계를 이용해 장쩌민은 아주 순조롭게 장아이핑(張愛萍)이 직접 이끄는 전자공업부 부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부장으로 승직했다. 베이징 제1기계공업부 장쩌민의 동료들은 장쩌민이 업무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으나 고위층 노선을 아주 잘 걷는다고 했으며 그는 어떤 사람이나 기회도 모두 이용한다고 했다. 장쩌민은 평소 대량의 시간을 들여 중앙급, 부장급 지도자를 찾아다니며 관계를 맺으려고 애썼다. 장쩌민은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자주 꺼내 복습하곤 했는데 거기에는 이용할만한 관리와 그들의 친척들의 생일과 좋아하는 것 등등이 기록돼 있었다. 장쩌민에게는 또 한 가지 재주가 있었는데 현직 중앙간부와 이미 사망한 중앙간부들의 자녀[장쩌민이 나중에 국가 주석으로 승직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한 쩡칭훙(曾慶紅)을 포함]들과 아주 익숙하게 지냈다. 1989년 장쩌민은 처음으로 덩샤오핑의 집에 갔을 때 그의 아들에게 물을 따라주고 덩샤오핑에게 슬리퍼를 받쳐주었다는 추문은 지금까지도 태자당(太子黨 역주-공산당 간부의 자제를 일컫는 말)들이 술상에서 한담할 때 꺼내는 이야기로 되었다.

왕다오한과 장아이핑이 밀어준 덕분에 1982년 3월, 장쩌민은 56세 나이에 전자공업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열린 중공 제12기 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이 되었다.

장쩌민은 전자공업부에 있는 몇 년 동안 아무런 공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풍류 소문만 많이 전해졌다. 중국 신문에서는 한 도시의 관리가 출국한 기회에 스트립쇼를 보러갔다가 동료들에 의해 검거된 사건을 보도한 적이 있었다. 사실 장쩌민도 80년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라스베가스 윤락가에서 스트립쇼를 보고 매춘하고는 귀국 후 공금으로 결산했다. 당시 일반 고위층 간부들은 아직 감히 이렇게 대담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소련에서 KGB 미녀와 난잡한 생활을 한 경력이 있기에 미국 윤락가에서 매춘한 것은 새로운 여자를 맛보는데 지나지 않았다.

장쩌민이 당•정•군 대권을 손에 쥔 10여 년 동안 중국의 매춘업이 활기를 띠기 시작해 서방 자본주의 선진국을 훨씬 초과하게 된 것은 장쩌민과 같은 탐관오리들이 모두 비공개 혹은 반공개적으로 내연녀와 첩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와서 스트립쇼도 고위층 관리들이 해외로 나가서 감상하는 특권이 아닌, 전국 각지에서 범람하는 ‘선진’ 문화로 되었다. 장쩌민의 이런 공로를 요약한 중국 민요에서는 “남자가 윤락 행위를 하지 않으면 당에 미안하고, 여자가 매춘하지 않으면 장쩌민에게 미안하다”라고 노래했다.

장쩌민은 전자공업부 부장까지 되자 야심이 더욱 커졌다. 그는 이제는 일반 고위층 관리들을 찾는 것이 아니라 부총리나 정치를 관여하고 있는 중공 원로들을 찾았다. 전자 공업부에서는 늘 새로운 양식의 수입 전자제품을 들여왔는데 장쩌민은 업무상 편리를 이용해 칼라TV나 고급 전자제품을 고위층 간부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는 간부들에게 그의 업무를 지도할 수 있게 사용해 보라고 했다. 장쩌민은 원로 핵심 정치 인물들 앞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심지어 무릎을 꿇고 TV채널을 맞춰 주기도 했다.

당시 장쩌민의 머리 나쁜 동료들은 그런 일에는 비서를 보내도 된다고 건의하자 장쩌민은 “이렇게 해야 당의 선배들에게 배울 수 있다”라고 대답했다. 비록 일부 동료들은 장쩌민의 이런 저열한 작풍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장기간의 아부로 신경이 무뎌진 고위층 간부들은 장쩌민을 말할 때면 “업무를 착실하게 한다”고 칭찬했다. 장쩌민은 바로 이러한 수작으로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게 기초를 닦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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