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22장

2014년 9월 3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22사면초가에 빠져 거짓 전기를 출간하고, 9평은 중공에 비바람을 뿌리다

1. 사면초가

조사 요청된 역사적 문제와 개인적 스캔들

2004년 마지막 날 밤, 각종 공연들이 전처럼 화려하게 시작되었고, 사회자는 소리 높여 외치고, 연기자들도 열심히 웃음을 전해 주려고 했지만, 장쩌민은 어떻게 된 일인지 즐거워 보이지가 않았다. 쑹쭈잉(宋祖英)의 공연이 본래 매년 첫 무대를 장식했지만, 이번에는 뒷부분으로 밀렸기 때문이고, 이는 장쩌민이 이미 권세를 잃고 있음을 암시했다.

민간에서도 이미 공개적으로 장쩌민에 대한 도전적인 말들이 유행했고, 이는 그를 더욱 곤란하게 했다.

2004년 2월 21일, 베이징 학자이자 중국 2차세계대전사연구회 회원인 뤼자핑(呂加平)은 중공중앙, 인대(人大) 대표들과 정협 위원들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이 들은 바 있는 장쩌민과 관련된 사실과 소문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편지에는 장쩌민과 쑹쭈잉 사이의 스캔들을 비롯해서, 장쩌민이 그녀에게 어떻게 비밀 쪽지를 보냈고, 어떻게 그녀를 이혼 시켰으며, 어떻게 비밀리에 간통을 했고, 어떻게 국고를 빼돌려 그녀가 오스트리아 빈과 시드니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했고, 또 해군 군비를 어떤 방식으로 쑹쭈잉에게 줘 가무극을 준비하게 했으며, 어떻게 그녀를 이용해, 13억원의 거금을 사용해 국립대극장을 만들었는지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2003년 3월 26일, 뤼자핑은 측근을 통해 후진타오와 기타 중공정치국 상무위원 8명에게 서신을 보냄과 동시에, 그 사본을 중앙 각 기관부서에 보내, 정식으로 장쩌민의 과거 정치 활동을 조사해 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그로부터 반년 후, 중국민주당 프랑스 본부 주석 우장(吳江)은 5장, 8천여 자에 달하는 연구 보고서에서 전 소련 정보부 관리의 회고록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장쩌민은 중국에 잠복한 이름난 케이지비(KGB) 요원이다. 장쩌민은 50년대 모스크바 유학 당시, 소련 정보부가 자신이 매국노로서 중공 조직을 속였다는 사실을 폭로한다고 협박하면서, 소련 스파이가 미인계와 뇌물로 유혹하는 바람에, 비밀리에 KGB 극동국에 가입한 동시에, 중공의 소련 유학파를 불러 모았고, 중국 대륙의 각종 첩보 임무를 맡았다.

뤼자핑은 이 서신을 보낸 후, 장쩌민의 복수를 받아, 3일 동안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인터넷에, 만약 뤼자핑을 풀어주지 않으면, 장쩌민과 쑹쭈잉의 성행위를 찍은 동영상을 유포시키겠다는, 장쩌민에게 보내는 최후의 통첩이 올라 왔다. 놀랍게도, 그 다음 날 뤼자핑이 풀려 났는데, 이로써 그 글이 장쩌민의 약점을 정확히 찔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누가 그렇게 은밀한 장면을 몰래 찍을 수 있었을까? 왜 장쩌민이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에게 도전을 했을까? 이런 사실은 정말로 장쩌민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2004년 5월, 해외에서는 “장쩌민을 밟아 버리자” 라는 운동까지 나타났다. 7월 1일 홍콩에서 50만 명의 시민들이 민주자유를 쟁취하자는 각종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는데, 그 중 “장쩌민을 밟아 버리자”라는 피켓과 그림이 특히 주목 받았다. 당시 많은 행인들도 “장쩌민 밟기” 운동에 참여했다. 쩡칭훙은 이 일을 중대 사항으로 삼고 후진타오에게 보고했지만, 후진타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중 자신들의 일은 그냥 그들 스스로 해결하게끔 하는 게 좋지!” 쩡칭훙은 이 말을 듣고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장옌융(蔣彦永)의 공개 서신과 6.4 동영상

2004년 2월, 2003년 “사스”의 진상을 폭로한 적이 있는 의사 장옌융은 중국 인대, 정협에 서신을 보내, 1989년 학생 민주 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호소했다. 이 서신은 후에 인터넷에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장옌융은 편지에서 자신이 제팡쥔(解放軍) 301병원의 외과 의사 주임으로 있을 당시, “6.4” 사건의 피해자를 직접 치료했던 경험을 밝혔고, 또한 자신이 목격한 환자 몇 명의 사망 원인을 언급하면서, “6.4” 당시 군인들이 확실히 총으로 시민과 학생들을 사살했다고 증명했다.

“6.4”는 장쩌민의 분명한 실수였기 때문에, 그는 황급히 사람을 보내 장옌융을 잡아들이게 했다. 그러나 당시의 장쩌민은 이미 옛날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중공 고위층과 군인들의 불만으로, 얼마 후 장옌융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6.4”사건은 줄곧 장쩌민을 골치 아프게 했다. 권력이 약해질수록, 장쩌민의 마음은 조급해 지기만 했다. 2004년 “6.4” 15주년 기념일 전에, 중공 선전부는 장쩌민의 명령에 따라 “6.4” 동영상을 제작해, 당정군(黨政軍) 기관 고위 관료들에게 보게끔 했고, 이로써 “6.4풍파”와 “통일사상”에 대해 이해 시키려 했다. 또한 장쩌민은 동영상을 현장에서 보게 하고, 바로 회수했으며, 개인적으로 보관하지 못하게 했다. 리펑(李鵬)은 이전에 자신의 회고록을 출판하려고 했지만, 중공이 허락하지 않았고, 장쩌민이 이때 “6.4”동영상을 만들었으니, 범상치 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해외에서는 이를 장쩌민은 자신이 권력을 잡은 과정이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히 사람들이 자신과 “6.4”학살의 관계를 폭로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동영상을 제작한 목적은 장쩌민과 “6.4”사건이 관계 없다고 속이려는 것이었다. “6.4” 동영상의 제작은 분명히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는 장쩌민이 뒷일을 걱정하며, 먼저 선수를 쳐서 “6.4” 사건에 대한 평가를 자의적으로 하려는 데 그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이다.

중난하이(中南海)에 침입한 원로 군인들

2004년 8월 26일 39군 300여 명의 원로 군인들이 가슴에 훈장을 달고,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한 중난하이에 들어와, 화환을 들고는 장쩌민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중난하이에 침입한다는 것은 과거에는 정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침입자는 현장에서 사살이 가능했지만, 39군의 전신이, 유명한 군장을 배출한 둥베이 야전군 제2종대였기 때문에, 경비원들은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원로 군인들이 항의한 것 중의 하나는 당이 군대를 지휘하고, 또한 군대가 당을 지휘하는 문제였으며, 이것이 뜻하는 것은 장쩌민의 퇴임이었다. 후진타오의 비서 왕웨이친(王僞親)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300여 명의 군인들이 중난하이에 들어와 현임 군사위원회 주석 장쩌민에게 화환을 전달하고, 후진타오의 비서가 곧바로 이에 응해 그들을 맞이한 것은, 장쩌민의 권력이 이미 예전과 같지 않고, 후진타오가 더 이상 장쩌민에게 순순히 복종만 하지는 않음을 말해 주었다.

엄밀하게 경호한 전용 열차

장쩌민은 줄곧 수하인들을 그렇게 신뢰하지 않았다. 매번 한 무리를 발탁하고 나서 얼마 후, 장쩌민은 그들의 충성심을 의심했고, 또 다시 다른 무리를 물색하곤 했다. 그래서 장쩌민이 발탁한 장군은 매우 많았다. 그는 하루에 152명의 장군을, 1년에 500여 명의 장군을 발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장군을 발탁했지만, 진정으로 보호가 필요할 때, 장쩌민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

장쩌민은 혹시나 비행기에 누가 폭탄을 설치하지는 않았나 하는 두려움에 비행기 타는 것도 두려워 했다. 2004년 초부터, 장쩌민은 전용 열차를 타고 전국 각지를 다녔다. 그의 전용 열차에는 2개의 내연기관이 있고, 열차 사이의 연결 고리는 독일에서 수입한 후 장착한 것이고, 그 중 한 차량에는 최신 전신전자 설비를 설치했으며, 듣자 하니 그 이유는 전쟁 “돌발”에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매번 열차를 타기 전에, 내부를 수 차례 조사하게끔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측근에게 엄밀히 검사하게 했고, 조사가 끝난 후에는 열차를 봉쇄하고, 경비원들에게 주변을 감시하게 했다.

2004년 7월 초, 장쩌민이 허난(河南) 카이펑(開封)에 간 적이 있었다. 암살 당하는 것이 두려워, 그는 아래 사람에게 사전에 후진타오가 올 것이란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장쩌민은 카이펑에 가서도 최고급 호텔에 머물지 못하고, 허름한 20군 내부의 여관에서 숙박했다. 그달 중순에, 장쩌민은 지난(濟南)군관구에서 우한(武漢)으로 가서, 화중(華中) 지역을 시찰할 계획이었지만, 측근이 그쪽 부대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발견해, 장쩌민에게 보고하였고, 장쩌민은 황급히 우한을 떠났다.

같은 달, 장쩌민은 난징(南京)에서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에 이르는 남순 시찰을 할 계획이었다. 북한 김정일 총비서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일어난 폭발 사건과 같은 것을 방지하기 위해, 혹은 누가 철로에 이물체를 놓거나, 철로 연결고리를 풀러 놓았을까봐 사람을 시켜, 출발 하루 전에 철로 20m 간격으로 경찰을 세워, 24시간 교대하며 순찰을 돌게 했고, 그가 탄 열차가 지나간지 3시간 후에야 경계 태세를 풀 수 있게 하였다.

먼저 칼을 뽑아 든 덩샤오핑 가족들

중공의 2004년 9월 16대 4중전회 소집 전, 장쩌민은 군대에서 대대적인 세대 교체 및 각지에서 대대적으로 군사 연습을 단행해, 군권만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후진타오는 덩샤오핑의 뜻을 받들어, 총서기와 국가주석의 자리를 맡았고, 점점 지지기반을 닦고 있었다. 이에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 투쟁은 나날이 뜨거워졌다.

8월 22일은 덩샤오핑 출생 100주년 기념일이었기 때문에, 각계 각층은 사전에 축하의 뜻을 전달하였다.

2004년 7월 28일, CCTV는 덩샤오핑 가족을 취재 보도하였고, 덩샤오핑 가족은 그가 퇴직 후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장쩌민이 권력이나 정치적 지위에서 물러나지 않으려고 하는 점을 비꼬았다. 중국의 고위 관료들은 보통 하극상을 금기시하지만, 덩샤오핑 가족의 대범한 발언은 그들과 대다수 정치 원로 및 원로 군인들의 장쩌민 수렴청정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7월 31일의 “8.1” 환영회에서, 외신은 중국 국방부 부장 차오강촨(曺剛川)이 연설문에서 후진타오를 지지하고 장쩌민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 관심을 가졌다. 차오강촨의 본심이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발언은 후진타오의 군대 내 지위 상승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2. 저우정이 사건으로 장쩌민에 대항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2004년 6월, “상해 제1 갑부”라고 불리는 저우정이(周正毅)가 주가 조작 혐의와 허위 자본 등록 혐의로 3년형을 선고 받았고, 이것은 후원(胡溫: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이 상하이에 뽑아 든 첫번째 칼이다.

“상해 제1 갑부” 저우정이는 미국 <포브스(Forbes)>가 선정한 중국 갑부 순위 11위이고, 그 소유 재산이 3억2천만 달러에 달한다. 저우정이의 재산과 부인이자 상하이상마오(商貿)주석인 마오위핑(毛玉萍)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마오위핑은 장쩌민의 측근이고, 상하이시위원회 서기 천량위(陳良宇)의 양녀이며, 장몐헝과 아주 가까운 사이이다.

총면적이 18만3천 평방미터에 달하는 상하이 징안(靜安)구 둥바콰이(東八塊) 부지는, 땅값이 징안구 구위원회에 의해 최고가까지 올라가, 이전부터 투자를 계획했던 홍콩 신훙지(新鴻基) 그룹이 투자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저우정이의 배후에 천량위의 동생 천량쥔(陳良軍)이 있었기 때문에, 징안구는 이 알짜배기 땅을 그녀에게 공짜로 줬다.

저우정이는 후에 탈세, 주가 조작과 거액 불법 대출 혐의로 중공기율검사위원회, 국안부 및 중국금융감독위원회 3개 부문에서 조직된 특별팀에 의해 구체적인 조사를 받았다. 이 안건은 중국에서 “건국이래 최대 규모의 금융 사건” 이라고 불렸다.

2003년 5월 하순, 베이징의 중공기율검사위원회는 129명의 연합조사팀을 조직해 상하이에서 지역 최고 갑부 저우정이 사건을 조사하게 했다. 5월 26일 저녁 저우정이는 구류되었고, 6월 1일 베이징으로 호송되어 조사 받았다.

저우정이가 구속된 후, 천량위는 즉시 각지에 사람을 보내 사건 조사 현황을 수소문했고, 갖가지 방법으로 수사원들에게 접근해, 저우정이가 공범으로 누구를 불었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천량위는 기율검사위원회의 전화를 받아, 이 안건은 상하이시가 간섭하고 조사하면 안 된다는 엄중 경고를 받았다. 천량위 측근은 전화를 받고 나서 그의 안색이 확 변하였고, 너무 놀라 두 손을 부르르 떨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천량위는 즉시 상하이시위원회 상무위원회를 소집해, 후진타오를 대표로 하는 중앙에 의견을 표명하며, 상하이시는 반드시 중앙의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련 부문과 협조해 저우정이 눙카이(農凱) 그룹 관련 조사가 잘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상하이는 장쩌민의 영역이고, 저우정이 부부는 장쩌민과 그의 아들 장몐헝, 황쥐 등 상하이방(上海幇)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후진타오가 저우정이 안건에 손을 쓴 것은, 장쩌민 권력에 도전한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천량위의 합의와 저우정이의 유죄 판결은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정치권 세력 싸움이 이미 후진타오 쪽으로 기울어졌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시산(西山) 퇴진 요구와 진실이 된 거짓 “퇴임 의사”

2004년 8월 중순, 훙쉐즈(洪學智), 류화칭(劉華淸), 양바이빙(楊白氷) 등 원로 장군들은 중앙조직생회(中央組織生活會)에서, 장쩌민이 4중전회에서는 반드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서 물러나야 된다는 의견을 발표했고, 이는 이전 정치국위원이자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인 츠하오톈(遲浩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왕커(王克), 왕루이린(王瑞林) 등의 지지를 받았다. 원로 장군들의 의견은 중앙위원과 후보중앙위원에게도 전달되었다. 40여 명의 중앙위원, 후보중앙위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정치국에 서신을 보내, 장쩌민이 퇴임 시기가 도래했다고 견해를 밝혔다.

2004년 8월 하순, 장쩌민은 베이징 시산(西山)의 중앙조직생활회의 현장에서 후원(胡溫)을 비판하며, 후원의 거시경제관리 정책이 경제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질책했고, 또한 사회 동요라도 일어난다면, 막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때 후원은 장쩌민에 복종하지 않고, 이치를 따라 그와 투쟁했으며, 동시에 차오스(喬石), 완리(萬里) 등 당내 원로들을 치켜세우며 장쩌민의 기세를 눌렀다. 이렇게, 시산 회의에서는 후원과 장쩌민의 속내가 드러나게 되었다.

원로 장군들의 “퇴진 요구”와 후원의 불복종은 장쩌민이 수습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장쩌민은 거짓으로 언제라도 퇴임할 수 있고, 정치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정치국상무위원회의 결정에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정치국상무위원회에 이미 자신의 측근을 다수 넣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해도 큰 위험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는 회의를 소집해 토론한 후, 장쩌민 퇴임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 이것은 장쩌민의 의도와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장쩌민은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아주 감격하였고, 자신이 아직 대권을 잡고 있으니, 우쭐거리며, 위엄있는 자태를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9월 1일, 장쩌민은 중앙정치국에 서신을 보내, 자신이 “신중한 고려”를 한 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하지만 장쩌민의 의도는 권력에 욕심이 없다는 거짓된 모습을 보여줘,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가라앉히려는 것이었지, 진심으로 권력을 넘겨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발탁한 측근들이 최후에 이를 “만류”할 것이라 믿었고, 이로써 다시 정권을 잡고, 계속해서 수렴청정할 명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곧바로 반대파 인사에 의해 해외로 전달되었고, 9월 6일 <뉴욕타임즈>는 장쩌민이 스스로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장쩌민은 아주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내부 소식통의 말에 의하면, 장몐헝은 부친이 이미 사임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을 접하고 난 후,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하루 종일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나절 동안, 그는 부친이 이렇게 큰 일을 자신과 상의도 하지 않고 결정했다고 원망했다. 장몐헝은 만약 부친이 사의 의사를 밝히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이를 제기할 수 없었지만, 이미 그렇게 되었으니, 반대파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부친의 결정을 말리지 않은 측근들을 크게 욕하기 시작했다.

장쩌민은 이 소식을 들은 후 다리에 힘이 빠지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반 개월 동안, 장쩌민은 매일 밤잠을 자지 못했고, 몇몇 측근에게 정국을 관찰하며, 최신 동태를 보고하게끔 했다.

9월 초, 장쩌민은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가서 정식으로 자신의 사임안을 토론했는데, 내부에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최후의 결정은 원칙적으로는 장쩌민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사임을 받아들이지만, 현재 정국을 고려하여, 2005년 말까지 유임해달라고 부탁했다.

관례에 따르면, 정치국상무위원회의 의견은 정치국의 안건으로 넘겨지고, 또한 원로들과 지난 회 정치국상무위원들의 의견을 참고한다. 중공15대 정치국상무위원 주룽지(朱鎔基), 리란칭(李嵐淸)이 “의견을 표시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 리루이환, 웨이젠싱(尉建行), 리펑쥔(李鵬均)은 장쩌민의 생각을 “존중”하며, 그의 퇴임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중공 원로 완리, 차오스, 숭핑(宋平), 구무(谷牧) 등도 장쩌민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4중전회가 소집되기 5일 전부터, 정치국은 장쩌민의 사임 문제를 계속해서 토론했다. 회의에서, 개인적 이익이 장쩌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몇 사람은 그가 2005년까지 유임하기 바란다고 요구하며, 그들은 대만 해군의 위협을 이유로 들었고, 장쩌민의 유임은 후진타오의 부담 등을 줄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정치국상무위원회는 장쩌민 사임을 주장하는 원로와 지난 회 정치국상무위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중앙위원, 중앙군사위원회위원들에게 보냈고, 이때 장쩌민은 이미 형세를 되돌릴 수 없었다.

9월 13일, 중앙정치국은 확대 회의를 소집하였고, 중앙군사위원회위원들이 이에 참가하였다. 회의에서 장쩌민이 직접 발탁한 중앙군사위원회위원 쉬차이허우(徐才厚), 량광례(梁光烈), 랴오시룽(廖錫龍), 리지나이(李繼耐) 등은 각각 의견을 표현하며, 장쩌민이 제기한 “사임”을 지지했다.

9월 14일, 4중전회 하루 전날, 정치국은 장쩌민의 사임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는데, 오후에 시작해 저녁 11시 경에야 비로소 끝이 났고, 결과적으로 장쩌민의 사임이 결정되었다. 장쩌민의 오른손 쩡칭훙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밀려, 장쩌민의 사임에 동의했다.

장쩌민은 정계를 떠나기 전, 만일 자신이 퇴임해야만 한다면, 그의 측근들이 반드시 더 많은 실권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9월 14일 중앙정치국회의에서, 장쩌민 측근들은 쩡칭훙에게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위임하고, 광둥성위원회 서기 장더장(張德江)과 상하이시위원회 서기 천량위를 중앙서기처 서기로 하자고 주장했지만, 이 두 가지 안건은 모두 통과하지 못했다.

9월 19일 4중전회 마지막 날, 장쩌민은 피동적으로 사임을 선포하였다. 9월 21일 미국 <뉴욕타임즈> 베이징지국 기자 자오옌(趙岩)은 상하이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베이징으로 붙잡혀 갔다. 쩡칭훙은 누가 해외로 장쩌민 퇴임 관련 소식을 흘려 여론을 조성하게 했는지 조사한 결과,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일이 자오옌에 의해 폭로되어, 장쩌민의 거짓 연극이 현실이 되어 버렸음을 알았다.

장쩌민이 군사위원회 주석에서 물러난 것은 그가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지기 시작함을 의미했다. 이로써 장쩌민이 예전처럼 언론에 자주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가 남긴 수많은 문제점과 그가 범한 죄악은 이렇게 한번에 없어질 수 없는 것이다.

4.서양인을 매수해 거짓 전기를 출간

“001사업”

장쩌민은 오래 전부터 자신의 전기를 만들고 싶어했다. 덩샤오핑 생전에는, 이렇게 할 용기가 없었지만, 그가 죽고 난 후, 장쩌민은 직접 전문 조직을 구성해 자신의 전기를 쓰게 했다. 장쩌민 전기 편집 조직은 있는 힘을 다해서, 자료 수집을 위해 적지 않은 지방을 다녔지만, 사람들이 전해준 말이나 자료는 모두 장쩌민이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달랐고, 또한 그가 출생신분을 바꾼 것과 같은 일들이 언급되었다. 이 조직이 수집한 자료를 보고, 장쩌민은 화가 치밀어 올라, 조직 해산을 명령했을 뿐 아니라, 이 조직원들이 다시는 중용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 일은 또한 점점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서양인이 쓴 첫번째 전기 <장쩌민전(江澤民傳)>은 밍징(明鏡)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캐나다인 중국문제 전문가 두링(Dooling)이 집필하였다. 두링은 서문에서, 우연히 화장실에서 장쩌민을 만나게 되었는데, 비록 대화는 나누지 못했지만, 이 일이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자극해 <장쩌민전>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두링이 책을 집필하면서 중국 정부측 정보와 기초 자료를 사용했다. 그는 중국정부의 지지를 받으며, 유일하게 중국 대륙에서 발행 허가가 난 홍콩 잡지 <징바오(鏡報)>와 <광자오징(廣角鏡)>의 기사를 주로 활용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전기를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정치국후보위원에서 상무위원으로 승임한 쩡칭훙이 마침내 좋은 생각을 마련했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을 찾아 그에게 집필하게 하면, 반드시 통역이 필요하며, 수집한 자료도 번역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면,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일을 진행할 수가 있고, 원하는 데로 전기를 만들 수가 있다.

장쩌민은 이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했고, 즉각 장쩌민 사무실 주임 자옌안(賈延安)을 시켜 일을 진행하도록 했으며, 2001년에 시작된 일이기 때문에, 이를 “001사업”으로 명명했다.

매수할 작가 물색

장쩌민 전기를 집필할 외국인을 찾는 일에 골머리를 썩히던 자옌안은 쩡칭훙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쩡칭훙은 자신들이 무슨 내용이 들어가는지 모두 알아야 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조종하기 힘든 전문 작가를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국내에 큰 규모로 투자를 하고 있는 외국인을 찾아 경제적 이익을 주며, 그를 수매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국가 조사 보고서에서 미국 시티뱅크의 집행 이사 로버트 로런스 쿤(Robert Lawrence Kuhn)이 중국에서 광범위한 투자를 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 경영인으로서, 경제적 이익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를 찾아 장쩌민의 의도대로 <장쩌민전>을 쓰기만 하면, 중공은 시티뱅크의 국내 영업 확대를 보장해 주겠다고 조건을 내 걸었다. 로버트 로런스 쿤은 말을 다 듣자마자, 아주 기뻐하며, 두말없이 이를 승낙했다.

시티뱅크에 각종 우대를 해준 것 외에도, 중공은 시티뱅크 상하이 분점이 2002년 3월 21일부터 중국인의 외환 예금 서비스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티뱅크는 중국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외환 서비스를 제공한 첫번째 외자독자은행이 되었다.

전문 작가가 아닌 쿤은, 어쩔 수 없이 전기 집필을 하는 것이고, 또한 언어상의 장애 및 정신 없이 바쁜 은행 업무와 다방면에서 고객 접대도 해야 했기 때문에, 전기 집필에 마음처럼 온 힘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쩌민은 중앙직속 기관을 시켜 유명한 전기작가 예융례(葉永烈)를 찾았다. 사건 당사자인 예융례는, 2001년 3월 전혀 알지 못하던 중앙 어떤 직속 기구의 국장과 전화로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그로부터 <장쩌민전> 집필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국장은 아예 솔직하게 최근 해외에서 장쩌민의 평판이 좋지않아, 그의 전기를 출판해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이런 추세를 전환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로버트 로런스 쿤은 중국 작가와 공동 집필을 바랬고, 예융례는 당국에 의해 지정된 “첫 번째 선출자”가 되었다.

“자신의 관점을 반영한 <장쩌민전> 출판”

처음부터 장쩌민이 쿤에게 <장쩌민전>을 쓰게 한 목적은 아주 분명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관점을 반영한 <장쩌민전> 출판” 이었다.

예융례는 당국의 지시로, “001사업”으로 명명된 장쩌민 전기 집필 작업에 대해 전면적인 조사를 했고, 3000자 분량의 요약본, 장쩌민 연보 15장, 대량의 참고서적 목록 및 100여 명의 취재 명단을 작성했다. 그러나 당국은 이 책을 “외국인의 이름을 내걸고 출판을 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는 이유로, 예융례와 쿤의 공동 집필을 인정해 주지 않고, 쿤으로 하여금 배후에서 도와주기만 할 뿐, 다시는 공동 집필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게 했다. 이것은 당연히 장쩌민의 생각이었다. 외국인이 장쩌민의 전기를 쓰는 것이 더 적합한 이유는 바로, 국내 인민을 현혹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융례는 쿤의 저작을 도와 전기를 완성했지만, 결국 그의 연구 결과는 모두 쿤의 몫이 된 것이다.

<장쩌민전>은 2005년 2월 이미 출판되었다. 이 책은 메스껍게 장쩌민의 공덕을 칭송했고, 또한 장쩌민이 영토를 팔아먹고, 기독교 가정교회, 민주인사와 파룬궁을 박해한 사실 및 그의 썩은 생활과 탐욕적이고 부패한 정치인생에 대해서는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파룬궁 문제에 대해, <장쩌민전>에서는 그의 입김이 들어가, 파룬궁을 모함한 사실을 완전히 왜곡하였다.

5.<9평 공산당>과 탈당 열풍

아주 오래 전에, 민간에서 장쩌민과 중공의 기묘한 관계가 전해졌는데, 즉 장쩌민이 지옥에서 공산당을 망하게 하는 명령을 가지고 세상에 왔다는 말이다.

당연히 장쩌민이 가지고 내려온 명령은 고르바초프 같이 대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장쩌민의 탐욕과 이기주의 때문에 원래 허술한 중공은 실속 있는 정책을 펴지 못했다. 이처럼 공산당은 본래 낡고 수리하지 않은 폐가처럼,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닌데, 장쩌민에 의해 뒤죽박죽 된 결과, 더욱 좋지않게 된 셈이다.

그 근본 원인은 장쩌민이 자기 고집대로만 파룬궁 문제에 대해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기 때문이고, 중공의 국가 기관을 끌어들여, 함께 악행을 저질렀고, 이들은 서로 이용하며, 함께 의기투합하였다.

장쩌민은 파룬궁 진압을 주장한 후, 숙청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했고, 그래서 가진 애를 쓰며 심복을 정치국에 넣어, 자신이 퇴임한 후에도 정책이 바뀌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장쩌민은 근본적인 대숙청이 하늘에서 내려올 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2004년 11월 18일, 해외 중문 언론 <대기원시보>는 체계적으로 중공의 악행을 폭로한 특별 평론 <9평 공산당(九評共産黨)>을 발표했다. 이 9편의 문장 제목은 각각 다음과 같다. 공산당이란 무엇인가, 중국 공산당 어떻게 일어섰는가, 중국 공산당의 폭정(暴政), 공산당은 반(反)우주적 힘, 장쩌민과 중공이 서로 이용하여 파룬궁을 박해, 중국 공산당의 민족문화 파괴, 중국 공산당의 살인 역사, 중국 공산당 사교(邪敎) 본질, 중국 공산당의 깡패 본성.

<9평>은 80여 년 동안 계속된 중공의 거짓과 폭정의 역사, 그것의 사악한 본성 및 중국 인민에게 가져온 막중한 재난을 폭로했다. 이 평론이 발표된 후, 전 세계에서 호평이 계속되었고, 거대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2005년 3월, 중국 내 많은 성시(省市)의 텔레비전 신호에 <9평>과 관련된 비디오가 삽입 방송되었다. 17일 그 삽입 방송이 나간 지역은 아주 광범위했는데, 대략 1, 2억 시청자들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중공은 <9평>이 자신들의 통치에 미칠 강한 영향력을 직시했고, 대대적으로 <9평>을 봉쇄했다. 최근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중국 인터넷 통제 현황에 대한 보고서에서는 <9평> 사이트가 중공이 봉쇄한 첫번째 중요 대상이 되었다고 밝혔다.

<9평>이 중국 내로 소개되는 것에 대해, 중공은 대대적인 체포를 하는 것 외에, 어떤 공식적인 대응도 할 수가 없었다. 중공은 이전의 대대적인 비판 방식을 고쳐, 이번에는 거의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고, <9평> 두 글자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민감한 사람들은 이번에 중공이 치명타를 받았음을 알았다. 사실 중공은 이미 만약 인민들이 <9평>이 폭로한 중공 성립 과정, 살인 역사, 사교 본질과 깡패 본성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장쩌민과 중공이 통치 유지를 위해서 의존한 거짓 책략이 무너져내릴 것임을 묵인했다. 중공의 어떤 공개적 대응도 모두 <9평>의 확산을 촉진할 것이며, 이는 결국 중공의 멸망 과정을 가속화 시키는 것과 같다.

<9평>이 발표된 후 얼마되지 않아, 대기원 사이트에는 또한 탈당 페이지가 마련됨으로써, 공산당 탈당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2005년 1월 12일, 대기원은 성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대한 중국 인민이여! 공산당이 붕괴될 날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악한 당은 역사적으로 중생(衆生), 신불(神佛)에 대해 하늘만큼 큰 죄악을 범했기 때문에, 신은 반드시 이 악마를 숙청할 것입니다. 만약 어느 날, 신이 누군가에게 공산당을 몰아내라고 지시를 한다면, 소위 사악한 악질 당원도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에 우리는 이렇게 중대 성명을 발표합니다. 공산당과 관련 다른 조직에 참가해 본적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빨리 탈당을 해서, 자신의 사악했던 기억을 지워버려야 합니다. 일단 누군가가 이 마교(魔敎)를 제거하려고 할 때, 대기원이 보관하고 있는 탈당 성명 기록은 공산당과 그것의 다른 조직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위한 구원의 증거 자료가 될 것입니다.”

그 후 더욱 큰 규모로 탈당 추세가 이어졌으며,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탈당을 선언하고 있다. 2005년 6월 초, 이미 200만명이 “3퇴(三退: 중공탈당, 중국청년단 탈단, 소선대 탈대)” 성명을 발표했고, 이 추세는 중공의 통치에 큰 압박을 주고 있다.

백만 명 탈당을 성원하기 위해, 전 세계에 퍼져있는 100여 개의 중국인 사회 단체는 4월 23일 4개 대륙에서 “백만 명 탈당 성원 대시위”를 거행했다. 중국 대륙 20여 개 성과 시의 적지 않은 저명한 민주와 관련 인사들은 대시위 전날 밤 대기원 기자의 취재를 수락했고, 이때 공개적으로 탈당(단대) 성명을 발표해, 적극적으로 대시위 활동을 성원하며 지지했다. 이것은 더 많은 중국 인민들의 탈당 선언을 자극했으며, 또한 <9평>과 탈당 소식은 각 종 루트를 통해서 중국 고위층과 민간에 광범위하게 퍼지게 되었다. 각 방면의 소식을 모아보면, <9평>이 소리없이 중공 안전부, 국무원, 공안부, 군대, 군수 산업, 교육계, 법조계, 체육계, 문화계, 의학계 등 영역에 퍼지고 있어, 더욱 큰 규모의 탈당 행렬을 촉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9평 공산당>은 “공산당을 해체 시키고 있는 책” 으로 불리고 있다.

<9평>의 감화를 받아, 적지 않은 중공 관료들이 탈당을 선언하고 중공을 떠났다. 2005년 6월 4일, 본래 중국 주시드니 영사관에서 정치업무를 담당하던 영사 천융린(陳用林)은 시드니 “6.4기념, 고별중공, 200만 민중의 탈당 성원”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중공 탈당을 선언했고, 호주 정부에 정치피난신청을 했다. 6월 6일, 본래 톈진시 공안국 국내 안전보위국, 610사무실 관료로 있었던 멜번(Melbourne)의 하오펑쥔(郝鳳軍)도 용감하게 나서, 자신의 경험으로 중공이 파룬궁에 가한 참혹한 박해를 폭로하며, 중공이 대대적으로 공포 정치를 했고, 도처에 스파이를 보내 정보를 수집한다는 천융린의 말에 동의했다. 6월 9일 캔버라(Canberra)에 살며, 가족의 안전을 이유로 성명을 밝히지 않은 중공 안전부의 고급 관료는 호주의 경력 있는 변호사 콜레리에게 위탁해, 그가 본 중국 안전부문이 자신들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인사들에게 가한 혹형에 대해 폭로했다.

탈당의 열풍을 좀 식히기 위해, 2005년 1월, 중공은 황급히 행정계통을 뛰어넘는, “공산당원의 선진적 교육활동 영도 조직”이라는 최고 권력 특별 행정조직을 구성하였다. 이 조직에는 58개의 중앙 감독 소조직이 있고, 감독 지방의 각급 정부는 “보선(保先)”운동을 실시했다. 이로부터 중공이 얼마나 <9평>을 두려워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미 공산당 붕괴를 예견했고, 조금씩 견해가 다르기는 했지만, 모두 중공의 멸망이 하늘의 뜻이라고 말했다.

<수이비(隨筆)> 잡지는 2005년 3월호에 <선철(先哲)의 유언>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은 아주 기이한 일 한 가지를 소개했다. 러시아 초기 마르크스주의자 프레하노프(Plekhanov)는 일찍이 80년 전의 유서에서 공산당이 붕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사회 규율을 위배한 공산당이 필연적으로 폭력과 거짓에 의존하는 독재 정부의 길을 갈 것이고, 그 결과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가차없이 지적했다. 그러나 프레하노프는 볼셰비키(소련 공산당의 전신)와 투쟁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유서는 소련 공산당이 붕괴된 후, 즉 1999년 11월 30일 러시아 <독립신문>에 발표되었다.

중국에서는 더욱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2002년 6월, 귀저우(貴州) 핑탕(平塘)현 장부(掌布)향에서 2.7억년 된 “장자석(藏字石)”이 발견되었다. 이 거석은 500년 전에 부서져 나왔는데, 그 단면에는 놀랍게도 정결한 6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중국공산당망(中國共産黨亡)”, 그 중에 “망”자의 크기가 특별히 컸다. 유명한 지질학자, 고생물 전문가들이 조사한 결과, 이 “장자석”에서는 어떤 인공 조각 및 가공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히 세계적인 수준의 불가사의이며, 엄청난 지질학적 연구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연구원들을 따라 이 조사 과정에 참가한 20여 개 중공의 대형 언론 매체들은 이 사실에 대한 보도를 했지만, 모두 “중국공산당” 5글자만을 언급했다. 어떤 사람도 마지막 여섯 번째 글자를 언급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2005년 <9평>이 발표되고 탈당 운동이 일기 시작한 후에야, 중공이 멸망한다는 이 예언은 비로소 인터넷에서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국토를 팔아먹고, 파룬궁을 박해하며, 부정부패를 저지를 때, 장쩌민은 항상 자신의 악행과 중공을 같이 내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중공이 힘을 잃어가기 시작하는 것은 장쩌민 숙청의 날 또한 멀지않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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