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21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21전 세계에서 기소 열풍이 불고, 광범위한 법망(法網)을 피할 방법이 없다
장쩌민은 시카고에서 고소된 후, 매일같이 파룬궁 해외 기소에 대응할 방안 마련에 고심하였다. 장쩌민은 측근에게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파룬궁 기소를 성공하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명령했고, 그래서 그는 경제와 군사 방면에서 파룬궁 대처 방안을 첫 번째 중요 요소로 삼았다. 장쩌민은 미국 정부가 자신의 기소안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사건을 유리하게 이끌게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제적 손실도 감수하려고 했다. 이에 장쩌민은 중공의 주미 대사관에 27명의 스파이를 몰래 투입해, 전문적으로 양원 의원들의 취미나 관심거리 등을 조사하게 하였고, 그들에게 적당한 아부를 해서,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하늘은 도리어 장쩌민의 희망 사항을 들어주지 않았다. 2005년 6월 말까지, 전 세계 29개 국가의 변호사 35명으로 구성된 전 세계 장쩌민 기소 변호사 단체가 조직되었고, 15개 국가와 지역에서 장쩌민을 피고로 16개 소송안이 제출되었다. 만약 장쩌민과 그 밖에 중공 관료를 고소한 22개의 기소장까지 포함한다면, 모두 47개 이상이며, 이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 인권사(人類人權史)에 있어서 가장 큰 규모의 국제인권소송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장에서는 장쩌민을 골치 아프게 하고, 그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친 소송 사건에 대해서 비교적 전면적으로 돌이켜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1. 처음으로 장쩌민을 기소한 안건

2000년 8월, 홍콩 시민 주커밍(朱柯明)과 베이징 시민 왕제(王杰)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최고검사원에 고소장을 제출하며, 장쩌민, 뤄간, 쩡칭훙을 불법적으로 파룬궁을 진압하고 해산 시켰다는 이유로 고소했다. 이것이 제일 첫 번째 기소안이다. 이 고소장이 등기 우편으로 최고검사원에 보내진 후, 피고 장쩌민과 뤄간은 원고를 잡아들이라고 직접 명령했다. 두 명의 원고는 고소장을 보내고 난 뒤 2주 만에 베이징에서 붙잡혔고, 왕제는 2001년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고, 주커밍은 비밀리에 5년형을 선고 받은 후, 지금까지 톈진 차뎬(天津茶淀)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

1999년 장쩌민이 전면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한 이후로, 주커밍과 왕제는 서점에서 법률 관련 서적을 구입하고, 각각 분담해서 법률 조항을 찾아가며, 고소 사실과 이유를 썼고, 2000년 7월 경에 마침내 최고검사원에 보낼 고소장을 완성했다. 두 사람은 장쩌민(당시 국가 주석, 중공 총서기, 국가군사위원회 주석), 뤄간(당시 국무위원, 정법위 서기), 쩡칭훙(당시 정치국 보결위원, 서기처 서기, 조직부 부장)을 파룬궁 박해, “국가의 명예와 사회 도덕을 해치고, 국가 체제, 헌법 및 법률을 무너뜨렸다”는 혐의로 고소했다. 8월 25일, 주커밍과 왕제는 베이징 장안제(長安街)의 한 우체국에서 최고검사원으로 고소장을 발송했다.

장쩌민과 뤄간은 이 일을 알고 난 후, 아주 분노하며, 이를 중대 안건으로 삼고 대대적인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주커밍은 과거에 베이징 옌산(燕山)석유화학 수출 매니저로 근무했던 단서가 발견되는 바람에, 9월 7일, 즉 고소장을 보내고 난 2주 후, 베이징시 하이뎬(海淀)구와 팡산(房山)구에서, 회사 부국장의 도움을 받은 사복차림의 경찰 20여 명에게, 저녁 11시 경, 포위되었고, 당시 주커밍의 집에 기거하던 왕제도 현장에서 불행히 체포되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폭발 시킨 장쩌민과 뤄간

주커밍과 왕제 두 사람이 9월 7일 체포된 후, 그들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을 걱정하던 파룬궁 수련생들과 친구들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알아낸 사실은, “장쩌민, 뤄간에게 직접 잡혔다”, “어떤 사람도 그들에 대해 물으면 안 되고, 관련된 사실을 외부로 누설해서도 안 된다” 였다.

주커밍과 왕제를 체포한 후, 장쩌민과 뤄간은 그들에게 별다른 것을 물어보지도 않고, 단지 개인적인 분노만을 표출했다. 그래서, 공안은 주커밍과 왕제를 심문하지 않았고, 구타와 고문을 했을 뿐이다. 이런 폭행 속에서도 두 사람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을지언정 뜻을 굽히지 않았다. 중국 대륙 공민인 왕제가 받은 고문과 박해는 주커밍보다 더욱 혹독했다.

2000년 11월 30일, 베이징시 중시이제허(中西醫結合)병원이 작성한 왕제의 <진단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2000년 11월 24일부터 2000년 11월 30일까지 7일 동안 치료 받았다. 퇴원 진단. “만성 콩팥 기능 비정상, 만성 콩팥염.” 이 증세는 모두 혹형과 고문을 받아 생기게 된 것이다. 당시 왕제의 체중은 체포되기 전 70kg에서 50kg까지 떨어졌다.

2000년 11월 30일, 왕제의 가족은 왕제를 “보석 석방 후 재조사” 한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사건의 경위를 알고 있는 한 사람은, 당시 왕제는 이미 거의 의식이 없었고, 대소변을 가릴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하루 걸러 한 번씩 콩팥 세척을 해줘야 했다고 말했다. 기자는 다른 병원의 영수증에서, 2000년 11월 30일부터 12월 16일까지, 왕제가 서우두이커(首都醫科) 대학 부속 베이징 유이(友誼) 병원에서 16일 동안 입원치료를 받았고, 총 비용은 9806.98 위안(元)이었는데, 그 중 상당액이 콩팥 관련 검사 비용임을 확인했다.

왕제는 베이징 유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동안, 매일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몸에는 계속해서 핏기가 없었고,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후에 경찰은 집에 돌아가 한약으로 몸조리하라고 동의했지만, “사후 재조사”라는 조건을 부쳐, 몸이 좋아진 후에 다시 잡아서 계속 고문할 생각이었다.

“경찰이 무릎 관절로 내 콩팥을 칠 때 가장 고통스러웠다”

왕제는 집으로 돌아 온 후, 어느 정도 건강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거동이 불편했으며, 움직일 수가 없었다.가족들이 그곳에서 어떤 혹형을 받았냐고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왕제는 대답하지 않고, 단지 눈물만 흘렸다.

2001년 4월 중하순, 왕제는 선인(善人)의 도움을 받아 해외로 도피할 수 있었다. 동년 5월 2일, 왕제에게 기억 상실 증세와 호흡 곤란이 나타나며,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어떤 사람은 파룬궁 수련생이 중공에게 박해 받은 경험담(물 고문, 불 고문, 춥게 하기, 구타 등이 제기됨)을 명혜망에서 찾아 왕제에게 보여주고, 또 미륵일파불의 고된 수련을 이야기해주면서, 그를 격려해줬다. 하루는, 왕제가 갑자기 굳었던 입을 열고 말했다. “그런 고문들은 모두 받아봤어요.” 왕제가 주변의 파룬궁 수련생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자쯔둥을 아세요, 저는 그곳의 고문을 모두 받았어요.” 그 수련생은 이렇게 되물었다. “맞을 때, 무서웠어요?” 본래 말수가 적은 왕제는 이 말을 듣고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대답했다. “설마!” 그 뜻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왕제의 발목은 꽉 쪼여진 수갑으로 뼈가 드러났고, 그 상처는 오랜 후에야 비로소 아물었다. 왕제는 경찰이 자주 사용하던 혹형은 어떤 도구를 써서, 사람을 말아 놓고 폭행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구타하면 외상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왕제에게 물었다. “언제가 가장 고통스러웠어?” 왕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경찰이 무릎 관절로 내 콩팥을 때릴 때,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 왕제는 팡산 구치소에서, 매일 심하게 폭행 당했다. 장쩌민과 뤄간의 명령을 받은 경찰은,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구타만 했을 뿐이다. 경찰이 무릎 관절로 왕제의 콩팥을 때린 후, 왕제는 응급처치를 받고서야 정신을 차렸지만, 한달 동안 의식이 불분명했다.

생의 마지막 날들을, 왕제는 식은땀을 흘리고, 피를 토해내며 보냈는데, 어떤 때는 밥을 한두 숟가락 먹었을 뿐인데 멀리까지 케챱 모양의 피를 토해냈다. 한 의사는 그 당시를 기억하며, 의학적으로 이런 증세는 중추신경을 다쳤을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왕제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서, 잠을 잘 때도 호흡을 하기위해, 내복을 벗거나, 허리부분을 쪼이는 경미한 압력까지도 줄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묵묵히, 굳건한 의지로 고통을 참았다. 2001년 6월 18일 깊은 밤, 화장실에서 쓰러진 왕제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001년 2월, 주커밍의 가족들은 팡산에 와서 그를 데려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가족들이 정작 팡산에 왔을 때, 경찰은 도리어 어떤 사람이 데려갔다는 말만하고, 구체적으로 누가 데리고 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2001년 4월, 주커밍의 가족들은 그가 비공개적으로 5년형을 받고, 현재 톈진 차뎬 감옥에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현재까지, 주커밍은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으며, 그는 중공의 세뇌전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매월 상소장을 작성했기 때문에, 감옥에서 “마지막까지 남을 사람”이라고 불렸다.

경찰은 그가 “사서(四書: 보증서, 시말서, 결별서, 적발서)를 쓰기만 하면, 내보낸다고 했지만, 주커밍은 굳은 신념을 가지고,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사실 주커밍이 작성한 상소장은 전달 될 수신 부서가 없었다.

2001년 8월부터, 홍콩과 미국 파룬궁 수련생들은 수차례 노력을 기울이며, 베이징에 잡혀 있는 홍콩인 주커밍을 석방하라고 호소했고, AP 통신사, BBC, AFP 통신사, <핑궈르바오(Appledaily)> 등 해외 매체는 모두 이를 기사화했다.

2. 장쩌민이 가장 두려워 한 소송

장쩌민은 2002년 10월 미국 시카고에서 기소된 소송을 가장 두려워했다.

중국 대륙에서, 장쩌민은 당과 군의 권력을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 인민들은 그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방법이 없었다. 주커밍과 왕제 같이 용감한 파룬궁 수련생이 소송장을 제출했지만, 최후에 그들에게 다가온 결과는 참혹한 박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해외에서 장쩌민을 기소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미국에서 장쩌민을 기소할 수 있었을까?

장쩌민은 국외에서 계속 연기를 하며, 자신의 긍정적 이미지를 부각시키려고 노력했다. 장쩌민은 겉으로는 강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나약한 인물이며, 중국 인민의 시각이 어쨌든 개의치 않았지만, 국제 사회의 태도는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장쩌민은 비록 국내에서 대범한 방법으로 파룬궁을 박해했지만, 국제 사회에서는 이 사실을 계속해서 부인했다. 국제 사회가 이 탄압 사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장쩌민은 거짓과 속임수로, 법률의 이름을 달고 암암리에 계속 파룬궁을 박해했다. 만약 파룬공 수련생들이 국제 사회에서 장쩌민에게 법률로 대응하고, 세계에 중공의 참혹한 탄압 사실을 이해 시킨다면, 이것은 장쩌민과 중공을 크나큰 두려움에 떨게 할 것이다.

해외에서 파룬궁을 질타하며, 탄압하려고 한 장쩌민의 조급한 마음은, 미국의 유명한 <워싱턴포스트>의 2001년 3월 9일자에 실린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사를 보면, 얼마 전 중국의 원로 외교관 3명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이 3명은 각각 주미 대사, 외교부 부부장을 역임했던 주치정(朱啓禎)과 주미 대사, 주연합국 대사를 역임했던 리다오위(李道豫), 및 주캐나다 대사를 역임했던 장원푸(張文朴)이다. 백악관 국가 안보회는 사전에, 이 3명의 전 대사들이 미국의 대만 무기 수출, 미국이 연합국 국제인권대회에서 중공의 인권기록에 대해 제출하려고 하는 결의안 및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 등의 문제를 의논하러 온 것이라고 예측하고, 미국 국가 안보회 보좌관 라이스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그들과 의견을 교환하려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회담이 시작되자 마자, 한 중공 대사가 미리 준비한 원고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파룬궁에 대한 중국 정부측 성토(聲討)였고, 대략 20분 동안 낭독을 했다. 라이스는 베이징측 대사의 이 설교에 매우 화가 났고, 상대가 원고를 다 읽은 후, 급히 회담을 끝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쩌민이 국외에서조차 이렇게 대담한 짓을 두려움 없이 한 것을 보면, 국내에서 파룬궁의 대우가 어떠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민주자유는 미국의 건국 이념이다. 과거의 청교도들이 종교 탄압을 피해, 즉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왔기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는 종교 자유와 인권 가치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미국의 개국 공신, 예를 들어 매디슨(Madison), 제퍼슨(Jefferson)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저작(著作)을 통해서, 인민들이 마땅히 종교 신앙의 자유와 기타 천부인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의견을 표명했다. 1978년 미국이 연방사법체계를 조직할 당시, 국회의 상•하 양원은 <외국 침권 구제 법안>을 통과시켜, 미국 변호사가 외국인이 국외에서 저지른 위법 행위에 대해 고소할 수 있도록 했다. 1992년 미국 상•하 양원은 <혹형 박해자 보호 법안>을 만장 일치로 통과시켰고, 미국 법원이 인종 학살죄, 혹형죄와 기타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해서 심리(審理)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범법자가 어느 나라 사람이던지, 또한 범죄 행위가 어디에서 발생했던지 상관없이, 범법자가 미국에 발을 디디기만 한다면, 피고로 고소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가 미국 하와이로 도망친 후, 1988년 10월 21일 미국 연방 배심원단은 뉴욕 맨해튼에서 마르코스 부부를 사기죄로 기소했다. 미국 외, 다른 민주국가에도 이와 유사한 법률이 있다.

집단학살죄

장쩌민은 파룬궁을 박해할 때, 중국의 법률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의 공약 또한 완전히 위반했다. 예를 들어, 연합국대회에서는 1948년 <인권 유린 방지 및 처벌 공약>이 통과했고, 그 중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계획적으로 어느 민족, 그 후손, 종족 혹은 종교단체를 전부 혹은 국부적으로 없애려 한다면, 이는 집단학살죄(群體滅絶罪)가 된다. 이런 범죄에 대해서는 범법자가 헌법 상의 통치자, 공무원, 개인일지라도, 모두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누구든지 면책권을 누릴 수 없다. 이런 범죄에는 바로 “보편 관할 원칙”이 적용되고, 설령 범법 행위가 자국 외부에서 일어나고, 가해자 혹은 피해자가 자국민이 아닐지라도, 국내 법규에 의거해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장쩌민 기소는 충분한 법적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파룬궁 수련생들이 미국에서 장쩌민을 기소하는데 타당한 근거가 된다. 2002년 10월, 장쩌민이 시카고에 머무를 당시, 파룬궁 수련생들은 소환장을 피고 장쩌민에게 전달해, 성공적으로 그를 미국 법정에 고소하게 되었다.

무서운 법률

시카고 장쩌민 고소 사건은 아주 큰 의의를 가진다. 고소장이 미국 각 급 법원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전 세계 사람들은 장쩌민이 파룬궁에게 무자비하게 가한 집단학살, 혹형과 박해를 이해하게 되었다.

동시에 이 고소 사건은 또한 전 세계에서 연쇄적으로 장쩌민 기소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장쩌민 고소 사건이 세계 각지에서 연달아 일어났고, 세계 각국의 30명의 변호사들은 공동으로 장쩌민을 고소했다. 이렇게 많은 변호사들이 공동으로 한 사람을 기소한 것은, 전 세계 역사 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장쩌민 고소 사건은 중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고, 각 부문 기구에서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고 있던 수많은 관료들은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들이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언젠가, 파룬궁 박해에 참여한 자신들도 장쩌민처럼 기소 당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장쩌민 기소 사건은 미국의 이익 뿐만 아니라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미국의 <독립선언>에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 자유의 권리, 혹형을 받지 않을 권리, 노역과 반인륜적 피해를 받지 않을 권리를 보장해 주었기 때문에, 적시에 장쩌민이 범한 군체멸절과 혹형범죄를 저지한다면, 이는 분명히 미국의 건국 이념에 부합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중국 인민의 천부적인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 인민의 이익에도 부합한다.

중국은 결코 중공이 아니다. 많은 중국 사람들이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중공의 세뇌 선전에 빠져, 강한 정신력과 문화, 도덕적 근원을 가지고 있는 중국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중국인들은 문화대혁명, 천안문 학살과 파룬궁 진압을 방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장쩌민 고소 사건은 중국의 진정한 도덕 정신 원칙과 서로 일치하며, 중국인을 각성 시킬 강한 도의(道義)적 원천이 될 수 있다.

그 밖의 충돌

장쩌민 소송과 관련해서는, 그가 시카고에서 머문 3일 동안 발생했던 충돌 외에도, 다른 힘겨루기가 존재했다.

2002년 10월 장쩌민이 시카고에 도착하기 전날, 시카고 제 4행정구 구장 브리커는 시정의회에서 파룬궁을 지지한다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 결의안에서는 장쩌민의 지시로 이루어지는 파룬궁 박해를 질책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및 그 외교관이 파룬궁을 수련하는 미국 공민과 시민, 그리고 파룬궁을 지지하는 미국 관료에게 가할 수 있는 위법 행위에 대한 조사를 하라고, 법률에 호소하는 한편, 그런 가해자들을 국외로 추방하자고 호소했다. 그 후, 시카고 의회 인적관계위원회가 주최한 청증회(聽證會)에서, 이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했고, 또한 시정부 의회로 전달되었다. 2002년 11월 6일 오전 10시, 시카고 시장 댈리(Daly)와 모든 시의원이 시카고 정부 의회에서 회의를 한 결과, 이 결의안은 반대 없이 만장일치로 통과하게 되었다.

장쩌민의 방미 기간 중 진행된 결의안은 장쩌민의 시카고 여행에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또 다른 난관이 막 다가오려고 하는데……

2003년 여름 어느날, 한 노인이 시카고 중국 영사관 앞에 좌선을 하고 있었다. 이때 택시 한 대가 노인 앞에 정차하였고, 차에서 어떤 사람이 내리더니, 편지 한 통을 노인에게 건내주고는 사라져버렸다. 영문을 알아 보지 못한 노인은, 저녁에 영어를 할 수 있는 친구를 찾아 부탁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편지가 중국 주시카고 신임 총영사 쉬진중(徐盡忠)이 친필 사인을 해 일리노이주 의원에게 보낸 편지임을 알았고, 편지에서 그는 의원들에게 시카고에서 심리 중인 장쩌민 고소 사건에 동의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당지 의원들은 중국에서 파룬궁이 받는 학대를 동정했고, 또한 매일 영사관 앞에서 수련을 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대사관이 의원들에게 보낸 파룬궁 비방 서신은 이곳에까지 전해져, 나중에는 파룬궁이 장쩌민을 기소하는데 증거 자료가 되었다.

2003년 6월 10일, 미국 국회의원 38명은 “법정지우(法庭之友)”란 이름으로, 법정에 장쩌민 고소 심리를 지지하는 변론문을 제출해, 국무원 사법부가 법정에 제출한 고소 중지 제의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였다. 피고 장쩌민이 “원수 면책권”으로 기소되지 않을 지에 대해서, 미국 의원 “법정지우”에는, <외국 원수 면책법>이 확립한 기본 원칙을 강조하며, 이런 요구 제의는 거대한 정치적인 압력을 통해 얻은 외교적 방안으로 해결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법률 표준에 기초해서 법정이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안건은 중난하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공은 외교적 수단을 이용해 미국과 기타 국가에 “장쩌민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이 소송을 막고 싶어한다”는 뜻을 밝혔고, 미국이 “원수 면책권”으로 이 소송을 중지시키길 바랬다. 국가정부기구의 관료들은 중국 외교관이 베이징으로 장쩌민 기소장을 전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일이 잘못되지는 않을까 “아주 긴장”하며, 계속해서 베이징의 “태도”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한 중국 대사관의 관료는 사적으로, 장쩌민 기소 및 법정 개정과 관련된 자료를, 대사관은 수시로 베이징으로 발송해야 했고, 중공 정치국상무위원들이 계속해서 이 자료들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3. 2차 세계 대전 후 가장 큰 규모의 국제 인권 소송

비록 장쩌민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소송 사건을 막으려고 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장쩌민 기소는 유행처럼 번져갔다. 2005년 6월까지 장쩌민을 피고로 한 소송은 15건이 있었고, 장쩌민의 측근과 관련된 것까지 합하면, 모두 47건 이상으로, 이는 2차 세계 대전 이후의 가장 큰 규모의 국제 인권 소송이 되었다.

이 같은 장쩌민 기소안은 세계 각지 유명 변호사와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아르헨티나의 전 독재자를 법정에 세운, 독일인 형사사건 변호사 카라이커는 2003년 11월 파룬궁 수련생들을 도와, 집단학살죄, 반인류죄와 혹형만행죄로 독일에서 전 중국국가주석 장쩌민을 기소했다.

벨기에에서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인권 변호사 조지 헨리 버설(George Henri Beauthier)은 파룬궁 수련생들을 대표해서 장쩌민을 피고로 형사 소송을 걸었는데, 그는 본래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고소 사건으로 유명해졌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명한 중국계 화가 장추이잉(章翠英) 여사의 장쩌민 기소 계획은 유명한 인권 변호사이자 연합국 시에라리온 특별법정의 주석인 제프리 로빈슨(Jeffrey Robinson)의 도움을 받았다.

과거 중국 형법 조항 제정에 자문을 했으며, 미국의 권위 있는 변호사 중 한 명인 앨랜(Allen)은 장쩌민은 국가 원수 면책권을 누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국가 원수가 직접 집단학살을 지시했고, 또한 정세를 권력으로 좌지우지 했다면, 어떤 국가 원수라도 사법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유고슬라비아의 독재자 밀로세비치도 헤이그 국제법정에서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 또한 사실 국가 원수였다. 만약 히틀러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는 분명히 뉘른베르크(Nuremberg)에서 국가 원수의 신분으로 기소됐을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인권 변호사 모튼 스퀼러(Moton Schuyler)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장쩌민의 혹형과 집단학살죄는 미국 법률을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국제법 및 중국 정부의 법률 마저 위반한 것이다. 그래서 장쩌민 기소는 장쩌민 개인의 범죄 행위를 고소한 것이다. 장쩌민 고소는 세계 인권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이 소송의 의의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모종의 기초, 즉 어떤 국가 관료라도 만약 심각한 인권 침해를 만행 한다면, 예를 들어 혹형과 집단학살, 모두 형사 민사상의 책임을 질 것이다라는 기초를 다졌다는데 있다.”

4. 소크라테스에 심취한 변호사

장쩌민을 기소한 변호사들은 모두 세계적인 수준의 전문가들이다. 장쩌민과 그의 측근들이 해외에 나타나기만 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마도 한 장의 고소장일 것이다. 이런 변호사들은 어떻게 의견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배후에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수많은 뒷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한 가지를 예로 들겠다.

시카고에서 장쩌민을 고소한 변호사 테리(Teri)는 많은 학위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박사 연구 제목은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관한 것이었다. 테리는 여러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는데, 그녀가 박사 연구를 할 때 활용한 언어로는 희랍어와 라틴어가 있다. 그녀는 심지어 범어(고대 인도어)까지도 공부했었다.

테리는 졸업 후에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강사로 재직했고, 그곳에서 주로 비교문학과 경전문학을 가르쳤다. 그녀가 가르친 교과목은 소크라테스, 오거스트 황제, 호메로스(일리아드 저자)와 고대 그리스 부녀였다. 그녀가 거주하던 곳은 해변에서 2분 거리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테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런 편안한 생활에 빠져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법률과 정치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의 방황 끝에, 그녀는 법률 연구를 선택했다. 계속 강사를 할 것인지, 법학 연구생이 될 것인지는, 그녀도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1989년 6월 4일, 그녀는 우연히 베이징 장안제(長安街)에서 젊은 학생들이 탱크에 무자비하게 깔리고, 군인들에게 살해되는 장면을 TV를 통해 보게 되었다. 계속해서 눈물을 머금던 그녀는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학생들이 죽어갈 때 선생님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이런 무고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돕고,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길 바랬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법학 대학원의 입학 통지서를 받고, 새로운 인생을 걷기로 결심했다.

테리는 소크라테스 연구에 푹 빠져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소크라테스의 지혜에 깊게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소위 “선인(agathos)”은 바로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가장 많은 적을 물리친 사람이 바로 좋은 사람을 가리켰다. “도덕”의 개념과 권력 장악의 개념이 서로 복잡하게 뒤섞여, 최고 권력자가 곧 가장 좋은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인들이 선량한 도덕 이념을 키우고 발전시킬 방법이 없었던 이유는, 이런 것들이 약자 혹은 부녀자만이 가지고 있는 품성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큰 공헌은 바로 사람들에게 “도덕”과 명예, 사회 지위, 부와 통치 능력의 차이를 알려 주었다는데 있다. 소크라테스의 가르침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본성적이고, 유신적 특성이 있는 모습이 바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다. 만약 우리가 진정한 자아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변할 것이다.

학술계에서 소크라테스는 도덕과 철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도덕 개념은 지위, 계급, 재부, 명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덕적 깨달음(즉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찾는 과정)을 얻어, 자신의 본성을 되찾는 것이다”. 그는 문답 형식으로 자신의 사상을 알렸는데, 후대에 이런 방식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고 불렀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가난하며, 외모도 볼품 없고, 화려한 의복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바로 초인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학설이 그리스에서 광범위하게 퍼지자, 아테네 상류층은 그에게 두려움과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는 최후에 “이단사설로 아테네 청소년의 정신 건강을 해치고, 아테네가 숭배하는 신 이외의 신령을 알렸다”는 억울한 죄를 받게 되었다. 사형 판결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는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의 대화인 <나의 자아 변호>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 대한 모든 질책을 받아들였다. “만약 너가 나를 석방시킨다면, 그 대가는 나의 모든 철학 사상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테네인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아주 사랑합니다, 하지만 나는 황제의 뜻에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 내가 살아 남는다 하더라도, 나는 내 철학을 포기하기 않을 것이고, 하던 일, 즉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리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친구들이여, 당신들은 아테네의 공민입니다. 이 도시는 지혜와 심령의 힘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당신들이 이렇게 자신의 금전, 명예, 지위만을 추구하며, 지혜, 진리, 선한 마음씨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부끄럽지 않습니까?”, “내 석방 여부에 상관없이, 설령 수차례 죽을 지라도, 나는 내 생활 원칙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테리는 파룬궁의 창시자인 리훙쯔 선생의 <나의 하나의 소감>을 읽었을 때,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어머! 이 두 편의 글은 정말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너무 유사하다. 왜 역사에는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역사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소크라테스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테리는 파룬궁을 도와 앞장서서 장쩌민을 고소하기로 결심했다.

5. 용감무쌍한 민간단체 – 장쩌민기소대연맹(審江大聯盟)

그 밖에, 민간에서도 아주 큰 규모로 장쩌민에 대한 도덕적 심판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공공장소에 모여, 장쩌민에 대한 모의 재판이 열렸다.

2003년 9월 30일, 유럽, 미국, 아시아, 호주에서 온 80여 개의 단체와 사람들이 공동으로 발기한 심강대연맹은 기자회견을 갖고, 이 조직이 정식으로 성립되었음을 선포했다. 이 조직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모든 정의세력을 응집해, 장(江)씨의 모든 죄목을 폭로하고, 장쩌민을 양심, 도덕과 법률의 심판대에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대규모로 열린 독재자의 도덕성 공개 재판은, 전례 없는 민간(民間)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심강대연맹의 성립은 민간 차원에서 장쩌민 기소의 노력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인터넷에서 어떤 평론가는 이런 의견을 표명했다. 인심(人心)은 진정한 법정이고, 가장 공정한 법관이며, 사회 정의를 지키는 가장 두터운 보루이다. 사람들의 내심에서 나온 심판은, 가장 철저한 것이다. 퇴임 전에 이렇게 큰 규모로, 민간(民間), 즉 사람들의 내심에서 나온 도덕적 심판을 받은 것은, 장쩌민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고, 또한 이런 일을 당한 독재자는 거의 없다. 이에 대해, 장쩌민은 화가 나는 한편 두려웠겠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6. 유죄 판결을 받은 중공 고관

장쩌민 이외에, 장쩌민의 측근 또한 각지에서 고소되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중공 대표단과 함께 해외 방문을 한 것이었는데, 모든 일의 주동자가 사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처럼, 파룬궁 박해에 참여한 자들은 기소 당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자와 이와 무관한 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

2000년 이후, 미국의 몇몇 지방 법정에서는 이와 유사한 안건에 대해, 줄곧 파룬궁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처음으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은 중공 관료 – 자오즈페이

후베이(湖北)성 공안청(公安廳) 부청장, 후베이성 “610사무실”의 두 번째 세력가인 자오즈페이(趙志飛)는 처음으로 기소된 중공 관료가 되었다. “610사무실”은 파룬궁 박해를 전담하는 기구이다.

자오즈페이는 2001년 7월 미국 방문 중, 뉴욕 맨해튼 호텔에서 법정의 소환장과 기소장을 받았다. 그는 불법치사, 혹형, 반인류죄 및 국제인권법안을 위반하며 후베이성의 파룬궁 수련생을 박해한 죄로 고소되었다. 자오즈페이는 기소장을 받고 나서 두 가지 질문을 했는데, 첫 번째는 “이것이 무엇입니까?”였고, 위탁인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미국에서 벗어날 수 있나요?”였다고 물어, 자신의 불안한 심리를 드러냈다. “가능해요”라는 대답을 듣고 난 후, 자오즈페이는 황급히 계획했던 일정을 마치고, 그 다음날 비행기로 중국으로 돌아 갔으며, 지금까지 미국에 갈 엄두를 못 내고 있다.

2001년 12월 21일, 뉴욕의 미국연방법원 법관은 자오즈페이의 결석재판을 진행해, 그에게 파룬궁 수련생 학살, 미국연방법률 중 “학대 피해자 보호법”을 위반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유죄 판결을 받은 베이징 시장 장류치, 랴오닝성 부성장 샤더런

2002년 2월 7일, 솔트레이크에서 제 19회 동계 올림픽을 참관하고 있던 베이징 시장이자, 베이징 올림픽위원회 주석 류치(劉淇)는 미국연방법원에 정식으로 기소되었고, 혐의 내용은 베이징 경찰이 그의 명령으로 파룬궁 수련생을 계획적으로 박해했다는데 있었다. 과거 베이징에서 심한 구타와 혹형을 받은 적이 있는 파룬궁 수련생 6명이 류치를 고소했다. 류치는 고문, 혹형, 비인도 및 학대 행위, 이유 없는 감금, 반인권 행위 및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박탈한 혐의로 고소되었다. 또 다른 피고는 랴오닝성 부성장인 샤더런(夏德仁)이었다.

2003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관 에드워드 천(陳)은 류치와 샤더런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고, 외교 면책권을 누릴 수 없다고 했다.

류치가 유죄 판결을 받았을 뿐 아니라 외교 면책권마저 가질 수 없다는 판결은 후에 상급 법원의 법관에게 넘겨져 검정 받았다. 1년의 심리 끝에, 북캘리포니아주의 샌프란시스코 지역 연방법원 법관인 윌킨(Wilkin)은 2004년 12월 8일 지방법관의 판결에 동의해, 베이징시위원 서기 유치에게 자신의 관할 경찰이 저지른 파룬궁 박해와 반인류죄에 대해 책임지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직위에 상관없이, 현임 관료가 만약 반인류죄를 범한다면, 동일하게 법률의 제재를 받는다는 원칙을 확실히 했다.

첫번째로 패소한 뒤 도주한 중공 주외 대사 – 판신춘

장쩌민의 해외 파룬궁 박해정책을 실시하기 위해서, 중공 주캐나다 토론토 부총영사 판신춘 (潘新春)은 2003년 5월 1일 지역 영자신문에 투고해, 토론토 상인이자 파룬궁 대변인인 조엘 치프카(Joel Chipkar)를 공격했다.

2003년 8월, 치프카는 비방죄로 판신춘을 캐나다 온타리오주 고등법원에 고소했다. 치프카는 판신춘의 투고한 문장 중에 “삐뚤어진 마음”, “다른 꿍꿍이가 있다” 및 “사교 세력” 등 중국 정부측이 파룬궁을 비난할 때 사용하는 어휘가 있다고 밝혔다. 치프카는 “중국 관료의 이런 선동적 행위는 캐나다인의 가치관에 대한 조롱이며, 동시에 헌장(憲章)이 우리에게 부여한 권리에 대한 냉소이다”라고 말했다.

비방죄로 법정에 기소된 판신춘은 아무 생각 없이, 중국 주외대사는 무슨 짓을 해도 면책권이 있을 거라 여기고, 수 차례 법정 문건 수취를 거부하다가, 결국에는 결석재판을 받게 되었다.

2004년 2월 3일, 판신춘은 온타리오주 고등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1000 캐나다 달러의 상징적 벌금과 10000 캐나다 달러의 원고소송비용 지불을 선고 받았다. 치프카는 1000 캐나다 달러의 적은 보상금을 요구한 이유는 판신춘이 자신을 비방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지, 돈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장쩌민은 자신의 파룬궁 박해 정책을 세계 각지로 확산시키기 위해서, 모든 주외 대사관에 잘못된 고정관념을 심어주었다. “중국 주외 대사관의 영사는 어떤 짓을 하던지 면책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2004년 2월 3일 판신춘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것은 장쩌민의 거짓말을 반박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가 되었다.

2004년 7월 14일, 판신춘이 벌금 부과를 거부했기 때문에, 캐나다 온타리오주 고등법원은 캐나다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중국은행에 중국 부영사 판신춘의, 벌금 액수에 상응하는 재산 압수 통지서를 보냈다. 2004년 11월 16일, 법정은 판신춘의 자산 조사를 하는 한편, 그를 소환해 자산 현황 및 법정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이유를 듣고, 그에게 법정 선서를 요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일 판신춘은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후에 캐나다 외교부 관계자는 판신춘이 이미 캐나다를 떠나 중국에 숨어 버렸음을 확인했다.

2004년 11월 16일, 원고 조엘 치프카는 변호사에게 위탁해, 캐나다 외교부장에게 판신춘을 캐나다 입국 금지자 명단에 올려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판신춘은 장쩌민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라 파룬궁을 비난하다가 자신의 창창한 미래를 망치게 되었다.

이것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파룬궁 수련생의 명의로 기소되어, 외국 법정이 중공 외교관의 파룬궁 박해에 대해 판결을 내린 사례이며, 또한 중공 외교관이 파룬궁에 대한 악담을 퍼뜨리다 서양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기소되는 뤄간

중공 정법위(政法委) 서기, 중공 “610사무실” 책임자이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인 뤄간(羅干)은 장쩌민의 파룬궁 진압 작전에 가장 열심인 사람이다.

뤄간은 99년 전에 파룬궁 진압을 도발하였고, 파룬궁 진압이 무기력해지자, 놀랍게도 천안문 “분신 자살” 사건을 만들어내, 진실을 모르는 수많은 민중들을 속였다. 뤄간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파룬궁 박해가 다른 곳보다 더욱 심했다. 최근 인터넷에 널리 퍼져있는 가오롱롱(高蓉蓉) 사망 사건도, 뤄간이 직접 조치를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멀리 랴오닝성 선양(沈陽)시 루쉰(魯迅)미술대학 재정처 직원이었던 가오롱롱은 롱산(龍山) 노동교양원에서 6-7시간 동안 계속 전기 고문을 받아,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계속 뜻을 굽히지 않았던 가오롱롱은 후에 한 선인의 도움으로 그곳을 벗어났지만, 뤄간은 그녀를 찾아 보복하라고 친히 명령했다. 극도로 쇠약해진 가오롱롱은 다시 붙잡혀, 악명 높은 마산자(馬三家)교양원에 구금되었다. 2005년 6월 16일 혹형과 박해를 견디지 못한 가오롱롱은, 3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003년 8월부터 2005년 4월까지, 뤄간은 해외에서 집단학살죄, 혹형죄로 14개 국가에서 기소되었고, 구체적으로는 벨기에, 핀란드, 아르메니아, 몰도바, 아이슬란드, 스페인, 대만, 독일, 한국, 캐나다, 칠레, 볼리비아, 페루와 일본이다.

2003년 9월 7일부터 뤄간은 유라시아 4개 국을 방문했다. 아이슬란드, 필란드, 아르메니아 및 몰도바 방문 기간 중 뤄간은 계속 기소 당했고, 이로 인해 역사상 가장 많은 “최고(最)”의 기록을 세웠다. 방문한 모든 국가에서 기소돼, 유사이래 외국 방문 기간 중 가장 많이 기소된 중공 관료가 되었고, 또한 장쩌민을 제외하고는, 해외에서 기소된 횟수가 가장 많은 중공 관료가 되었다.

뤄간의 610 두목 역할과 인권 침해를 보면, 그것이 히틀러의 게슈타포 두목 역할과 비슷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인들은, 이런 인물에 대해,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낄 것이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그곳에서 뤄간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뤄간이 핀란드에 도착하기 하루 전, 핀란드 <수도일보>의 일면과 국제신문 란에는 뤄간의 핀란드 방문과 파룬궁이 중국 고관을 “집단학살죄”로 고소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핀란드 대중들은 언론 매체를 통해, “좋지 않은 인권 침해 기록”이 있는 중국 손님에게 계속해서, “환영하지 않는다”는 속마음을 표현했다. 핀란드 사법부와 외교부는 차례로 대중들의 항의에 변명하듯 이렇게 발표했다. 뤄간은 우리의 국경일에 참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 것이지, 우리가 그를 초청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 누구도 이런 사람과 가까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이슬란드 대중은 뤄간이 오기 전에 이미 언론 매체를 통해 항의를 시작했으며, 이렇게 반문했다. “인권 유린의 대표자인 이런 사람이 어떻게 유럽으로 초청되었나요?” 그리고 아이슬란드 정부는 뤄간이 주동적으로 초청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고, 아이슬란드 정부는 이에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아이슬란드 최고법원장은 심지어 TV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뤄간)가 직접 법원장과 만나려고 하는데, 나는 그가 도대체 왜 나를 만나려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사전에 꿍꿍이를 어느 정도 들켜 버린 뤄간은 너무 화가 나서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쳤다.

그러나 본래 인품이 좋지 않은 사람은 어디를 가도 머리를 똑바로 들 수가 없기 마련이다. 작고 작은 몰도바의 지역 일간지도 장편의 기사를 보도했는데,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몰도바 대통령이 “집단학살”을 만행한 친구를 초대했다.”

처음으로 법정에 강제 출석한 중공 고관 – 천즈리

중국교육부장을 역임했고, 현임 국무위원이자 장쩌민의 패거리 중 하나인 천즈리(陳至立)는 2004년 7월 19일 탄자니아 방문 시기에, 인권변호사에 의해 지역 법정으로 소환되었고, 그녀는 중국교육부가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혹형과 학대를 만행한 죄로 고소되었으며, 7월 19일에는 강제적으로 법정에 출석해 취조 받았다. 법정 소환장을 받고 즉시 연락이 두절되거나, 중국으로 도망간 관료들과는 상대적으로, 탄자니아에 귀빈 자격으로 외교방문을 하던 천즈리는, 그곳의 법정에서 도피할 핑계를 찾지 못한 결과, 숨지 못하고 강제적으로 법정에 선 첫 번째 중국 고관이 되었다.

천즈리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중국 교육부장을 맡았고, 현재는 문교부의 국무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녀는 장쩌민과의 특수한 관계를 이용해 특권을 얻었고, 중국 교육부에서 장쩌민의 박해 정책을 강력히 실행해서, 아주 흉악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파룬궁을 진압했다. 그녀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해, 체계적으로 학생들에게 “파룬궁 진압과 증오심에 대한 타당성” 을 주입시켰고, 또한 파룬궁을 수련하는 학생과 교직원이 다수 구금되게 하는 결과를 직접적으로 초래했으며, 그 중 최소 61명이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2004년 12월 7일, 탄자니아 법정은 천즈리를 혹형과 학대죄로 고소하고, 그녀에 대해서 초보적인 사법 절차를 밟았다.

한 내부 소식통은 피해자들이 제공한 대량의 증거로 천즈리의 죄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배령이 무서워 도주해버린 성위원회 서기 – 쑤룽

중공 간수(甘肅)성위원회 서기 쑤룽(蘇榮)은 이전에 중공 지린성위원회 부서기를 역임했었다. 그 당시, 쑤룽은 “성위원회 파룬궁 문제 처리반”의 우두머리로, 지린성 내 파룬궁 진압행동을 지휘했다. 불법적인 진압 행동이 본격화 되면서, 쑤룽은 적극적으로 파룬궁 수련생의 “전화”와 당적(黨籍) 및 공직(公職) 박탈 등의 처벌을 지지하며 주도했다.

2004년 11월 4일 오후, 쑤룽은 우방궈(吳邦國)와 함께 일정을 마치고 호텔에 돌아가는 도중, 잠비아 고등법원 직원이 직접 가지고 온 법원 소환장을 받았다. 그는 지린성 중공 610사무실 우두머리로 있는 동안 파룬궁 수련생의 살해를 도모했고, 혹형과 능욕을 범했다는 죄목으로 파룬궁 수련생들에 의해 고소되었다. 소환장을 받고 나서, 쑤룽은 어쩔 수 없이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 머무르며 법정 소환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1월 8일, 쑤룽은 예정일에 법정 출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법정 무시죄”가 추가되었다. 11월 13일 오전, 잠비아 고등법원은 쑤룽 소송안을 다시 심리하려고 했지만, 피고 쑤룽은 또 참석하지 않았다. 그 후 잠비아 경찰은 수배령을 내려, 그를 체포하려고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쑤룽의 도피처 – 잠비아 중국투자개발 무역활성화센터에서 그의 옷가지와 개인 용품 등을 발견했지만, 정작 쑤룽은 찾지 못했다. 쑤룽이 묶었던 호텔 기록에는, 그가 11월 8일 오후 2시 방을 뺐다고 나와 있고, 그 후로 그는 종적을 감추었다.

듣자 하니, 쑤룽은 거의 10일 동안 도피를 하다가, 잠비아 경찰의 수배령을 보고는, 친런디(Chirundy) 변경을 통해 잠바브비로 건너갔다. 그 후에는 남아프리카로 갔다가 2004년 11월 15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도주하였다. 내부 소식통에 의하면, 잠비아에서 겪은 이 특수한 “방문”에 대해, 쑤룽은 다시는 아무 생각 없이 중국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파룬궁 박해 참여자들에 대한 법적 추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중공 성급 관료인 쑤룽을 헤이그 국제 법정에 재고소 했다.

파룬궁 진압의 직접적인 지휘자 – 류징

류징(劉京)은 현임 공안부 부부장이며, 파룬궁 박해를 전담하는 “610사무실”의 부주임이다. 파룬궁 유혈 탄압이 날로 극심해짐에 따라, 류징은 이미 인터넷에서 중공의 특급 투사와 인간백정의 대표자가 되었다.

류징과 장쩌민의 인연은 9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류징이 쿤밍(昆明)시 시장을 맡고 있을 때, 쩡칭훙은 그를 찾아, 중국장애인집행이사회 이사를 맡고 있는 덩푸팡(鄧朴方)과의 관계를 이용해 양자장(楊家將)을 몰아내는데 협조를 요청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류징은 장쩌민이 양상쿤(楊尙昆), 양바이빙(楊白冰) 형제를 몰아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특수한 관계로부터, 우리는 류징이 후에 왜 중앙 “610사무실” 부주임과 공안부 부부장을 역임하며, 장쩌민 파룬궁 진압 정책의 충실한 집행자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류징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매우 포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할 때쯤, 류징은 베이징공예(工業)대학 3학년 학생이었다. 중공 고관의 자제였기 때문에, 그는 일찍이 공업대학 당위원에 의해 학생 당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류징은 그와 같이 중공 고관 자제인 급우 탄리푸(譚力夫)처럼, 일찍이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 1966년 6월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이 두완룽(杜萬榮)을 대장으로 문화대혁명 조직을 공업대학으로 보내, 그곳에 주둔하게 하였고, 이때 류징과 탄리푸는 지금이 바로 정치적 도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깨달았다. 자신을 가르치고 입당시킨 공업대학교의 구(舊)당위원들에 대해, 류징은 즉각 고관의 자녀들을 조직해 그들을 헤이방(黑幇)으로 몰아부치고, 양심도 없는 것처럼 공업대학교 당위원들에게 “간부 자녀를 무시하고 박해했다”고 질책했다. 문화대혁명 조직의 교육을 받으며, 류징은 공업대학교 “문화대혁명위원회”의 주임, 탄리푸는 홍위병 총대장이 되어, 두 사람은 한 순간에 학교 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헤이방”과 투쟁하고, 교수를 때리며, 문화대혁명 조직에 반대하는 교사와 학생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또한 그들을 “우파(右派)”로 몰아부치고…… 결과적으로, 공업대학교 내 류징과 탄리푸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박해와 폭력이 있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당시 공업대학교에서 류징의 “문화대혁명위원회”에 의해 “헤이방”, “우파”로 몰린 사람은 모두 300여 명이나 된다.

중앙 610사무실 부주임을 역임하는 동안, 류징은 장쩌민과 뤄간의, 총 발포 명령, 대규모 체포, 파룬궁 수련생 학살과 세뇌 등을 포함한 박해 명령을 전하고 집행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인권회의, 외신기자회견 등의 장소에서 파룬궁을 모함하는 거짓 정보를 퍼뜨렸으며, 당시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인권 박해를 미화하고 찬양하며, 파룬궁 진압을 변호했다. 파룬궁 진압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류징은 2002년 11월 중공 “16대” 이후에 610사무실 주임, 공안부 부부장, 당위원회 부서기를 맡았을 뿐만 아니라, 중공 제16대 중앙위원으로 승임(陞任)했다.

2004년 3월과 2004년 11월 두 차례, 류징은 캐나다에서 집단학살죄, 혹형과 반인류죄로 민–형사 기소되었다.

기소 당한 공안부장 – 저우융캉

2001년 8월 27일 오후, 미국을 방문 중이던 쓰촨(四川)성위원회 서기, 중공 공안부 부장이자 자칭 장쩌민 아내의 처조카인 저우융캉(周永康)은, 파룬궁 혹형 박해, 암살 및 모함을 지시한 혐의로,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기소되었고, 이로써 그는 해외에서 파룬궁에 의해 기소된 두 번째 중공 관료가 되었다. 소식에 의하면, 미국 일리노이주 북부 법원은 이미 이 안건을 입안 처리하였다고 한다.

저우융캉은 쓰촨성위원회 서기로 있을 때, 장쩌민을 도와 파룬궁을 진압했다. 저우융캉은 파룬궁 수련생 박해를 적극 장려하며, 또한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암살, 혹형과 실종 등의 수단을 써서 자신의 관할 구역 내에 있는 파룬궁 수련생을 협박하고, 전화하는 전 과정을 감독하고 지시했으며,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연좌제 정책을 실행했다. “부모가 파룬궁을 수련하면, 그 자녀를 퇴직시킨다. 자녀가 수련을 하면, 그 부모를 퇴직시키고, 퇴직금도 주지 않고, 경제적 소득원을 없애 버린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쓰촨성에서 박해 받아 사망한 파룬궁 수련생은 43명이나 되며, 그 중 어떤 사람은 참혹한 고문을 받다가, 혹은 현장에서 맞아 죽었다.

저우융캉은 쓰촨 지역의 황제로 군림할 때, 강도 높은 압박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은 그를 아주 증오하며, 흔히들 “인권 살인마”로 불렀다. 파룬궁 진압과 티베트 자치구의 티베트인들을 박해한 것 이외에, 저우융캉은 언론 매체를 협박하며, 기자들까지도 박해했다.

저우융캉은 또한 언론에 자신의 기사를 더욱 많이 게재하라고 요구했다. 그의 뜻에 따라, 2001년 “7월 1일(중국공산당 창당기념일)”자 <청두상바오(成都商報)> 1면에는 그의 대형 사진이 실렸다. 그 다음 날, 측근의 충고를 듣고 나서, 그는 <청두상바오>에 장쩌민의 대형 사진을 실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진의 크기가 같고, “7월 2일”자에 장쩌민 사진, “7월 1일”자에는 저우융캉의 사진이 실렸기 때문에, 성 전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저우융캉은 제멋대로 헌법과 법률 규정을 깨고, 법관 임명장을 배포하는 월권 행위를 했으며, 인대와 정협 회의에서 자신의 “중요 강화”를 발표했다. 어떤 사람도 그의 연설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고, 피곤해하거나 마음에 없는 듯한 표정을 짓지도 못했다.

그는 간부회의에서 마음대로 고위 간부를 모욕했으며, 종종 “중앙에서 나를 보냈다”, 나는 장쩌민 주석의 측근 인사다”라고 자화자찬 했다. 그는 또한 스예(實業)호텔에서 수차례 호텔 여직원을 성희롱 했다. 성인민대표자 회의 기간에, 쩌우융캉은 호텔에 머물면서, 공개적으로 성적 요구를 드러내어, 성위원들과 호텔 직원들은 격분했지만 감히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장쩌민은 상하이 공안국 국장을 그의 외손자 우즈밍(吳志明)으로 바꾸려고 했지만, 공안부장 자춘왕(賈春旺)이 자신의 패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티베트의 살아 있는 부처 카르마파(Karmapa)가 도망간 것을 핑계로 잡아, 고의로 지어낸 성난 표정으로 책상을 크게 주먹으로 치며 자춘왕에게 욕했고, 이어서 만약 바오퉁(鮑彤) 같은 사람이 도망간다면, 퇴직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날 베이징 공안당국은 18명의 사람을 시켜 24시간 동안 바오퉁을 쫓아 다니게 했다. 중공 고위층의 말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저우융캉을 중앙 공안부장으로 삼으려는 기초 작업에 불과한 것이었다.

장쩌민은 저우융캉이 혼신의 힘을 다해 파룬궁 진압에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퇴직한 후에도 계속해서 파룬궁을 박해하길 바라며, 그를 직접적으로 파룬궁을 진압할 수 있는 공안부장으로 승임시켰으며, 그에게 파룬궁 진압 전문 기구 – 중공 “610사무실(후에는 “사교 문제 처리 사무실”이란 거짓 명칭 사용)” 부주임과 정치위원회 부서기 자리를 맡겨, 그가 더욱 두려움 없이 파룬궁을 박해할 수 있도록 했다.

저우융캉이 베이징 공안부장으로 승임한 후, 쓰촨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깡패들이 전부 치안을 담당하니, 이 나라는 이제 희망이 없구나. 저우융캉과 전임 자춘왕의 정치 스타일은 예상대로 아주 상이 했으며, 그는 “치안방공체계(治安防控體系)”를 만들었는데, 그 목적은 장쩌민의 “적대 세력”을 모두 무자비하게 진압하는데 있었다.

저우융캉은 후에 16대에서 정치국에 들어갔고, 국무위원 겸임 공안부장으로 승임했는데, 이 모든 것이 장쩌민이 내린 상이었다. 장쩌민은 그의 가족 규모가 크지 않고, 아들과 외손자 및 조카가 적은 것을 아쉬워했다. 왜냐하면, 정치국 회의를 자기 집안 행사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 11월, 캐나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캐나다 법정에 장쩌민, 뤄간, 류징, 저우융캉, 리강칭(李崗淸)등 다섯 명의 전–현임 중공 고관을 기소했다.

기소된 장쩌민의 군사 참모 – 쩡칭훙

2002년 10월, 한 법률 소송 문건이 연합국혹형반대위원회, 연합국인권위원회와 국제형사법정에 전달되었는데, 피소된 사람은 파룬궁 박해 주도 인물인 장쩌민, 당시 중앙조직부부장 쩡칭훙과 정치국비서 뤄간이었다. 그 소송 문건에는 그들이 파룬궁 박해 운동을 발기하고 추진한데에 대해 씻어 낼 수 없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문건에는 국제형사법정이 세 사람의 피고에 대해, 국제형사법에 의거한 전면적인 조사를 하길 바란다고 적혀 있었으며, 기소자는 각각 캐나다, 미국, 프랑스, 호주, 아일랜드, 홍콩인이었다.

2005년 1월 29일, 쩡칭훙의 남미 방문 기간에, 페루 파룬궁 수련생들은 페루 최고법원에 쩡칭훙, 장쩌민, 뤄간과 薄熙來을 피고로 하는 소송을 하며, 그들이 중국 대륙에서 파룬궁 박해 및 집단학살죄와 반인류죄를 범했다고 기소 이유를 밝혔다. 페루 최고법원은 그날 오후 이 소송장을 받아 들였다.

쩡칭훙은 장쩌민의 군사 참모이고, 중앙조직부를 통제하며, 장쩌민의 파룬궁 진압 정책에 필요한 모든 조직 일정과 사상 통일을 책임지고 진행했다. 내부 소식통에 따르면, 쩡칭훙은 장쩌민의 진압 정책을 위해서 수많은 관련 의견을 제기했다.

유럽 사법 역사상 처음으로 조사령을 받은 중공 고관 – 리강칭

리강칭(李崗淸)은 혹형죄로 프랑스, 벨기에, 대만, 독일, 캐나다, 칠레와 네덜란드 등 해외에서 모두 8번 기소되었는데, 그 중 프랑스 소송안이 그를 가장 골치 아프게 했다.

1999년 장쩌민이 파룬궁 진압을 결정한 후, 6월 10일 경, 장쩌민은 “파룬궁문제처리전문조직”을 만들길 원했고, 당시 부총리 리강칭은 장쩌민의 꼬임에 넘어간 첫번째 사람이 되어, 610사무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999년부터 2003년에 퇴직 할 때까지, 리강칭은 계속해서 전국 규모의 진압 행동을 책임졌다.

인권조직 “조사국제(追査國際)”의 조사 보고서에는 리강칭은 중공파룬궁문제처리조직을 맡고 있을 때, 과학기술, 교육, 문예, 노인문제 등 여러 방면의 박해를 지휘했고, 전국적으로 반(反)파룬궁 시상식, 전람회 연설에서 파룬궁에 대해 악담을 퍼부었다.

리강칭의 아들은 유럽에서 공부를 마치고, “가업을 이어”, 아버지가 근무했던 중국 중싱치처(重型汽車)그룹에서 일했다. 95년 이 그룹과 스웨덴이 41억 위안 규모의 합작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기회를 노려, 40억 위안을 마치 “바람을 타고 사라”지는 것처럼 빼돌렸다. 이 40억 “손실” 중, 10억은 리강칭의 아들과 관계가 있다.

비록 이 일을 계속해서 숨기려고 했지만, 진실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었다. 회사 소재지인 지난(濟南)시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산둥(山東)에는 실직 노동자들이 아주 많았는데, 본래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그들은, 리강칭 아들이 그렇게 많은 검은 돈과 관련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더욱 분노했다.

산둥성위원회 서기 우관정(吳官正)은 흉흉한 민심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자신의 지위조차 부지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이 사건을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리강칭은 산둥에서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하면, 하나 밖에 없는 아들(리강칭은 딸이 한 명 더 있다)이 좋지 않게 물러나게 되는 변고가 생길 것임을 느꼈다. 그래서 리강칭은 장쩌민에게 가서 하소연하며, 그가 도와주기를 바랬다.

계속해서 자신에 충성하던 리강칭에게, 장쩌민은 그를 자칭린(賈慶林)이나 그의 부인보다 덜 챙길 수는 없었고, 리강칭도 당연히 “아들 때문에 괴로워”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장쩌민의 “모든 일을 한 번에 처리할 수는 없다” 는 지시에 따라, 결과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리강칭은 이를 통해, 장쩌민 총서기에 충성만 하면, 어떤 부정부패를 저질러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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