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20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20사스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군권 유지를 위해 애써 허덕이다
1. 사스 전염병

2003년, 무시무시한 비전형성 폐염(사스, SARS) 전염병이 전 세계를 위협했다.

사스는 30여 개 국가에서 만연했으며, 전 세계적으로 8천여 명이 감염되어, 8백여 명이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30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 감염자 중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으며, 홍콩과 중국 대륙의 사스 병례(病例)는 전 세계 총 수의 80%를 차지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은 중공이 정확한 통계를 숨겼다고 의심하며,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전염병 확산을 숨겨 연임을 도모하다

사스는 2002년 11월 중국 남방에서 처음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막 16대 회의가 소집되었기 때문에, 장쩌민은 자신의 중앙 군사위원회 직위 유임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중국 언론은 16대에서 양호한 정치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요구를 받았고, 종종 장쩌민의 구호인 “안정이 모든 것을 잠재울 수 있다”를 계속해서 기재했다. 중공의 중앙 선전부 내부 간행물에서는 분명하게,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SARS), 즉 사스가 언급 되었지만, 중국 언론은 중공의 명령으로 계속해서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전 세계 중국어 권역에서는 “SARS”를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이라고 했지만, 중공만이 유일하게 “비전(非典: 비전형성 폐염)”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인민들의 공포 심리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인민의 공포심을 덜어 주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한 것이지, 단지 명칭을 바꿔 사람들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은 어떤 긍정적 작용도 할 수가 없다. 인민은 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근거 없는 소문에 의해 더욱 쉽게 두려움에 떨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과 타인을 모두 속인 방법은 확실히 장쩌민의 “안정이 모든 것을 잠재울 수 있다”는 방침을 따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광둥(廣東)에서 첫 번째 병례가 발견된 후, 장쩌민의 측근인 리장춘(李長春: 정치국상무위원, 광둥성위원회 서기)을 필두로 한 선전부는 갖가지 방법으로 사실을 숨기려 했고, 전염병은 점차 다른 성(省)까지 퍼지게 되었다. 리장춘이 광둥을 떠날 때쯤, 광둥 관료 내부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이 생기기 시작했다. 광둥 지역 신문에서 사스 전염병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을 때, 장쩌민은 저장(浙江)성위원회 서기인 장더장(張德江)을 급히 광둥성위원회 서기로 임명해, 그가 직접 광둥성위원회 선전부장 중양성(鐘陽勝)을 감독하게 했고, 그에게 수차례 언론 통제를 명령했다. 2월 말에서 3월 초, 광둥성위원회 선전부는 아예 각 신문사에 인사 개편을 단행했다. 한 차례 인사 개편이 있고 난 후, 광둥 언론 매체는 중앙 선전부 장쩌민 측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때부터 전염병 관련 보도는 언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전염병 은폐는 전형적인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방법이다. 비록 언론 보도는 통제할 수 있었지만, 바이러스는 막을 방법이 없었고, 그 결과 광둥에서는 사스가 점점 퍼지기 시작했다. 2003년 2월 전 세계에 사스가 퍼진 후, 세계 각 지역 언론은 매일같이 사스 사망 병례 및 현황에 대해 보도했다. 그러나 사스의 발원지인 중국에서는, 도리어 특히 정부측 언론 매체는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다.

2003년 3월 초, 전인대와 정협의 베이징 회의 소집 기간 중에, 광둥의 한 의사의 병세가 매우 좋지 않아서, 홍콩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는데, 그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충격적인 보도가 전해졌다. 홍콩 언론은 그제서야 사스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조치를 취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다. 그때부터 홍콩에서도 사스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홍콩은 국제 사회에서 경제, 교통의 중심지이고, 사람과 화물의 집산지이며, 매일 얼마나 많은 비행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발병한 사람은 쉽게 추적할 수 있지만, 병원균을 추적 조사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잠복기에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또한 파악이 불가능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중공에 즉각 국내의 사스 발병 상황과 확산 범위 등을 통보하라고 요구했다.

3월 26일, 장쩌민의 주치의이자 위생부 부장 장원캉(張文康)이 세계보건기구의 압력으로 베이징에서 처음으로 전염병 상황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광둥에서 792명이 감염되었고, 31명이 사망했다는 사실만 보고했을 뿐, 다른 지역의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후진타오(胡錦濤)가 지방 정부와 관원들에게 매일 전염병 현황에 대한 보고를 하라고 지시했지만, 축소, 거짓 등 왜곡 보도가 많았다. 이에 장쩌민의 측근인 장원캉이 후진타오에게 공격적인 발언을 했는데, 그는 중국 법규상 매일 전염병을 보고하라는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중공이 이렇게 고의적으로 전염병 확산 사태를 간과했기 때문에,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고, 결국에는 중국 남방의 광둥성에서부터, 중국 수도 베이징과 중난하이(中南海)를 포함해, 20여 개 성시(省市)로까지 퍼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을 통해서, 전염병은 아주 빠른 속도로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사실, 당시 중공과 독립적인 북미지역의 중화권 방송국 – 신당인 방송국은 2003년 2월부터 사스와 관련된 보도를 하면서 세계에 경고했지만, 애석하게도 대륙의 언론 봉쇄로 인해, 인민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이와 반대로, 4월 2일, 중국 정부측 언론은 “이미 비전염성 페렴 전염병의 효과적 치료책이 마련되었다”라고 보도했다. 다음 날 위생부 부장 장원캉은 외신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장담하는데, 중국에서 업무, 생활, 여행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때 중국 전역은 이미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고, 각 대도시에서는 한약(中藥)인 판람뿌리침제(板藍根浸劑), 녹두, 흰색 식초, 소금 등을 사재기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많은 약품의 가격이 일제히 상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어떤 사람은 <卜算子(부쏸쯔)>라는 노래를 지어 이 기이한 현상을 조롱했다. “비바람이 가고 봄이 왔는데, 사스도 같이 왔구나, 이미 봄빛이 이렇게 눈부신데, 두꺼운 마스크를 쓰고 다니네. 그러고도 불안한지, 미친 듯이 약을 먹으며, 약이 다 팔리자, 악덕 상인들이 웃기 시작하네.”

위기가 도래했을 때는, 인민이 정부 발표를 얼마나 신뢰하는 지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비록 장쩌민 측근이 이미 사스 치료책을 마련했다고 말했지만, 베이징의 수많은 노동자, 학생들은 고향으로 되돌아갔고, 또한 주중(駐中) 외국계 기업인들도 모두 베이징을 떠났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베이징 특파원의 추측을 인용해, 사스 발발 일부터, 연일 계속해서 거의 100만 명이 베이징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동(同) 신문 보도에서는, 최근 베이징 공항, 기차역은 그 곳을 떠나려는 인파로 북적거린다고 말했다. 또한 베이징의 대학교에서는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었는데, 예를 들어 민주(民族) 대학교에는 이미 2/3의 학생이 교정을 떠나 버렸다. 이런 베이징 도피 현상은 사스의 전국 확산을 더욱 부추겼다.

중국 정부측이 사스의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했다고 다시금 강조할 때, 중궈런민민제팡쥔(中國人民解放軍) 301병원 퇴직 외과 의사인 장옌융(蔣彦永)은 공개 성명을 발표해, 중국 위생부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옌융은 4월 3일까지, 총후근부(總後勤部)에 의해 사스 치료 병원으로 지정된 309병원에는 이미 60명의 감염자가 입원했고, 그 중에서 적어도 6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 위생부 부장 장원캉이 4월 3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베이징에는 단지 2건의 관련 병례가 있고, 그 중 3명이 사망하였다. 301 병원에 복직한, 당년 71세의 한 외과 의사는 동료 의사와 간호사들은 그의 이런 망언에 아주 화가 났다고 말했다.

2주 후 위생부 부장 장원캉이 면직되었고, 이로 인해 여론이 한 차례 술렁거렸다.

장쩌민 측근이 계속해서 사스를 숨기려 할지라도, 전염병은 소리없이 우리에게 다가 왔다. 4월 중순 사스는 중난하이로까지 퍼져, 정치국 상무위원 2명이 쓰러졌다. 뤄간(羅干)과 우관정(吳官正). 우관정은 4월 1일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뤄간은 4월 12일 이후 몇 달 동안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절대 기밀을 지인을 통해서 접하게 된 장쩌민은 아주 두려워 했고, 정부측 매체는 그들이 어떤 지방에 조사를 나갔다고 계속해서 거짓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두 사람은 병마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국제 회의에서, 중공 정부가 언론을 봉쇄하고, 전염병 진행 상황을 숨겨, 바이러스를 잡을 수 있는 호기를 놓쳤기 때문에, 사스가 전 세계에 만연하게 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90여 개 국가는 중국에 비자 발급을 중지했다.

중공이 사스에 대해서 침묵하고, 관련 자료의 외부 유출을 봉쇄한 것은 지구의 대재앙을 불러 와, 전 세계는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었고, 또한 고귀한 생명이 사라졌으며, 이런 중공의 조치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살인하고 입을 막는 것이 바로 '안정'

각 국의 조직과 여론이 중국 정부의 “사스” 처리 방식에 대해 비판을 하고 난 후, 국가 주석 후진타오는 위생부 관료들에게 “비전형성 폐염 병례”를 더 이상 숨기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 두 사람은 대중 매체에 빈번히 출현하면서, 직접 사스 방지에 나섰다.

그러나 장쩌민은 뤄간, 우관정이 쓰러진 후에 즉각 친지들과 함께 상하이로 피했다. 이때 장쩌민 측근들은 후방으로 물러나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에게 총대를 주고, 최전방에서 사스와 싸우게 했는데, 이는 사실 이를 빌미로, 후진타오를 제거하려는 계획이었다. 장쩌민은 상해에 도착하자마자, 목숨을 내걸고 상하이를 보호하라고 명령했다. 그 결과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 천량위(陳良宇)만 괴로움을 끊임 없이 호소하게 되었다. 그는 사스 전염병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소리없이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가는데, 사람이 어떻게 목숨을 내걸고 사스와 싸우냐고 반문했다.

장쩌민은 소위 “안정이 모든 것을 잠재운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상해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스로 병원에 입원할지라도, 정부측 발표는 4명을 유지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웃기는 이야기죠, 우리 아파트에서만 5명이 사스에 걸렸는데”라고 현황을 비웃었다. 후에 감염자수를 7명으로 올린 이유는 환자 중에 3명의 외국인이 있어, 보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염병에 걸린 마지막 환자를 치료 할 때까지, 상해시가 발표한 환자수는 계속해서 7명이었다. 이 “삼개대표(三個代表)” 실현은 상해를 안정시키는데 충분한 역할을 수행했다.

후진타오가 남방의 사스 현황에 대해 시찰하고 난 보름 후, 사스를 피해 상하이로 도망친 장쩌민은 4월 26일, 상하이에서 처음 가진 공개 성명을 통해, “중국은 사스 치료에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고 말했다. 그러나 사스에 대비하기 전, 장쩌민 측근들은 사실을 왜곡하며, 거짓말을 하고, 전염병을 피해 도망갔기 때문에, 그들은 인민의 원망과 경시를 받게 되었다. 한 북경 대학교 학생은 인터넷에서 장쩌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난국을 피해 상하이로 도망가다니! 죽음이 두려워!”

그러나 장쩌민이 어디로 도망가던지, 사스 전염병은 위력을 더해갔다. 상하이가 비록 그의 명령 “목숨을 내걸고 상하이를 지켜라” 를 고수했지만,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장쩌민은 상하이도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랴오닝(遼寧), 산둥(山東)으로 도망갔다. 5월 말 사스가 좀 잠잠해지고 나서야, 장쩌민은 비로소 남몰래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중난하이로 가지는 못하고, 위취안산(玉泉山)에 머물렀다. 어떤 사람은 이를 조롱하며 말하길, 죽음을 두려워 한 장쩌민은 이리저리 도망 다녔는데, 이는 그가 어디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스 만연의 전반적인 과정을 보면, 장쩌민 및 기타 측근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수했던 기만 정책은 지구 대재앙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안정”유지를 외쳤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들 권력의 안정 유지였지, 몇 명의 인민이 죽던지 그들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사스 전염병이 공개적으로 발표된 후에도, 장쩌민은 여전히 전염병과 관련된 사실을 숨겼다. 미국 주간지 <타임매거진> 보도에 따르면, 4월 22일 세계보건기구 전문가들이 베이징제팡쥔(北京解放軍) 309병원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 309병원은 이미 전염병에 걸린 40여 명의 환자를 한 여관으로 옮겼다. 그 밖에 중르유이(中日友好) 병원에서도 사스 환자를 숨기는 상황 — 31명의 사스 환자를 황급히 구급차에 태우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시킴 — 이 발생했다. <타임매거진>에 전화를 걸어 이 제보를 한 기자와 통화를 했는데, 그녀는 중르유이 병원의 간호사들도 이런 조치에 대해 아주 화가 나있었다고 말했다, 이유는 그들도 사스 환자와 함께 구급차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중공은 어떤 지방에서라도 사스가 발발하면 지역 책임자를 면직 시킬 것이라는 장쩌민의 명령을 전국 각지로 하달했다. 그래서 지방 각 급 정부 관료들은 발병 상황을 상부에 보고하길 두려워 했고, 각 종 방법을 갈구하며,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사스를 “소멸(殲滅)”하고 감추었으며, 가장 보편적인 수단으로는 병원에서 사스로 죽은 환자의 사망 사유를 바꾸는 것이었다. 내부 관련자의 말에 따르면, 사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병원에서는 환자를 “안락사(安樂死)”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이 시기, 각 지역에서 사스 전염병은 지역 정부의 절대 기밀이 되었다.

광둥성의 한 의사는 익명으로 말했다. “사스 환자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자료는 없지만, 베이징 정부가 각 지역에 지표, 즉 지역 마다 배정 환자 수를 통보한 후, 지방 관료들은 중앙의 배정에 맞추어 보고하였으며, 그들이 보기에 중국이 발표한 통계자료는 아주 한결같았다.” 선전(深圳) 공안국에서 사스 사망자 안건을 전담한 한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사스로 죽은 환자는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공안국은 그 시체를 불태워 버렸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베이징 정부가 선전에 할당한 수는 30명을 초과할 수 없었지만, 사실 선전에서 사스로 사망한 환자는 정부의 할당 수를 훨씬 초과했다.”

광둥, 쓰촨(四川)과 둥베이산성(東北三省) 등지에서는 군인들이 “봉촌(封村)”의 방법으로, 사스가 발발한 수많은 촌락을 봉쇄했다. 그 구체적 방법은 다음과 같다. 전화선 절단, 주민의 이주 금지, 정보 봉쇄 등이 있었다. 어떤 촌락이 봉쇄당한 후, 한 주민이 몰래 그곳을 빠져 나오려고 했지만, 군인에게 발견되어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봉쇄된 대다수 촌락에서, 경찰은 주민들이 거의 죽어 없어지길 기다렸다가, 시체를 대폭적으로 소독 처리하였다. 중국 선전 공안국의 한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병원에서는 이미 사스 사망자의 시체 처리를 책임지지 않았고, 군대와 공안국이 이를 이어서 관리했으므로, 군부대가 사망자의 화장을 담당했다.”

듣건데, 6월 말까지 둥베이 지역에서만 만 명이 사스로 사망했다. 중공은 이 사실과 대륙 언론의 보도를 엄격하게 봉쇄하였다. 중국 선전부의 한 문건을 통해, 언론사들이 사스 관련 보도를 할 때, 반드시 신화사가 보낸 원고를 그대로 올려야 하며, 그 밖의 지역에서는 독자적으로 사스와 관련된 어떤 소식지도 발간할 수 없음을 명시했다. 이 일이 있기 전, 중공 선전부는 전국적으로 언론을 감사하며, 신문사들을 단속해, “말을 듣지 않는 언론”이 이런 사실을 내보내지 못하도록 방지했다.

2002년 11월 16일 광둥에서 처음으로 사스 환자를 확인한 후, 사스 관련 보도에 대해서 중공 고위층의 의견은 둘로 나눠져, 한 쪽은 마땅히 대중에게 사실을 알려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재앙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도리어 큰소리치며 말했다. “안정이 더 나은 번영을 가져오기 때문에, 200만 명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다.” 장쩌민 측근들의 손아귀에 있는 CCTV의 사스 관련 보도는 모두 장쩌민이 결정한 것이다. 해외에 용감히 진실을 말한 사스 영웅 장옌융은 중공에 의해 입이 막혀버렸고, 군대 기율에 의해 처벌을 받았다.

더욱 황당한 일은 사스 전염병 앞에서, 장쩌민과 중공은 자신들의 잘잘못은 따지지 않고, 모든 책임을 무고한 인민들에게 돌리며, “고의적”으로 사스 바이러스를 확대시키려는 사람을 극형으로 처리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정부의 과실,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인민들이 어떻게 “고의적”으로 사스를 퍼뜨린다는 말인가? 또한 이때, 장쩌민은 사스를 파룬궁을 비방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6월 9일, 신화사는 갑자기 파룬궁 수련생이 “사스”를 전국으로 전파 시킨다는 기사를 내보냈지만, 정작 기사를 내보낸 그들도 이 사실을 믿지는 않았다. 외국 언론들은, 이 기사가 사실 장쩌민이 사스 발병 마을을 봉쇄하고 없애라고 한 명령에 신뢰성을 더해주고, 동시에 이 기회를 빌어 파룬궁의 진상 밝히기 활동을 엄격히 막기 위한 것이지, 사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사스 사건을 통해, 장쩌민은 그의 쥐 같이 소심한 성격과 인민의 생명을 지푸라기같이 보는 차가운 본성을 재차 드러내었다.

2. 홍콩 23조 입법(立法)

2003년 7월 1일은 중공의 홍콩 반환 6주년 기념일이다. 그런데 그날 생각지도 못하게, 89년 “6.4”사건 당시 백만 명의 홍콩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한 이래로, 가장 큰 규모의 항의 운동이 일어났다. 오십만 명이 넘는 홍콩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기본법” 제 23조 제정에 반대했고, 또한 보통선거를 통한 행정장관 선출과 입법(立法)회의를 요구했다.

몇 시간 전, 중공 외교부 대변인은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방금 수만 명이 시위에 참가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직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시위 조직자가 오후 3시에 데모를 시작할 것이라고 선포했으니, 아직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가할지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실제로 데모에 참가한 사람은 수만 명을 훨씬 넘어, 최소 50만 명이었다. 이렇듯 중공은 홍콩 민심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세부 항목에 악마와 같은 생각이 있다”

1989년 중국 “6.4”사건 기간, 홍콩 백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학생민주운동을 지지했고, 이에 베이징은 매우 놀라며, 홍콩을 소위 “전복 기지”로 삼았다. 중국측이 당초 작성한 홍콩 기본법(홍콩 헌법) 초안에 한 조항이 들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특별행정구 정부는 필요시 입법으로 반(反)전복을 할 수 있다(제 23조). 당시 몇몇 법조계 인사들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23조 법률(또는 “국가보안법 조례”)이 홍콩의 민주자유 정신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97년 전야, 중국과 영국 간 정권 인수 기간, 중국 베이징측은 23조 매국죄와 전복죄를 법안에 넣으려고 했지만, 이는 홍콩 각계와 영국의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래서 중공은 순조롭게 정권을 이양 받기 위해, 공개적으로, 기본법 23조의 입법을 잠시 보류한다고 말했다.

1990년 4월 반포된 최종 홍콩 기본법 제 23조의 실제 내용에는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다.

1)조문에서는 대륙에서 국가 안전을 이유로 해체된 어떤 단체나 그 하부 조직은 홍콩에서도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 홍콩 정부에는 어떤 독립적인 조사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2) 조문에서는 고의적으로 개념을 바꾸어, 국가와 정부의 관계를 혼돈되게 했다. 민주자유의 국가에서, 공민은 정부를 감시하고 탄핵할 권리가 있으나, 23조 입법에서는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바로 국가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3)23조 입법에서는 경찰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줬다. 예를 들어 경찰은 법원의 영장 없이도 민가에 무단으로 들어가 조사, 체포할 수 있고, 증거가 없더라도 경찰의 심증이 바로 증거가 될 수 있다.

4)선동적인 발언은 구두, 서면, 혹은 전자적 형식에 상관없이, 모두 죄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런 말을 한 사람, 들은 사람, 그리고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사람까지도 유죄가 된다.

5)만약 홍콩 사람이라면, 어디에 있던지 간에, 이 법률의 제한을 받고, 23조를 위반할 경우에는 홍콩으로 소환할 수 있다. 홍콩 안에 있는 사람은, 국적을 막론하고(국경을 지나가는 자와 내방자 포함), 모두 23조 입법의 제한을 받는다. 경범죄일 경우에는 7년형을 선고하고, 중범죄일 경우에는 종신형을 선고할 수도 있다.

홍콩대변호사협회(香港大律師公會)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23조는 일기 쓰기, 심지어는 개인의 생각을 종이에 쓰는 것조차도 모두 범법 행위로 삼았다. 그리고 소위 “매국 은폐”죄는, “일반 인민들에게 매국 행위를 보고할 책임을 간접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그 결과 수많은 무지하고 천진난만하며, 다른 사람을 잘 신뢰하는 사람 혹은 직업적인 이유로 어쩔 수없이 비밀을 말해서는 안 되는 사람마저도 범죄자가 된다. 이러한 입법 초안은 억울한 죄인을 만들어낼 소지가 다분하다. 홍콩의 유명한 변호사 후훙위(胡紅玉)는 사스가 막 지나가긴 했지만, 만약 이렇게 중요한 공공 보건 자료가 “국가 기밀”로 취급되어 공개되지 않는다면, 이는 모든 사람들의 생사와 관련된 문제가 될 것이다.

파룬궁 근절이 목적

99년 7월부터 장쩌민은 파룬궁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장쩌민이 국내에서는 갖가지 방법으로 파룬궁을 박해했지만, 홍콩에서는 파룬궁 처리에 대해 어느 정도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한다고 했으니, 대륙과 같은 진압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홍콩은 국제금융의 중심지이고, 대륙 사람들이 선호하는 관광지이다. 매일 수많은 관광객들이 홍콩을 방문하며, 그곳에서 종종 파룬궁 수련생들이 나눠주는 중공의 진상 자료를 볼 수도 있고, 심지어 어떤 관광지에서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틀어주는 “분신 자살” 위조 사건을 폭로하는 비디오 테이프를 볼 수도 있는데, 이런 점을 장쩌민이 참을 리가 없었다. 장쩌민은 제 23조 입법을 홍콩에서 파룬궁의 뿌리를 뽑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다.

제 23조 입법은 수많은 사람들의 권리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그 파급 효과가 아주 컸고, 국제적으로도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켜, 이는 홍콩의 경제 발전과 특별행정구 정부의 이미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99년 7월 이후, 장쩌민의 마음 속에는 온통 파룬궁 진압 생각 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그렇게 많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국내에서는 살해를 할 수 있지만, 홍콩에서는 법안을 만드는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사 단행

홍콩 특별행정구 행정장관 둥젠화(董建華)는 그 당시 선박왕 둥하오윈(董浩雲)의 아들이었다. 둥하오윈은 과거에 세계에서 가장 큰 석유 운송 함선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아들은 가업을 물려받은 후, 10년 동안 가산을 모두 탕진했다. 1997년 둥젠화의 가족 회사 “둥팡하이와이(東方海外)”는 거의 부도 위기에 몰렸지만, 중공의 도움으로 난관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둥젠화는 중공의 명령을 아주 잘 복종하게 되었다.

둥젠화가 행정장관이 된 것은 홍콩 사람들의 선택이 아니라, 베이징의 선택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둥젠화의 행정장관 연임에 더욱 반대하였다.

확실히 둥젠화의 운명은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장쩌민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결정되었다. 둥젠화의 재임 시기, 장쩌민은 실질적인 이익을 얻지 못했고, 금융 위기로 인해 도리어 장쩌민이 둥젠화에게 적지 않은 자금을 주었다. 둥젠화가 이때 어떻게 그냥 물러날 수 있었겠는가? 장쩌민은 이미 오래 전에 그에게 준 빚에 대한 계산을 해두었고, 이때 그가 자신을 위해 중대한 일을 한가지 처리해주길 바랬다.

2001년 말 둥젠화가 베이징에서 업무 보고를 할 때, 외신은 “장쩌민이 그와 특별행정구 정부에 아낌없는 지지를 보여주었고, 이는 그의 연임에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보도하였다.

2002년 초, 율정국(律政司) 국장 량아이스(梁愛詩)는 연임의 뜻이 없다고 다수 말한 적이 있었지만, 2월 하순 경 베이징에 불려가, 홍콩과 마카오 관련 일을 주관하는 정치국 위원 겸 부총리인 첸치천(錢其琛)을 만나, 시의(時宜) 적절한 대책이 무엇인지에 대해 들었다. 그 후로 량아이스는 다시 퇴임의 뜻을 밝히지 않았다. 량아이스는 중공의 지하 당원 출신인 “애당세가(愛黨世家)”였고, 장쩌민이 그녀의 유임을 사전에 계획하였으니, 당연히 조직의 뜻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2002년 7월 1일 장쩌민은 우유부단한 둥젠화의 특별행정구 장관직 연임을 전폭 지지한다고 밝혔다.

과연, 둥젠화는 장쩌민의 뜻대로 되었으며, 9월 24일 율정국의 주도로 홍콩 정부의 결정안이 황급히 발표되어, 그는 23조 입법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고, 제 23조 매국 및 반전복 등 죄목과 관련된 입법에 대해서는 3개월 동안의 여론 조사를 거쳐, 늦어도 다음 해 초에 더욱 구체적인 방안을 공포하고 나서, 입법회의로 넘겨져 토론 및 입법 과정을 추진할 것이다고 발표했다. 량아이스는 이미 이 일과 관련해 베이징과 “교류”가 있었다고 말했다.

천팡안성의 사직을 강요

파룬궁 진압 이후로, 제 23조 입법은 장쩌민의 명령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잡혔고, 중공은 계속적으로 홍콩 정부에 시행 압력을 가하며, 빠른 법률 제정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무국 국장 천팡안성(陳方安生)을 필두로 한 홍콩 고관들은, 아직 홍콩 이미지 유지를 위해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이 일을 방임했다.

천팡안성은 줄곧 굳건한 자세로, 홍콩의 양심이라고 불렸다. 1997년 홍콩이 중공에 반환된 후, 그녀는 홍콩에서 가장 환영 받는 관원이 되었다. 적지 않은 홍콩 사람들은, 만약 홍콩이 첫번째 특별행정구 장관을 선거로 뽑는다면, 바로 그녀가 최후의 승리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장기간 민주제도에서 생활하고 일한 사람으로써, 천팡안성은 자유는 하나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 문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파룬궁 진압이 시작된 후, 그녀는 홍콩 두 번째 권력가로써 파룬궁 단체에 법제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장쩌민은 이에 아주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천팡안성을 퇴임시킬 방법이 없던 장쩌민은 결국에 그녀를 강제적으로 사직시켰다.

둥젠화의 특별행정구 장관 연임, 율정국 국장 양아이스의 연임에 보안국 국장 예류수이(葉劉淑儀)는 공을 세워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에 이리저리 분주했으며, 이로써 세 사람 간의 권력 삼각 구도가 형성되어, 장쩌민이 기다리던 시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에 장쩌민은 홍콩에서 큰 일을 저지를 계획을 짰다.

장쩌민이 선택하려고 한 수법과 초기의 파룬궁 진압 방법은 아주 유사하게도, 단 번에 맹렬한 기세로 속전속결하는 것이었다. 홍콩에 대해서, 사후 국제 사회에 트집을 잡히지 않으려고, 장쩌민은 형식적인 3개월의 여론 조사 기간을 주었고, 국제 사회의 관심 밖에 있는 마카오에 대해서는 아예 어떤 조사 기간도 주지 않고, 바로 법률 제정을 시도했다.

장쩌민은 홍콩에 긴고주(緊箍呪: 서유기에서 손오공을 괴롭히던 당승의 주문)를 읽는데 바빠, 한 가지 사실을 망각했다. 제 23조의 조항은 바로 “6.4”시기, 홍콩 인민 백만 명이 두 차례나 자발적으로 거리로 뛰어나가, 민주 운동을 성원하고 중공의 살상 행위를 질책한 후에, 없어진 기본법과 같은 내용이었다. 이로써 장쩌민은 파룬궁을 진압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700만 홍콩인의 민주 의식에 도전한 것이 되었다. – 이렇게 장쩌민은 어떤 나쁜 짓을 할 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각계의 반대

23조 문제는 각국 정부, 기구, 비정부조직 및 종교계, 언론, 해외 홍콩인, 법조계, 학생, 상인, 대만 각계 각층의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홍콩 각계 인사 및 세계 각지의 중국인들은 계속해서 반대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점점 더 강력하게 대응했다. 홍콩 민주인사와 사회 각 층의 사람들은 함께 힘을 모아, 민중들에게 23조의 위험성을 알리고, 서구 사회의 지지를 구했다.

2002년 12월 15일 일요일 오후, 홍콩 40여 개의 단체는 97년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이래, 가장 큰 규모의 평화 시위를 거행해, 당국의 홍콩 기본법 제 23조에 근거한 “반전복법(反顚覆法)” 제정을 반대했다. 시위에 참가한 인원수에 대해 홍콩 경찰은 1만 2천명, 민간 단체는 최고 6만 명이라고 서로 다른 주장을 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이것이 97년 홍콩의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간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참가한 시위였다는 것이다. 점점 더 많은 홍콩 사람들이 제 23조 입법안이 언론 자유, 신문 자유 및 인권 등 다방면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자각한 결과, 그들은 거리로 나와 마음의 뜻을 표현한 것이다.

해외 각지의 중국인 단체와 홍콩의 여러 단체들은 모두 23조에 반대하는 활동을 주관했고, “홍콩을 지키는 것이 양심을 지키는 것이다”, “23조에 반대하며, 정권을 민중에게 돌려줘라” 의 구호를 내건, 범세계적 항의 운동은 이렇게 그 서막을 열게 되었다.

“전세계23조입법반대대연맹(全球反對23條立法大聯盟: 大聯盟)”이 2002년 12월 4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성립되었고, 그 취지는 다음과 같다. 홍콩의 인권과 법제를 지키자. “대연맹(大聯盟)”은 해외 중국인들의 시위 동참을 요구하며, 홍콩의 민주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 홍콩이란 동방의 진주가 계속해서 밝은 빛을 발산할 수 있도록 하자고 호소했다. 이 연맹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단 몇 일만에 전 세계 각지 9000여 명의 23조 입법 반대 서명을 받았다. 대연맹은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 두 지역에서 집회를 열고, 동시에 홍콩의 시위 운동을 지지했다. 전 세계 화교 민주평화연맹”의 각 지역 단체와 캐나다 벤쿠버 중국인 단체에서도 현지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중공의 23조 입법에 반대하자고 호소했다.
50만 홍콩인, 거리로 나와 세계를 놀라게 하다

7월 1일, 홍콩 주권이 중국에 반환된 6주년 되던 때, 적게 잡아 50만 명의 홍콩 시민들이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고 나왔다. 사람들은 홍콩 정부의 기본법 제 23조 입법 추진을 항의했는데, 그 반대 세력의 규모가 예상을 뛰어 넘어, 홍콩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시위는 40여 개 조직으로 구성된 단체인 “민간인권전선(民間人權前線)”에서 일으킨 것이다. 시위 운동은 오후 3시에 시작해, 저녁 9시 30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이 나, 총 6시간 30분 동안 진행되었다. 주관 단체의 예상으로는, 시위 참가자는 50만 명을 넘어서, 예상 수치를 훨씬 뛰어 넘었고, 일부 매체는 참가자가 많게는 120만에 달한다고 했으며, 홍콩 경찰은 최소 35만 명일 것이라고 인정했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예측치는 50만 명인데, 홍콩 인구수는 고작 680만 명이다.

거의 모든 서양의 언론매체와 통신사들은 홍콩의 평화 시위를 계속해서 보도했고, 홍콩 대다수의 언론 매체들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톱기사로 내보냈다. 미국 AP 통신사는 시위대를 “분노하고 걱정하는 홍콩인”으로 묘사했다.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는 시위대가 각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홍콩 정부가 민의(民意)를 저버려, “홍콩 쇠미(衰微)”를 드러냈다고 비평했다. <뉴욕타임스>는 수십만 명의 홍콩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1989년 천안문 사건 이래 최대 규모의 시위 운동을 하며, “홍콩이 직면할 민주자유 상실”의 위기를 애도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 대륙의 대다수 인민들은 당시에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사건을 거의 모르고 있었다. 이는 중공이 거의 모든 관련 소식을 막았기 때문이다. 중공의 명령에 복종하는 봉황위시(鳳凰衛視)는 7월 1일 6만 명의 사람들이 “홍콩 반환 행사”를 했다고 보도만 했을 뿐, 50만 명의 대규모 시위 운동을 보도하지 않았고, 대륙의 모든 언론 매체는 이 사건에 대해 한 글자도 소개하지 않았다.

홍콩의 대규모 시위 운동은 국제 사회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베이징 당국도 이에 매우 놀랐다. 홍콩 각 파의 정치 세력은 거대한 민의에 따라 분화되기 시작했다. 7월 6일 저녁, 자유당 주석 톈베이쥔(田北俊)은 행정회의 의원직에서 물러났다. 동시에, 자유당은 성명을 통해, 23조 초안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발표했다.

둥젠화는 원래 입법회의 60석 중, 친중공 세력 의석이 28, 9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고, 자유당 주석 톈베이쥔 수중의 8석은, 행정회의 의원으로서, 톈베이쥔이 자신의 명령에 따를 의무가 있으므로, 둥젠화는 톈베이쥔의 손아귀에 있는 8석을 포함하면, 이미 36, 7석을 확보하게 돼, 과반수를 넘었으므로,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 시위에 귀기울일 필요가 없으며, 입법 통과를 강행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톈베이쥔의 뜻 밖의 발언은, 둥젠화에게는 8석을 잃는 것을 의미했으며, 23조를 통과시키는 가능성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고, 23조 입법 검토 절차는 어쩔 수없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중공을 추종하던 보안국장 예류수이는 23조 입법을 강력하게 추진하다 대중의 지지를 잃었고, 재정부장 량진숭(梁錦松)은 공금으로 개인 자동차를 샀다가 홍콩 감사원에 적발되어 율정국의 처벌을 받았다. 7월 16일 저녁, 홍콩 정부는 성명을 통해, 예류수이와 량진숭의 퇴임을 공식 발표했다.

이때, 장쩌민에게는 이미 형세를 되돌린 만한 힘이 없었다.

같은 해 9월 5일, 제 23조 강제 제정이 희망이 없다는 것을 보고, 홍콩 특별행정구 장관 둥젠화는 어쩔 수 없이 형식적으로, 사람들의 제 23조에 입법에 대한 의문을 없애기 위해, “국가안전(입법조문) 조례 초안” 철회를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장쩌민이 홍콩 23조를 통해 파룬궁을 진압하고, 홍콩 사람들을 압박하려는 계획은 이렇게 완벽히 실패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곧 바로 자신의 잘못을 떠넘기기에 바빠졌다. 장쩌민은 후진타오가 홍콩 사무를 주관했는데, 중앙에 정확한 홍콩 민정을 제공하지 않아, 정책이 실패했다는 이유로, 후진타오를 홍콩 사무의 실권에서 내려 앉히고, 심복인 쩡칭훙에게 홍콩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게 했다.

홍콩 행정장관 둥젠화는 장쩌민의 명령에 따라, 홍콩 인민의 이익에 저해되는 수많은 일을 도모했기 때문에, 홍콩에서 평판이 아주 좋지 않았다. 중공은 그를 어떤 이용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인물을 찾아 홍콩 장관으로 임명해, 홍콩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로 결정했다. 2005년 3월 10일, 든든한 지원자였던 장쩌민에게 버림받은 둥젠화는 강제적으로 특별행정구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3. 후진타오와 장쩌민의 숨가쁜 결투

2003년은 후진타오와 장쩌민이 격렬하게 싸운 한 해이다.

2002년 11월 16대 4중전회에서 장쩌민은 국가 주석과 총서기 직위에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권력에서 물러나길 원하지 않았고, 장완녠(張萬年)에게 긴급 동의를 하도록 지시해, 총대를 잡고 계속해서 군대의 대권을 장악했다.

장쩌민은 9명의 상무위원들에게 몇 가지 방침을 정해주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홉 명으로 조직된 정치국상무위원회에 지도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에, 만약 후진타오를 핵심으로 그 조직이 정비된다면, 장쩌민에게는 용납하기 어려운 현실이 된다는 것이었다. 장쩌민의 또 다른 중요 지시 사항은, 작은 일, 일반 사무는 다 같이 상의해서 수행하고, 중요한 문제는 장쩌민이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렇다면, 정계에서 물러난다 할지라도, 후진타오는 권력을 갖지 못할 것이었다. 이렇듯 장쩌민의 권력욕,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 타인의 권력 장악에 대한 시기는 누구든지 쉽게 알 수 있다.

서열 싸움

이런 정치 참여 방식은 “불삼불사(不三不四)”라고 불리는데, 이는 장쩌민이 제 3세대, 제 4세대 지도층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 재미있는 일은 당 총서기, 국가 주석 후진타오가 군사위원회 부주석이고, 보통 당원 장쩌민이 군사위원회 주석이니, 당 세력구도가 뒤죽박죽 되었다는데 있다. 중공 고위층의 혼란스러운 세력구도에 대해, 어떤 외신은 비유해서 이렇게 말했다. “장쩌민이 계속 군권을 장악함으로써 중국에는 심상치 않은 권력 구도가 형성되었고, 이는 클린턴이 정권을 부시에게 넘겨주고 난 후에, 임시적으로 미군총지휘관의 자리에 남아있는 것과 같다.

중공 내부는 16대 이후, 언론에서 공개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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