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2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02문필로 중용받고 전기 기술로 매국노가 된 부자(父子)

장쩌민은 노래와 춤으로 유명하다. 그는 피아노, 중국 호금, 기타 등 적어도 3가지 악기를 다룰 줄 알았는데 장기자랑을 위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1999년 3월 30일, 장쩌민은 오스트리아 클레스틸 대통령의 안내로 모짜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를 방문했다. 모짜르트의 생가에서 가장 값진 유품은 1785년 비엔나에서 모짜르트가 구입한 피아노였다. 클레스틸 대통령이 200여 년 역사를 가지고 있는 그 유물에 대한 소개를 마치기 바쁘게 장쩌민은 피아노에 앞에 다가가 앉더니 뚜껑을 열고 연주하기 시작했다. 만약 모짜르트의 대표작 ‘돈 지오반니’나 ‘휘가로의 결혼’을 연주했다면 그나마 위대한 음악가를 추모하는 행동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겠으나 장쩌민은 엉뚱하게도 중국공산당 찬미 가요 ‘홍호(洪湖)의 물결이 넘실거리네’를 연주했다. 클레스틸 대통령은 장쩌민이 유물을 함부로 만지지 못하게 저지하려 했으나 실례가 될까 봐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어쩔 바를 몰랐다. 그러나 장쩌민은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연주를 하는 한편 음탕한 눈길로 옆에 있는 중국 아가씨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찬사를 보내기를 바랐다.

비싼 악기에 속하는 피아노를 가지고 자신의 장기를 자랑하는 자체가 장스쥔, 장쩌민 부자(父子)의 매국노 신분을 폭로하는 것임을 장쩌민은 생각하지 못했다.

왕징웨이 괴뢰정권 시기, 비싼 학비를 내고 귀족 중학교와 괴뢰정부의 중앙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피아노까지 배울 수 있었다면 절대 일반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말할 수 없다.

장쩌민의 아버지 장스쥔은 1940년에 난징에 갔는데 당시 괴뢰정부는 왕징웨이, 천궁보(陳公博)와 저우포하이(周佛海) 세 사람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중 천궁보와 저우포하이는 중국공산당 창시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제1기 공산당대표대회 대표로서 당내 순위가 마오쩌둥보다 앞서 있었다.

난징에 별도의 괴뢰정부를 세우게 되자 왕징웨이는 높은 관직부터 작은 사무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후안무치한 문인, 의리 없는 상인, 할일 없이 놀고 있던 정객들과 퇴직했던 관리들이 소문을 듣고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왕징웨이 관저 앞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40년대 최신형 승용차와 흑백 무늬가 섞인 구식 침대차들이 친화이[秦淮 역주-난징시에 있는 강 이름]강변의 호화 저택에서, 쉬안우호[玄武湖 역주-난징에 있는 호수] 주변에서, 시즈호[西子湖 역주-난징과 가까운 항저우(杭州)에 있는 호수] 주변에서, 상하이, 쑤저우(蘇州), 우시(無錫), 양저우 등 주변 지역에서 몰려들어 줄을 이었다. 사회 찌꺼기들이 기회를 잡으려고 권세가에 빌붙어 파리 떼처럼 진득거리며 아부하고 있는 가운데 상인 출신의 문인 장스쥔도 포함돼 있었다.

장스쥔은 투기와 아부에 능란했다. 당시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승승장구하여 동북, 화북, 화중에서부터 상하이, 우한, 광저우까지 내려왔으며 홍콩, 마닐라, 남태평양까지 모두 함락시켰다. 게다가 1941년 말, 일본 해군 총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가 진주만을 기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장제스 중앙정부는 한양[漢陽, 역주-우한(武漢)시에 속하며 당시 국민당의 무기공장이 있었다]에서 큰 칼과 구식 보총을 제조해 일본군의 비행기, 탱크와 맞서려고 하자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망국론’이 우세를 차지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빌붙었다. 장스쥔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지만 장사했던 머리가 있어 언젠가 일본군이 망하고 국민당이 일어설 것을 대비해 이름을 장관첸(江冠千)으로 고쳤다.

문학과 전기공학에 관심이 많았던 장스쥔은 이 방면을 이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나치의 선전 수단을 깊이 연구했으며 특히 예술적인 수법, 종교적 열광에 가까운 대중의 열정을 이용해 히틀러를 신격화 시킨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를 즐겨 보았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초기에 ‘의지의 승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기라도 하듯 독일의 GDP는 해마다 100%의 고성장을 보였다. 레니 감독의 다른 한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는 올림픽대회를 더더욱 파시즘의 대잔치로 묘사했다. 화면이 극도로 예술화된 레니 감독의 영화는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을 열광케 했다.

괴뢰정부 선전부에서 일하게 된 장스쥔은 파시즘의 선전 수단을 깊이 연구했던 까닭에 여론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매일‘바쁘게’보내면서도 시간을 짜내 장쩌민에게 이 방면을 교육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6.4천안문사건’ 전에 장쩌민이 ‘세계경제도보(導報)’를 폐쇄시킨 것이 우연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다. 언론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 장쩌민은 15세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으며 공산당 무리 속에서 뒹구는 과정에서 공산당의 선전 ‘이론’까지 흡수해 갈수록 이 분야의 고수가 되었다. 게다가 장쩌민은 갈수록 이 능력을 실제로 써먹을 기회가 많았다.

장스쥔은 그가 배운 선전 기교와 전기공학 지식을 동원해 ‘대동아성전 태평양 전과전’이라는 타이틀의 전람회를 열었다. 그는 소리와 빛을 이용해 일본과 미국 사이의 공중전, 해상전을 재연해 보여주었는데 일본군이 쏜 포탄을 맞고 추락하는 미국 비행기의 모습 등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했다. 또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유화 ‘진주만 기습’을 보면, 전쟁의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는 가운데 무사도 정신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본군 전투기가 모기처럼 내리 꽂혔다가 다시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밖에 천조대신(天照大神, 역주-일본 민족의 최고 신)이 굽어 살피는 ‘무운장구(武運長久)’ 네 글자는 관람객들에게 누구도 일본 침략군을 이길 수 없고 영원히 중국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치 않게 했으며 일본이 머지않아 영국, 미국을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장스쥔은 또 영국, 미국에 저항하는 영화 ‘만고유방(萬古流芳)’ 제작에 참여했다. 그는 높은 보수로 대스타 가오잔페이(高占非)를 청해 린저쉬(林則徐, 역주- 청조말 애국정치가, 아편전쟁 당시 아편 단속과 금연운동을 펼쳤다) 역을 맡게 하고 미국을 적대시하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역사를 왜곡한 시나리오를 짰다.

민족의 위기가 들이닥쳤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스러운 가상을 꾸미고 시민들로 하여금 몇년 전 발생한 난징 대학살을 잊게 하기 위해, 장스쥔은 민속활동까지 벌였다. 그는 불교문화를 이용해 ‘우란분회(盂蘭盆會, 역주-음력 7월 15일 열리는 불교 행사, 부처의 힘을 빌려 조상의 업을 멸하고 영혼을 위로하는 날)’ 행사를 열고 강에 연등을 띄웠으며 신문을 통해 과장스러운 보도를 내보냈다. 보도에서는 친화이(秦淮)강, 쉬안우호(玄武湖)가 연등으로 꽃 바다를 이루었으며 구경하러 온 난징 시민들이 친화이 강변과 공자묘 앞까지 줄을 이었다고 하면서 독자들을 세뇌시켰다.

장스쥔이 담당한 괴뢰정부 선전부는 세뇌는 어린 시절부터 진행해야 한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부르기 쉬운 동요를 만들어 보급시켰다. 그들은 “보검이 번쩍이고 위풍이 당당하네, 영예와 번영을 위해…”와 같은 가사로 ‘민족’의 부강을 위해서라면 살인하고 전쟁을 일으켜도 괜찮다고 가르쳤으며, “천리만리 큰 바람이 불어치네”와 같은 가사로 ‘동아민족의 해방 위해 큰 바람 속에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며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일본 침략군을 미화했다. 이 밖에 어린이 서적으로 ‘영미중국침략사’를 만화로 펴내 영국, 미국을 증오하도록 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칭송했으며‘아시아 인민들이 함께 노력해 영국, 미국을 소멸하자’고 선동했다.

장쩌민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약은데다 천성이 저질스러워 장스쥔의 마취-세뇌술을 쉽게 터득했다. 오늘날의 중공은 국고를 털어 베이징, 상하이, 선전, 광저우 4대 쇼윈도우 도시를 건설하고 관리들이 호화롭고 방탕한 생활을 하도록 방치하고 있으며 가수, 배우, 코미디언들을 모아 놓고 한 무대위에서 함께 ‘성세’를 칭송하게 하고 있다. 중국 9억 농민들은 연평균 수입이 유엔 극빈층 표준선 3000위안 보다 낮은 2620위안이어서 전체 9억 농민이 모두 극빈층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9억 농민과 도시의 3천만 실업노동자 및 그들의 가족들은 만약 배고픔만 아니라면 정말 TV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천당에서 살고 있는 줄로 착각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은 선천적인 ‘능력’을 가진 장쩌민이 파시즘의 수단을 학습한 매국노 가르침을 받고 공산당의 배양까지 거쳐 능란하게 죄행을 펼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장쩌민은 3권을 한 손에 장악한 후, 교육부장이자 절친한 친구 천즈리(陳至立)를 이용해 어린이들에게 세뇌교육을 진행했다. 특히 한심한 사례는,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을 민족 영웅 이름에서 빼버리고 후세에 오명을 남긴 매국노 진회(秦檜, 역주-남송의 충신 악비를 모함한 인물)를 극력 미화한 것이다. 장쩌민은 또 ‘의지의 승리’와 비슷한 영화를 찍기 위해 3천만 달러로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을 청해 아름다운 화면으로 폭군 진시황을 미화한 영화 ‘영웅(英雄)’을 찍게 했으며 영화가 완성된 후에는 인민대회당에서 첫 상영식을 가졌다. 이와 같이 장쩌민의 세뇌술은 그 이전에 어떤 사람도 미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장쩌민은 번화한 친화이 강변에서 사치하고 부귀한 생활을 즐겼다. 당시 일본군은 미모와 가창력이 뛰어난 제국의 꽃, 리샹란(李香蘭)을 크게 떠받들었는데 그녀가 부른 노래 ‘님은 언제 다시 오시려나(何時君再來)’,‘야래향(夜來香)’,‘사탕 장수의 노래(賣糖歌)’,‘노래와 춤으로 오늘 밤을(歌舞今宵)’ 등은 당시 중국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달콤하고 취할 것만 같은 노래 소리는 일본군 함락지역에 중국인들로 하여금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났던 난징대학살을 잊어버리게 했다. 이 밖에 리샹란은 한 중국 아가씨가 일본군을 사랑한 이야기를 줄거리로 한 ‘지나의 밤’이라는 영화에 주연 배우로 출현했으며 동명의 영화 주제가를 불러 대히트를 쳤다. 이와 같이 미녀의 달콤한 노래로 국민들의 사상을 바꿔놓는 세심하고 교묘한 세뇌수단도 장쩌민은 잘 기억해 두었다. 그리하여 정권을 장악한 장쩌민은 CCTV에 명령해 음력설 특집 공연 당시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는 가수 쑹주잉(宋祖英)의 노래를 제일 앞에 배치하게 하는 등, 과거에 배워둔 이론을 실천에 옮기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밖에 장쩌민은 꽃처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지고 있었던 리샹란을 꿈에도 잊지 못했다. 1991년, 일본 유명극단 ‘시키(四季)’가 중국을 방문해 대형 오페라 ‘리샹란’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이미 71세 고령이 된 리샹란이 다롄(大連) 폐막식 공연 때 직접 중국에 오기로 되어 있었으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일정이 취소되었다. 이 때문에 장쩌민은 수천 만 남자들의 연인이었던 미녀 가수 리샹란을 직접 만나지 못한 아쉬움으로 한 동안 우울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장스쥔은 또 중국문화를 선전한다는 명의로 해마다 공자묘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큰 의식을 차리고 팔일무[八佾舞 역주-제사를 지낼 때 추는 고대 악무로, 1행이 여덟 사람인 것을 가리켜 일(佾)라고 했다. 황제는 팔일(八佾)로 제사를 지낼 수 있었으나 대신들은 육일(六佾), 대부들은 사일(四佾)로 제사를 지냄]를 추게 했으며 ‘예기(禮記)’에 기록된 전통에 따라 돼지, 소, 양을 제물로 바친 뒤 일본 괴뢰정부의 관리들에게 보내주었다. 장쩌민이 중국문화를 선전한다는 깃발을 내걸고 중공을 미화하는 수단 역시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일본 침략군 특무 기관장이며 육군대장인 도히하라겐지(土肥原賢二)에겐 딩모춘(丁默邨)이라는 중국인 오른팔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상하이첩보계획’이라는 전략 보고서를 써내 일본군의 중시를 받기 시작했으며 상하이 키스페오르거리 76번지에 ‘첩보총지휘부’를 세운 후 자신이 주임직을 맡고 리스췬(李士群)이 부주임직을 맡게 했다. 딩모춘은 1939년에 괴뢰정부 국민당중앙위원회와 중앙상무위원회위원 겸 사회부장직을 맡았는데 지금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국가안전부장에 해당하는 직위였다.

아들이 뛰어난 인물이 되기를 바란 장스쥔은, 오직 스파이 출신이어야만 일본군으로부터 각별한 신임과 중시를 받을 수 있으며 딩모춘 같은 전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딩모춘은 괴뢰정부의 중앙대학을 새로 세우면서 항일을 주장하는 학생이 있을 것을 대비해 ‘난징대학 청년간부 훈련반’을 개설하고 첩보 역할을 해줄 학생들을 양성했다. 그는 일본 침략군의 경험에 따라 고위층 관리의 자녀 중에서 ‘인재’를 골라 프로수준의 스파이들을 양성하려 했는데 당시 괴뢰정부의 고위층 관리 자녀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딩모춘은 모두 4차례 ‘미래 간부 훈련반’을 개설해 매번 같지 않는 숫자의 스파이를 양성했다. 장스쥔은 아들을 특별한 인재로 만들기 위해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스파이 훈련반에서는 첩보 기술을 가르치는 외 사상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정치 과목을 개설했으며 신(神)을 믿는 것을 금지했다. 신이 죽었다고 말한 니체의 이론은 스파이들을 양성하는데 가장 좋은 교과서가 되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주축이 되어 뭉친 후에 이들 국가들은 서로 스파이 정보를 활발하게 교환했으며 첩보 사업에 큰 뒷받침이 된 니체의 이단 학설을 ‘선진문화’로 떠받들었다.

장쩌민은 제4기 훈련반에 참가했다. 중앙대학 명의로 개설된 ‘간부 양성반’에서는 관련 학부의 교수 및 스파이들을 교사로 청해왔으며 매번 졸업한 학생들을 중앙대학에 보내 다른 학생들과 섞여 공부하게 했다. 훈련반에서 나온 장쩌민은 대동아성전 전람회에서 실력을 발휘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전기공학 전공을 선택했다.

장쩌민은 무료로 입학했고, 스파이 신분 때문에 월급을 받고 있었기에 손이 컸으며 그에게 빌붙어 아부하는 친구들과 함께 번화가를 돌아다니기 좋아했다. 스파이 직업으로 일찍부터 타락한 장쩌민은 전자공업부 부장직을 맡고 미국으로 첫 출장 갔을 때부터 기생들을 익숙하게 다뤘는데 당시 부장급 중국 지도자들 가운데서 이런 현상은 보기 드물었다.

청년간부 학습반 학생들은 나중에 일본군이 투항하자 뿔뿔이 도망갔다. 중공의 손에 들어간 자들은 모두가 보안 부문에서 비전문직 강사를 맡고 정기적으로 보안 간부들에게 수업을 했는데 장쩌민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사무를 보는 능력은 지방 회사의 자그마한 과장보다도 못했지만 그의 스파이 경력은 아무것도 모르는 중공 간부들을 갖고 놀기에는 충분했다.

2003년 10월,인터넷에서는 ‘첩보총지휘부’부주임을 맡았던 리스췬과 장쩌민이 1942년 6월 함께 찍은 사진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공개해달라는 호소문이 나왔다. 이 사진을 본적이 있는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리스췬은 괴뢰정부 중앙대학 청년간부 비밀 훈련반 제4기 수강생 23명을 만나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장쩌민은 두 번째 줄, 왼쪽 5번째에 서있었다고 한다.

왕징웨이 괴뢰정부 스파이 두목인 리스췬은 1924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7년 4월 12일, 중공의 명령에 따라 스파이 훈련을 받으러 러시아에 갔다가 이듬해 말 상하이로 돌아와 중공의 첩보부서에서 일했다. 그러던 1938년, 리스췬은 일본 침략군의 품에 안겼으며 ‘76번지 첩보 총지휘부’를 세웠다. 때문에 리스췬과 같이 찍은 사진은 장쩌민에게 있어서 매국노 및 스파이 출신임을 증명하는 증거이자 지워 버릴 수 없는 악몽으로 되었다.

1945년 9월 3일,일본군이 투항하면서 중국은 광복을 맞았으며 국민당 정부는 같은 달 26일,‘수복지역 대학생 심사방법’을 발포하여 일본 침략군에 점령되고 있었던 지역의 국립대학 재학생들을 상대로 심사를 진행했다. 같은 해 10월, 국민정부 교육부는 상하이 교통대학, 충칭 교통대학과 난징 중앙대학을 합병해 하나로 만들고 쉬자후이(徐家滙)의 상하이 교통대학을 모체로 지정했다. 동시에 당시 괴뢰정부 산하에 있었던 난징 중앙대학과 상하이 교통대학 등 6개 대학 학생들은 매국 행위가 있었는지 심사를 받아야 했다. 장쩌민도 당연히 블랙리스트에 올랐지만 심사를 앞두고 갑자기 학교를 떠났다.

그가 도망간 원인은 매국노 천궁보(陳公博)가 심판대 위에 서는 것을 보고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1945년 9월 9일, 일본이 정식 투항하자 난징정부는 즉시 허잉친(何應欽)을 대표로 내세워 오카무라 야스지(岡村 寧次)에게 천궁보의 신병을 중국에 넘길 것을 요구했으며 그해 10월 3일, 천궁보는 중국에 인도되어 판결을 받았다.

국민당 정부가 매국노들을 상대로 엄하게 나오자 장스쥔도 위기가 눈앞에 닥쳐왔음을 알고 ‘장관첸’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다시 ‘장스쥔’이라는 상인으로, 전기공학 전문가로, 문인으로 변신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한 동안 소리 없이 지냈다.

학교를 떠난 장쩌민도 장시(江西)성 융신(永新) 몐화핑(棉花坪)이라는 곳에 몸을 피해 있었다. 갑자기 ‘지나의 밤’ 노래 소리가 사라지고 친화이 강변의 번화함도 볼 수 없었으며 스파이 직업에 따른 월급과 사람마다 부러워했던 부자집 도련님의 생활은 더욱 사라졌다. 현지의 한 농민이 거리에서 방랑하던 장쩌민을 불쌍히 여겨 자신의 집에서 머물도록 해서야 그는 반년 후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떠나기 전에 장쩌민은 농민의 집에 있던 낡은 의서(醫書)에 “출세하면 꼭 돌아와 감사드리겠다”는 말들을 남기고 서명까지 했다. 나중에 총서기로 된 장쩌민이 징강산(井崗山)에 갈 일이 있게 되자 융신에서 하루 머물면서 일부러 몐화핑까지 찾아갔다. 수행원들은 그가 무엇 때문에 그 지역을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며 관심을 쏟는지 몰랐다. 1997년, 장쩌민의 이름이 적혀있는 낡은 의서를 발견한 그 농민의 자녀들은 너무 기뻐 당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웨이젠싱(尉建行)의 부인(융신 출신)의 친척을 찾아가 도움을 받을 방법이 없는지 알아보았으나 그 친척의 권고로 그만 두었다.

장쩌민이 도망간 기간에 중국공산당 상하이 학생위원회에서는 많은 대학생들이 심사 제도에 불만을 품고 있는 점을 이용해 6개 대학 학생들을 부추겨 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1945년 10월부터 1946년 3월까지 반년 동안(장쩌민이 몐화핑에 있은 기간) 7차례 항의시위를 벌이고(가장 유명한 시위는 ‘11.6항의시위’) 8차례 탄원했으며 여러 번 국내외 기자들과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와 동시에 난징, 베이핑(北平) 등 지역에서 괴뢰정부 학교 리스트에 오른 대학의 학생들도 현지 중공 지하당의 지도와 격려 하에 연달아 거리에 나가 항의시위를 벌여 매우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말재주가 좋은 장쩌민이 만약 그렇게 규모가 크고 기세가 대단했던 학생운동에 직접 참가했더라면 자신을 추켜 올리는 드라마 2, 30회라도 만들어 냈을 것이었지만 그는 이 일을 입밖에 꺼낸 적이 없었다. 할 말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말을 꺼내기만 하면 당시 그가 난징도 상하이도 아닌 외진 곳에 숨어 심사 제도가 없어지기 만을 기다린 사실이 들통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장쩌민은 나중에 이를 숨기기 위해 1943년에 중공 지하당에서 조직한 학생운동에 참가했다고 했는데 이런 엉터리 거짓말은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속일 수 있었다. 알다시피 당시 일본군이 점령했던 지역의 대학교에서는 비밀리에 반일, 항일 활동을 벌이기는 했으나 중공 지하당이 주도한 공개적인 학생 운동은 일어난 적이 없었다. 국민당 정부가 통제하고 있는 지역에서만 장제스 정부에게 항일을 요구하며 일어난 학생운동이 있었다. 그러나 중공이 이런 지역에서 일으킨 학생운동은 항일을 장제스의 명예를 훼손하려는데 목표가 있었으며 국민당과 일본이 동시에 망하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잔인한 수단으로 무장 점령 지역을 식민화 시킨 일본군과 이를 동조한 괴뢰정부는 중국 학생과 교사들이 거리에 나가 집회나 가두행진, 시위 및 수업을 거부하는 행동을 잔혹하게 진압했다.

장쩌민은 대학을 졸업한 뒤인 1948년에 상하이에서 있었던 한 단락 역사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꺼려했다. 중공에 제출된 이력서를 보면 장쩌민이 1947년 대학을 졸업했다는 기록 뒤에는 곧바로 1949년 이후의 경력이 이어졌다.

1948년에 장쩌민은 공산당에 의해 착취자로 묘사된 미국인과 반혁명으로 묘사된 국민당 당원을 사장으로 모시고 일했다. 마르크스의 적과 짧은 시간이나마 함께 일했던 이 한 단락 역사를 공산당 통치시대에 장쩌민은 말할 리 만무했으며 따라서 해외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1947년, 상하이 교통대학을 졸업한 장쩌민은 이듬해인 1948년에 미국회사 하이닝양행(海寧洋行) 산하의 식품공장에서 기계과 기술자로 있었다. 같은 해 그 공장은 국민당 연합근무총사령부에 매수되어 제1식량공장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장쩌민은 계속 기계과에 남아 있었다. 이 공장은 국민당이 엄격히 통제하는 군사공업 기업에 속했으므로 공장 내부직원, 특히 중요한 부서에 있는 직원에 대해서는 심사가 극히 엄격했다. 친공산당 혐의가 있거나 의심을 받게 되면 중용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공장에는 공산당 지하조직이 없었으며 장쩌민은 가정 배경이 폭로될까 봐 고분고분하며 지냈다.

 

1949년, 중공군이 상하이에 진입하면서 장쩌민이 근무하던 공장은 ‘이민(益民)식품제1공장’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장쩌민도 덩달아 공산당의 기술자로 되었다. ‘홍조제사(紅朝帝師 역주-공산당의 정신적 지도자)’로 불리는 왕다오한(汪道涵)도 당시 아내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그 공장에 시찰간 적이 있었다.

틈만 있으면 파고 드는 장쩌민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상하이 교통대학 동문의 신분으로 왕다오한에게 접근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 장쩌민은 그가 장상칭의 옛 부하였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즉시 ‘장상칭의 양아들’이라는 만능 무기를 꺼내 들었다. 장쩌민은 또 그가 한시를 즐긴다는 것을 알고 어울리지 않게 소동파(蘇東坡)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 ‘강성자(江城子)’ 중의 한 구절 “10년생사양망망(十年生死兩茫茫)”을 읊었다. 왕다오한은 이 시를 듣고 죽은 지 꼭 10년이 되는 장상칭을 떠올리며 감개무량해 했다. 장쩌민의 계책은 성공했다. 왕다오한은 장상칭의 덕분으로 출세하게 된 것을 생각해 별 다른 의심 없이 장쩌민을 즉시 승직시켰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자신의 이 새로운 신분에 큰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왕다오한 또한 이때부터 장쩌민의 가짜 출신에 대한 증인이 되었다. 장쩌민이 나중에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데는 왕다오한의 공로가 절반을 차지했다.

일반 간부들과는 달리 장쩌민은 반드시 여러 방면에서 처세를 잘해야 했다. 그는 군중이 그에게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거나 검거 적발하는 일이 없도록 아래 사람들과 잘 지내야 했고, 좋지 않은 인상을 품거나 출신을 의심받지 않도록 모든 상관과의 관계를 잘 처리해야 했으며, 공장 이사장의 남편인 권세가 왕다오한에 접근해 점차 그의 가족들과 가깝게 지내는 동시에 중공 열사의 미망인 및 그들의 가족들에게 관심을 보여 지지를 얻어야 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더 적극적으로 가짜 양어머니 비위를 맞춰주었으며 왕저란의 이질녀 왕예핑(王冶坪)을 아내로 맞아 두 자녀를 낳았다.

왕다오한은 장쩌민을 이민식품공장 전기공학 기술자로부터 상하이 비누공장 부사장으로 승직시켰다가 다시 국가제1기계공업부 상하이 제2지국 전기과 과장으로 승직시켰다. 또 1954년 11월에는 창춘(長春) 제1자동차 제조공장에 전근시켰는데 공장의 요구로 모스크바에 기술을 배우러 가게 되었다. 그는 창춘에서 4개월 동안 러시아어 공부를 한 뒤, 이듬해인 1955년 3월에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났다.

장쩌민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으며 대 풍작을 거뒀다. ‘76번지 첩보 총지휘부’ 훈련반 딩모춘의 제자 장쩌민은 그 당시 배워둔 ‘정계생존술’과‘처세술’의 절반만 이용해도 단순한 중공을 대처하기에 충분했다.

장쩌민은 모스크바 스탈린 자동차공장 통제센터에서 작은 의자에 앉아 열심히 전기 공급 장치를 다뤘다. 이것은 12년 전 아버지가 열었던 ‘대동아 성전 전람회’에서 이용했던 공전시스템보다 규모만 좀 더 클 뿐 구조가 비슷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장쩌민도 전기장치와 인연을 맺었으며 소련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복인지 화근인지는 두고 봐야 알 수 있었다.

1945년, 소련 홍군은 세 갈래로 나누어 갑자기 중국 동북으로 진입했으며 창춘에서 도히하라겐지의 첩보망과 관련된 자료를 수색해 냈는데 그 중에는 당연히 청년간부학교 훈련반과 관련된 문자 및 사진 자료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비밀 자료들의 이용가치를 알고 있는 소련 전직 비밀 첩보국(KGB)은 마치 진귀한 보물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나중에 소련은 정말로 이 자료들 덕분에 넓고 비옥한 국경지대의 중국 영토를 자신들의 소유로 할 수 있었다.

중공은 대규모로 반우파 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반역자 리스췬의 행적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련에서 첩보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그가 일본 침략군의 패배가 눈앞에 닥치자 소련으로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리스췬은 도망갈 준비를 하는 한편 당시 일본으로 도망간 천궁보를 비웃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만약 전쟁에서 패하면 당연히 천궁보를 보호해 주지 못할 것이며 만약 일본군이 승리한다면 도망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리스췬은 일본군이 망해도 장제스든 중공이든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같은 승전국인 소련과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기에 소련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1955년부터 중국과 소련은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해 양국은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하면서도 뒤로는 경계하며 서로 상대방 국민을 간첩으로 만들었다. 소련보다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훨씬 먼저 손을 썼다. 그는 소련의 홍색 공포가 두려워 상하이에 도망온 백러시아(벨로루시) 의사 부부와 가깝게 지내면서 그들 부부가 소련 전문가들의 병을 치료하는 기회를 이용해 소련 고위층의 정보를 얻어냈다. 이 부부는 나중에 문화대혁명 때 상하이 홍위병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았으며 저우언라이에게만 고백하겠다고 했다.

장쩌민은 소련에서 유학하는 동안에도 처세를 잘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며 곳곳에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다뤘으며 쇼를 해서 자신을 뽐냈다. 이 모든 것을 주시해 온 KGB는 악기를 다룰 줄 알고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관리라면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을 것이며 게다가 일본군 점령지 난징 출신이라 반드시 사회적으로 유명인물이거나 매국노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짐작하고 장쩌민의 자료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명성이 자자한 매국노 장관첸의 아들이었다. 그리하여 KGB는 즉시 미녀 스파이 크라바를 파견해 장쩌민을 유혹하게 했다.

영화배우처럼 코가 오똑하고 눈이 크며 매력 넘치는 크라바를 본 장쩌민은 더 이상 자신의 조강지처를 그리워하지 않고 그녀의 품에 안겼다. 장쩌민의 수많은 풍류정사는 현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이 일을 뒤에서 따로 기술하려고 한다.

장쩌민이 한창 재미에 푹 빠져 있을 때 크라바는 장쩌민의 귀에다 리스췬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말해 장쩌민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고 KGB는 이때라고 판단하고 장쩌민에게 돈 뭉치를 넘겨주면서 KGB에 가입해 중공 유학생 및 중국 국내 정보를 수집해 주면 그의 매국노 출신을 절대 폭로하지 않겠다고 보증했으며 돌아가기 전까지 크라바와 계속 만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때부터 장쩌민은 소련 간첩이 되었으며 귀국한 뒤에도 계속 KGB를 위해 일했다. 소련 당국도 스탈린이 중공의 동북 우두머리 가오강(高崗)을 배신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고 장쩌민의 간첩신분을 노출하지 않았다.

1991년 5월, 장쩌민은 중공 중앙 총서기 신분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당시 소련은 붕괴를 앞두고 있었지만 소련 공산당의 KGB는 여전히 장쩌민의 과거사를 사전에 모두 조사해 냈다.

중국 관영 ‘인민일보’는 장쩌민이 리가쵸프 자동차제조공장을 방문했던 당시에 함께 일했던 직원과 그들의 자녀들을 보자 눈물을 글썽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의 말에 따르면, 장쩌민이 공장 직원들의 숙소를 지날 때 ‘마침’ 한 여인이 “장쩌민씨 아니예요!”라고 다정하게 말하며 걸어 나왔는데 그 여인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여인이 바로 당시 장쩌민을 석류치마 아래 무릎 꿇게 한 크라바였다. 이런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KGB로 놓고 말하면 식은죽 먹기였다. KGB는 장쩌민의 모든 것을 이미 속속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 해 소련 방문에서 옛 애인과 미쳐 다 나누지 못한 정을 마저 나눈 장쩌민은 중국에 돌아오자마자 ‘중러 동부국경선협의서’에 서명해서 수백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소련에 건네주었다.

소련이 해체된 뒤, 장쩌민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더욱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옐친이든 KGB 출신인 푸틴이든 과거를 들추는 기미가 있기만 해도 장쩌민은 며칠씩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때문에 소련은 이미 무너졌지만 장쩌민의 매국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장스쥔과 장쩌민 부자가 일본군 앞잡이로 있은 경력에 대해 공산당은 조사하지 않았다. 이유는 공산당이 일본인 그리고 그들의 침략전쟁을 매우 환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로구교(鹵 泃橋) 사변이 아니었더라면 공산당은 조만간 장제스에게 소멸되었을 것이었으며 또 만약 ‘9.18’사변에서 장쉐량(張學良)이 동북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중공은 시안(西安)사변을 성공적으로 책동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루산(廬山) 회의에서 “공산당은 일본군과 배합하여 항일하는 군민을 없애버림으로써 일본 침략군이 중국 땅을 더 많이 점령하게 해야 한다”고 했으며 “이렇게 해야만 중공은 국민당이 힘없는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정풍운동을 하고 마약도 생산할 수 있으며 역량을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중공의 일본 매국노에 대한 진압은 국민당에 가입했던 사람들에 대한 진압에 훨씬 못 미쳤다. 마오쩌둥은 사사키 고조(佐佐木 更三), 구로다 히사오(黑田 壽男), 호소사코 가네미쓰(細迫兼光)등 일본 사회당 인사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만약 일본 황군이 중국을 절반 이상 침략하지 않았더라면 중국공산당은 정권을 탈취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장쩌민은 소련에 유학을 떠날 때 이미 파시즘의 핵심적인 선전수단 및 통치방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소련에서 새로운 기교를 더 배우게 되었다. 장쩌민은 소련에 도착한 후 역사가 모두 왜곡되어 있고 대학생들은 마르크스, 엥겔스를 잘 모르며 누구나 배우고 있는 ‘소련공산당역사’도 스탈린의 이익에 맞게 고쳐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련 공산당은 마르크스, 레닌의 이론에 대한 숭배를 스탈린 개인에 대한 숭배로 바꿔버렸던 것이다.

이는 장쩌민에게 새로운 계발을 주었다. 그는 그 때까지 자기가 집권할 경우 어떤 방법으로 정권을 유지할 것인지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소련 공산당이 그에게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었다.

1956년 2월, 후루시초프는 소련 공산당 제20기대표대회에서 ‘비밀보고’를 발표해 스탈린의 죄행을 폭로했고 이 소식은 신속히 소련 전역에 퍼졌다. 스탈린이 수천만 백성을 학살한 사실을 안 소련 국민들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스탈린의 동상은 넘어졌으며 찢어진 스탈린의 초상화가 온 거리에 널려 있었다. 스탈린에 대한 국민들의 태도가 180도로 변화된 사실은 장쩌민으로 하여금 더더욱 진상이 폭로되는 것을 두렵게 만들었다.

스탈린의 경우와 비슷한 마오쩌둥은 소련에 있는 자국민들이‘나쁜’영향을 받을까봐 두려워 외교관들을 제외한 인원을 전부 신속히 귀국하게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마오쩌둥이 그렇게 큰 죄를 짓고서도 진압과 거짓말로 죽을 때까지 집정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 수단과 방법들을 머릿속에 깊이 새겨두고 반복적으로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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