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19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19운 없이 피고되고, 피바람을 일으켜 군권(軍權)을 잡다

 

1. TV 방송

몇 년 동안, 장쩌민은 거짓된 정보 유출, 사실 숨기기와 참혹한 박해를 수단으로 파룬궁을 진압했다. 현재 그가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왜곡하고 숨긴 파룬궁의 진상을 인민들이 알게 되는 것이다.

2002년 3월 5일, 장쩌민이 계속 걱정하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다. 그날 저녁, 파룬궁 창시자인 리홍쯔(李洪志) 선생의 고향이자, 파룬궁의 발원지인 장춘(長春)의 8개 유선 방송에서 <분신 자살 혹은 사기극?>과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세상에 퍼지다> 등 파룬궁의 진상을 담은 자료를 방송하였고, 총 방송 시간은 45분에 달했다.

이로 인해 장쩌민의 수 년간 공들인 거짓 선전이 한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방송에서 보여진 파룬궁 모습은 중공의 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그 성대함과 전 세계 60여 개국과 지역에서의 활동 상황에 관한 것이며, 이를 통해 인민들은 파룬궁의 진실과 “진선인(眞善忍)”의 미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신 자살 혹은 사기극?>에서는 CCTV “자오뎬팡탄(焦點訪談)”의 녹화분을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면서, 그것이 조작되었음을 지적하였고, 장춘의 수십만 인민은 이 사건의 진상을 보고 놀란 나머지 입을 열지 못했다. 방송이 나간 후 둘째 날, 장춘의 사무실, 버스, 학교, 상점 등지에서, 사람들은 모두 류춘링(柳春玲)이 천안문 분신 자살 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구타 당해 죽은 느린 화면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거짓이 탄로 난 후,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쿠언(庫恩)은 <장쩌민전(江澤民傳)>에서 “방송이 나간 것이 황금 시간대 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파룬궁’의 방송을 보았고, 그 후 도시 전체가 술렁거렸다”라고 사실을 인정했다. 장쩌민은 방송이 나간 날 저녁, 뜻 밖의 소식을 접하고는 크게 놀랐다. 잠시 동안 놀란 마음을 가라 앉히고, 그는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고, 주먹으로 책상을 치면서, “쩡칭훙(曾慶紅)과 뤄간(羅干)을 불러와, 당장 불러와!” 라고 말했다.

장쩌민의 비서는 곁에서 종종 그가 화내는 것을 보았지만, 이제껏 그렇게 이성을 잃고 미친 듯한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고,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쩡칭훙과 뤄간의 의견에 따라, 장쩌민은 선양(沈陽) 군관구(軍管區)에 2급 전비 태세, 장춘 군관구와 지린(吉林)성 무장경찰 사단에 1급 전비 태세를 명령했다. 뤄간은 지린성 공안청(公安廳)과 장춘시 공안국(公安局)에 명령을 내리고, 기간 내에 이 사건을 해결하게 했다. 뤄간이 전화로 각각의 임무를 지시할 때, 장쩌민은 다른 한 쪽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모든 공안국에 만약 방송 중간에 파룬궁 영상물을 내보낸 파룬궁 수련생을 발견하면, 즉시 사살 해도 좋고, ‘살무사(殺無赦: 살인은 사면 받을 수 없다)!’ 가 있긴 하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파룬궁 수련생은 사살해도 조금의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일주일 내에, 사건을 해결해라. 그렇지 못하면, 장춘 시당위원회(市黨委員會) 서기부터 공안국 및 관련 기관의 모든 책임자들을 파직시킬 것이다!”

장쩌민의 명령으로, 뤄간이 직접 이번 사건을 총괄 책임지게 되었다. 2002년 3월 12일 새벽, 장춘 파룬궁 수련생 류하이보(劉海波)는 혐의자에게 숙소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콴청(寬城) 공안국 경찰에게 고문을 받으며, 자백을 강요 받다가 사망했다. 장춘 시당위원회 소속 “610”업무의 제 1 부서기인 창샤오핑(常小平)은 몇 일을 계속해서 콴청 공안국에 왔고, 이 사건의 처리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했다.

1)파룬궁과 관련한 사건 해결은 막중한 정치적 임무이니, 혐의자 사살을 걱정하지 말아라. 2)보안을 철저히 유지해, 비밀이 밖으로 새나가 국제 사회의 간섭을 받지 말도록 해라. 3)각 급 감사기구는 파룬궁 수련생의 사망이나 상해에 대해서 조사하지 말며, “모든 것에는 정국 안정이 우선이다.”

이와 동시에, 장쩌민은 중공 선전 기관에 파룬궁 수련생이 저지른 방송 중단 행위에 대해 비방하는 내용의 영상물 제작을 지시했다. 그러나 “중간 방송”된 내용에 대해서, 장쩌민은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고, 단지 “중간 방송”은 파룬궁의 선전물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장쩌민은 이를 통해 사회적으로 파룬궁에 대한 반감이 조성되기를 바랬다. 사실 장쩌민이 먼저 파룬궁이 사람을 죽인다는 거짓 사실을 만들어 전파시켰지만, 파룬궁의 “중간 방송”에는 장쩌민의 살상 행위를 규탄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사람들에게 사건의 진실을 알려 주었다. 장쩌민은 고의적으로 이 점을 숨기려 했지만, 사실이 탄로 난 바람에 그의 부당함과 거짓은 더욱 부각 되었다.

“불법”은 본래 “합법”에 대응하는 말로, “합법”이 있어야 비로소 “불법”이 존재한다. 어느 학자가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를, 개방의 대문이 있어야 비로소 사람들이 창문을 뛰어 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할 수 있다. 만약 대문을 굳게 닫아 놓았다면, 사람들은 창문을 뛰어 넘을 권리가 있고, 심지어는 지붕을 들어 올릴 권리가 있다. 기본적인 인권이 박탈 당한 지방에서, 기본적 인권을 되찾기 위한 모든 투쟁은 자연법(自然法)에 부합하는 합법적인 행동이다.

파룬궁의 “중간 방송”은 본래 방송 설비에 대해 조금의 피해도 주지 않았고, 단지 인민에게 정보를 제공하며, 진실을 호소했을 뿐이다. 그러나 파룬궁 수련생들은 중공이 “어떤 사람들이 이로 인해 피해를 받은 것은 아닌갚 와 같은 논리로 수천만 수련생의 합법적 권익과 관련된 행동을 억압해도 대응할 방법이 없다. 정부가 정식으로 허가한 시위 행위 또한 보행자들에게 길을 막는 피해를 줄 것이고, 급한 걸음을 걷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방해” 가 될 것이지만, 이것은 인권 보호를 위한 필수적인 대가이며, 현대 사회가 공인하는 규칙이다.

본론으로 돌아와, 최근 몇 년 동안 장쩌민은 모든 방송국에 압력을 가해 파룬궁을 모함하는 프로그램을 수 차례 내보냈는데,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시청 자유를 빼앗은 것은 아닌가?

장쩌민은 당연히 위와 같은 권선(勸善)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중간 방송을 한 모든 사람들을 아주 증오하며, 그들을 죽여야 성이 풀릴 것 같다고 여겼다. 2002년 3월 24일, 또 다른 혐의자인 류청쥔(劉成軍)이 체포되었는데, 경찰은 의도적으로 이미 팔과 다리에 수갑을 채운 류청쥔의 다리에 총을 두 번 쏴서, 중상을 입혔다. 구치소에서 류청쥔은 참혹한 고문을 받았고, 후에 억울하게 19년형을 받았는데, 2003년 12월 26일, 그는 안타깝게 감옥에서 고문으로 사망했다.

후에 유사한 중간 방송 사건이 다른 지역의 유선 방송에서 계속해서 발생했고, 위성 방송 또한 파룬궁 수련생들에 의해 점령당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정확하지 않은 통계이나, 2002년 3월에서 2003년 10월 동안, 파룬궁 수련생들은 헤이룽장(黑龍江), 산둥(山東), 허베이(河北), 간쑤(甘肅), 칭하이(靑海), 총칭(重慶) 등지의 20여 개 도시의 방송국에서 장쩌민의 거짓된 모습을 담은 영상물을 중간 방송했다.

1999년 7월 파룬궁을 진압하기 시작한 이후로, 장쩌민은 전국 선전기구를 통해서 파룬궁을 비방했으며,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어떤 발언의 기회도 주지 않았다. 중공에 의해 위장된 “분신 자살” 사건이 발생한 후로, 장쩌민은 권력을 이용해, 파룬궁의 발언을 막았으며, 전국 인민의 파룬궁에 대한 증오심을 극점까지 끌어 올렸다. 만약 파룬궁에게 강한 적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파룬궁에 대한 증오심은 어디서 유래되었나요?’ 라고 물으면, 십중팔구가 “CCTV” 라고 대답할 것이다. 중국의 평균 TV보급률은 86%에 달하고, 전달력이 아주 강한 TV 선전은 장쩌민이 파룬궁을 비방하는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다. 장쩌민은 자신의 거짓말이 가장 효과적인 선전 수단인 TV의 중간 방송을 통해서 폭로될지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2. 순조롭게 처리되지 않는 파룬궁 문제

2002년은 장쩌민이 파룬궁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순조롭지 않은 한 해였다. 2002년 4월, 파룬궁은 미국 수도 워싱턴 특구에서 중국 공안부, 정보부 및 CCTV를 고소했다. 8월, 미국 국회의원들은 찬성 420표, 반대 0표, 만장일치로 제 188호 결의안을 통과시켜, 장쩌민이 더 이상 파룬궁을 박해하지 못하게 하는데 의견 일치를 보였다.

장쩌민은4월 독일로 출국 한 뒤, 6월 13일 아이슬랜드를 방문할 예정이었는데, 이때 파룬궁 수련생들의 항의에 직면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장쩌민은 파룬궁이 즐겨 입는 노란색과 남색 복장을 보는 것을 두려워 한 나머지, 독일 경찰에게 이 두 가지 색을 그가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우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것저것 의심을 많이 했고, 심지어는 경찰에게 그의 택시 운수조(運輸組)와 연결된 하수도의 뚜껑 마저 용접해 막아버리라고 지시했다. 호텔을 출입할 때도, 장쩌민은 정문으로 다니지 않고,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통로로 다녔으며, 일정과 노선을 자주 변경해, 독일 경찰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아이슬랜드 방문 시기 중, 장쩌민은 아이슬랜드 정부를 협박해 파룬궁 수련생의 입국 금지를 요구했는데, 이로 인해 장쩌민는 그 지역 수 천명 주민들의 격렬한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장쩌민이 아이슬랜드에 도착한 날, 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일간지는 총 4편의 글을 실어,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사죄했다. 그 사죄문은 아이슬랜드 국회의원, 사회 유명 인사 등 450 명의 이름으로 올라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광고문은 “對不起(죄송합니다)” 라는 이름의 중문 제목으로 실렸고,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사죄 드립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광고문은 다음을 강조했다, “아이슬랜드 정부는 중국 독재자 장쩌민에게 굴복했고, 파룬궁 수련생들이 아이슬랜드에서 계획한 평화적인 항의를 허락하지 않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며, 이에 아이슬랜드 국민들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바, 이렇게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사죄하는 바입니다.”

히 재미있는 일은, 장쩌민이 4월 초 독일을 방문할 무렵, 정확하게 독일에 도착하기 이틀 전, 독일의 거의 모든 기차역에 갑자기 “위를 보아라” 라는 제목으로 개구리로 표현된 광고가 나타났는데, 두 마리 개구리가 한쪽에 서서, 위쪽을 바라보니, 배가 불룩 나오고, 머리에 왕관을 쓴 흰 개구리가 보였으며, 그 옆에는 “큰 놈이 나왔다” 라고 적혀 있었다. 신화왕에도 아주 독특한 일이 발생했는데, 이곳에 접속할 때 팔짝팔짝 뛰는 녹색의 전동 개구리가 나타났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 광고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장쩌민이 6월 13일 아이슬랜드를 방문하기 이틀 전인 6월 11일, 아이슬랜드의 가장 큰 신문에는 공교롭게도 한 장의 사진이 올라 왔다. 장쩌민을 상징하는 한 마리의 큰 두꺼비! 그것도 온 몸이 오돌토돌한 두꺼비였다! 그리고 장쩌민이 10월 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 영사관 근처의 한 식당에서도 개구리 그림이 걸려져 있었다.

장쩌민을 상징하는 또 다른 것으로는 그가 어디를 가던지 모두 음산한 바람이 솔솔 불고, 먹구름이 하늘에 가득 낀다는 점이다. 독일, 아이슬랜드, 미국에서도 모두 유사한 상황이 일어났다. 심지어 장쩌민이 아이슬랜드의 수도 레이캬비크(Reykjavik) 부근의 유명한 분수를 방문할 찰나에, 갑자기 분수의 한 물줄기가 둘로 갈라져 한 쪽이 검게 변하고, 다른 한 쪽의 물줄기와 대응하는 하늘 또한 먹구름이 가득하더니, 하늘이 한쪽은 검고, 한쪽은 밝게 변했다. 지역 주민들은 놀라며 “이제껏 이렇게 검은 물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했다.

장쩌민 환영식을 맡았던 사람도 불운을 겪게 되었다. 베이징광보쉐위안(北京廣播學院)의 리(李) 교수와 그의 부인은 퇴직 후, 아이슬랜드 수도로 이민을 가서, 먼저 그곳에서 살고 있던 아들, 며느리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리 교수 부자는 아이슬랜드에 정착한 후 점차 그 지역 화교들 중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고 있었다. 장쩌민이 아이슬랜드를 방문할 때, 중국 영사관은 분위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지역 화교들를 사서 환영단을 조직했다. 장쩌민은 이에 특별히 리 교수를 비롯한 환영단 대표들을 만났고, 이와 관련된 소식이 CCTV 연합방송을 통해서 보도되었다. 장쩌민이 아이슬랜드를 떠나고 대략 이틀 후, 리 교수 일가족은 차를 끌고 외출을 나갔다. 리 교수의 아들이 차를 몰았고, 차 안에는 며느리, 한 살 먹은 손자와 그의 부인 등 5명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차가 갑자기 호수로 굴러 떨어져버렸다. 그 결과 리 교수의 아들은 다행히 차 유리를 깨고 밖으로 빠져 나와 살았지만, 다른 4명은 불행히도 모두 사망하였다.

3. 크로포드 농장의 비하인드 스토리

중공 16대는 이미 왕성한 활동을 전개 했고, 각계 각층의 인사들 또한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장쩌민으로 하여금 덩샤오핑(鄧小平)의 뜻을 받들어, 권력을 후진타오(胡錦濤)에게 넘겨주게끔 만들었다. 이렇게 달갑지 않은 퇴임을 하게 된 장쩌민은 생각 끝에 외교 방문을 선택했고, 이를 통해 외국 정부와 중공 고위층에게 “외국과의 관계 개선을 논할 때, 장쩌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다.

장쩌민의 건강은 아주 좋지 않았기 때문에, 종종 301 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곤 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건강한 척 연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2년은 장쩌민에게 있어서, 해외 방문이 가장 많은 한 해였고, 10월 하순 경, 그의 미국 방문은 전 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장쩌민의 미국 방문 목적은 텍사스에 위치한 부시 대통령의 크로포드 농장에 가서 “고기를 구어 먹기” 위해서였다. 크로포드 농장은 부시의 개인 농장이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했다는 것은 양국 원수의 사적인 정이 돈독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세계적인 인사들 중에서도 이곳에 초청 받은 사람이 많지 않을 뿐더러, 초청을 받은 사람은 모종의 자부심을 갖고, 다른 지도자들의 부러움을 받기까지 한다. 그래서 장쩌민은 외교부를 통해서 부시의 초청을 받아 내도록 요구했지만, 부시는 사적으로 장쩌민을 아주 싫어 했다.

비록 중국 외교부가 각종 방법을 써서 요청 했지만, 부시는 못들은 척하며, 계속해서 대답을 회피했고, 더 이상 미루지 못하다, 어쩔 수 없이 장쩌민을 초청한 것이다. 중국 언론은 장쩌민이 이렇게 부시와 좋은 친구 사이로, 돈독한 우정을 과시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장쩌민은 자신이 미국에 도착하기 전날, 중국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 13곳과 47억 달러에 달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것이 바로 장쩌민이 크로포드 농장에서 고기를 구어 먹은 대가가 되었다.

중공 언론은 장쩌민이 텍사스에 위치한 부시의 크로포드 농장에서 고기를 구어 먹은 것은 최고의 영예라고 치켜세웠고, 중국 외교부 미주(美洲) 국장 허야페이(何亞非)는 기자 회견에서 조만간 중미 양국이 공동 성명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백악관은 이에 즉각 부시와 장쩌민이 공동 성명을 할지는 미지수라고 발표했고, <뉴욕타임즈>는 베이징의 보도들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잘라 말했다. 사실 크로포드 농장으로 초청을 받은 외국 귀빈 중,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영국 수상 블레어는 모두 농장 안에서 하루를 보냈고,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압둘라(Abdullah) 조차도 목장에서 다섯 시간을 머물렀으며, 두 사람은 최소 두 시간 동안 정식 회담을 가졌다. 부시는 친히 소형 화물차에 푸틴 부부를 태우고 목장을 구경시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장쩌민이 갔을 때, 부시는 그와 한 시간 반 정도(고기 굽는 시간도 포함) 함께 한 뒤, 매정하게도 그를 돌려 보냈다.

비록 장쩌민이 언론을 통해 이를 크게 부풀렸지만, 중공 고위층은 모두 외국의 평론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이 같은 속임수로는 정치국(政治局)의 권력 계승 결정을 바꾸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그는 미국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고소 당해, 피고가 되었다. 이와 관련된 일은 본 장의 아래 부분에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4. “매국(賣國)” 사실을 알린 대형 화물차

장쩌민의 미국 방문 계획은 2002년 여름 점차 소문나기 시작했지만, 그의 여정은 계속해서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2002년 10월 10일에서야, 중국 외교부 대변인 장치웨(章啓月)는 기자 정기회의에서 비로소 장쩌민이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미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기자들의 계속되는 질문에도 불구하고, 장치웨는 장쩌민의 구체적인 미국 일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10월 17일, 중국 외교부는 비로소 장쩌민의 구체적인 일정을 발표했는데, 이는 시간적으로 촉박하게 만들어, 항의자들의 손을 묶어 두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몇 달 전부터 세계 각지의 파룬궁 수련생들은 이미 중공의 파룬궁 진압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상의하기 시작했다. 각종 소식들을 종합해 보면, 장쩌민은 텍사스에 가기 전에 미국의 다른 대 도시를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에 대비해, 중국 주미 대사관, 영사관은 거짓 정보를 흘리기 시작했다. “장쩌민은 보스톤을 방문하고 뉴욕에 올 것이며, 또한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를 방문 할 예정이며, 워싱턴 특구에 갈 수도 있다……” 각 부분의 정보를 종합한 후에, 영사관이 있는 대 도시 중에 단지 시카고만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장쩌민이 동시에 그렇게 많은 도시를 방문할 수 없음을 고려한다면, 이는 분명히 연막(煙幕)에 불과했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고심 끝에 이러한 추측을 했다. 장쩌민이 방문할 곳은 바로 시카고이다!

그 날부터, 파룬궁 수련생들과 위탁 변호사들은 시카고에서 장쩌민 “환영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2년 10월 22일 아침 10시 38분, 장쩌민의 전용기가 먹구름 속에서 서서히 착륙하였다. 장쩌민은 영사관이 조직한 환영단과 어떠한 인사도 하지 않고, 바로 차를 타고 공항에서 벗어났다. 장쩌민을 태운 차량이 공항을 빠져 나오자 마자, 그는 두 지역에서 화재가 발생해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아 오르는 장면을 보았고, 이는 마치 그에게 시카고 일정의 결과를 암시하는 듯했다.

장쩌민을 태운 차량은 90번 고속도로를 타고 도시 중심부로 향해 갔다. 그런데 지하철 플랫폼을 지날 때 마다 파룬궁 항의자들이 보였고, 그들은 피켓을 들고 있거나,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는 등 기공 체조를 하던지, 혹은 큰 소리로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좋은 것이다”라고 외쳤다. 오전 11시 25분, 차량은 숙소인 리츠칼튼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 정문 도처에서는 “파룬궁 진압을 중단하라”는 글자를 적은 오색찬란한 피켓이 보였고, 노란색 수련복이 눈에 가득 찼으며,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정문에 군집해 있는 수천 명의 항의자들을 피해서, 장쩌민을 태운 차량은 화물과 쓰레기를 운반하는 출입구에 정차했다. 중국 영사관이 준비한 사오 백 명의 대학생 환영단은,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애석하게도 장쩌민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고, 그들의 아쉬움은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환영단 중에는 시카고 지역에서 온 학생들을 비롯해, 심지어 저 멀리 루이지애나주(Louisiana)에서 온 학생들도 있었다. 오성홍기를 흔들며 장쩌민을 기다리던 학생 중 한 명은 그가 이미 호텔 쪽문으로 들어 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이 정말이요?”

중국영사관은 사전에 시카고 지역 대학교 학생회와 연락을 취해, 환영단을 반드시 학교의 기록들을 토대로 해서 “믿을 만한” 학생들로 구성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 중국 학생은 영사관이 환영단에게 지불한 금액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날 환영단에 참가할 경우 35달러를 받습니다. 만약 다음 날 아침 배웅식에도 참가할 경우, 55달러를 준다고 했습니다.” 이 때문에 환영단 학생들은 각종 장비를 구비하고,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중공의 음악을 반복해서 틀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주변 이웃들의 신고 전화를 받은 경찰에 의해 경고를 받기도 했다.

이때 “중국 대사면” 의 대형 트럭이 지나갔는데, 차량에는 장쩌민과 옐친의 뜨거운 포옹 장면을 그린 대형 화보가 새겨져 있었다. 장쩌민은 두 손으로 옐친의 목을 감싸 안았고, 그 웃고 있는 얼굴이 매우 간사해 보였다. 그 옆에는 큰 글씨로 “민족의 변절자, 천고의 죄인” 라고 적혀 있었으며,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계획한, 중국 북방의 일부를 러시아에게 팔려고 했던 안내도가 보였다. 환영단은 잠시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차에 새겨진 내용을 자세히 보면서, 마음 속으로는 자신들이 환영하려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때, 환영단 책임자 중 몇 사람이 트럭 운전사에게 소리쳤다. “뭐야! 얼른 가버려!” 그들은 환영단의 다른 사람들이 도와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누구도 그 트럭을 보내는데 호응하지 않았다.

많은 학생들은 그 트럭을 보고 난 후, 손에 쥐고 있는 홍기를 더 이상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어떤 학생들은 카메라를 꺼내, 대형 트럭 위에 새겨진 그림을 찍기도 했다. 어떤 학생은, 이것은 중국 역대 지도자 및 진정한 중국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불평등 조약이라고 말했다. 어떤 학생은 후에 BBS에 우리는 장쩌민의 매국(賣國) 사건을 알고 난 후에, 마음이 저려왔다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비록 2002년 추수감사절 전에, 대부분 학생들이 중국 영사관이 주는 수고비 35달러를 받았지만, 어떤 학생들은 다시는 장쩌민 환영단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쩌민은 본래 오후에 시카고 교외에 본사가 있는 한 첨단 전자 회사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파룬궁 항의대가 두려워, 일정을 취소했다. 장쩌민은 저녁에 시카고의 자본가 및 인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고, 간단한 연설을 했다. 이때 그는 좀처럼 기운이 없어 보였고, 한 시간 정도의 강연을 했을 뿐인데도 지친 듯했다. 연설이 끝난 후, 시카고 부(副)총영사 선웨이롄(沈僞濂)이 무대 위로 올라가 장쩌민을 부축하고 내려왔다.

시카고 시장 데일리(Daley)는 이전부터 장쩌민의 피 비린내 나는 악행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연회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장쩌민과 정식 회견을 갖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 연회 참가자들과 항의자들이 점점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이 되자, 파룬궁 수련생들은 호텔 앞에서 밤새도록 앉아 침묵 시위 하기를 희망했고, 그들의 이런 평화적인 모습은 지역 경찰을 감동시켰다. 경장(警長)은 파룬궁 수련생들과의 약속에 매우 기뻐하며, 마음을 놓았고, 나중에는 단지 한 대의 경찰차만을 호텔 앞에 대기시키고는 모두 철수 시켰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이렇게 리츠칼튼 호텔 앞의 인도와 잔디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조용히 앉아있었다.

10월 23일 아침, 침묵 시위대를 피해, 장쩌민은 쪽문을 통해서 호텔을 빠져 나갔다. 그러나 그를 태운 차량이 막 나가려고 할 때, 그 앞에 파룬궁 수련생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장쩌민을 보며 “파룬따파는 좋은 것이다!”라고 목 놓아 외쳤다. 이따금 파룬궁 수련생과 장쩌민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 지기도 했지만, 지역 경찰들은 그들이 별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장쩌민의 차량이 고속도로를 타고 이동할 때, 몇 분 마다 계속해서 파룬궁의 깃발이 나타났다.

장쩌민의 수행원들은 오래 전부터 미국에 압력을 가해, 그가 내방했을 때, 시위자, 특히 파룬궁 수련생들이 항의하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장쩌민이 독일과 아이슬랜드를 내방하기 전, 그의 수행원들은 역시 같은 부탁을 했고, 이는 지역 사람들의 강한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대답은 아주 간단 명료했다. “Welcome to America!(당신이 일단 미국에 오면, 마땅히 미국의 법을 따라야 한다)” 시카고 경찰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헌법에는 모든 항의자들은 반드시 보이고, 들리는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당신들(파룬궁)의 권리는 반드시 보장 받을 것이다.”

5. 장쩌민을 놀라게 한 소환장

장쩌민은 그가 시카고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에 의해 고소 당할 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2차 대전 이후 인권 침해와 관련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법률 투쟁운동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장쩌민 기소는 민사 사건에 속하기 때문에, 반드시 피고 장쩌민에게 소환장을 전달하여야 했다. 그러나 시카고 방문 기간에, 장쩌민은 시위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 비밀리에 일정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의 일정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 주변을 경호원들이 겹겹이 호위하기 때문에, 소환장을 전달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2002년 10월 21일, 일리노이주 법정은 장쩌민 기소 법정명령을 내렸고, 만약 소환장이 장쩌민 본인에게 전달 된다면 아주 위험하고, 또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가 시카고에 머무를 동안, 소환장이 장쩌민 경호를 맡은 경호원에게 전달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해 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10월 22일 당일, 7명의 소환장 전달자와 장쩌민을 기소한 원고 변호사 테리 마쉬는 개인 사무실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의견을 나누었다. 그들 중 3명은 한 회사의 전문 영장 송달관(Process Server)으로, 수 년간의 영장 송달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설 탐정이었다. 그 밖에는 4명은 젊은 파룬궁 수련생으로, 세 명의 백인과 한 명의 중국인이 있었다.

오후 4시 경, 고소장 전달자 중 한 명인 페터(Fetter)는 18구 경찰국에서 고소장을 국장에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국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비서는 마음대로 고소장을 받을 수 없었다. 다른 고소장 전달자 밥(Bob)은 겹겹이 둘러싼 중공 경호원의 방해 위협과 미국 경찰의 압력을 뚫고, 마침내 호텔 밖에서 당직을 맡고 있던 18구 경찰국 국장 그리핀(Griffyn)에게 고소장을 성공적으로 전달했다. 법령에 의하면, 그리핀 국장은 장쩌민과 “610사무실”을 대신해 고소장을 받을 수 있는 보안요원 중 한 명이다. 그리핀은 고소장과 관련 문건을 받고 나서 자신이 맡은 의무를 반드시 실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쩌민을 고소하는 데는 수많은 장애 요소가 있기 때문에, 보안요원을 통한 고소장 전달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판단을 했고, 이렇게 장쩌민 고소 절차는 성공을 거두었다.

장쩌민은 파룬궁이 이미 자신을 고소했을 뿐만 아니라, 법원 소환장이 이미 전달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쇼파에 힘없이 주저 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정신을 좀 차린 후, 그는 노발대발하며 시카고 총영사 웨이루이싱(魏瑞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웨이루이싱은 중공의 연륜 있는 외교관이었지만, 과거 2년 화교 사회에서 여자와 관련한 구설수에 오르며, 귀국해 3개월 “휴양” 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웨이루이싱은 그릇된 생각을 하고, 파룬궁 사건을 빌어 장쩌민의 환심을 사 다시 출세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 파룬궁 진압이 시작되자 마자, 웨이루이싱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서 파룬궁에 대해 공격적인 연설을 했다. 그 후, 영사관은 몇 차례 더 문화대혁명식의 비판회를 열었다.

시카고에서 뜻밖의 일격을 당한 장쩌민은 10월 말 중국으로 돌아와, 11월 4일 웨이루이싱의 총영사 직위를 박탈하고, 그를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그의 정치 인생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장쩌민 같은 사람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일을 해도, 이는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에 불과하다. 고소장 전달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관련 변호사들은 장쩌민이 중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몇 차례 더 고소장을 중난하이(中南海)로 등기 발송했다.

2002년 12월 13일, 법정 서기가 서명 발송한 개정 시간을 알리는 중영문(中英文) 통지서가 그것을 해석한 중영문 서신 및 고소장, 소환장과 원고를 대신해 피고에게 관련 서류를 발송하는 법정령(法庭令)의 부본(副本)과 함께, 연방 특급 우편을 통해, 피고 장쩌민의 거주지인 중국 베이징 중난하이의 행정실로 전해졌다. 이 문건은 처음에 중국 외교부가 접수했다. 그러나 이 특급 우편이 아주 특별한 것 같았기 때문에, 외교부는 “수취인이 없으니, 되돌려 보내라”고 말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마음대로 수취할 수도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이 우편물을 곧장 중난하이의 “장쩌민 행정실”로 보냈다. 그런데“장쩌민 행정실” 관계자는 오히려 주저 없이 이를 받아들였고, 황(T. Huang)은 이에 수취 확인 사인을 하였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중공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우스개소리로 전해지고 있다.

피고가 된 장쩌민은 급히 중난하이 행정실 주임 자팅안(賈廷安)에게 미국 정부와 교섭을 지시해, “국가 원수 면책권” 을 핑계로 이 사건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어서, 장쩌민은 멀리 베이징에 있는 뤄간과 정보부 부장 쉬융웨(許永躍)에게 전화를 걸어, “국내외에서 원고가 누구인지 빨리 조사해서, 모두 잡아들여라!”라고 말했다. 뤄간은 감히 늑장을 부릴 수 없었기 때문에, 각 공안청에 조사 명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적지 않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체포 구금되었다.

6. 독일 행

시카고에서 뜻 밖에 피고가 되어버린 장쩌민은 당시 정말 중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애써 부시의 크로포드 농장까지 올 수 있었는데, 일을 마치자 마자 귀국하면 체면을 잃을 것이란 생각에, 어쩔 수 없이 파룬궁 수련생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독일로 향했다. 항의와 관련해 말하자면, 장쩌민이 일년 전에 겪은 한 파룬궁 수련생이 가까운 거리에서 항의한 것을 빼놓을 수가 없다.

2001년 8월, 장쩌민이 지중해 지역의 작은 나라 몰타(Malta)섬에서, 길을 걷다가 파룬궁 수련생이자, 해외 언론사에서 연륜이 깊은 기자인 왕(王) 모 기자를 만났다. 호텔에서 어느 정도 걸어 나온 장쩌민은 한 동양계 기자의 취재 요청을 듣고는, 거짓으로 연기할 생각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왕 기자의 앞에 다가갔다. 귀를 내밀고 그녀의 찬사를 들으려고 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그는 황당한 말을 들었다. “파룬궁 수련생 사살을 중지해야 합니다.” 어리둥절해진 장쩌민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한 마디 말도 안하고, 몸을 돌려 가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장쩌민은 외국을 나갈 때마다 마음을 조리며, 모든 것에 조심스레 경계한다.

2002년 4월 장쩌민이 독일을 내방했을 때, 파룬궁의 항의 규모는 대략 수백에서 수천 명에 달했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항의 피켓을 들고서 “파룬따파는 좋은 것이다” 라는 구호를 외쳤고, 이에 장쩌민은 혼비백산해졌다. 독일에 머무는 동안, 장쩌민이 어디를 가던, 구급차가 그 뒤를 따르며, 그가 갑자기 졸도하는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심지어 장쩌민이 독일 폭스바겐(Volkswagen)을 방문했을 때, 동 회사는 장쩌민에게 아예 구급차를 선물로 주었다.

이 때, 장쩌민은 수 천명 규모의 파룬궁 항의자들을 보고 자연히 더욱 겁에 질렸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장쩌민은 파룬궁 항의자들을 피해,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매일 20만 달러의 숙박비를 아끼지 않고, 미국 휴스톤에 있는 인터컨티넨탈(Inter Continental) 호텔의 485여 개 객실을 거의 모두 빌렸다.

25일은 장쩌민이 기대하던 부시의 농장을 방문하는 날이었다. 그러나 장쩌민의 몸에 갑자기 이상이 생겨, 차량은 어쩔 수없이 중국영사관에 대기해 있었고, 세계가 주목하는 장쩌민과 부시의 회담은 예상치 못하게 30분 정도 늦어졌다. 부시는 약속 시간 준수로 아주 유명한데, 장쩌민의 늑장에 그는 아주 화가 나있었다. 지역 신문 휴스턴 크로니클(Houston Chronicle)의 다음 날 보도에 따르면, 부시는 찬 바람을 맞으며 기다리다, 시계를 한 번 보고는 부근의 연못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라리 낚시나 하는 게 낫겠다!”

그러나 부시 부부는 어쨌든 교양 있게 손님을 기다렸고, 장쩌민과 부인 왕예핑(王冶坪)이 도착한 것을 보고, 부시와 그의 부인 로라(Laura)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을 환영해주었다. 장쩌민은 차에서 내려, 부시 부부와 악수를 하며 인사말을 건냈다. “안녕하세요?” 왕예핑은 아주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부시는 장쩌민과 악수를 하고 난 후, 예의를 갖춰 왕예핑과 포옹을 했으며, 로라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네 사람이 단체 사진을 다 찍자마자, 장쩌민은 왕예핑과 부시 부부는 생각하지도 않고 황급히 문쪽으로 혼자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왕예핑이 걷는데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자, 부시 부부는 즉시 그녀 곁으로 다가가, 양 옆에서 그녀를 부축하며 천천히 걸었다. 이 일은 그 지역에서 우스개 소리로 남겨졌다.

장쩌민은 중국 영사관에 다수의 학생들을 돈을 주고 사 자신을 환영하게끔 하라고 명령했다. 사실, 그는 문 앞에 서서 그를 환영해주는 학생들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장쩌민의 방문 기간 동안, 휴스톤에는 연이어 장대비가 쏟아지고, 온 하늘과 땅이 캄캄해졌고, 종일 먹구름이 가득했다. 지역 주민들은 계절적으로, 이런 저온(低溫)은 자주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학생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한 손에는 작은 국기를 들고, 새벽 4시부터 모이기 시작해, 환영 구호와 국기 흔드는 자세를 연습했다. 매번 7, 8시간 동안 기다렸지만, 장쩌민은 모두 옆 문을 통해 출입했고, 단 한 번도 환영단 학생들을 보지 않았다. 시카고 공항에서 시카고 호텔, 휴스톤 공항, 호텔에서 웨이코(Waco) 공항까지, 장쩌민은 계속해서 환영단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들을 고용해 환영단을 조직한 진짜 목적은 수 천명에 달하는 파룬궁 항의자들의 기세를 누르기 위함에 불구했고, 장쩌민은 근본적으로 파룬궁 수련생들과 마주칠 엄두를 내지 못했으며, 그 모습이 마치 머리를 감싸고 쥐처럼 도망가는 것과 같았다. 그가 이렇게 도망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장쩌민은 도처에 존재하는 파룬궁 항의자들과 그 깃발을 볼 수밖에 없었다.

7. 퇴로 찾기

2002년 파룬궁 진압 상황은 이미 전과 같지 않았다. 파룬궁은 “분신 자살” 날조 사건의 진상 알리기를 위해 급기야 국내에서 직접 중간 방송을 했다. 또한 민간인과 관료마저 파룬궁 진압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당시 장쩌민은 퇴임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파룬궁의 항의는 도리어 더욱 거세졌으며, 이는 마치 그림자처럼 장쩌민을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시카고 기소 사건 후, 장쩌민은 자신의 국제적 지위가 무너지고 있음을 간파했고, 이에 어쩔 수없이 파룬궁과 타협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즉 1976년 “사인방(四人幇)”을 몰아낸 후에 추궁 조사가 벌어졌다. 중공 고관 및 그 자제를 박해한 군인은 내부 청산을 당했으며, 일부는 운난(雲南)으로 이송되어 비밀리에 처형 당했고, 중공은 그 가족들에게 “공무 순직” 이라고만 알렸을 뿐이다. 당시 베이징 공안국 국장 류촨신(劉傳新)은 두려움에 떨다가, 추궁 조사가 시작되기 전에 자살을 선택했다.

장쩌민은 미국의 측근을 통해 파룬궁의 의견을 떠보고, 문화대혁명 당시처럼 파룬궁 수련생을 죽인 경찰을 총살해 그들에게 보상 하겠다는 제의를 하면서, 기소를 취소해달라고 요구했다. 또한 문화대혁명 때보다 더욱 엄격하게 처리할 것이고, 희생된 파룬궁 수련생의 수만큼 경찰들을 총살할 수 있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아주 불공평하며,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다. 장쩌민은 수년 동안 국가의 1/4, 심할 때는 1/3의 예산을 써가며 파룬궁을 진압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에서 제멋대로 파룬궁을 “사교” 라고 선포한 후, 인대(人大)를 강압해 법률을 수정했는데, 이는 분명히 경찰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교소 경찰들이 수감자들을 고문할 때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장쩌민이 이렇게 시켰다” 이다. 그래서 죄는 바로 장쩌민에게 있는 것이다. 사실 장쩌민은 파룬궁 진압에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또한 더욱 은밀하고, 참혹한 방법으로 수련생 박해를 강요했다. 경찰들은 장쩌민에 의해 이용당했을 뿐이다. 만약 경찰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죄를 씻어 낼 수 있다면, 장쩌민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런 방법을 선택할 것이다.

8. 16대 “군사 정변”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서, 장쩌민은 중공 16대 소집일을 9월부터 계속해서 11월까지 미루었다. 2002년 상반기, 장쩌민은 이미 16대에서 퇴임하는 것을 마음 조리며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는 차오스(喬石)을 몰아낼 당시에, 자신이 오늘날 이처럼 큰 대가를 치를 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쩌민은 퇴임 후에 속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정협(政協) 주석인 리루이환(李瑞環) 때문이다. 국외에서 리루이환에게 바라는 요구 사항은 아주 드높았는데, 첫째는 그가 어디를 가던지 공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장쩌민을 공격하였고, 특히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리루이환은 파룬궁 진압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이 모든 것들이 장쩌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장쩌민을 곤란하게 한 점은, 리루이환을 차오스와 같은 방법으로, 그가 아직 퇴직할 나이인 70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리할 수 없다는데 있었다. 만약 그가 16대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장쩌민과 상반된 주장을 하면, 이는 퇴임을 앞둔 그에게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고, 나중에 자신이 발탁해 정치국에 들어간 측근이 자신의 의견을 집행할 때에도 방해 요소가 될 것이다. 그래서 장쩌민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리루이환을 퇴임 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리루이환은 권력에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심지어는 장쩌민과 함께 퇴임하길 바란다는 말까지 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정치국은 다섯 차례에 걸친 격렬한 논쟁과 표결을 거쳐, 장쩌민의 모든 직위 퇴임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그리고 리루이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며, 재차 유임하지 않았다. 원로 및 정치국 위원들은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들 생각에, 장쩌민이 퇴임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 장쩌민을 적지 않게 추켜 세웠다. 장쩌민은 이 기회를 틈타 자신의 측근을 정치국에 넣으려고 했다. 정치국 사람들은 별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이에 동의했다. 그들은 이 일의 심각성을 알지 못했는데, 16대 정치국 및 상무위원회에 장(江)씨 성을 가진 사람이 다수 존재하는 상황에서, 장쩌민이 정치국의 막후(幕後) 원로가 될지는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 결과는 지난 15대 보다 더욱 참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5대에서는 적어도 장쩌민이 리루이환, 웨이젠싱(尉健行) 등 원로들의 제약을 받아, 그의 주장이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치대로 말하면, 장쩌민은 분명히 이 결과에 만족했을 것이다. 16대 상무위원회 명단을 보면 장쩌민이 바라던 “3대원칙” 이 실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그가 발탁한 관원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면, 그들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에게 반항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이 “사인방”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할 것이다. 두 번째, 부정부패한 관원이 대다수를 차지한다면, 그들은 개인의 이익을 보호하려고 할 것이고, 그래야만 반(反)부패를 주장하지 않고, 또한 장쩌민 자신이 국고를 빼돌리고, 나라를 팔아 먹고, 신분을 고치고, 규벌(閨閥: 처가의 세력을 중심으로 결성된 파벌) 관계를 형성한 죄목을 들춰내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 눈을 부릅뜨고 파룬궁 진압에 전심전력한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해야지만, 파룬궁이 후에 재평가 되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이들 자신이 숙청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여전히 내심 불안해 했다. 2002년 10월 22일, 미국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에 의해 “집단 학살”로 법정에 고소된 날로부터 6개월이 지난 후, 16대를 열기까지 시간이 매우 촉박했기 때문에, 이때 정치국의 결정을 뒤엎고, 국가 주석을 계속 연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고, 법률에 “전임 국가 원수”는 면책권(免罪權)을 누릴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내심 여전히 불안해 했다. 미국에서,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집단 학살”로 고소되었는데, 이런 죄목은 국가 원수 면책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경우가 장쩌민에게는 타산지석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장쩌민은 재위시 정치, 경제와 외교적인 압력으로 미국과 교섭하려고 했고, 심지어 “원수 면책”을 퇴로의 수단으로 삼았다. 하지만 중공 16대 소집일이 이미 반 개월 정도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장쩌민이 정치국의 결의를 뒤집고 국가 주석직을 계속 연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일단 원수 직에서 물러난 뒤, 다시 “원수 면책”을 들먹이다가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장쩌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총대를 움켜잡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유지하고, 후진타오(胡錦濤)를 조종해, 미국 사법의 공정성에 대해서 비판하게 하며, 법의 심판을 피하는 것이었다. 장쩌민은 쩡칭훙을 불러, 16대에서 퇴임할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장완녠(張萬年)을 찾아 자신의 유임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일이 성공한 한 후에는 그를 국방부장으로 임명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2002년 11월 8일, 중공 16대가 개막했고, 장쩌민의 이름은 새로운 중앙 위원회 후보자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 이는 장쩌민이 새로 조직될 중앙 위원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당과 국가와 관련된 어떤 간부 직위도 맡을 수 없음을 의미했다. 전국 모든 사람들이 이 사실에 기뻐하며, 이제서야 장쩌민이 완전히 퇴임한다고 생각했다. 몇 명의 영향력 있는 원로, 예를 들어 완리(萬里)는 모든 것이 정치국의 결의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1월 13일, 중공 16대 주석단 상임위원회의 네 번째 회의에서, 장쩌민의 지시를 받은 장완녠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아주 강경한 태도로, 20명의 주석단(전부 군인)의 “특별동의” 서명을 제안하며, 장쩌민의 중앙 군사위원회 주석 직위를 유임하자고 건의했다.

장왕녠은 “특별동의”의 이유로 5가지를 들었다. (1) 지도체제가 바뀐 후 당정군(黨政軍)의 업무 강화에 도움이 된다. (2) 군대 인사 체제 변경에 유익하다. (3) 현재 복잡한 국제 정세에서, 중미 관계에 있어서 미국 내정과 대외 전략에 발맞추어 변화를 주는데 유익하다. (4) 대만 정국 변화에 따른 정책 결정에 유익하다. (5) 새로 조직된 정치국 인사 문제 처리에 유익하다.

장완녠의 발언 후, 장쩌민의 도움으로 아들이 저지른 10억원 규모의 사고를 말끔히 청산한 리란칭(李岚淸), 장쩌민에게 딸을 인질로 잡힌 류화칭(劉華淸)은 즉시 이렇게 말했다. “전적으로 ‘특별동의’를 지지한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사전에 계획된 것임을 그제서야 간파했고, 이렇게 그들은 모두 간접적으로 강요 받게 되었다. 회의장 분위기는 잠시 동안 엄숙해졌고, 어떤 사람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어서, 본래 후진타오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장완녠이 그에게 태도를 표명하라고 강요했다. 회의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져, 심지어 호흡 소리마저도 들렸고, 사람들은 후진타오가 만약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군인들이 그를 잡아 연금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후진타오는 조용하게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장완녠, 궈보슝(郭伯雄), 차오강촨(曺剛川) 등 20명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후진타오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지었지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그 웃는 표정이 우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장왕녠은 아첨하는 눈빛으로 장쩌민을 보았고, 장쩌민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어서, 거수 표결이 진행 되었다. 리우이환, 웨이젠싱, 차오칭저(曺慶澤) 세 사람은 기권하였고, 장완녠을 비롯한 20명의 동의로 “특별동의” 결의는 순조롭게 통과되었다. 웨이젠싱은 회의장에서 이 일에 대해서 사적인 의견을 표명했다. 조직 원칙 상 임시 “특별동의” 통과를 받아 들였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이에 반대한다. 주석단 상무위원 전체회의는 임시 “특별동의”로 정치국 상무위원회와 정치국의 다섯 차례 토론회 및 표결을 거친 결의안을 부정했고, 이는 아주 특이하고 심각한 일이며, 관련자에게는 반드시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이 사건은 계획적인 음모로, 장쩌민의 배후 조종을 받은 군인 세력이 성공시킨 무혈 군사 정변과 같은 것이다. 정치국 결의를 무시하고, 천박한 수단으로 모든 회의 참가자들을 강요한 것은 정치 깡패와 같은 장쩌민에게는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장쩌민은 일이 성공한 뒤 장완녠에게 한 약속을 무시하고, 그를 “해갑귀전(解甲歸田: 군대에서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다)” 시켰다. 현재까지, 장쩌민에게 이용당한 사람들은 모두 장왕녠처럼, 그의 이름만 들어도 격분하며 이를 간다.

당시 휴가를 가서 돌아 오지 않은 완리(萬里)는 이 소식을 들은 후, 온 몸이 떨릴 정도로 매우 격분했으며, 책상을 치며 장쩌민을 욕했고, 주석단 상무위원회를 자진 퇴임해, 항의 의사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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