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18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18호색한이라 처첩이 한 무리고, 소인배가 출세하니 친인척이 날뛰네

2002년, 후난성 사오둥(邵東)에서 발견된 ‘국모 쑹쭈잉(國母宋祖英)’이라는 기이한 책은 장쩌민을 노발대발하게 만들어 결국 수십 명이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나 장쩌민의 음탕한 생활은 이 사건으로 세상에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사실 그 전에도 장쩌민과 내연녀들에 대한 스캔들은 이미 민간과 관료들 중에서 유전되고 있었다.

1.쑹쭈잉(宋祖英)

장쩌민의 내연녀들 중 가장 주목받은 사람은 쑹쭈잉이었다.

“일이 있으면 오빠를 찾아라”

쑹쭈잉은 원래 샹시(湘西)의 한 평범한 묘족(苗族) 여성이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중앙민족대학 음악무용학과에 선발되었고 1991년 CCTV의 설 특집 공연에 나와 ‘작은 멜 광주리’란 노래를 한 곡 부른 행운이 있었다. 노래는 썩 잘하지 못했지만 쑹쭈잉의 미모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쑹쭈잉의 할아버지뻘 되는 장쩌민은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벌써 그녀에게 눈독을 들였다.

그 뒤 쑹쭈잉은 군사위 주석인 장쩌민에 의해 해군정치위원회 가무단으로 옮겨갔으며 소장급 문예 군관이 되었다. 해군정치위원회 사령관은 원래 장쩌민을 만나기가 힘들었지만 나중에 보니 장쩌민이 해군정치위원회 가무단의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또 매번 반드시 쑹쭈잉이 부르는 노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됐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에 올라와 연예인들과 악수를 할 때면 장쩌민은 쑹쭈잉의 손을 잡고는 놓기 싫어했으며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하여 가무단 지도자들도 점차 이를 눈치 채고 장쩌민이 올 때마다 쑹쭈잉의 노래를 가장 중요한 순서에 배치했으며 평소 그녀의 생활과 진급에 대해서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한번은 공연이 끝나고 악수할 때, 장쩌민은 쑹쭈잉에게 슬그머니 쪽지를 건네주었다. 주변에 이목이 많아서 쑹쭈잉은 감히 보지 못하고 바로 호주머니에 넣었다가 나중에 펼쳐보니 거기에는 “이제부터는 일이 있으면 오빠를 찾아라, 오빠가 어떤 일이든 해결해 주마”라고 적혀 있었다. 쪽지에서 말한 ‘오빠’는 바로 장쩌민 자신이었다. 쑹쭈잉은 득의양양한 나머지 종이쪽지의 내용을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장쩌민은 쑹쭈잉과의 밀회가 방해를 받거나 탄로 나지 않게 하기 위해 쑹쭈잉을 이혼하게 하고 가무단 숙소에 머물게 했다. 그 뒤부터 장쩌민은 늘 저녁에 숙소에 찾아가 쑹쭈잉을 만났는데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행동했고 신변 경호원들도 평소보다 더 경호에 신경을 썼으며 매번 차 번호판도 바꿨다. 그리고 장쩌민은 차에서 내려 바로 쑹쭈잉의 방으로 들어갔다. 숙소 사람들은 모두 이를 알고 있었지만 못 본 척 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구역질나고 역겨워 했다. 나중에 한 노 간부가 두 사람이 밀회한다는 사실을 상급 관리에게 보고했지만 도리어 행동을 감시 받고 전화를 도청 당하는 화를 안게 되었다.

1966년 8월 1일 중국 후난성 구장(古丈)현에서 태어난 쑹쭈잉은 1926년 8월 26일 장쑤성 양저우에서 태어난 장쩌민보다 40살이나 어려 나이로 따지면 장쩌민은 쑹쭈잉의 할아버지도 될 수 있다. 두 사람의 더러운 정사관계를 숨기기 위해 쑹쭈잉의 남편인 뤄하호(羅浩)는 그때부터 매우 난처한 처지에 빠졌다. 기자들이 쑹쭈잉을 취재할 때면 뤄하호는 이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먼저 취재 장소에 나타나야 했으며 쑹쭈잉이 온 뒤에는 다른 방에 물러나 있어야 했다. 쑹쭈잉은 이렇게 이혼 사실을 감추려고 했으나 일부 기자들은 쑹쭈잉의 이런 행동이 오히려 그녀가 이혼했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었다고 말했다.

중난하이 ‘빨간색 카드’

CCTV 방송국에서도 쑹쭈잉은 특권을 누렸다. 그녀가 어느 노래를 부를 것인지는 다른 가수들과는 달리 자신이 직접 결정할 수 있었으며 CCTV 프로그램 감독이나 간부 심지어 중앙선전부 관리들도 감히 간섭하지 못했다. 장쩌민은 또 CCTV에서 쑹쭈잉의 노래를 중계방송을 할 때, 그녀가 노래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담아내기 위해 카메라를 관리들이 앉아있는 관중석쪽으로는 돌리지 못하게 했다.

2002년 여름, 쑹쭈잉은 쓰촨(四川)성의 한 도시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장쩌민의 심복인 중앙 경위국 국장 유시구이(由喜貴)의 지시로 당시 쓰촨성 당서기였던 저우융캉(周永康, 현임 공안부장)은 부총리 급 이상의 국가 지도자들을 맞을 때 동원되는 1급 경위대를 동원해 쑹쭈잉을 맞이했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콘서트가 열리는 경기장에는 4, 5만 명 관중이 장쩌민의 내연녀를 보려고 밀려들었다. 쑹쭈잉의 노래 중에는 ‘용선조(龍船調)’라는 후베이(湖北) 민요가 있었다.

가사 중에 ‘처녀가 강을 건너려 하는데 누가 와서 업어줄까’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가사가 나오자 무대 아래에 있는 몇 만 명 관중들은 일제히 “장(江) 할아버지가 업어 주지요!”라고 대답했다. 쑹쭈잉은 창피하여 몸 둘 바를 몰랐지만 관중들이 돈을 내고 보는 공연이기에 중도에 그만 둘 수 없어서 억지로 노래를 계속했다.

2절을 부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저녁 쑹쭈잉은 호텔에 돌아와 눈이 빨갛게 되도록 울었고 그 이튿날 바로 베이징으로 날아가 장쩌민에게 이 사건을 얘기했다. 장쩌민은 화가 나서 콘서트가 열렸던 도시의 당서기에게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지금은 지방의 당서기들도 많이 약아져 이런 일로 민중을 건드리기 싫어했다. 며칠이 지난 뒤, 그 도시의 당서기는 “그 날 저녁 현지 TV방송국 카메라가 무대만 향하고 있어 몇 만 명 관중들 가운데서 범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리하여 이번 사건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쑹쭈잉에게는 또 중난하이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통행증인 ‘빨간색 카드’가 있었다. 이 사실은 1997년, 지방에서 베이징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한 여 가수가 쑹쭈잉과 같은 차를 타고 CCTV방송국에 프로그램을 제작하러 가는 도중, 차 안의 소품 상자에서 우연히 쑹쭈잉의 이름으로 된 중난하이 통행증을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이 여가수가 입단속을 잘 하지 못한 관계로 이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해방군과 라디오 방송국 계통의 문예부서에서는 여러 번 간부, 당원, 군중 회의을 열고 중난하이 ‘빨간색 카드’와 관련된 루머를 퍼뜨리지 말고 믿지도 말라고 호소했으며 정치 규율로 정하고 반드시 엄격하게 준수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가장 먼저 이 사실을 공개했던 그 여가수도 얼마 뒤, 톈진(天津)에 있는 원래 직장으로 돌려보내졌으며 톈진에서 살해되었다. 그 여가수는 다른 사람이 뒤에서 떠미는 바람에 건물 베란다에서 추락해 사망했다고 한다.

사이트에서의 마지막 통첩

장쩌민과 쑹쭈잉의 스캔들은 1998년부터 베이징에서 퍼질대로 퍼져 있었다. 베이징 택시기사들은 차가 밀릴 때면 늘 손님들과 이 일을 흥미진진하게 담론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2001년 어느 하루, CCTV 문예부 주임을 담당했고 몇 년 동안 설 특집 프로그램 감독을 맡았던 자오안(趙安)이 쑹쭈잉을 포함한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다. 술자리에서 쑹쭈잉은 술기운이 오르자 장쩌민과의 풍류정사를 떠벌렸는데 자오안이 이 사실을 외부에 전한 적이 있다. 나중에 자오안은 작사가이자 파트너인 장쥔(張俊)과 모순이 생겼고 장쥔은 두 차례에 거쳐 국가기관 주요 관리들에게 익명으로 300여 통의 편지를 보내 자오안이 쑹쭈잉과 장쩌민의 스캔들을 누설했다고 제보했다.

제보라고는 하지만 이 때문에 장쩌민과 쑹쭈잉 사이의 스캔들은 수 백 명 고위층 관리들에게 전부 상세하게 알려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관리들이 처음에는 모두 모르는척하고 있어 2년 동안은 아무 일이 없었지만 나중에 누군가 장쩌민에게 이 사실을 고발했다. 일이 들통 난 것을 안 장쩌민은 심지어 정치국회의에서까지 화를 내며 그런 일이 절대 없다며 변명에 나섰고 즉시 뇌물수수 혐의로 자오안을 체포해 10년 판결을 내리게 했다. 장쥔 역시 6년 판결을 받았다. 두 사람 다 감옥에 밀어 넣고서야 장쩌민은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나중에 장쩌민이 16차 당대표 대회에서 억지를 쓰면서 군사위 주석 자리를 물러나려 하지 않자 평범한 학자인 뤼자핑(呂加平)이 장쩌민과 쑹쭈잉 사이의 스캔들을 또 다시 폭로했고 장쩌민 역시 평소 관례대로 2004년 2월 23일, 뤼자핑을 체포했다.

그러나 그 이튿날, 인터넷 토론방 게시판에는 당장 뤼자핑을 석방하지 않을 경우, 그와 쑹쭈잉의 밀회 장면을 녹화한 동영상 자료를 전국과 전 세계에 공개하겠다는 협박 내용이 발표되었다. 이 일이 있기 얼마 전에 인터넷 게시판에 대만 모 관리의 도색 스캔들을 폭로한 동영상이 나돌았기 때문에 이 경고는 장쩌민에게 있어서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의외로 뤼자핑은 체포된 당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사건이 좀 가라앉자 장쩌민은 뤼자핑을 후난(湖南)으로 끌고가 암살해 버렸다.

한편, 쑹쭈잉은 여전히 황비나 된 것처럼 행세를 했으며 국가 1급 배우가 되어 국무원에서 발급하는 ‘정부 특별 수당’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정치위원, 국가부녀연합집행위원 및 전국청년연합회위원과 중국음악가협회 이사가 되었다.

국립대극장

쑹쭈잉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장쩌민은 국고의 돈을 적지 않게 낭비했다. 쑹쭈잉이 호주에서 콘서트를 열고 싶다고 한 마디 하자 장쩌민은 즉시 수천만 위안을 들여 쑹쭈잉이 호주와 오스트리아에서 이름을 날리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민간 가수인 쑹쭈잉의 공연에 민족 악기의 연주와 중국인 합창단이 필요하긴 하지만 시드니 공연에서는 중국어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외국인 합창단을 선택했으며 반주도 서양악기로 했다. 민가 음악회 무대에서 오직 쑹쭈잉 한 사람만 중국 사람이어서 그녀의 콘서트는 중국식도 서양식도 아닌 이상한 음악회가 되었다. 2002년 서울 월드컵 개막식에서 한국에서 실력 있는 가수를 한 명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중국에서는 수준이 안 되는 쑹쭈잉을 보냈다. 나중에 한국 측에서는 공연에 참여한 모든 스타들에게 매우 많은 출연료를 주었지만 유독 쑹쭈잉에게만은 일전 한 푼 주지 않았다.

장쩌민은 수천 만 위안을 쏟아가며 쑹쭈잉의 첫 번째 DVD 앨범을 제작해 2002년 설 전야에 전국 시장에 출시했다. 그러나 장쩌민의 선물 가운데서 가장 쑹쭈잉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국립대극장이었다.

2001년 12월 13일, 신화사는 국립대극장 착공식을 가졌다고 보도했다. 베이징 천안문광장 인민대회당 서쪽에 들어설 국립대극장은 총 건축 면적이 14만 9천5백 평방미터에 달하며 건설비만 총 3억 달러가 투입되는 거대한 규모이다. 4년 안에 준공될 예정인 국립대극장은 준공된 후, 정식 영업에 들어가려면 3억 위안 이상이 추가로 필요해 과거 15년 동안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동을 돕기 위해 발족한 ‘희망공정’이 국내외에서 받아들인 헌금 총액의 배에 해당한다. 이는 빈곤 학생 500여 만 명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국립대극장은 건설안이 제출된 첫날부터 줄곧 반대의 목소리에 휩싸여 왔다. 어떠한 각도에서든 대극장을 건축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전문가는 한 사람도 없었으며 모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저지를 시도했다. 학자들은, 실직 노동자들과 민공(民工)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어찌 30여 억 위안을 유흥을 위한 건물에 쏟아 부을 수 있겠냐며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게다가 극장 설계를 담당한 프랑스인 폴 앙드뢰는 공항 전문 설계사로, 극장을 설계한 경험이 없는데다 그가 설계한 프랑스 드골 공항 터미널은 설계와 공사 결함으로 2004년 5월 23일 지붕이 붕괴돼 6명이 숨지고 수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파리 검찰 측은 2003년 7월부터 진행된 조사를 통해 그가 베이징 국립대극장 설계를 위한 입찰 과정에서 뇌물을 사용한 혐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또 건축 전문가들은, 대극장이 외관 상 마치 외계인들의 UFO가 중난하이의 문 앞에 내려앉은 것 같다고 비난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이, 중국 6개 왕조의 수도였던 베이징의 문화전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국립대극장의 설계는 큰 잘못이며 웃음거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실용적인 가치를 따져보면 더 많은 문제점이 존재한다. 캐나다 황실건축학회 마이클 커클랜드(Michael Kirkland) 원사는 이 대극장이 “건축 개념과 기본 과학 법칙마저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고 혹평했다. 그는 설계자가 실용 위주로 되어야할 극장을 예술품으로만 간주했다며 지상에서도 충분히 큰 공간을 열어놓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지하로만 정신없이 파 들어가 세계 건축사에서 가장 황당한 사례로 되었다고 지적했다.

국제 건축학계에서 권위 있는 잡지인 영국 ‘Architecture Review’지는 1999년 1월호에서 앙드뢰의 중국 국립대극장 설계를 ‘무법천지(Outrage)’라고 비난했고 ‘완벽한 인분 덩어리’에 외관을 비유하며 베이징의 기타 건축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예리하게 비평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누가 뱉어놓은 침처럼 보인다는 사람마저 있으나 장쩌민만은 너무나 맘에 들어 했다. 쿤은 ‘장쩌민 평전’에서, “중난하이의 남쪽 정원에서 달구경을 하기 좋아하는 장쩌민은 호수에 비친 달빛을 따라 저 멀리 바라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국립대극장이 점차 완성돼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라고 썼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오밍 페이(Ieoh Ming Pei)도 국립대극장이 베이징의 고대 건축물들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기에 고궁에서 바라봤을 때 그 모습이 보일까봐 가장 걱정했다.

사실 국립대극장에 대한 가장 많은 평가는 외관이 마치 ‘큰 무덤’과 같고 지하로 통하는 입구는 마치 묘지로 들어가는 통로와 같다는 것이다. 앙드뢰는 극장 입구를 수족관처럼 주위가 수면에 둘러싸인 약 100미터 정도의 터널로 설계했는데 이는 오래된 무덤에서 볼 수 있는 고인 물을 떠올리게 했다.

이 국립대극장을 두고 민간에서는, 중국의 중심 중의 중심인 베이징 천안문 광장 한 복판이 무덤으로 변했다고 했다. 풍수를 중시하는 중국에서 나라 심장부에 무덤을 만들어 놓고, 고궁과 인민대회당에서 문을 열면 모두 무덤이 보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풍수 전문가들은 이 ‘큰 무덤’이 베이징의 절묘한 건물 배치를 훼손시켰다고 말하고 있다. 조상들이 오행(五行), 오제(五帝), 사방사상(四方四象)에 따라 좋은 풍수를 마련해 놓았지만 이제 베이징은 음기(陰氣)로 가득 차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장쩌민의 특수한 내력에 비춰볼 때, 이러한 음기가 장쩌민이 양간(陽間)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유리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거금을 들이고도 추하고 아무 쓸모없는 국립대극장이 장쩌민의 총애를 받는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밖에, 이 대극장은 또 공사가 완성된 뒤에도 광(光)오염, 건물을 감싸고 있는 바깥 유리 청소, 매월 400만 위안에 달하는 전기료 등 수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특히 중국은 현재 돈이 있어도 전기를 살 수 없을 지경으로 에너지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와 같은 억지공사를 두고 중국 양원(중국과학원과 중국공정원)의 140명 과학자들과 유명한 건축가, 도시 설계사 및 엔지니어 114명이 각각 중공 고위층에 합동 서명한 탄원서를 제출해 앙드뢰가 설계한 국립대극장 건축 방안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으나 장쩌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장쩌민에 있어서 과학자들의 말보다는 쑹쭈잉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했다. 때문에 사람들은 심지어 국립대극장을 가리켜 장쩌민이 쑹미인을 위해 마련한 기생집이라고 하기도 했다.

쑹쭈잉도 장쩌민의 통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모두 중공 정권과 장쩌민을 위해 태평성세의 가상을 꾸미는 노래들이었다. ‘행복한 생활(好日子)’, ‘갈수록 좋네(越來越好)’. ‘대를 잇는 개척자(繼往開來的領路人)’, ‘영원히 따르겠습니다(永遠跟你走)’ 등 노래가 바로 대표적인 것들이다.

중공 고위층과 지방 관리들은 모두 쑹쭈잉에게 아부하는 것이 장쩌민에게 아부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군정치위원회 가무단 장군들은 계급이 낮음에도 불구, 쑹쭈잉에게 굽실댔다. 한번은 해군정치위원회 가무단에서 티베트 주둔 부대 위문공연을 가게 되었는데 쑹쭈잉도 공연진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안 가무단 지도자들은 “쑹쭈잉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총서기에게 미안하게 된다. 티베트는 해발고가 높아 기후가 좋지 않고 고생스러우니 쑹쭈잉은 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2. 리루이잉(李瑞英)

장쩌민과 애매한 감정을 가진 여인은 쑹쭈잉 한 사람 뿐만이 아니다. 쑹쭈잉은 외모가 각별이 요염하여 더 주의력을 끌었을 뿐이었다. 민간에서는 “집에는 부엉이를 두고 출국할 때에는 리루이잉을 데리고 가며 노래는 쑹쭈잉의 노래만 듣는다”라는 말이 떠돌고 있는데 이는 장쩌민과 주변에 있는 여인들 사이의 관계를 풍자한 말이다.

‘부엉이’는 장쩌민의 부인 왕예핑(王冶坪)을 가리키는데 나이가 많고 병도 많아 얻은 별명이었다. 장쩌민이 출국할 때 그녀를 동행시키는 것은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고 있다”는 생색을 내기 위한 것일뿐, 속으로는 사실 그녀를 매우 싫어했다. 2002년, 미국 텍사스 주 농장에서 부시 대통령 부부가 미국을 방문한 장쩌민 부부를 환영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내를 한쪽에 버리고 혼자 연회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당시 부시 부부가 남편에게 냉대를 당한 왕예핑을 위로하는 장면이 외신기자들의 카메라에 잡혀 공개되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예의의 나라로 불렸지만 장쩌민의 이와 같은 행동은 국제사회에서 중국 사람들의 체면을 구겨 놓았다.

쑹쭈잉과 리루이잉의 중난하이 대결

쑹쭈잉과 간통하기 전에 장쩌민은 한 유부녀를 내연녀로 두고 있었는데 바로 CCTV 아나운서 리루이잉(李瑞英)이었다. 리루이잉은 외모는 평범했지만 아양을 떠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에 매년 정협회의에 빠진 적이 없었다. 그녀는 또 몇 해 동안 장쩌민이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CCTV 기자 신분으로 수행하곤 했는데, 낮에는 TV화면에 나와 장의 나팔수가 되었고 밤에는 장쩌민의 ‘쓸쓸함’을 달래줬다. 장쩌민을 따라 외국에 간 리루이잉이 현장에서 전해온 보도 화면을 보고 중국 시청자들은 그녀가 장쩌민 앞에서 애교를 떨던 말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 같다며 비난했다.

리루이잉은 1986년부터 CCTV에서 중견 아나운서로 일해왔다. 6.4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초기에, 여론이 학생들을 지지하는 쪽으로 쏠리자 리루이잉도 민주를 지지하고 정의로운 척 했다. 그러나 계엄령이 발표되자 그녀는 즉시 태도를 바꿔 학생운동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당시 CCTV의 두시안(杜憲)과 쉐페이(薛飛) 두 아나운서는 독재정권이 학생들을 학살하는데 동조하는 것을 거절하여 모두 아나운서 자격을 박탈당했다. 특히 두시안 아나운서는 뉴스를 진행하면서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나 양심을 저버린 리루이잉은 계속해서 중공의 나팔수가 되었다.

장쩌민이 “일이 있으면 오빠를 찾아라”는 쪽지를 건네주면서부터 쑹쭈잉은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이 방자한 행동을 시작했다. 한 번은 장쩌민이 동남아 국가를 방문하기 직전, 쑹쭈잉과 리루이잉이 중난하이에서 차량 충돌 사고가 발생했는데, 쑹쭈잉은 장쩌민에게 리루이잉을 중난하이에 오지 못하게 하고 왕래도 하지 말며 심지어 출국할 때 기자로도 데려가지도 말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했다. 쑹쭈잉은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선택하라”고 장쩌민을 협박했다. 소문에 의하면, 장쩌민이 당시 쑹쭈잉의 협박 조건에 ‘묵인’하면서 리루이잉은 크게 패했다고 한다. 그 뒤로 장쩌민이 외국을 방문할 때면 다시는 리루이잉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CCTV는 아예 아나운서가 국가주석을 따라 출국하는 것을 금지했다.

2003년, 다시 정협 지도자를 선거하게 되자 정협 위원들 중 누군가가 투표 시 쑹쭈잉의 이름을 ‘정협부주석, 비서장’ 후보 명단에 써넣었다. 결과를 선포하는 관리가 “쑹쭈잉 한 표”라고 선포하자 사람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더 재미있는 것은, 쑹쭈잉 바로 뒤에 선포된 것은 “리루이잉 한표”라는 결과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마주보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주고받았다. 정협 대표들은 사실 선거표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아예 장쩌민과 장난을 친 것이었다.

3. 천즈리(陳至立)

장쩌민의 내연녀들 중에서 관직이 가장 높은 천즈리는 또한 장쩌민에게 가장 충성했다. 이는 그녀가 상하이 ‘세계경제도보(導報)’ 편집국장 친번리(欽本立) 등 사람들에 대한 박해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장쩌민과 몇 십 년 동안 각별한 사이를 유지해 온 천즈리의 충성심은 남녀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아닌, 정치상에서 장쩌민에 대한 지지에서 표현되었다. 천즈리는 장쩌민이 박해하려 한다면 반드시 심하게 탄압했고 장쩌민이 좋아한다면 반드시 심혈을 기울여 보호하곤 했다.

추악한 남녀

천즈리는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장쩌민의 맏아들 장몐헝(江綿恒)이 일하는 중국과학원 상하이 규산염 연구소에서 일했다. 장쩌민이 상하이 당서기로 승진한 뒤, 장몐헝의 소개로 만난 장쩌민과 천즈리는 서로 첫눈에 반해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했다. 1998년, 장쩌민이 천즈리를 상하이 당 선전부장을 맡기면서부터 천즈리는 상하이에서 큰소리를 치게 되었다. 그러나 상하이 당국 관리들은 그녀의 관직이 어떻게 온 것인지 모두 알고 있었다.

‘세계경제도보’ 사건은 1989년 상하이 학생민주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나중에 중공 원로들 중 6.4학생운동 탄압을 주장한 몇 사람이 장쩌민을 중공 고위층에 발탁시킨 것도 모두 장쩌민이 도보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서 그들과 입장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도보 사건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바로 천즈리였지만 6.4 학생운동의 전주곡이 된 이번 사건은 전국 지식인들의 항의를 불러일으키며 예상보다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1989년 5월, 장쩌민은 베이징에서 총서기 자오쯔양에게 도보 사건을 부당하게 처리했다고 심한 비판을 받았다. 장쩌민이 불안에 떨고 있는 것을 본 천즈리는 “저 혼자 모든 책임을 감당하겠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장쩌민을 위로했다. 큰 재앙이 닥칠지도 모르는 상하이 도보 사건을 놓고 대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것으로부터 장쩌민에 대한 천즈리의 충성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6.4 탄압이 지나간 뒤, 천즈리는 도보 직원들을 해산시켰고 특히 도보 기자들이 다시는 기자직에 종사하지 못하게 금지시켰다. 도보 총 편집국장 친번리가 사망하기 전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천즈리는 직접 병원으로 찾아가 친번리에게 당원 자격을 박탈한다는 통보문을 전달해 편히 죽지도 못하게 했다.

천즈리와 장쩌민의 떳떳하지 못한 남녀 관계를 상하이 당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전자공업부에 있었던 황리만(黃麗滿)과의 스캔들에서부터 쑹쭈잉과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외신 기자들에게 순간적으로 포착된, 미녀들을 보고는 넋을 잃는 장쩌민의 표정은 장쩌민이 얼마나 음란하며 저질스러운 인간인지 알 수 있게 한다. 놀라운 충성심 때문일까, 평범한 외모를 가진 천즈리는 수 십 년 동안 장쩌민의 버림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손을 잡은 추악한 남녀에 불과했다.

장쩌민은 중난하이 입성에 성공하자 즉시 천즈리를 베이징으로 불러 중요한 관직을 맡기려 했다. 그러나 전 중앙조직부장 쑹핑(宋平) 등 원로들의 반대로 줄곧 성사시키지 못했다. 1997년, 덩샤오핑의 병세가 심해지면서 장쩌민은 대권을 독차지 하게 됐고 천즈리도 베이징으로 가 국가교육위원회 주임직을 맡게 되었다. 자신과 장쩌민 사이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에 급급했던 천즈리가 베이징에서 자신이 처음 사회를 맡은, 교육위원회 관리들이 모인 회의에서 꺼낸 첫 화제는, 교육과 관련된 국가 사무가 아니라 남편 차오린(喬林)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가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많은 관리들은 황당해 하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다”라고 비꼬았다.

중국 교육계통을 타락시켜

1998년, 장쩌민은 이전에 전혀 교육과 관련된 직책을 맡아보지 못했던 천즈리를 교육부장으로 임명해 중국 문화교육 사업을 망치게 했다. 능력 부족으로 교육부장직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 장쩌민은 또 천즈리를 국무위원으로 승직시켰으며 전국 및 군부 교육 사업을 전부 관리하게 했다.

최근 천즈리는 내부에서 여러 번 탄핵되었다. 그중 한번은, 80여개 대학 1200여 명의 교수들이 중앙에 공동으로 서명한 편지를 써서, 현재의 교육 체계에 대한 개혁이 시급하다고 호소했다. 칭화대(淸華大), 베이징대 등 몇 십개 대학 총장들은 해외 관광에만 정신이 팔려있는 천즈리에게 ‘구미순회대사(歐美巡廻大使)’라는 별명을 달아줬고 여러 번 천즈리를 해직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교육계가 천즈리에 대한 불만이 높은 가운데, 천즈리가 교육부장직에서 낙마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사람들이 기뻐하기도 전에 또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장쩌민이 이례적으로 천즈리를 교육을 주관하는 국무위원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천즈리는 계속 교육계를 관리하게 됐으며 게다가 관직이 더 높아졌다. 새로 지정된 국무원 지도자 명단을 토론할 때, 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한 32개 대표단 중 27개 대표단과 40여 개 대학이 천즈리가 국무위원으로 되는 것에 강력한 반대를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장쩌민은 이러한 의견들을 전부 무시하고 군인 교육마저 천즈리의 손에 맡겼다. 그리하여 중국교육 사업은 철저하게 깊은 골짜기에 떨어져 들어가게 되었다.

교육계는 국가의 기둥을 배양하는 정토여야 하지만 천즈리는 “길게 봤을 때, 경제적인 안광이 있어야 한다”며 중국 교육계를 더러운 교역 장소로 만들어 버렸다. 그 때부터 중국 교육계는 멋대로 학생들의 돈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졸업장을 위조, 판매하는 현상이 보편화 되면서 사회에서 큰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중국 물가감독회의에서 발표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3년 각종 학교와 교육당국이 학생들에게서 불법으로 털어간 돈은 21억 위안에 달하며 일부 명문 대학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정부 측의 다른 한 통계에 따르면, 10년 동안 중국 교육계가 벌어들인 부당한 수익은 2천억 위안에 달하며 교육계의 ‘잡부금’은 연속 3년 전국 소비자 신고에서 가장 많이 제기된 사항이라고 한다. 천즈리가 관할하면서부터 국가 교육부는 국민들이 소멸하고 싶어 하는 또 하나의 적으로 되었다.

교육은 국가 정책, 민생과 직접 관련 될 뿐만 아니라 민족의 미래에도 관련이 있는 중요한 사업이다. 장쩌민의 매국 행위가 폭로된 후인 2001년 12월, 천즈리는 교육부에 명령을 내려 역사를 고치게 하고 신판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요강에서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을 민족영웅으로 부르지 못하게 했으며 나라를 팔아먹는 리훙장(李鴻章)을 애국자로 칭송하게 하면서 흑백을 뒤바꿔 정쩌민의 매국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건을 마련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회 각계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고 천즈리는 질책을 받았다.

가장 심한 것은, 천즈리가 교육을 장쩌민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삼고 초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을 세뇌 시켰다는 점이다. ‘천안문분신자살사건’이 중공의 조작극이라는 사실이 해외에서 널리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천즈리는 초, 중고교생 가운데서 백만인 서명운동을 벌여 장쩌민의 박해 정책을 지지하게 했고 학생들 속에서 증오와 거짓을 선전했다.

천즈리가 교육부를 주관한 7년 동안 줄곧 수단을 가리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취약했던, 중국 교육계에 큰 타격을 입혔고 청소년들을 독해(毒害)시켰다. 교육 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교육의 질이 떨어지면서 학교의 기풍은 점차 타락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대학졸업장, 학위증서가 엄격한 절차 없이 마구 발급되는 현상이 보편화 되었고 도시 적령기 청소년 중 20%이상이 법적으로 규정된 9년 의무교육을 받지 못했다. 대학생들의 도덕은 더더욱 타락해 매매춘, 도박, 강도 등 추악한 행위로 캠퍼스와 중국 사회를 얼룩지게 하고 있다.

천즈리가 교육을 하나의 큰 장사라고 생각하고 ‘교육산업화’를 실시하면서 원래 보편화 되지 못했던 9년 의무교육제도가 이제는 아예 죽어버린 제도로 되고 말았다. 게다가 대학에서 학생 수를 무제한 늘이는 한 편, 학비를 거액으로 받고 있어 적지 않은 농민들은 피까지 팔아보지만 자녀들의 학비를 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천즈리가 교육에는 투자하는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또 천즈리가 연구 과제를 통해 돈벌이를 하라고 격려하면서 교수들이 학생들보다는 부자가 되는데 열중하게 되었고 학생들의 소질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게다다 전국적으로 불경기가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실업자들이 수없이 생겨나 대학생들도 졸업한 뒤 취업곤란에 허덕이게 되었다.

교육계의 부패와 학술부패가 갈수록 심각해짐에 따라 겨우 대학에 들어간 학생들은 거액의 학비를 내고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며 졸업 후에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 중국 교육계의 현주소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교육계 현황을 통책하고 있으며 일부 네티즌들은 “천즈리 이 여자를 죽이지 않으면 민간의 분노를 수그러들게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2003년 장쩌민은 권력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대량 군사위에 밀어 넣으려고 계획하고 천즈리를 군사위원회, 국방과학기술, 교육 관련 사무에 참여시킬 것을 제안했지만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토론에서 분쟁이 크게 일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중앙정치국에서도 대부분 반대하여 실패했다. 군부 고급 장령들은 모두 천즈리를 보는 척도 하지 않았고 뒤에서 그녀를 ‘창녀’라고 불렀다.

4.황리만(黃麗滿)

장쩌민이 가장 총애하는 여자들 중에는 또 황리만이란 여자도 있었다.

사무실의 원앙새

헤이룽장성 치치하얼 출신인 황리만은 하얼빈 군사공정대학을 졸업했다. 그녀는 학교 다닐 때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남자들을 유혹하는 데는 재간이 대단했다. 황리만의 동창생은 “동북 지역에서는 중학교 때부터 남녀학생들이 함께 춤추는 것을 허락했는데, 황리만은 그때부터 많은 남학생들이 그녀를 위해 서로 질투하고 싸우게 했다”고 회억했다. 대학교 때, 황리만은 또 어떤 교수와 묘연의 관계가 있어 그의 아내가 학교에 찾아와 싸운 적이 있다. 그 교수는 이 때문에 학교 당국의 처벌까지 받았다.

황리만과 장쩌민이 만난 것은 80년대 초였다. 당시 장쩌민은 전자공업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리만도 마침 전자공업부 사무실에 배치되었다. 당시 황리만과 같은 사무실에 있었던 동료의 기억에 의하면, 황리만은 매일 짙은 화장에 화려한 옷을 입었으며 굽 높은 하이힐에 꼭 프랑스제 향수 냄새를 요란하게 풍기고 다니면서 선천적으로 호색한 장쩌민을 즐겁게 해줬다고 한다.

중공 기관에는 매일 점심 식사 후 잠자는 시간을 주는데, 이 시간만 되면 황리만은 다른 사람들 몰래 장쩌민의 사무실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동료들은 옆방 부장 사무실 문이 찰깍 잠기는 소리가 나면 모두 알아차리고 아무 말 없이 눈으로만 ‘의사’를 교환했다.

한번은 중앙에서 장쩌민에게 긴급 통보문을 보냈다.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은 장쩌민과 황리만이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몰라 감히 노크도 하지 못하고 밖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휴식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고 한참 지나서야 황리만이 옷매무시를 흩뜨린 채 급히 부장실에서 나왔고 그제서야 장쩌민에게 편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통보문 내용은 장쩌민을 상하이 시장으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왕다오한(汪道涵)의 도움으로 승진하게 된 장쩌민은 전자공업부를 떠나기 전에 황리만을 전자공업부 사무실 부실장으로 승진시켰다. 장쩌민이 상하이에 가자 황리만은 즉시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연결할 수 있는 직통 전화를 설치했다.

당시 중국에서 고급 관리들의 전화비는 국가에서 부담했지만 황리만의 전화비가 어처구니없이 많이 나오자 전자공업부 재무부서에서는 이 일을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전화국에서 조사 확인한 결과, 황리만의 대부분 전화는 상하이에 한 것이며 매 번 2시간 이상 통화했다. 황리만은 장쩌민과의 애매한 관계를 끝내 숨기지 못해 남편에게 들켰다. 황리만의 남편 다쑤이(大隨)가 이혼하겠다고 법정까지 가자 조급해진 장쩌민은 베이징에 가서 황리만의 남편을 구슬렀다. 나중에 장쩌민은 황리만의 남편을 선전(深圳)에 있는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큰 회사로 보내 사업을 하게했다. 그리하여 베이징에 혼자 남은 황리만은 장쩌민이 ‘사무를 보러’ 베이징에 올 때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장쩌민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선전에서 여왕이 되다

6.4 이후, 장쩌민은 황리만을 남편이 있는 선전으로 보냈다. 초기에, 선전 당국 관리들은 누구도 황리만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선전 당국은 누구도 황리만과 장쩌민의 관계를 직접 밝히기 싫어 그녀를 선전 당위원회 부비서장이란 실권이 없는 자리에 배치했다. 그러자 황리만은 가득 쌓인 불만을 장쩌민에게 쏟아내면서 어떻게 해서든 보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장쩌민 자신도 당시 상하이에서 자리를 잡은 상태가 아니었고 게다가 황리만의 상사는 중공 원로 런중이(任仲夷)의 맏아들 런커레이(任克雷)였기 때문에 장쩌민은 황리만에게 조금만 참으라고 했다.

1993년,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준비하면서 남부 도시를 시찰했으나 장쩌민은 이를 반대했기 때문에 하마터면 총서기 자리에서 낙마할 뻔했다. 형세의 압력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장쩌민은 할 수 없이 덩샤오핑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사람들을 거느리고 선전으로 시찰하러 갔다.

선전 당국의 관리들이 사업 보고를 하려하자 장쩌민은 머리도 들지 않고 “왜 황리만 동지는 보이지 않습니까?”라고 느릿느릿 물었다. 이 말에 선전시 당서기 리유웨이(厲有爲)는 깜짝 놀랐다. 그는 부비서장이 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장쩌민이 이렇게 묻는 것은 분명히 황리만을 소홀히 대하지 말라는 암시임을 알아차렸다. 중공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고 있는 리유웨이는 즉시 차를 보내 황리만을 회의장으로 모셔왔다. 회의가 끝난 후, 장쩌민은 기분이 좋다는 듯이 “오늘 밥맛이 당기는데 저녁에 황리만 씨 집에 가서 만두나 먹읍시다”라고 리유웨이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연극하고 나서 리유웨이도 한 시름 놓고 “하마터면 이 동북 창녀 때문에 관직을 잃을 뻔 했네!”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선전시는 인사를 진행했고 황리만은 비서장 겸 선전시 당 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승진했으며 나중에는 선전시 당위원회 부서기로 뛰어 올랐다. 황리만은 비록 부서기지만 그녀의 집에는 중난하이로 직통하는 전화기가 있었는데 이는 선전의 모든 관리들이 받아 보지 못한 특별 처우였다.

황리만은 관직이 높아지자 재물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은 마치 일년 내내 벼슬을 요구하는 사람, 징벌을 피하려는 사람 등 어중이떠중이들로 북적거렸다. 사법 계통에서 일하는 한 관리의 말에 따르면 황리만의 요구로 무죄 석방된 특별 경제사범들만 해도 적지 않으며 그 사람들은 황리만의 집에 갈 때마다 달러를 보따리 째 들고 간다고 한다.

사실 선전 관리들은 모두 장쩌민 덕분에 높은 관직에 앉은 황리만을 깔봤다. 선전의 한 관리는 황리만에 대해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품성도 나쁘고 시민들 가운데서도 신임이 없습니다. 유일한 재간이라면 장쩌민의 속옷 색깔, 재질, 메이커를 외울 정도로 잘 아는 것이지요”라고 풍자했다.

황리만의 남편이 아내가 바람났다는 소문 때문에 분노하는 것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장쩌민은 부동산 사업을 하는 황리만의 남편에게 어디서나 녹색등을 켜주도록 명령했다. 10억 위안 이상을 투자해 선전에 새로 건설한 연합광장이 바로 다쑤이 회사가 만든 것이었다.

황리만이 선전에서 여왕이 되면서 그녀의 자매들도 따라서 신세를 고치게 되었다. 큰 동생 황리룽(黃麗蓉)은 선전의 한 대회사에서 노조 책임자로 있었는데 이 회사 회장은 날마다 그들 자매에게 ‘충성심을 표시’했다. 1997년, 회사가 상장되자 회장은 즉시 황리룽에게 5만 위안에 달하는 주식을 주었다. 선전에 ‘합작은행’이 새로 성립되자 황리만은 또 작은 동생 황리저(黃麗哲)를 은행의 처장으로 배치했다. 최근 들어 은행에서 대출받기가 줄곧 힘들었지만 황리저 남편이 운영하는 회사는 돈이 모자랄 때가 없었다. 황리저 부부는 다른 건 몰라도 대출을 통해 벌어들인 돈만 해도 산더미만큼 된다.

나중에 황리만은 또 광둥성 당위원회 부서기로 승진했다. 장쩌민은 또 리창춘(李長春)을 광둥성 당 서기로 임명하면서 “모든 일은 황리만과 상의하라”고 당부했다. 말 잘 듣는 리창춘은 늘 황리만에게 양보했고 이 때문에 2002년 11월 중공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되었다. 황리만도 뒤질세라 장쩌민이 아직 16차 당 대표대회 인사 배치 권리가 있는 기간 중앙 후보위원으로 되었다.

황리만의 ‘비밀 금고’

중공 당국이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한 결과 관리들의 부패 현상과 ‘비밀 금고(자금 빼돌리기)’ 현상이 매우 심각했다. 선전시 당서기 황리만의 비밀 금고는 아무리 돈을 물 쓰듯 해도 항상 5백 억 위안을 유지한다고 한다.

국가심계국의 조사에 의하면, 황리만 등 선전 특구 당위원회, 선전시 주요 지도자들은 매월 복지금으로 25만에서 30만 위안씩 지급 받았으며 사적인 연회석과 우저우(五洲)호텔 스위트룸에 쏟아 부은 돈만 일인당 15만에서 20만 위안, 예물로 나간 지출은 일인당 5만 위안에 달한다고 한다.

선전에 가있는 4년 동안, 황리만은 선전뿐만 아니라 광저우, 베이징, 상하이에도 각각 하나씩 별장을 사 놓았는데 시가로는 총 1,400만에서 1,500만 위안에 달한다. 그 중 베이징, 광저우, 선전에서 구매한 별장은 모두 국가에서 자금을 보조해 주었는데 사실은 선물로 받은 것과 같았다. 광저우 바이윈산(白雲山) 관광지에 있는 한 별장은 시가 400만 위안에 달한데, 황리만은 25,000위안의 인테리어비만 지불했다. 이 관광지에 있는 40여 채 별장은 모두 광둥성 당위원회 현임 상무위원들의 개인 재산으로 신고되어 있다. 황리만이 선전에 갖고 있는 유럽풍의 한 별장은 건평 280평방미터에 100여 평방미터의 정원이 딸려 있어 시가로 500만 위안에 달하지만 황리만은 단돈 5만 위안을 지불했을 뿐이다. 거주 면적으로 보나 국가에서 받은 보조금으로 보나 황리만은 모두 규정을 위반했다.

황리만은 또 시 당위원회의 명의로 장기간 치린(麒麟)별장, 우저우(五洲)호텔 스위트룸을 독차지하고 사용하면서 연간 2천 만 위안을 소비한 혐의로 제보되었다.

황리만이 선전에 있을 때, 선전에서는 매일 평균 특대형 형사 사건이 600여 건에 달하면서 범죄자들의 낙원이 되었다. 장쩌민이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서 내려오자 황리만도 즉시 세력을 잃고 광둥성에서 실권이 없는 인민대표대회 주임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이미 엉망이 된 선전의 국면은 짧은 시간 내에 수습하기 어렵게 되었다.

장쩌민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장쩌민 자신도 똑똑히 알지 못할 것이다. 장쩌민은 50년대에 구소련으로 유학 갔을 때 러시아 정부(情婦) 커라와(克拉娃)와 관계를 가졌었다. 나중에 그가 전자공업부 부장으로 있을 때, 처음으로 출국하여 라스베가스에서 매춘부를 찾았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창녀 FBI(연방조사국) 경찰에게 “그 뚱보가 그래도 팁을 많이 주네”라고 말했다. 물론 장쩌민이 쓴 돈은 공금이었다.

80년대에 장쩌민이 상하이 시장 자격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를 방문했다. 방문 기간에 장쩌민은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리 멀지 않은 르노 도박장을 가고 싶어 했다. 이곳은 라스베가스를 제외하고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박장이었다. 물론 장쩌민이 도박에 건 돈은 모두 상하이 시정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방문 기간 중에 장쩌민은 갑자기 미국 여자와 관계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장쩌민의 경호를 책임진 한 고위 경찰은 이 말을 듣고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국의 가장 큰 도시의 시장이란 사람이 공개적으로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장쩌민은 너무나 음탕하여, 심지어 자식이 도대체 몇 명인지도 똑똑히 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본처인 왕예핑은 장쩌민에게 두 아들을 낳아 주었는데, 큰 아들은 장몐헝[江綿恒, 원래 이름은 장민캉(江民康)]이고, 둘째 아들은 장몐캉(江綿康)이다. 하지만 장쩌민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다. 다른 한 명은 장촨캉(江傳康)이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가족 사진에 나타난 적이 없다고 한다. 장촨캉은 상하이 시의 중간 간부로 들리는 바에 의하면 ‘610’ 책임자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여인을 농락하는 것은 성관계와 금전 거래를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큰 부자나 고관들은 색을 탐하고 여인은 재물을 탐내지만, 그러나 정치에 간여하지는 않았고, 또 이런 여인들은 모두 남편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었다. 그러나 장쩌민의 음탕함은 모두 공금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공개적으로 자신의 정부(情婦)를 고급 간부의 직책에 올려놓았고, 장쩌민이 발탁한 이 여인들은 또한 장쩌민을 도와 국가와 인민들에게 재앙을 가져다주는데 일조했다. 심지어 각 영역에서 장쩌민을 도와 중화민족의 문화유산과 도덕규범마저도 파괴했다. 정쩌민의 정부 천즈리는 교육을 파괴했고, 황리만은 부패를 저질렀으며, 쑹쭈잉은 찬송가로 국가적인 위기를 덮어 감췄으며, 러시아 애인은 장쩌민이 중국영토를 팔아먹는데 촉진작용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쩌민의 음란한 범주는 이미 그 개인의 도덕품행을 벗어났으며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미래에까지 관련되는 것이다.

5. 친인척이 득세

장쩌민과 놀아났던 여인들은 모두 장쩌민을 따라 그 가족들이 권세를 얻었으며 동시에 장쩌민의 사돈에 팔촌까지 벼락출세하였다.

‘중국 제일의 탐오’ 장몐헝

80년대에 장쩌민은 자신의 큰 아들 장몐헝을 미국에 유학 보내 아들을 낳게 하고 영주권을 얻어 형세를 관망토록 했다. 92년 장쩌민이 당, 정부, 군부의 대권을 장악한 후에 장몐헝을 귀국시켰다. 장몐헝은 미국 국적의 아들을 데리고 온 가족이 귀국했다. 1993년 1월에는 중국과학원 상하이 야금연구소 일반 연구원이었으나 불과 4년 만에 소장까지 올라갔다. 장쩌민의 지위가 탄탄해지고 권력이 증가함에 따라 장몐헝은 관직을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돈벌이에 나섰다.

1994년 장몐헝은 수백만 위안을 ‘대출’받아 상하이 시 경제위원회로부터 시가 1억 위안이 넘는 상하이 연합투자공사를 사들여 ‘전자통신’ 왕국의 닻을 올렸다. 상하이 연합투자공사(上聯으로 약칭)는 원래 황씨 성을 가진 상하이 시 경제위원회 부주임이 설립한 것으로 그는 회사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러나 회사가 설립된 지 석 달 후에 갑자기 낙하산으로 내려온 장몐헝이 이사회 의장 및 총경리를 맡아 ‘전자통신의 제왕’이 되었다. 원래 회사를 설립했던 사람은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장몐헝은 이렇게 상련을 약탈했다.

겉으로 보기에 상련은 국영기업이지만 실제로는 장몐헝의 사유재산이다. 장몐헝은 상련을 기점으로 상하이에 포진하였다. 그는 장쩌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돈이 필요하면 돈이 있었고 권력이 필요하면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해외 화교들과 야휴의 설립자를 포함한 서방 기업가들이 앞을 다퉈 그를 찾아왔고 불과 몇 년 사이에 장몐헝은 방대한 전자통신 왕국을 만들었다. 2001년 상련과 상련을 지주로 하는 회사는 십여 개에 달했다. 여기에는 상하이정보통신, 상하이유선통신, 중국인터넷통신 등을 포함한다. 업무는 상당히 광범위하여 케이블, 전자출판, VCD 생산, 전자상거래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상하이 경제계 인사들에 의하면 장몐헝 이사장의 명함은 너무나 많아서 셀 수 없을 정도이며 상하이에서 조금이라도 중요한 영역에는 모두 그의 입김이 들어간다고 한다. 심지어 상하이 터널, 상하이 지하철에도 모두 그의 지분이 있다. 어떤 기업인에 따르면 비행기 잡지에 나온 상하이항공 이사회 사진에도 장몐헝이 있었다고 한다. 상하이항공 이사회 명단은 아직까지 공개된 적이 없다. 그들은 하나같이 장몐헝이야말로 중국전자통신의 제왕이며 상해탄의 대두목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장씨 부자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중공 역사를 돌이켜보면 아무리 부유할지라도 관직이 없으면 도처에 위기가 잠복해있기 때문이다. 이에 1999년 12월 2일 국무원에서 발표한 명단에 장몐헝의 이름이 올라갔다. 즉 장쩌민은 자식을 중국과학원 부원장에 임명하여 졸지에 국가지도자 반열에 오르게 만들었다.

2001년 5월 홍콩에서 발행하는 《재부논단(財富論壇)》에 장쩌민은 ‘국가지도자’ 장몐헝을 대동하고 나타나 다국적 기업인들 및 국제적인 VIP들에게 소개하여 장씨 왕국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이리하여 장몐헝은 외국 부호들과 큰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이때 장몐헝은 이미 중공 정경유착의 최고 대표가 되었다.

‘중국네트워크’가 생기기 전에 장몐헝은 ‘인터넷통신’사장으로 ‘북방전신(北方電信)’을 합병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그러나 사실 그에게는 북방전신을 사들일 능력이 없었다. 아들의 위기를 돕기 위해 장쩌민은 직접 중국전신을 두개로 나눌 것을 명령했다. 즉, 북방전신과 남방전신으로 나눠 북방전신 10개 성 의 고정자산을 ‘인터넷통신’에 넘겨주도록 했다.

2004년 9월 중국 4대 전신 중에 상장되지 않은 마지막 회사인 ‘인터넷통신’의 상장 일정이 또 다시 연기되었다. 장몐헝은 장쩌민이란 최고 권력자의 아들로서, 북방전신 10개 성의 고정자산을 얻었으면서도, 중국 내 4대 전신 중 다른 3개는 모두 상장했는데 왜 아직 상장하지 못하는가? 돈은 다 어디로 갔는가?

이때에 장몐헝은 인터넷통신을 세 차례에 걸쳐 정리하고 다시 취소하는 현란한 과정을 통해 국가자산을 자기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가 직접 초빙한 중국인터넷통신 총재 장춘장(張春江)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이 모든 것은 다 증시에 상장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다. 명백히 말하자면 곧 국가재산을 사유화시켜 알멩이는 자신이 차지하고 증시에서는 빈껍데기 주식만 판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많은 사람들이 잘 아는 추문이 있다. 2000년 9월 장몐헝은 대만 재벌 왕융칭(王永慶)의 아들과 합작하여 훙리(宏力) 전자회사를 차린다고 선포했다. 여기에는 총 64억 불이 투자되었으며 합자회사로 칭했다. 그러나 왕융칭의 아들인 왕원양(王文洋)이 밝힌 바에 의하면 실제로 그는 한 푼도 투자하지 않았으며 모두 장몐헝이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권력을 이용하여 장몐헝은 큰 부를 축적했으며 명실상부한 중국 최고의 탐오가 되었다. 이외에도 장쩌민은 학술적인 공헌이라곤 전혀 없는 장몐헝을 중국과학원 부원장에 임명하여 중국과학계의 커다란 치욕이자 세계 과학계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한편, 상하이 최고의 땅부자로 불리는 저우정이(周正毅)가 2003년 5월 조사를 받았다. 그는 탈세, 증권 조작 및 불법 대출 등의 혐의로 이미 중국은행 홍콩 지점장인 류진바오(劉金寶)를 파직시킨 적이 있다. 이 사건은 “건국 이후 최대의 금융사기사건”으로 불리는데, 조사 결과 장몐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당시 훙리 전자회사를 설립할 때, 류진바오가 중국은행 상하이 지점에서 대출한 십여 억 달러는 모두 규정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개방(開放)》잡지에서 폭로한 바에 의하면, 저우정이의 정경유착 토지문제를 조사할 때, 심지어 장쩌민의 두 아들까지 연루되었다고 한다. 조사에 참가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진린징안(緊隣靜安)구의 푸퉈(普陀)구에서, 장몐헝과 푸퉈구 정부 역시 저우정이가 징안구에서 한 수법으로 많은 토지를 차지했다고 한다. 장몐헝과 장몐캉이 상하이에서 차지한 땅도 모두 비준을 받아 사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모두 무료이고, 일전 한 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장몐헝은 저우정이보다 더 사악하다. 저우정이는 그래도 상하이파에게 상납이라도 했지만,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장쩌민의 큰 아들은 거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도 규정에 따른 보상은 전혀 해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16대가 개최되기 전날, 장몐헝은 정보산업부 502초대소에 가서 제2세대 고속 인터넷 시연을 참관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는 데이터 검색속도를 시험해보는 것이었다. 보고하던 사람이 아마 장몐헝에게 잘 보이려고 했는지, 구글에서 ‘장쩌민’이란 세 글자를 쳤다. 그러자 의외로 화면에 나타난 10개의 기사 중 3개가 장쩌민의 죄악을 폭로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사악한 장쩌민’이란 글자가 맨 앞에 나타났다. 장몐헝은 매우 놀랐고 또 화가 났다.

돌아간 후, 장몐헝은 사이트 봉쇄 문제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가 주관한 진둔(金盾) 공정은 초기에만 8억 달러가 투입되었다. 그것은 중국 사람들에게 민주, 인권, 자유, 특히 파룬궁 해외 사이트 등에 관한 소식을 얻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장몐헝은 장쩌민 통치 하의 전자경찰 총 감독이 되었다.

‘친인척이 날뛰다’

장쩌민의 둘째 아들 장몐캉은 형인 장몐헝처럼 그렇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쩌민은 쉬차이허우(徐才厚)에게 부탁하여 난징(南京) 군구(軍區) 정치위원회 부주임으로 소장 계급을 달게 했다. 장몐캉은 본래 무선통신을 전공했지만, 원래 해오던 일은 모두 군대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장쩌민은 은퇴하기 전에, 총자루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 보다는 자기 아들에게 넘기는 게 더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장몐헝을 총참모부에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의외로 전 국방부장인 츠하오톈(遲浩田)에게 거절당했다. 하는 수 없이, 장쩌민은 아들을 총정치조직부 제2국 국장으로 밀어 넣었고, 얼마 후에는 조직부 부부장으로 승진시켰고 또 다시 조직부 부장으로 승진시켰다.

장쩌민의 숙부이자 법적으로 양자로 들어간 장상칭(江上靑)에겐 원래 딸이 둘이 있는데, 장쩌후이(江澤慧)와 장쩌링(江澤玲)이다. 장쩌민은 장상칭의 딸 장쩌후이를 진급시켜 부장급(장관급) 간부로 임명했다. 장쩌후이는 원래 안후이 농업대학의 평범한 교수였다. 장쩌민의 관직이 오르자, 장쩌후이도 연속 세 단계나 승진했다. 처음에는 안후이 농업대학 임학원 원장, 이어서 다시 농업대학 총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나중에는 또 임업과학원(林科院) 원장이 되었다.

장쩌민에겐 안휘(安徽) 벙두(蚌埠)에 살면서 십팔 년 동안 철도 분기점에서 차량을 다른 선로로 옮기던 일을 해 오던 생질 우즈밍(吳志明)이 있었다. 그는 장쩌민의 생모인 우웨칭(吳月卿)의 일족이다. 우즈밍은 배운 것도 없고 재주도 없었지만 장쩌민이 상하이시위원회 서기로 된 후인 1986년 3월에 공산당에 입당 했다. 이어 초고속으로 진급하여 부부장급(차관급) 간부가 되었다. 현재는 중공 상하이 시위원회 상무위원이자 시 공안국 당위원회 서기, 국장, 무장경찰 상하이 총대대 제일 정법위원으로 있다.

장쩌링의 아들 타이잔(邰展)은 부동산 투기를 일삼다 1150만 위안을 빚졌다. 그러나 타이잔은 장쩌민의 생질이라는 이유로 재판 과정에서 층층의 저애를 받았다. 타이잔은 부동산 투기에 실패하여 갚을 능력이 없게 되자, “양저우강잔(揚州港展) 부동산개발주식회사”란 도장을 위조하여, 한 홍콩 기업인이 소유한 45세대 아파트를 공상은행에 담보로 잡혔다. 이 사건은 홍콩 기업인에 의해 법정에 고소당하여 2000년 3월에 심사를 받았다. 법원에서는 비록 “부동산 권리 이전증”의 도장이 위조한 것임을 알았지만, 당시 양저우 시 당서기 우둥화(吳冬華), 시 정법위원회 서기 다이런구이(冀仁貴) 및 양저우 중급법원 법원장 스샤오팡(師小芳) 등의 압력 때문에, 2000년 3월 이 사건에 대한 조사와 심사를 중지한다고 판결했다. 지금까지도 타이잔은 징벌을 받지 않고 있으며 홍콩 기업인 역시 집을 돌려받지 못했다.

내막을 잘 아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지난 십여 년 동안 타이잔은 장쩌민의 생질이란 신분을 이용해 함부로 부동산 투기, 증권 매매 및 오락사업에 투자했으며, 그는 “양저우 빌딩” 총경리, “톈잔(添展) 오락실” 사장 및 여러 회사의 이사를 맡고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타이잔은 일찍이 장쩌민의 생질이란 신분을 이용하여 군부를 배경으로 하는 “베이팡(北方) 공업집단”으로부터 1600만 위안을 대출하여 증권투자를 하기도 했다. 그 후부터 타이잔은 줄곧 사업전선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2003년 1월, 장쩌민은 자신의 생질 샤더런(夏德仁)을 랴오닝성 성위원회 상무위원, 다롄시 시위원회 부서기, 다롄시 시장으로 전근시켰다. 그때부터 장쩌민이 다롄에 갈 때면 마치 자기 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매체 보도에 의하면, 공안부장 저우융캉(周永康)은 장쩌민 부인의 친 조카를 자칭하면서, 또한 늘 자신은 “장 주석의 측근”이라고 자랑했다. 저우융캉의 품행은 아주 나쁜 편으로 그를 가까이 해본 인사가 폭로한데 따르면, 저우는 가끔 “자신을 잊고 열심히 일한다”는 구실로 모텔에 투숙하여 저녁에 귀가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은 남몰래 기생을 부르거나 또는 호텔에서 여러 차례 내부 여직원들을 강간했다고 한다. 파룬궁을 탄압하는 과정에서, 저우융캉은 누구보다도 탄압에 가장 앞장섰고 이 때문에 장쩌민에게 발탁되어 공안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이 외에도, 장쩌민이 또 얼마나 많은 친척들을 관직에 끌어들이거나 소리 없이 돈을 벌게 했는지는, 이미 통계를 내기조차 힘들 정도이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다. 장쩌민은 공공연히 사적인 관계를 이용했기 때문에, 전체 국가권력에 부패가 만연하게 만들었으며 사태를 수습하기가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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