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그 사람 – 17장

2014년 9월 4일 업데이트: 2019년 6월 28일

img-real-story-jiang-zemin-cap17‘3개대표론’을 자화자찬하고 음흉하게 ‘분신자살사건’을 조작

1. ‘3개대표론’

2000년 3월 초, ‘인민일보’의 사설에 처음 ‘3개대표론’이라는 단어가 출현했는데 이는 장쩌민이 처음으로 자신의 ‘사상이론’을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단한 선전 공세를 펼쳤던 장쩌민의 ‘3개대표론’은 조작극에 불과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3개대표론’의 탄생

‘3개대표론’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처음에는 아무도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3개대표론’이 한창 화제로 되고 있을 때, 왕후닝이란 사람이 입을 단속하지 못하고 자신이 썼다는 비밀을 누설하면서 파문이 일어났다. 사실 알고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상하이시 당서기로 있을 때부터 장쩌민은 왕후닝의 문장을 몇 페이지씩 외우고 다녔으며 쩡칭훙과 우방궈 등은 장쩌민이 베이징에 온 뒤, 장쩌민을 보좌할 인물로 왕후닝을 적극 추천하여 나중에 끝내 권력중심인 중난하이에 ‘모셔’갔다.

왕후닝이 ‘3개대표론’을 써낸 뒤, 장쩌민은 2000년 2월 25일 오후, 광저우 주다우(珠島) 호텔에서 열린 광둥성 고위층 관리들과의 면담에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이를 외워보였다. “공산당은 언제까지나 중국 선진적인 사회 생산력 발전의 요구를 대표하고, 중국 선진문화의 전진 방향을 대표하며, 중국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

나중에 왕후닝은 장쩌민을 위해 또 몇 마디를 추가했는데 5월 14일, 상하이에서 열린 당조직 건설 좌담회에서 장쩌민은 추가된 구절을 바로 써먹었다. “언제 어디서나 ‘3개대표론’을 지키는 것은 우리 당의 원칙이고 기초이며 힘의 원천이다.”

장쩌민 자신을 포함해 모든 관영 언론들도 모두 ‘3개대표론’이 도대체 무엇인지 해석하지 못했지만 이를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다. 전국의 크고 작은 관리들은 전부 먹고 마시고 매춘하고 도박하며 탐오할 생각만 하다보니 상급에서 뭐라고 하면 같이 떠들어대면 그만이었다.

‘3개대표론’은 사실 별 의미가 없는 빈말뿐이어서 사람들은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는 떠들어 대기도 곤란해 할 정도였다. 그러나 자신만의 이론이 필요했던 장쩌민에 있어서는 ‘3개대표론’은 너무나 중요했다. 장쩌민은 마오쩌둥, 덩샤오핑의 이론과 견줄만한 이론을 내놓아 ‘제3세대 권위적인 이론’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그리하여 껍데기뿐인 ‘3개대표론’은 장쩌민의 명령으로 관영 매스컴에서 하늘까지 치켜 올려졌다. 장쩌민은 퇴임하기 전, ‘3개대표론’을 당헌과 헌법에 넣기 위해 있는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리하여 현재 중공 총서기, 국가주석, 군사위 주석을 맡고 있는 후진타오도 ‘3개대표론’을 내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고 어떠한 관리든지 연설을 할 때마다 ‘3개대표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3개대표론’ 학습

장쩌민의 희망과는 달리, 매스컴에서 아무리 선전 공세를 펼치고 크고 작은 회의 때마다 학습을 시켜도 ‘3개대표론’을 중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국적으로 ‘3개대표론’을 학습하는 붐을 일으킬 때, CCTV에서는 이와 관련해 매일 일반 민중들을 인터뷰한 특별 보도를 내보냈다. 보도에서 어떤 농민은 “우리 마을에 다리를 하나 놓았는데 ‘3개대표론’ 덕분”이라고 했고, 어떤 여성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는데 ‘3개대표론’ 덕분”이라고 했으며, 어떤 사람은 심지어 “3개대표론을 지침으로 삼고 국제적인 수준의 고급 공공 화장실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어느 시골마을에는 “‘3개대표론’으로 가축 도살 작업을 지도하자!”라는 표어가 붙어 있는 등 별의별 일들이 다 있었다.

중공 감옥에 3년 동안 감금되었다 풀려난 대기원시보(大紀元時報) 주베이징 특파원 왕빈(王斌)도 ‘3개대표론’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진실한 이야기를 공개했다. 감옥에서는 죄수들을 이용해 불법 이득을 챙겼는데, 일부 죄수들은 음란 간행물을 찍어내는 일을 맡았다. 중국 법률 부문 사람들은 정치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으므로 그 당시 ‘3개대표론’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무슨 일이나 모두 ‘3개대표론’과 연결시켰다. 그리하여 죄수들도 음란 간행물을 계획보다 많이 생산하면 ‘3개대표론’을 지침으로 삼았기에 그처럼 힘이 솟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 성(省)의 당서기는 ‘3개대표론’을 학습하는 회의에서 관리들이 모두 시큰둥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시간을 정해 학습하고 회의라는 형식도 갖춰야 하며 숙제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저는 관직을 잃게 됩니다, 모두들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처럼 타협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3개대표론이 정말 첨단 과학기술을 창조할 수 있고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농촌에 남아도는 몇 억 명 인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서방 선진국들도 ‘3개대표론’에 의거해 성공했습니까?”라고 사정없이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관리들은 당(黨) 학습반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면 ‘3개대표론’의 덕분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생기고 실패하면 무엇이라고 해석해야 합니까? ‘3개대표론’에 문제가 생겼다고 봐도 됩니까?”라고 질문했다.

또 어떤 사람은 우스개 소리로 “‘3개대표론’을 잘 학습한 사람들을 올림픽에 보내면 반드시 모두 금메달을 딸 것입니다”라고 했다.

벽에 부딪친 ‘3개대표론’

‘3개대표론’은 출시된 후, 공산당 안팎으로 모두 비판의 목소리에 휩싸였다.

‘추스(求是)’지 연구소, 중앙당교(역주 – 공산당 이론을 연구하는 학교) 이론 연구실은 ‘3개대표론’ 학술 세미나에서 “3개대표론이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수수께끼”라고 말했다. 회의에서 어떤 사람은 ‘3개대표론’은 사실 당내에서 인위적으로 장쩌민에게 위대하고 능력 있으며 뛰어나다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생겨난 것이라고 지적했고 또 어떤 사람은 당내의 ‘3개대표론’ 학습, 선전은 대부분 임무완성식이고 형식적이며 이것은 곧 ‘정치적인 사기’라고까지 했다.

전 중공중앙 정치체제 개혁연구소 바우퉁(鮑彤) 소장은 ‘3개대표론’이 황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인민을 대표한다는 것은 빈 말이고, 항상 선진적인 문화를 대표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항상 선진적인 생산력을 대표한다는 것은 관리와 상인이 결탁한다는 의미다”라고 분석했다.

중국사회과학원의 한 학자는 “3개대표론은 알맹이가 없고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형식주의이다. 지방의 당위원회와 정부에서는 대부분 할 수 없이 시늉만 하고 있다. 이 3년 동안에 3개대표론이 해결한 문제가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형식주의는 국가와 국민에게 재앙을 가져다 줄 뿐이다… …

어떤 사람은 이른바 ‘선진문화’, ‘선진생산력’이라는 것은 사실 타락한 문인 그리고 관리와 상인들의 결탁을 가리킨다고 했으며 ‘인민의 근본이익’이라는 것은 철저한 거짓말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 중 상당 부분 사람들이 피를 팔고 장기를 팔며 몸을 팔아 생활을 유지하고 있으며 에이즈에 걸려도 생사를 묻는 사람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또 중공이 ‘형님’이라고 친절하게 부르는 노동자계급도 최소 3천만이 실업자 신세지만 장쩌민은 자신이 그들의 대표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중공 4중전회가 열기 전, ‘장쩌민 군사사상문헌’이 출판될 예정이었으나 군부의 장전(張震), 훙쉐즈(洪學智), 양바이빙(楊白氷) 등 원로들의 반대로 출판이 지연됐다. 그들은 장쩌민이 자신을 과대평가했다고 했으며 양바이빙은 심지어 ‘3개대표론’을 쓰레기 사상이라고 비난했다.

2002년, 중공 16차 대표대회가 연기되었는데 내부 소식통에 의하면 주요 원인은 중공 내부에서 ‘3개대표론’에 대한 인식 차이를 놓고 심한 갈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개대표론’과 관련된 유머

민간에서 3개대표론과 관련된 유머가 널리 퍼져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 전에 유행한 유머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을 초청해 어떻게 하면 빈 라덴을 소멸할 것인지를 토론했다. 부시는 미사일을 이용해 폭파시켜 버리겠다고 했고 푸틴은 미녀를 보내 미모에 빠져 죽게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장쩌민은 ‘3개대표론’으로 빈 라덴을 귀찮게 해 죽이겠다고 했다고 한다.

또 다른 한 유머는 아래와 같다. 저승에 있는 마오쩌둥이 장쩌민도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있는 것을 보자 화가 나서 곁에 있는 귀신에게 “장쩌민은 책을 몇 권이나 내놨는가?”라고 묻자 귀신은 “한 권도 채 되지 않습니다, 3강 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오쩌둥이 또 “장쩌민을 지지하는 인민대표가 얼마나 되는가?”라고 묻자 귀신은 “아무리 세어 봐도 3개 대표밖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유머를 보면 중국 국민들이 ‘3개대표론’을 얼마나 배척하고 혐오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결국 장쩌민이 극력 내세웠던 ‘3개대표론’은 위대하고 능력있고 뛰어난 이미지를 수립하는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도리어 “어떤 사람은 이름을 길이 남기려고 돌에 새겨 넣지만 새겨 놓은 글자가 돌보다 더 빨리 부서진다”라고 어느 한 유명 인사가 말한 것처럼 되고 말았다. 장쩌민의 ‘3개대표론’은 이처럼 보편적으로 비판을 받았지만 끝내 중공 헌법과 당헌에 들어가 중공 정치에 또 하나의 커다란 추문과 웃음거리가 되었다. ‘3개대표론’이 공헌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

움직이지 않는 국민들

파룬궁에 대한 탄압이 1년 동안 진행되었지만 장쩌민이 기대했던 것처럼 전 국민이 나서서 탄압을 지지하는 국면이 나타나지 않았다. 루머도 퍼뜨렸고 비판하는 문장도 적지 않게 썼으며 정치적 세뇌도 시켰지만 국민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정치운동을 겪을 대로 겪은 사람들은 대부분 “장쩌민이 파룬궁과 싸울테면 실컷 싸우라, 우리와는 상관없다”라고 생각했다.

극소수 지역만 장쩌민을 따라 탄압을 강행했으나 대부분 지역에서는 ‘610사무실’에서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톈진시 한구(漢沽) 지역을 관할했던 전 ‘610사무실’ 관리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사실 지방에서는 이런 임무를 집행하기 싫어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공안 지국의 경찰들은 파룬궁수련생들과 이웃으로 지내지 않으면 매일 길에서 만나는 사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구는 손바닥만한 해변 마을이라 4개 파출소에서 그 누구를 체포해도 서로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체포된 사람의 집사람이 경찰의 집사람과 같은 회사에서 일할 수도 있었고, 경찰과 같은 아파트에 살 수도 있었지요. 모두 잘 아는 사이거나 이웃인데다 그들이 정말 법을 어기거나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라 모두들 차마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국민들은 정치국 상무위원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 적극적으로 장쩌민을 지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주룽지와 리루이환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 문제를 극력 회피했다.

공안당국의 조작극

소극적인 사람이 있으면 적극적인 사람도 있기 마련, 인간 세상에는 바로 이런 이치가 있다. 장쩌민을 가장 흡족하게 한 사람은 뤄간이었다. 뤄간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 장쩌민을 지지했다. 법률 계통을 관할했던 뤄간은 원래 리펑 아래에 있었지만 파룬궁 탄압을 통해 장쩌민에게 다가가려고 애썼다. 뤄간은 이번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고 파룬궁 탄압에 열을 올렸다.

장쩌민이 탄압을 개시한 순간부터 뤄간은 매우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사법 계통 사람들에게 파룬궁 탄압에 전력을 다하며 특히 ‘허위증거’ 수집에 중점을 두도록 요구했다.

베이징 공안부의 한 책임자가 고위급 공안 회의에서 ‘허위증거’를 조작한 과정을 이야기했다.

이 책임자는 회의에서 “1999년 초부터 공안부는 이미 각종 미신 활동 자료를 파룬궁 활동 자료로 바꾸는 방침을 정하고 대대적인 ‘증거’ 수집에 들어갔습니다… … 짧은 시간 내에 급히 하다보니 사람들의 의심을 사게 되었고 이에 미처 대처하지 못해서 조금은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 관계자는 회의에서 또, “즉시 처리하지 않아 실수가 생기는 경우도 있는데, 예를 들면 직접 파룬궁 창시자에게서 치료를 받아 완치된 사람들은 쉽게 생각을 바꾸지 않으므로 즉시 감금하거나 자유를 제한하는 방법으로 진상이 퍼져 나가지 않도록 단속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최근 외신에서 보도된 징잔이(景占義) 사건이 바로 이러한 공안 당국의 비열한 수단을 잘 보여 주었다.

2003년 11월 5일, 중국 관영 CCTV ‘초점방담(焦點訪談)’ 프로그램에서는 ‘특허 뒤에 숨은 진실’이라는 특별보도를 내보냈다. 이 보도에는 한단(邯鄲) 강철회사 엔지니어인 징잔이가 출현해 파룬궁 수련을 통해 몸에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부인했다. 프로그램이 방송된 뒤, 전국 언론에서 인용 보도를 게재했으며 중공은 파룬궁이 비과학적임을 주장하는 유력한 증거로 되었다.

그러나 2005년 11월 5일, 호주에 망명간 전 ‘610사무실’ 고위급 관리 하오펑쥔(郝鳳軍)이 해외 언론에 ‘거짓 폭로’를 목적으로 한 이 프로그램이 제작된 과정을 폭로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2003년 톈진시 국가 보안국 ‘610사무실’은 특별 임무를 맡고 허베이성 스자좡(石家庄)시에 가서 한 노인을 체포해 왔다. 하오펑쥔은 동료들로부터 그 노인이 허베이성의 고급 엔지니어 징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이어 CCTV 기자들이 징잔이를 인터뷰하여 국제 사회에 중국 고위층 인물이 어떻게 과오를 뉘우치는지 보게 한다며 찾아왔다. 인터뷰는 국가 보안국의 지시와 명령에 따라 진행되었는데 당시 하오펑쥔은 바로 문 밖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보안국 국장 자오웨쩡(趙月增)은 징잔이에게 그들이 미리 준비한 대본대로 말을 하면 형을 감소시켜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국가를 배신한 죄를 추가하여 무기형이나 사형에 처하겠다고 협박했다. 가련한 그 늙은이는 협박에 못 이겨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파룬궁을 수련해 몸에 신기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파룬궁을 비판했다. 나중에 징잔이는 8년 판결을 받았다.

인터뷰를 끝마친 기자가 문을 나서다 마침 하오펑쥔과 마주치자 마이크를 가져다 대면서 이 사건에 대한 견해를 말해보라고 했다. 하오펑쥔은 “이건 조작이 아니고 뭡니까?”라고 말했다. 이틀 후, 보안국 부국장이 하오펑쥔을 불러 이 일에 대해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하오펑쥔이 왜 징잔이를 협박했는지 따져 묻자 부국장은 책상을 치며 일어나 “당신 미쳤나?”라고 소리쳤다. 나중에 하오펑쥔은 영하의 날씨에 아무런 보온 시설이 없는 방에 20여 일 동안 감금되었다.

장쩌민, 병으로 쓰러지다

2000년 10월 9일부터 11일까지 중공 15대 5중전회가 베이징에서 열렸다. 개막 당일, 몇몇 중앙위원이 파룬궁 탄압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진실을 규명할 것을 요구했다.

정치국 7명 상무위원 중 장쩌민, 리펑과 리란칭이 탄압을 지지했지만 주룽지, 후진타오, 리루이환(李瑞環), 워이젠싱(尉建行) 네 사람이 탄압을 반대해 절반 이상의 위원이 반대편에 섰다. 전(前) 인대위원장 차오스(喬石)도 죄 없는 민중에 대한 학살에 불만을 품고 청원하는 파룬궁수련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천안문광장에 직접 찾아가 상황을 알아보았다. 국무원 총리 주룽지 역시 직접 베이징시 공안국을 찾아 “더 이상 파룬궁 수련생을 심하게 대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형세가 불리하게 되자 고민에 빠진 장쩌민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2000년을 마감하는 날, 선전(堔圳)에 있었던 장쩌민의 장남 장멘헝(江綿恒)은 중앙사무실로부터 아버지가 심장병이 발작하여 쓰러졌으니 빨리 베이징에 오라는 긴급 전화를 받았다. 장쩌민은 그 날 그를 수행했던 의사에게 간단한 검사와 치료를 받은 뒤, 베이징 301병원에 입원했다.

이것은 반대파들에게 있어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장쩌민이 입원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국에서 회의가 열렸다. 음력설 이튿날 열린 회의에서 정치국 위원들은 정치체제 개혁과 파룬궁 문제를 토론했다. 회의에서 개혁파와 보수파지간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아무런 타협도 이뤄내지 못해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장쩌민과 뤄간이 결탁

장쩌민은 병으로 쓰러져 있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더 폭발적인 효과로 파룬궁에 ‘사교(邪敎)’의 누명을 들씌울 수 있을까 고민했다.

파룬궁을 사교로 몰기 위해 장쩌민은 온갖 심혈을 다 기울였다. 장쩌민이 처음 파룬궁을 ‘사교’라고 언급한 것은 1999년 10월 25일,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였다. 그 뒤, 같은 해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기간에도 장쩌민은 파룬궁을 모함하는 소책자를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각 나라 정상들에게 나눠주었다. 또 2000년 8월, 미국 유명 기자 월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장쩌민은 심지어 ‘수 천 명의 파룬궁 수련생이 자살했다’는 황당한 발언을 해, 국내 언론에서도 여론이 무서워 다루지 않았다.

1999년 5월, 파룬궁 탄압이 아직 계획 단계에 있을 때, 장쩌민과 뤄간은 이미 ‘특별행동’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 과정은 이랬다. 우선, 중앙 사무실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파룬궁 수련생들이 향산(香山)에서 집단 자살을 감행할 것’이라는 내용의 공문을 지방에 내려 보내고 해외 언론에도 이 소식을 전했다. 그 다음 특수 경찰, 사복 경찰, 특무를 시켜 파룬궁 수련생들에게 이 소식을 널리 퍼뜨리게 했으며 동시에 향산에서는 실탄으로 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매복에 들어갔다. 이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향산에 유인한 뒤 ‘집단자살’이나 ‘집단자살미수’ 현장을 조작하려는 함정이었다. 장쩌민은 이번 행동을 통해 파룬궁이 사교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증거를 얻으려 했으며 거리낌 없는 탄압에 구실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파룬궁 수련생은 단 한명도 향산에 나타나지 않았다. 특무들이 향산에 모이는 날짜를 5월 1일에서 9월 9일까지 3번이나 변경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집단 자살은 사교의 특징이다. 그러나 파룬궁 서적에서는 자살을 포함해 살생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비록 모든 파룬궁 서적, 녹음녹화 테이프가 대부분 소각되고 해외 파룬궁 사이트도 봉쇄되었지만 진정한 파룬궁수련생들은 살생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파룬궁 수련생들의 ‘집단자살’ 현장을 조작해 보려던 뤄간의 음모를 실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음모가 거듭 실패하자 장쩌민은 발이 닳도록 뤄간을 찾아가 다른 방법을 연구했다. 이번에 뤄간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담보까지 하면서 다른 한 계획을 내놨다.

뤄간은 우선 여론을 조성했다. 2000년 12월 29일, 신화사는 중앙 610사무실의 지시대로 출처가 없는 뉴스를 보도했다. 당사자 이름 및 사건 발생 장소 경과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채, 몇몇 파룬궁수련생이 집단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했다고 한 이 보도에서는 또 음력설을 전후로 선동을 받은 파룬궁수련생들이 집단자살을 할 것이라고 크게 보도해 사람들에게 앞으로 발생할 조작 사건이 미리 예고된 사건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만들었다.

이상한 분신 사건

2001년 1월 23일은 마침 음력설 전날이라 중국은 명절 분위기가 넘쳤다. 사람들이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 첫 설날을 맞이하느라 각별히 분주하고 보내고 있는데 베이징의 심장부인 천안문광장에서 갑자기 치솟는 불길과 함께 검은 연기가 사방에서 피어 올랐다. 전세계를 놀라게 한 이번 조작사건은 중국 허난성에서 온 1남 4녀가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분신자살하면서 시작됐다.

1분이 채 되지 않아 여자 한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한 외, 나머지 4명의 몸에 붙은 불은 모두 ‘1분 30초’ 만에 진화됐고 화살처럼 현장에 달려온 경찰차가 심각한 화상을 입은 그들을 신속히 병원 응급실로 이송했다… … 2시간 후, 신화사는 즉시 전 세계에 영문 속보를 내보내 ‘5명의 파룬궁 수련자가 천안문광장에서 분신자살을 했다’라고 보도했다.

동시에, CCTV는 12세의 천진난만한 여자어린이와 19세의 꽃다운 나이의 소녀가 ‘요언(妖言)’을 듣고 바보같이 분신자살을 시도했다고 보도했으며 승천(昇天)을 위해 얼굴이 숯처럼 까맣게 불에 그을린 그 여자어린이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는 모습, 그리고 병원에 누워 있으면서도 상처 입은 작은 손을 내밀면서 천국에 가겠다고 말하는 모습 등을 화면에 담았다.

이처럼 충격적인 보도가 나가자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많은 사람들은 전에 파룬궁의 신기한 효과와 파룬궁수련생이 한 선행을 직접 눈으로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으로 모두 부인해 버렸다. 마치 정부의 언론이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보다 더 믿음이 가는 것 같았다. 한동안 잠잠했던 당국의 선전기구도 마약이나 먹은 것처럼 흥분되어 또 다시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다양한 계층, 다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TV화면에 나와 파룬궁을 규탄했다. CCTV는 보도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인터뷰 중간 중간에 끔찍한 분신자살 화면을 끼워 넣었다.

장쩌민은 그제야 길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잔뜩 찌푸렸던 이마도 펴졌다. 그는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해야 한다’며 언론에 긴장을 늦추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할 것을 명령했다.

장쩌민의 명령이 하달되자 전국 언론에서는 파룬궁을 비판하는 새로운 열조가 일어났다. 1월 31일부터 나흘 동안, 신화사와 중국신문사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파룬궁을 비판하는 문장이 각각 107편과 64편이 게재되었고 14개 이상의 성에서 파룬궁을 질책하는 목소리를 냈다. 모든 관리와 사회단체들은 파룬궁 탄압을 실행하는 중앙의 결정과 정책에 복종한다는 성명을 발표해야 하는 것 외에, 지방에서는 파룬궁 ‘사교조직’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규탄하는 비판대회를 열어야 했다. 그 시기 CCTV는 매일 사회 각 계층 인사들을 인터뷰하여 반복적으로 방송에 내보냄으로써 집집마다, 사람마다 이 사실을 알게 하려 했으며 국민의 마음속에 파룬궁에 대한 증오를 심어주려 했다.

너무나 많은 의혹들

그러나 해외의 많은 언론과 파룬궁 단체 웹사이트에서는 이번 사건이 발생한 첫날부터 많은 의혹을 발표했다.

분신자살 사건 비디오를 슬로우 모션으로 보면 그 자리에서 숨진 류춘링(劉春玲)은 현장에서 경찰이 휘두른 물체에 맞아 죽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널리 알려진 동영상 ‘분신자살인가, 조작극인가?’는, 바로 CCTV의 영상을 정밀 분석한 자료이며 2002년1월, 이를 소재로 신당인(新唐人)TV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위화(僞火, False Fire)’는 제51회 콜롬버스 국제영화제에서 영예상을 수상했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중국 대륙에서 몇 차례나 앞에서 말한 동영상을 TV에 삽입 방송했으며, 공포에 빠진 장쩌민은 전력으로 이를 저지하려 했다. 2002년 3월 5일 저녁, 창춘(長春) 파룬궁수련생들이 유선TV 8개 채널에 45분 동안 진상 동영상 삽입 방송에 성공한 후, 장쩌민이 10분 내에 강렬한 반응을 보였다고 ‘장쩌민 평전’의 작가 로버트 쿤이 서술했다.

‘분신자살인가, 조작극인가?’에서는 이렇게 사건을 분석했다

“신화통신은 류춘링이 분신자살로 사망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만약 CCTV의 비디오를 슬로우 모션으로 본다면 류춘링은 불에 타 죽은 것이 아니라 경찰에게 맞아 죽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분석 화면에서 보면, 불길에 휩싸여 허우적거리고 있던 류춘링은 뒤에서 누군가 휘두른 물체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다. 이와 동시에 그녀의 머리를 타격했던 긴 물체는 몇 미터 밖으로 튕겨나갔다가 무게가 있는 듯 급속히 하락한다. 그렇다면 살인범은 누구인가? 류춘링이 머리를 맞는 순간의 화면을 정지시키고 보면 휘두르고 있는 누군가의 팔이 그녀의 머리에 접근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화면에 보이는 한 무장경찰의 뒤에 어떤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이는데 그 사람은 마침 류춘링의 머리를 타격한 위치에 서있으며 여전히 좀 전에 취했던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류춘링의 머리 위로 날아 오른 물체를 어떤 사람은 흉기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녀의 머리카락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심지어 그녀의 옷자락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물체는 소화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기류와 같은 방향으로 날아간 것이 아니라 소화기를 든 경찰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는 그 물체가 소화기 기류에 의해 날아오른 것이 아니라 류춘링의 머리를 타격한 뒤 튕겨나온 흉기라는 것을 설명한다. 게다가 긴 흉기는 류춘링의 머리를 타격한 뒤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있어 얼마나 큰 힘으로 타격을 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화면을 보면, 류춘링은 쓰러지기 직전, 반사적으로 왼손을 들어 맞은 머리 부위에 갖다 댄다.”

12일이 지난 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는 ‘분신자살의 불길이 중국의 어둠을 밝혀주었다 – 공개적인 분신자살은 파룬궁 탄압을 강화하기 위한 당국의 음모였다’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발표했다. 이 보도를 쓴 기자는 류춘링이 생활했던 허난성 카이펑(開封)에 직접 가서 조사를 한 결과 누구도 그녀가 파룬궁을 수련하다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전했다.

허점투성이인 CCTV의 분신자살 동영상에 대한 의문점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천안문 광장에는 원래 소화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으며 경찰들도 소화기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면 몇 분 내에 나타난 10여 개의 소화기와 소방 담요는 어디서 온 것일까?

2. 동영상 자료에서 분신자살자 왕진둥(王進東)의 외침 소리는 녹음효과가 너무 좋아 당시 카메라와 함께 마이크가 10미터 내에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사건 발생 전에 카메라가 현장에서 대기 중이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1분 정도 밖에 안 되었던 사건의 전반 과정을 촬영할 수 없었다.

3. 심각한 화상을 입은 12살 여자어린이 류쓰잉(劉思影)은 기관지 손상으로 기도절개 수술을 받았지만 뒤에서 나오는 인터뷰 화면에서 CCTV 기자와 정상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심지어 노래까지 불렀다.

4. CCTV 고정 시사분석 프로그램 ‘초점방담(焦點訪談)’에서 보여준 화면에서 보면 왕진둥은 무릎부분의 바지까지 다 불에 탔지만 두 다리 사이에 놓여있는, 휘발유가 가득 담긴 패트병은 놀랍게도 폭발은 물론 아무런 변형도 되지 않은 채 고스란히 놓여있다. 이처럼 큰 허점은 이 모든 것이 조작극에 불과하다는 의심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초점방담’ 프로그램 제작진에 참여했던 여기자 리위창(李玉强)은 나중에 퇀허(團河)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불법으로 감금된 파룬궁 수련생 자오밍(趙明)을 찾아 취재를 할 때 자오밍이 그 부분을 지적하자 솔직한 대답을 해 주었다. 그녀는 “그건 우리가 추가로 촬영한 장면인데 만약 그 화면이 문제가 될 걸 알았더라면 방송에 내보내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화면을 추가 촬영했고 왕진둥은 왜 적극적으로 그들의 요구에 따라 했겠는가? 여기에 밝혀지지 않은 음모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2001년 8월 14일, 국제교육개발(IED)기구는 유엔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아래와 같은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중공 당국은 올해 1월 23일, 천안문광장 분신자살 사건을 증거로 제시하면서 파룬궁을 모함했다. 그러나 우리가 입수한 동영상 분석 자료는 이번 사건이 정부가 조작한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이 자료의 복사본이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에게 제공하겠다.”

유엔회의에 참석한 중공 대표단은 이 성명이 발표되자 기가 죽어 생떼를 쓸 힘마저 없었다

최근 중국 정부는 10년 전에 출판된 인기 소설 ‘황훠(黃禍)’를 출판 금지시켰다. 그 이유는, 이번 천안문 분신자살 사건이 소설에서 나오는 스토리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황훠’의 제2장에는 한 사람이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말기 암 환자를 돈으로 매수하여 분신자살을 시킴으로써 다른 한 사람을 모함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때문에 이 소설에 대한 출판금지는 우연한 것이 아니었으며 음모가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세인들을 놀라게 한 이번 분신자살 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은 직접 참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전체 중국 국민들도 포함된다. 배후에서 악독한 음모를 꾸미고 조종한 장쩌민은 사람의 생명을 대가로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고 파룬궁에 대한 증오를 대중의 마음속에게 심어 줌으로써 파룬궁에 대한 거리낌 없는 탄압에 길을 열어 놓았다. 현대화된 선전 도구를 이용해 전 국민들 앞에서 그처럼 충격적인 조작극을 벌여 원한을 선동한 장쩌민은 자신의 역사에 또 하나의 치욕적인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속임수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냉정을 되찾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진상자료를 통해 진상을 알게 되었고 장쩌민은 결국 자신이 자신의 무덤을 판셈이 되었다.

이번 사건은 장쩌민의 음험하고 사악하며 악독하고 교활한 본성을 남김없이 보여주었으며 장쩌민 역시 이번 사건 진상이 알려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때문에 그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이용해 진상이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옛날 속담에 “사람이 제 아무리 계산한다 해도 하늘의 뜻을 어기지 못한다[人算不如天算]”는 말이 있듯이, 음모로 얻은 강력한 ‘무기’가 결국 장쩌민 자신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고 말았다.

3. 흐지부지하게 끝난 탄저균사건

2001년, 미국에서 9.11테러가 발생한 후, 반테러는 서방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부상했고 장쩌민은 이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연속 몇 년 동안 국제엠네스티와 ‘국경없는기자회’에서 ‘언론의 공적(公敵)’, ‘인권망나니’로 평가받은 장쩌민은 악명에 걸맞게 외국을 방문할 때마다 항의 단체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장쩌민은 서방에서 반테러를 중시하자 파룬궁을 포함한,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단체를 테러조직으로 몰아 세계적인 반테러 행동의 일부로 만들면 감히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꾀를 생각해 냈다.

9.11테러가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은 탄저균이 들어 있는 우편물 때문에 또 다시 공포에 빠진 적이 있었다. 파룬궁수련생들이 대량의 진상 자료를 우편으로 부치고 있어 줄곧 고민이었던 장쩌민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사한 사건을 조작해 파룬궁을 테러집단으로 몰기로 작심하고 황당한 조작극을 벌였다.

2001년 10월 18일, 중국 외교부 쑨위시(孫玉璽) 대변인은 기자회견에서 이틀 전, 중국에서 처음 탄저균으로 추정되는 우편물 두 개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자세한 상황을 언급하지 않은 채, 우편물은 파룬궁 진상자료라는 점만 강조했다.

중공의 대변인 역할을 한 홍콩 ‘명보(明報)’

탄저균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한 언론은 홍콩 신문 ‘명보’였다. 2001년 10월 17일, 명보는 “중국외교부 쑨위시 대변인이 어제(16일) 가진 정례 브리핑에서 갑자기 ‘탄저균을 중국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정부가 대응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조사 결과 아직 탄저균에 감염된 사람이 없으나 관련 부문에서는 방비 대책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라고 보도했다.

중공은 홍콩 ‘명보’에 이번 발표를 보도하도록 특혜를 주었는데 역시 목적이 있었다. 명보는 홍콩에서 50년간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캐나다와 미국 동서부에서 동시에 발행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명보가 중공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명보’는 장기간 중공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2004년 4월 28일, 미국 서부에서 진행된 창간 행사에는 샌프란시스코의 중국 영사관 펑커위(彭克玉) 총영사가 참석해 축하 발언까지 했다.

‘명보’의 보도가 나갔지만 자세한 상황이 보도되지 않아 해외의 많은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했다. 그 이튿날, 쑨 대변인은 “중국에서 발견된 탄저균이 외국에서 유입됐다”고 추가로 밝혔으며 ‘명보’는 또 즉시 보도했다.

‘명보’는 10월 18일자 신문에 ‘중국에서 수상한 우편물 두개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탄저균이 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우편물 중 하나가 미국 회사의 중국 직원에게 배달되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중국 정부가 발표했다”, “그러나 쑨 대변인은 이 미국 회사의 이름과 소재 지역을 밝히지 않았으며 우편물이 어디에서 발송되었는지도 밝히지 않았다”라고 보도했다.

뉴스의 기본 요소도 갖추지 못한 이 뉴스는 전혀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 뉴스가 그처럼 된 것은, 당시 장쩌민, 쩡칭훙, 뤄간 등이 아직 탄저균 출처를 어느 나라로 선택해야 뒤따르는 문제가 없고, 중국에 있는 어느 미국회사를 선택해야 비교적 적합하며, 그 회사의 어느 직원을 선택해야 진상이 폭로되지 않을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이번 사건의 구체적인 상황은 발표되지 않았다.

목적은 파룬궁 모함

‘명보’의 보도에 따르면 외교부 쑨 대변인은 “미국 회사에 배달된 문제의 우편물은 파룬궁 서적에 꽂혀있었다”고 말했고 중국정부가 이번 사건을 매우 중시한다며 “이미 조취를 취해 우편물을 제거하고 방역을 실시했으며 위생국에서도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밝혔다.

이번 사건의 진정한 의도가 밝혀진 셈이다. 즉, 탄저균 테러사건을 만들어 파룬궁이 자살 외에 테러도 감행한다고 선전해 중국 국민들로 하여금 파룬궁에 반감을 가지게 하고 파룬궁 선전 자료에 탄저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오자마자 해외 언론에서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만약 탄저균이 정말 파룬궁 서적과 함께 있었다면 이것은 파룬궁 수련을 모함하는 유력한 증거라고 분석했다. 이처럼 바보스러운 짓은 장쩌민의 브레인들밖에 아마 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하지 못한 거짓말

쑨 대변인의 ‘말’과 뤄간의 ‘행동’이 서로 잘 맞아 떨어지지 않아 상황이 엉망이 되자 18일 가진 정례 브리핑에서 쑨 대변인은 사건을 다음과 같이 수정해 발표했다. “10월 16일 중국 내에서 탄저균으로 의심되는 우편물 두 개를 발견했고 그 중 하나가 미국회사의 중국인 직원에게 배달됐다. 중국 국가우편관리국은 탄저균 전염을 막기 위해 18일, 긴급 공고를 내보내 백색 분말 형태의 우편물을 열어 보거나 부치지 말 것을 요구했다”고 했다.

이번에는 국내 언론에서 재빨리 도와 나섰다. 신화망은 10월 18일, ‘탄저병이 우리나라에 전파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편국은 백색 분말 형태의 우편물을 보내거나 받지 말 것을 요구했다’는 보도를 내보냈고 기타 언론에서도 이와 유사한 문장들을 발표했다. 쑨 대변인은 “중국 정부가 이번 사건을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위생 방역부문은 이미 수상한 물품을 접촉한 사람과 지역에 대해 엄격한 방역 조치를 취했다.”라고 말했다.

전반 사건을 돌이켜 보면, 탄저균을 발견한 것은 16일이었지만 우편국은 18일에야 긴급 공고를 내보냈으며 같은 날 외교부에서 이 사건을 언론에 공개하고 이와 동시에 해외 친중공 언론 ‘명보’가 이 사실을 보도했으며 19일에야 기타 중문 언론에 전재됐다. 상대방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중대한 소식을 당국이 이처럼 느리게 처리했다는 것만 해도 약간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분신사건을 예를 들어 말해도 짧은 몇 시간 내에 보도가 나가기 시작했다. 내부 소식통에 의하면, 뤄간은 탄저균 사건을 이용해 파룬궁을 모함하려던 계획을 더 이상 진행할 방법이 없어 중도에 그만 두었다고 한다.

만약 외교부 대변인이 말한 ‘탄저균 사건’이 정말 있다고 우긴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가 의문점으로 제기된다.

1. 이번 테러사건을 왜 공안이 아닌 우체국에서 나서서 처리했는가?

2. 만약 우편물에 정말 탄저균이 들어 있었다면 봉투를 연 사람은 모두 감염되게 된다. 미국에서 발견된 탄저균도 감염 사례가 발견되면서 나중에 조사되었다. 중국에서는 감염된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미국의 탄저균과 종류가 다르단 말인가?

3. 감염된 사람은 반드시 병원에 갈 것이고 병원측이 이를 공안에 보고를 해야 순서가 맞는데 왜 우체국만 나와서 발언을 했는가?

4. 미국에서 최소 36명이 탄저균에 감염됨에 따라 전 세계가 탄저균 공포에 떨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나라든 탄저균이 발견되기만 하면 즉시 긴급조치를 취하며 관련 보도가 있기 마련이다. 중공은 왜 이런 절차를 무시한 것일까?

5. 중공은 왜 탄저균 우편물이 파룬궁 진상 소책자에 끼여 있었다는 것만 발표하고 어느 국가에서 발송되고 어느 회사 어느 직원이 받았는지는 말하지 않는가?

비참한 실패

10월 23일, 공안부는 형세의 핍박으로 “베이징에 전달된 수상한 우편물에서 탄저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이튿날, 쑨 대변인도 “당시 우편물에 백색 분말이 들어 있어 탄저균으로 의심했으나 아니라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관련된 회사측은 더 이상 보도가 나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우리는 그들의 요구를 존중한다. 우리는 중국 내에 탄저균 감염자가 없다고 보증한다”고 발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해외 게시판에는 탄저균 사건을 이용해 파룬궁을 모함하려 했던 중공의 비열한 행위를 질책하는 중국인 네티즌들의 글이 넘쳐났다.

내부 소식통에 의하면, 쑨위시는 25일 외교부로부터 즉각 경고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말을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둘러대지 못해 엄중한 외교문제를 초래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이 일어나 환경이 매우 위험하게 되자 쑨위시는 그곳 대사관으로 파견되는 벌을 받았다.

4. 천안문에 간 서양인 파룬궁 수련생들

뤄간이 충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던 탓으로 ‘분신자살 사건’은 많은 허점을 드러내며 해외에서 비난을 받았지만 장쩌민은 그나마 만족스러웠다. 왜냐하면 국내에서 그러한 허점을 감추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십 년 동안 CCTV만 보아온 중국인들은 정부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대로 믿는데 습관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때를 즈음해 CCTV에서는 ‘가짜, 저질상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을 조사, 검거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해 인기를 모으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당국이 직접 나서서 그처럼 비열하고 잔인한 수단으로 파룬궁을 모함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일반 국민들은 이번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장쩌민이 파룬궁에 대해 쌓아왔던 원한을 알지 못했다. 때문에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TV에서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논평을 발표해 마치 정부의 비판이자 국민들의 비판인 것처럼 꾸몄다. 당시 전체 중국 국민들은 이성을 잃은 채, 생각도 하지 않고 장쩌민의 뜻대로 파룬궁을 사교로 인정했고 그들의 분노는 정부의 박해를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장쩌민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2001년 11월 20일 오후 2시, 15개 나라에서 온 36명의 서양인 파룬궁수련생이 갑자기 천안문 광장에 나타났다. 그들은 각기 같지 않은 방향에서 걸어와 국기 계양대 남쪽 30미터 되는 곳에서 모였으며 두 줄로 나란히 앉아 파룬궁 연공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 뒤에서 몇 사람이 ‘진선인(眞善忍)’이라는 글자가 찍혀진 큰 현수막을 펼쳤다. 그들의 목적은 중공 정부의 파룬궁 박해를 제지시키려는 것이었다.

“제가 살면서 가장 위대하고 장엄한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30여명은 약속이나 한 듯 마음의 목소리를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라고 당시 행동에 동참했던 캐나다 수련생 치프카가 감상을 말했다.

다른 한 참가자 션츄리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경찰차가 요란하게 경보를 울리며 달려와 눈 깜짝할 새에 우리를 포위했고 항의를 하는 수련생들은 경찰에게 구타를 받았고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의 항의는 1분밖에 진행되지 못했지만 전세계를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전세계 각 언론들에서는 모두 이번 사건에 신속한 반응을 보이며 상세한 보도했다. 해외에서 영웅으로 된 36명의 서양인 수련생들은 사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로, “11월 20일 오후 2시 정각 천안문 광장 국기 게양대 남쪽에서 평화적 시위를 할 것이니 누구든지 가도 좋다”라는 간단한 공지 하나만으로 함께 모일 수 있었다.

참가자 라미첼은 “저는 몇 사람밖에 얼굴을 몰랐고 몇 명이 올지 사전에 몰랐습니다. 천안문 광장에 도착한 다음에야 우리는 서로를 찾기 시작했지요”라고 말했으며 “우리는 그저 중국 국민들에게 전세계 기타 많은 국가에도 파룬궁수련자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박해를 절대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또 세계 각지 파룬궁수련생들이 성원하고 있다는 것과 중국 장쩌민 정부가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장쩌민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비록 4.25사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작았지만 15개국 서양인이 중공 심장부에서 시위를 벌인 것은 중공 통치 역사에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사태는 점점 크게 번지기 시작했다.

파룬궁 박해를 줄곧 전세계로 확장할 계획이었던 장쩌민은 1999년 APEC 정상회담에서 직접 파룬궁을 모함하는 책자를 각 나라 정상들에게 나눠줬으며 분신사건을 조작한 뒤에는 사교로 몰아 전세계적으로 파룬궁의 명예를 더럽히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론의 자유가 있는 서방 세계는 독재 국가 중국과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천안문 시위에 참가한 서양인들은 즉시 각국 언론에서 중요 인물이 되었다. 중공은 ‘분신자살’에 참여했던 사람들처럼 그들의 입을 쉽게 조종할 수 없었다. 그들이 중국에 오래 머물러 있을수록 국제적인 시선이 더욱 중국에 집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중국 국민들도 소문을 듣게 되어 심혈을 기울여 조작한 ‘분신자살사건’도 진상이 들통 날 위험이 커졌다.

사람들이 ‘파룬궁이 외국에서 환영받지 못하며 심지어 금지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왜 그들은 파룬궁을 수련하는가? 정부는 파룬궁이 사회 안정을 파괴하고 인류에 해롭다고 하는데 서방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단 말인가? 파룬궁은 왜 다른 민족과 문화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는가?’ 등 문제를 제기할까 봐 장쩌민은 두렵기 그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루 속히 서양인 수련생들을 추방하도록 명령했다. 전에 발생했던 4.25사건은 파룬궁 수련생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세상을 놀라게 했지만 장쩌민은 오히려 엄밀한 조직이 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국가 안전국은 사전에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다. 장쩌민은 힘이 빠져 안전국에 책임을 물을 기운도 없었다. 중공 당국은 20여 시간의 철야 조사를 진행하고 5년 내에 다시 중국에 오지 못한다는 조취를 취한 뒤 서양인 수련생들을 전부 추방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보도를 내보내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장쩌민의 우려는 아니나 다를까 현실로 되었다. 이번 사건을 중심으로 각국의 언론들에서는 중공의 파룬궁 박해를 다시 포커스로 다뤘으며 전세계에 범위에서 파룬궁의 명예를 더럽히던 장쩌민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이번 사건은 서방 국가들이 중국 인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장쩌민은 파룬궁에 대한 박해를 배후에서 하는 전략으로 바꾸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신 박해의 수위는 점점 높아만 갔다.

이번 감동적인 시위 과정은 캐나다에서 온 파룬궁수련생 조엘 치푸카의 몰래 카메라로 촬영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는 경찰이 다가오기 전, 파룬궁수련생들이 모여 현수막을 펼치고 있는 장면을 찍고는 바로 현장을 떠났다.

다른 한 참가자 요한 나니아는 “이 사진을 보면 중심 위치에 우리 36개국에서 온 수련생이 모여 있고 뒤에 있는 현수막에는 ‘진선인’ 세 글자가 찍힌 현수막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어 통역이 저에게 현수막 위에 보이는 천안문 성루의 구호에 ‘전 세계인민 대단결 만세!’라는 문구가 있다고 알려줘 깜짝 놀랐어요. 저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수련생의 말대로 확실히 우연히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전세계 민중이 함께 이번 박해를 반대할 날이 멀지 않았으며 심지어 현재 진행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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